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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준호 10

다른 사람들에겐 평범한 연애였지만 태오에게는 의미가 달랐음. 돈이나 허영이 목적이 아닌 사람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기분임. 준호는 참으로 읽기 쉬운 성격이었음. 비단 성직자로서의 정직과 청렴을 내세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님. 종교계도 한꺼풀 벗겨보면 사람 사는 곳은 똑같음. 준호는 말을 하지 않아도 생각한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이었음. 태오는 준호와 데이트를 하며 그의 잔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음. 그래서 일부러 패악을 부렸음. 그러면 꼭 준호가 말린다는 것을 알았음. 존내 성격도 나쁘구나 싶겠지만 의심 많고 베베 꼬인 태오로선 끊임없이 준호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음.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며 태오에게 왁왁거리며 설교하는... 일련의 과정은 어떤 의미로 보살핌 받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었음. 준호는 점점 더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했고 그럴때마다 태오는 '기어오른다'가 아닌 '날 아껴주는구나.' 란 생각을 떠올림.


놀이공원. 소파에 앉아 있던 태오는 고개를 갸웃거렸음. 거길 왜 가요? 진심 몰라서 물어보는 것임. 준호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음. 며칠 전에 말했잖습니까. 원생 중에 생일이 겹치는 아이들이 다섯명이라 토요일 하루 날 잡았다고요. 고아원인만큼 태어난 날짜를 알 수 없는 아이들이 많았음.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갓난 아이들에겐 비슷한 날짜로 생일을 잡음. 그것이 내일이란 소리였음. 흠- 그제야 얼마 전 식사 도중에 준호가 했던 말이 기억남. 태오가 눈썹을 꿈틀이며 무언가 생각함. 준호는 뭔가 불만이 있는구나 직감적으로 알아챔. 또 왜 그러십니까? 준호의 물음에 태오가 어깨를 으쓱했음. 그냥, 부제님이 나 빼놓고 놀러가는구나 생각하니까 섭섭해서요. 준호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음. 조태오씨가 앱니까? 그리고 스무명이 넘는 아이들 통솔하면서 잘도 놀겠습니다.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음. 태오는 눈을 크게 뜸. 혹시 힘들어요? 일 그만둘래요? 똑똑한 사람이 이럴때만 단세포임. 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듬. 그런 의미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오늘 가져온 저 옷들도 도로 반품 하십쇼. 단호하게 말했음. 태오는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중얼거림. 부제님 라인에 맞춘 거라니까... 반품 안되요 저건. 사실이었음. 준호는 이마를 짚고 재차 한숨을 쉼. 성직자가 한 벌에 몇 백 몇 천하는 옷들을 걸친다니 어불성설임. 주님께서 잘도 봐주시겠습니까. 답답한 준호의 말에 태오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듬. 주님이 안봐줘도 내가 예쁘게 봐주잖아. 준호는 입술에 꾹 힘을 주며 볼을 부풀림. 네네... 알겠슴다. 아무튼 내일은 좀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계십쇼. 임규남씨한테도 말 해 놨습니다. 서류를 뒤적이며 준호의 말을 흘러 듣던 태오가 일정 대목에서 행동을 멈췄음. 임..규남? 목소리가 자작하게 깔림. 준호는 갑자기 분위기를 바뀌자 의아함. 저 태워주시는 운전기사분이신데... 태오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준호는 태오가 사온 옷을 옷걸이에 걸어 옷장으로 가져가다가 멈춰섰음. 아랫사람들 이름 하나하나 기억 못해요. 그런데 많이 친한가 봅니다. 이름으로 막 부르고 그래요? 태오의 음산한 말투에 준호는 살짝 쫄았음. 오랜만에 보는 빡이 은은하게 친 조태오임. 