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만났더라면, 그가 내보이던 싸한 시선을 빠르게 눈치채고 지혜롭게 대응했더라면 지금과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준호는 묵주알을 굴리며 자아성찰을 해봄. 지나간 시간은 잡을 수 없음. 과거를 되새김질 하며 비생산적인 소모활동을 해봐야 속만 쓰릴 뿐이란 사실을 암. 알면서도 준호는 그 자학같은 파헤침을 멈출 수 없었음. 도철에게 '여대생의 자살'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은 조태오의 악랄하고 끔찍한 천성이 아니라 [약을 끊었다고 들었는데 뭔가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사실 관계 없지 않았을까.] 라며 오히려 그를 변호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음. 그것은 태오에게 연민 등의 감정을 느꼈을 때 받았던 충격보다 훨씬 크게 다가와 준호를 뒤흔들었음. 사실 뭔가에 의구심을 가질 때 나쁜 쪽 보다는 좋은 쪽으로 비중을 두려는 상냥함이야 말로 준호의 타고난 성정이었기에 딱히 어긋나있는 것도 아니었음. 그러나 준호는 비정상적인 환경에 놓여있음. 육체적 감정적으로 끊임없이 학대를 당하는 상황이므로 판단 장애가 오는 것도 당연함. 준호는 시계를 흘끗 봄. 오후 4시. 태오가 올 시간임. 소파에서 일어난 준호는 창가로 걸어가 밖의 동정을 살핌. 아직 조용했음. 준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음. 해야한다... 조용히 중얼거렸음. 그게 옳아. 하지만... 준호는 입에 꾹꾹 힘을 주었음.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 산을 낀 도로에 태오의 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임. 준호는 주머니 속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핸드폰을 꺼내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음.
이게... 다 뭡니까. 준호가 얼떨떨하게 말하며 뒤로 물러섬. 수행원들이 커다란 박스를 들고 들어옴. 뒤따라 들어와 준호 옆에 나란히 선 태오가 박스를 옮기는 수행원들에게 빈공간을 가리키며 손짓했음. 전에 말했잖아요. 심심할까봐. 어어, 됐어, 이제 거기서 위로 좀 더 올려. 수행원들이 박스에서 꺼낸 브라운관을 벽에 붙여 위치를 가늠함. 셋탑박스다 뭐다 척척 꺼내 세팅함. 생각 없이 보고 있는 준호에게 태오가 손을 내밀었음. 자 그럼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산책이나 좀 할까요.
며칠 지났다고 바람이 제법 쌀쌀했음. 처음 함께 걸었던 돌길은 좀 더 따뜻한 느낌이었음. 준호는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멍하니 걸었음. 둘 사이의 대화는 주로 태오가 말을 걸고 준호가 답하는 1차적인 방식이었는데 오늘따라 태오쪽에서 말이 없음.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뻘쭘해짐. 그렇다고 먼저 말을 붙이긴 뭣해서 얌전히 걷기만 하는데 드디어 태오가 입을 열었음. 부제님. 준호는 일부러 조금 뜸을 들인 후 답했음. 네. 그런데 말을 걸어 놓고 다시 묵묵부답임. 준호가 의아한 얼굴로 태오의 뒷통수를 바라봄.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두어번, 볼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의 두어차례. 내가 지금. 가라앉은 소리가 흘러나옴. 태오가 자리에서 멈췄음. 준호도 멈췄음. 얼마 전 백사장에서처럼 태오가 뒤로 빙글 돌더니 준호에게 터벅터벅 걸어옴. 숨이 닿을 만한 거리에 서자 준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함. 준호씨에게 키스해도 될까요. 준호는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림. 아휴 참, 웃으라니까. 웃는게 예쁘다는데 왜 자꾸 찡그려. 태오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손을 뻗었음. 준호는 흠칫 떨면서도 피하지는 않았음. 오른손이 준호의 왼쪽 귀를 만지작거림. 아주 오랜만에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손놀림이었음. 준호는 그 신호를 받아들이는 감상이 예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음. 기분나쁘지 않았음. 오히려 가슴이 간질간질함. 그것이 '기대'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타격을 받았음. 충격 쓰리아웃임. 싫으면 싫다고 해요. 나 매너 있는 신사야. 신사들 다 얼어 죽겠다 이놈아! 하면서 당장 반박해야 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요지가 앞에 나와 있었음. 준호는 잠깐 굳어 있다가 이내 입술을 꾹 깨물며 말함. 싫습니ㄷ... 말이 막혔음. 준호는 본능적으로 눈을 크게 떴음. 손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 지 몰라서 주머니에 넣은 채로 굳음. 