일단 더 이상 오해를 키우면 안되겠다 싶어 손에 든 옷을 침대 위에 펴놓고 맞은 편 소파에 앉았음.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아침 저녁으로 절 태워주시는 분이니 이름은 알아둬야겠다 싶어 제가 먼저 물어본 겁니다. 태오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고개를 뒤로 확 돌림. 듣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 같음. 그 애새끼같은 모습에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준호는 끈기있게 말을 이어감. 이것저것 도와주시는 분을 매번 저기요 여기요 이봐요 라고 부를 순 없잖습니까. 어르는 말투임. 태오가 고개를 확 들었음. 도와준다구요? 부제님을? 태오는 이제 완전 꼬아봄. 준호는 입을 약간 벌리고 당황함. 이대로 가다가는 규남에게 피해가 가겠다 싶음. 가끔 일이 많았을 때 제가 먼저 부탁했습니다. 말 안하려는 거 억지로 시켰다구요. 필사적인 변호에 태오는 더 기분이 나빠짐. 그 정도로 바쁠 줄은 몰랐네. 이제부턴 안나가도 되요. 수녀님께는 내가 말해둘 테니까. 준호는 환장할 것 같음. 자동으로 입이 딱 벌어짐. 태오씨. 제발 이런식으로 유치하게 굴지말아요. 저 정말 힘듭니다... 준호가 애절하게 말하자 태오가 턱 밑을 쓰다듬음. 유치하다? 하하핫. 자작하게 웃던 태오가 눈을 뜨고 준호를 바라보았는데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음. 준호는 몸을 덜컥 굳힘. 저것과 비슷한 표정을 전에도 보았음. 이리와요. 태오가 명령했음. 조금 망설이던 준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음. 그리고 천천히 태오에게 다가갔음. 앉아요. 그말에 준호가 뻣뻣하게 굳어 태오 옆에 앉으려고 함. 그떄 태오가 준호가 앉으려는 자리에 손을 턱 올림. 거기 말고. 여기에. 소파 위에 길게 뻗어 있던 다른 손으로 가리킨 곳은. 아..... 준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 태오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무릎 위임. 내쪽 보면서 천천히 앉아요. 준호는 달아오른 얼굴로 안절부절 못했음. 임규남씨 일자리 잃어도 괜찮은가봐? 태오가 부추기듯 말하자 준호는 입술을 깨뭄. 결국 그가 시키는대로 함. 태오를 마주보며 무릎 위에 올라 앉았음. 상대방 심장소리를 다 들을 수 있을정도로 가까움. 태오는 준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뭍고 숨을 들이켰음. 바람이 살랑거려 간지러움. 참 이상하단 말이야. 부제님은... 왜 알아서 약점을 만들어? 그것들이 다 뭐라고 스스로 발목에 족쇄를 채우지? 니트를 뚫고 들어온 숨결이 가슴에 닿음. 태오의 어깨 너머 소파를 두 손을 잡고 있던 준호는 갑자기 태오가 목을 쭉 빼 몸이 뒤로 기울어지자 저도 모르게 목 뒤로 팔을 감았음. 준호씨가 그런 사람이란 건 알고 있지만.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익숙하게 잡으며 태오가 웃었음. 날개죽지를 더듬거리자 불편하고 거슬리는지 연신 몸을 뒤틈. 그래도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네. 태오가 실실 웃으며 준호의 목을 핥아 올렸음.


결국 어찌어찌 태오를 설득한 준호는 진이 다빠짐. 규남은 내일까지만 여기서 일하고 모레부턴 다른 부서로 배치하겠다는 소리를 들음. 그래도 일거리를 잃는 것은 아니라 다행이다 싶음. 방금 준호는 하마터면 끝(?)까지 갈 뻔 했음. 키스나 더듬는 행위 정도까지는 어떻게 괜찮은 것 같은데 잠자리는 아직 잘 모르겠음. 아니 무리가 있다고 생각함. 가끔 손이 바지를 파고들면 온 몸이 덜덜 떨리면서 숨이 막혀왔음. 태오도 배려해 주는 것인지 더 진도를 나가지는 않았음. 준호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털썩 누우며 오른팔로 두 눈을 가렸음. 태오의 도가 지나친 행동을 적절히 커트하며 시간이 지나 그의 집착이 완화되면 관계를 재정립하거나 서서히 멀어지는 것. 당초의 목적이었음. 준호가 그러했듯 조태오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누그러지리라 생각한 것임. 우습게도 또라이 싸패같은 태오가 좋았지만(!!) 준호는 그가 주는 사랑을 그대로 받는 것은 죄라고 여겼고 그랬기에 자신과 태오를 분리했음.  