얼굴이 저돌적으로 부딛쳐 올 때 몸이 잠깐 비틀거렸지만 태오가 한손으로 준호의 허리를 감싸 단단히 고정시킴. 닿은 입술이 아주 잠깐 떨어졌음. 뜨거운 숨이 서로를 간지럽혔음. 얼이 빠진 준호가 뭐라 항의하기도 전에 입술이 다시 붙었음. 준호는 눈을 꽉 감음. 놀라느라 조금 벌어진 틈으로 뜨거운 혀가 침범함. 태오는 허리를 감은 손을 제쪽으로 끌어 당겼음. 이제 완전히 밀착함. 둘의 몸이 어색하게 흔들렸음. 태오의 몸을 밀어내야 한다는 사고조차 못한 준호가 그의 어깨를 꽉 잡고 매달렸음. 맞닿은 점막이 축축하고 진득하게 꿈틀거렸음. 옭아매는 혀의 움직임은 준호에겐 생에 처음 겪어보는 선정성이었음. 학창시절의 풋풋한 키스는 과연 어린애 장난이었음. 질척이는 소리가 울림.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쭉쭉 빠져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준호를 태오는 솜씨 좋게 이끌었음. 좀 더, 좀 더, 태오의 혀와 손이 욕심을 내며 몰아붙이자 준호가 뒷걸음질쳤음. 뒤쫒듯 함께 걸음을 옮기던 태오가 눈을 뜨며 천천히 입술을 뗐음. 진득한 침이 이어져서 주륵 딸려 나옴. 준호는 입가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숨을 헉헉 몰아쉬며 멍하니 태오를 보았음. 태오는 배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욕정을 억지로 누르며 혀로 입술을 핥아 올렸음. 싫다고 안했으니 승낙한거다. 태오가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음. 둘은 다시 눈을 감았음.
미친게 아닐까. 준호는 진지하게 생각했음. 동공지진 상태로 화면을 보는데 태오가 준호 옆에 딱 들러붙어서 어깨동무를 하더니 낄낄웃음. 아직도 굳어 있네. 너무 순진하시다. 소파는 넓었고 엉덩이를 뺄 공간은 충분했지만 준호는 부동자세로 어색하게 앉아 화면만 바라봄. 키스가 좋았음. 그건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음. 준호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짐. 조태오는 악마임. 범죄자임. 강간범임. 약쟁이임. 온갖 악담을 되새기며 조태오혐 충전의 시간을 가져보지만 쉽지가 않음. 누가 그러던가 시간이 약이라고. 준호는 초반에 태오에게 시달리며 피눈물을 흘렸던 시절이 꿈만 같았음. 그 때의 감정과 각오를 떠올릴 순 있지만 딱 거기까지임. 점점 무뎌지고 있었음. 그리고 그 무뎌짐을 인지하면서도 막을 수가 없음. [신진물산이 XX자선단체 등 총 여덟 군데의 사회복지시설과 후원행사를 개최해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오. 태오가 고개를 기울이며 가벼운 감탄사를 꺼냈음. 아나운서가 말한 신진물산은 조태오의 회사임. '과거의 불명예'라는 대목에서 태오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지만 이어진 기자의 말은 대체로 우호적이었음. 좀 무리하긴 했지. 원래는 두어군데만 더 늘릴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확 불어나더라고. 태오가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뒤로 휙 젖혔음. 잘됐네요. 준호가 말했음. 그러자 태오가 천장을 보던 시선을 준호 쪽으로 돌렸음. 누가요? 태오가 물었음. 준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끝을 올렸음. 두쪽... 다요? 태오가 피식 웃음. 뭐, 그런 셈이죠. 어쨌든 저쪽은 당장 돈을 받고 우리는 이미지 좋아지고. 준호는 의아했다가 이어진 태오의 말에 안색을 굳혔음. 어차피 나중에 다 회수할거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가 너무도 명확했음. 기부가 아니었습니까? 준호가 언성을 높이자 태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음. 명목상으론 기부긴 해요. 근데 뭐 대기업들은 다 그런식으로..... 아아, 미안해요. 우리 부제님 순진하다는 거 깜빡했네. 태오가 웃었음. 푼돈이니까. 딱히 턴 안해도 상관 없긴 해. 태오의 말은 준호를 납득하게 만들지 못함.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곤 없는 겁니까? 오랜만에 작렬하는 준호의 꼰대끼에 태오가 눈을 가늘게 뜸. 잠깐 말을 고르던 태오는 어깨동무한 손을 풀고 뒷머리를 긁적였음. 마음 바꿨어. 기부금 안돌릴테니 걱정말아요. 준호는 태오의 근본적인 부분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통감했음. 그것은 누군가 아무리 애를 써도 쉽게 바로 잡지 못할 것임. 준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가지 더 물어보았음. 왜 마음을 바꾼거죠? 준호의 말에 태오가 어깨를 으쓱함. 그리곤 새삼스럽다는 듯이 입을 염. 그거야 부제님이 싫어하니까. 고백 더하기 고백. 그리고 확인사살임. 마음이 복잡해짐. 흘낏- 준호는 태오쪽을 바라보았음.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임. 제가 좋습니까? 준호가 기습적으로 물어봄. 태오가 눈을 크게 뜨고 헛웃음을 지음.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걸 이제야 겨우 받아들였어? 준호는 씁쓸하게 웃었음. 받아들인 것이 아님. 준호는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임. 태오는 사람과 사람이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어떤 것을 참아야 하고 어떤 것을 내주어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름. 준호도 그렇게 능숙한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평범한 사회인의 범주에는 듬. 그러나 조태오는 그렇지 못함.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가지고 싶으니까. '내'가 가지고 싶은 '저것'을 손에 넣은 것 뿐이니까 그건 당연한거야. 그러나 준호는 '저것'이 아니었음. 준호는 감정이 있는 인간이었음. 약에 당해 강제로 욕보여지면서 느꼈던 수치심도, 트라우마를 자극당해 휩싸였던 공포심도, 얻어 맞아 부러지고 찢어졌던 몸의 고통도, 전부 태오가 아닌 준호가 느꼈던 것임. 그러나 태오는 준호의 감정을 축소화하거나 아예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합리화해버림. 어린아이처럼 말임. 참 답답합니다... 준호가 중얼거리며 소파에 목을 기대고 눈을 감았음. 태오는 잠시 그런 준호를 바라보다가 똑같이 소파에 목을 기댔음.
준호는 도철에게 연락해 이곳에 계속 머물겠다는 의사를 전했음. 당연히 도철은 길길이 날뛰며 반대함. 그 뭐시기냐 스톡홀롬 증후군에 걸리기라도 한 것 마냥 행동하니 어이가 없을 것임. 도철은 준호가 심리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임을 강조하며 계속 설득했음. 확실히 준호는 태오에게 동화되어 미친것이 아닐까 하고 계속 생각해 왔었음. 그래도 일단은 제 판단을 믿어 보기로 함. 준호는 김신부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음. 그리고 믿어주셔서 고맙다고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덧붙여 달라고 흠. 도철이 하도 날뛰어서 폰은 처분 안하기로 함.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겠다는 다짐을 다섯차례나 하고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음. 준호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침대 밑으로 넣었음.
이어진 주말, 준호는 시간제 선생님이라 말하고 파트타임 보모를 뜻하는 보육교사 일을 시작함. 책도 읽어주고 전임자가 남겨둔 일지를 보고 수업 비스무레한 것도 시도함. 힘이 넘치는 애들이 사고 치지 못하도록 주시해가며 밥을 먹이고 화장실을 보냈음. 그렇게 어영부영 보살피다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감. 애들 낮잠을 재우고 청소도 그럭저럭 마침. 준호는 수고했다며 수녀님에게 받은 옥수수 접시를 들고 현관 앞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았음. 하나 들고 입에 넣으려는데 멀지 않은 구석에 타고온 차가 보임. 수행원이 차문에 기대 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음. 준호는 먹으려던 옥수수를 도로 내려 놓고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장을 가로질렀음.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남자는 준호기 다가오자 폰을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근-엄 표정을 지어보지만 이미 늦음. 좀 드시겠습니까. 받았는데 너무 많아서 다 못먹을 것 같습니다. 준호가 내민 접시에 흘끗 시선을 준 남자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괜찮습니다, 큰 소리로 말함. 그동안 다른 수행원들은 많이 봤는데 이 사람은 낯섬. 새로 오셨나 봅니다. 옥수수는 오래 두면 금방 쉬는데... 그냥 하나 드세요. 준호가 다시 접시를 내밀자 남자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제일 작아 보이는 걸 하나 집어 올림.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준호가 무슨 말을 하든 뭔 짓을 당하든 1도 신경 안쓰던 수행원들과는 좀 다름. 준호는 태오가 아닌 다른 사람(도철은 전화상이므로 제외)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 기분이 들뜸. 둘은 옥수수를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음. 남자는 31살 임규남이라고 자기를 소개했음. 강친 알바를 하다가 성실하다고 추천 받고 여기로 오게 되었다고 함. 처음 일을 시작할때 지시가 없으면 경호 대상과는 절대 대화를 하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들었는데 이런 조건은 처음이라며 서글서글 웃었음. 준호는 실소함. 지금 저랑 말하고 있는데 괜찮겠어요? 장난스럽게 떠보자 규남이 순박하게 웃음. 보는 눈도 없는데 뭐 어떻습니까. 고자질 안하실거죠? 붙임성 좋은 규남의 말에 준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음.
겨울이 성큼 다가오자 해가 빨리 기울음. 준호는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여자애를 등에 업고 옥상에서 빨래를 널었음. 슬슬 주위가 어두워지고 있음. 곧 별장으로 돌아갈 시간임. 등에 업은 여자애를 조심조심 품으로 돌려 안은 준호는 빈통을 질질 끌고 계단을 내려갔음. 그새 잠이 든 아이를 방에 눕히고 복도로 나가 문을 닫고 두 손을 탁탁 털었음. 이제 일이 끝남. 신학교 시절에 많이 했던 자원봉사 느낌임. 준호의 삶에서 신학대란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히 자리잡은 것이었음. 구마의식 역시 마찬가지임. 짧지만 영혼에 새겨진 경험으로 인해 준호는 학교를 그만두고 정식 신부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제든 장미십자회의 법도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음. 지금은 그저 좀 돌아 가는 중이다- 그렇게 생각함. 원장실에 들러 수녀와 인사한 준호는 아이들의 배웅에 손을 흔들며 복도를 지나 현관으로 나갔음. 먼 운동장에 차가 두대. 언제 왔는지 태오의 차가 있었음. 기어코 현관까지 뛰어 나온 아이들의 등을 두드리고 준호는 운동장을 걸었음. 태오가 차에서 내림. 준호는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어딘가 뒤틀린 남자에게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갔음. 남자가 바라는 것이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날 밤, 준호는 태오에게 부모님과 통화할 수 있도록 해달라 부탁했음. 태오가 인상을 좀 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김신부와의 통화도 요구함. 설마 내가 허락해 줄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황당한 태오에게 준호는 고개를 끄덕임. 저를 좋아한다고 했잖습니까. 좀 들어 주시죠. 뻔뻔하게 나가기로 작전을 바꾼 것인지 대놓고 씩 웃기까지 했음. 태오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림. 요즘 너무 풀어줬나 개지랄 한 번 떨어볼까 싶다가도 웃는 얼굴 보니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것이다. 좋아요, 내가 그 말 들어준다고 쳐. 그럼 부제님은 나한테 뭘 해줄건데. 준호는 잠깐 고민함. 뭘 받고 싶으십니까. 준호의 말에 태오가 교활하게 웃음. 지금 당장 말 안해도 되겠죠? 준호는 고개를 끄덕끄덕함. 매우 불공정했지만 여튼 딜이 성사됨. 소원은 백지수표로 남음.
준호는 부모님에게 된통 깨졌음. 납득시키려니 겁나 힘듬. 준호는 제자리에서 초조하게 왔다갔다하며 열심히 설득함. 그래도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준호를 위해 주는 분들이었음. 태오는 부모님과 통화하는 준호를 관찰하며 영화를 한 편 보는 듯한 기분이었음. 특히, 아 엄마~ 나 한 번만 믿어 주라. 평범한 아들이 되어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태오는 입에 담긴 맥주를 줄줄 흘릴 뻔 했음. 스피커 너머로 '너 이 자식 최준호!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라는 분노에 찬 아버지의 일갈이 들려오자 태오는 더 참지 못하고 풉- 웃었음. 준호는 냉랭하게 노려보다가 얼른 표정을 바꾸어 착한 아들 모드로 들어갔음. 그래도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사실이었음. 10분 남짓 길지 않은 대화였는데도 기운이 쭉 빠짐. 소파에 털썩 삼켜지듯 앉은 준호를 보며 태오가 프하하 웃었음. 어릴 때 말썽 많이 피웠나봐요. 양심이 있다면 조태오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지만 태오에겐 그딴 거 없으니까 상관 없음. 그 반대였죠. 준호가 중얼거렸음. 동생 사고 이후 갑자기 얌전해져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의심한 부모님 손에 끌려 병원을 전전한 과거가 있었음.
다음은 김신부님... 준호가 중얼거리며 태오의 폰을 들어 올렸음. 혹시 번호 저장해 두셨습니까? 준호가 묻자 태오가 띠껍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준호쪽으로 몸을 기울여 액정을 두드렸음. 톡.톡. 이름이 하나 뜸. 악마새끼. 준호가 몹시 극-혐하는 눈으로 태오를 노려봄. 세상에, 신부님에게 악마새끼가 뭡니까? 버럭 화를 내자 태오가 어깨를 으쓱함. 아니~ 구마할때 성경들고 기도문 중얼중얼 하면 악마새끼가 뿅하고 튀어나오잖아요? 그게 참 신기해서 그랬어. 언빌리버블 하잖아. 여기에 강하게 남은 거지. 태오가 검지와 중지를 붙여 이마를 툭툭 쳤음. 준호는 더 말하기도 입아픔. 가장 걱정이었던 김신부와의 대화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음. 태오는 최고존엄 지랄할 줄 알았던 김신부가 생각보다 점잖게 나오자 뭐라 꼬투리 잡을 건덕지가 없어짐. 가만 듣고 있자니 자기들끼리 성경구절 인용하고 난리가 났음. 소외된 기분은 과히 좋지 못했으나 최근들어 허들이 많이 낮아진 준호와의 관계가 마음에 드니 적당히 참음. 통화를 끝낸 준호가 폰을 내밀자 태오는 그걸 받으며 뚱한 표정을 지었음. 거 대화 한 번 존나 꼬아서 하시네요. 준호는 헛웃음.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십니까? 경청하겠다는 자세로 두팔을 양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린 준호를 보며 태오는 뒷목을 주물렀음. 아니 뭐... 마음에 안들고 그런 건 없는데... 태오는 잠시 말문이 막힘. 막상 찝찝한 기분을 대놓고 털어놓자니 가오가 상함. 결국 태오는 고개를 저었음. 좋은게 좋은거라고 그냥 냅둬야 겠음. 마지막으로 학장신부와 통화해 비공식 휴학 승인을 받는 준호를 보며 태오는 입맛을 쩝 다셨음.
그 날 이후, 태오는 사상검증이라도 하듯 준호에게 이것저것 들이댔음. 시도 때도 없이 키스했고 좀만 틈이 보이면 여기저기 더듬었음. 빼박 성추행이었는데도 준호는 꾹 참아줌. 벌써 몇 번이나 입을 맞췄는데도 매번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화들짝 놀라는 반응이 참으로 귀여움. 겉모습은 양다리를 넘어 문어다리 그리마다리 정도는 걸치게 생겼는데 보여 주는 행동은 순진한 아낙네가 따로 없음. 그래도 겁에 질려 벌벌 떨거나 불신을 가득 담고 노려보기만 하던 때보다 좋음. 물논 그런 모습도 태오에게 원초적인 쾌감을 주긴 했지만... 여튼 지금의 살랑살랑거리는 모습이 매우 조은것이다. 결론은 조태오... 로맨스... 성공적...
처음에 최상무는 조태오가 사고도 안치고 잠잠해서 매우 안심했었음. 실실 웃고 다나며(평소에도 그러긴 했지만 지금은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하다.) 아랫사람이 작은 실수를 해도 하하하 괜찮아요,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라고 넘어갔음. 그러다가 직원들 보너스 인상을 검토하는 서류에 긍정적 도장을 찍는 수준까지 오니 뜨악함. 설마 몰래 거래 뚫어서 코카인 건드리나 싶어 알아봤는데 완전 클린함. 여자 끼고 노는거야 준호 가둔 이후로 줄었다지만 최근 들어선 술도 잘 안함. 요즘 밀고 있는 신제품 때문에 눈코뜰새 없이 바쁜 최상무는 태오가 뭘 하는지 소문으로만 듣곤 했음. 측근들에게 듣자하니 요즘 준호와 데이트도 자주 나가고 초반처럼 강압적으로 굴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음. 아주 물고 빨고 난리라고 함. 롤렉스를 선물했다가 받지 않아 반품했다는 소문도 있음. 롤렉스라니 무슨; 듀렉스라면 모를까;; 준호와 조태오의 시작이 어땠는지 잘 아는 최상무로선 솔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임. 그렇게 의구심만 키워가던 어느 날, 최상무는 소문의 진실을 목격함. 오랜만에 쌀국 컨설턴트와 함께 술을 퍼마신 태오가 꽐라가 된 것임. 하도 난동을 부려서 가게에 비상이 걸렸다는 연락에 최상무는 내천자를 그리며 차를 몰았음. 니가 그럼 그렇지- 이런 심정임. 그리고 가게에 도착한 최상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림. 난장판이 된 룸에 태오가 가만히 누워 있었음. 그리고 그 옆에 준호가 앉아 뭐라뭐라 설교하고 있음.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술을 드셨으면 얌전히 집에서 주무셔야죠. 왜 기물을 파손하고 그러십니까. 저도 술 좋아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며 마시진 않습니다. 태오는 귀를 막으며 으으 신음소리를 냈음. 나 지금 머리 깨질 것 같아. 태오가 투덜거리자 준호가 그러게 누가 그렇게 퍼마시래요? 하며 쿠사리를 줌. 그리고 절 왜 찾으셨습니까? 일단 오긴 왔는데... 난장판 만든 거 자랑하려고 불렀습니까? 한숨을 푹 쉬자 태오가 귀를 막은 한 손을 슬그머니 내려 준호의 손목을 잡음. 준호씨 보고 싶어서 불렀지~ 발음이 꼬여있음. 최상무는 혀를 깨물뻔함. 미친 저거...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음. 준호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누운 태오를 끌어당겨 새웠음. 가요. 아 좀 자꾸 기대서 힘 빼지 말고 제대로 걸어요. 준호는 멍하니 서있는 최상무 곁을 스쳐지나가며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인사함. 인사를 받아 준 최상무는 입을 떡 벌리고 비틀거리는 두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봄. 존나 충격과 공포임. 준호의 어깨에 기대어 뭐라뭐라 중얼거리는(냄새 좋네, 살 부드럽다 등등) 죄책감 1도 없는 태오와 달리 준호는 마주치는 사람마다 일일히 고개를 숙여 죄송함다... 하고 사과함. 최상무는 한동안 멍청하니 둘이 열고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계산서를 내미는 가게주인의 행동에 정신이 듬. 카드를 내밀면서 방금 본 것이 환상은 아니었을까 의심함.
다음 날 최상무는 여느때와 다를바 없이 출근한 조태오의 눈치를 살핌. 싱글벙글함.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임. 어제 나 대신 형이 정리했다며? 태오의 말에 최상무는 그렇다고 대답함. 고마워. 짧은 인사였지만 존나 믿을 수 없음. 최상무가 알기로 태오가 사과와 감사를 표현하는 경우는 주로 두가지임. 첫째, 인정하지 않지만 상대가 강자일 경우(주로 아버지) 둘째, 상대방을 존나 위선적으로 비웃기 위해서.(업-신)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주로 둘째 사례에 속했음. 그런데 방금은... 태오는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넘기며 사무실로 들어감. 최상무는 불안했음. 개과천선이 말은 좋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 지금 보여주는 태오의 변화는 일시적임. 그것도 본인의 의지가 아닌 것임에 분명함. 변화는 최준호라는 한 남자에게 달려 있음. 최상무가 보기에 준호는 무슨 성모 마리아급으로 태오에게 맞춰주고 있었음. 그가 조금만 더 스스로 미래를 생각한다면, 조태오가 아닌 다른 중요한 것을 찾아 낸다면... 변수가 너무 많음. 길게 당길수록 놓았을때의 반작용이 큰 법임. 저렇게 좋아하다가 호되게 통수 한 번 맞을 것임.. 아니 굳이 뒤통수가 아니라 준호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태오는 쉽게 폭발할 것임. 피해범위를 상상해 보니 존나 뉴클리아밤임. 최상무는 누구보다도 죠태오를 잘 알았음. 사상누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