규남은 뒷자석에 탄 준호가 어쩐지 시무룩하다고 느낌. 무슨 일 있나요? 규남의 걱정스런 말에 준호가 퍼뜩 고개를 듬. 네? 딴 생각을 깊이 한 모양임. 규남은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가볍게 웃었음. 뭔가 근심이 있어 보여서요. 비꼼 따위 1도 없는 젠틀한 말에 준호는 더 씁쓸해졌음. 좋은 사람인데 자기 때문에 태오에게 밉보였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미안함. 그리고 앞으로 자신과 얽히지 않는 편이 그에겐 더 나을 것임. 별 거 아니에요. 그보다 오늘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 같은데 규남씨 힘드실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준호의 말에 규남이 웃었음. 그러라고 돈 받는건데요 뭘. 걱정마십쇼. 저 아주 튼튼합니다. 운전대를 잡은 한 손을 들어 굽혀보임. 정장 차림이라 자세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근육이 보이는것도 같음. 성격 좋고 바른 사람처럼 보이니 어딜 가서도 잘 될 것 같음. 준호는 억지로 웃었음.


예상했던대로 애들 보기가 굉장히 바빴음. 봉사자 여대생 한 명과 준호 그리고 옆을 따라다니는 규남 조합의 어른 셋은 틈만 나면 애들 머릿수를 세야했음. 다양한 나이대였지만 놀이공원을 처음 와보는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별세계에 넋을 놓고 핀볼처럼 튀어나갔기에 몇 번이고 식겁해야했음. 추운 겨울이라 감기 걸리지 말라고 목도리며 옷도 두껍게 입혀 줬는데 흥분한 애들은 답답하다고 벗어재끼고 여대생과 준호는 그거 다시 입히고 정신이 하나도 없음. 놀이기구도 태우고 과자도 사먹임. 등에 지고 온 도시락의 무게가 온몸을 누름. 그나마 규남이 같이 들어줘서 다행임. 여대생이 애들을 데리고 회전목마를 타는 사이 진이 빠진 준호는 벤치에 앉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멍하니 바라봄. 그때 멀리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쥐고 규남이 벤치로 다가옴. 하나 드세요. 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내밈. 준호는 어쩐지 옥수수를 건네 주던 제 모습이 겹쳐서 웃으며 받아 들었음. 나중에 애들 나와서 아이스크림 보면 사달라고 난리날텐데 괜찮겠어요? 장난기 담긴 준호의 말에 규남이 어깨를 으쓱함. 얼마 안하더라구요. 요번 일은 페이가 좋아서 괜찮아요. 규남이 그렇게 말하며 준호 옆자리에 털썩 앉았음. 그리고 오늘이면 저 애들 보는 것도 마지막일테고... 이별 선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너무 싸죠. 준호는 규남의 말에 깜짝 놀람. 그만둔다구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봄. 규남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우물쭈물함. 사정이 좀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아쉽네요. 거만한 유명인사들과 달리 준호씨 경호 엄청 편했는데. 얼버무리는 것을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음. 준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음. 혹시... 윗선에서 그만두라고 하던가요. 그 말에 규남이 조금 놀람. 어떻게 아셨나요? 명목상으론 자진퇴사지만 권고사직이나 다름없죠. 아 그렇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에요. 그래도 아는 선배가 많아 다른 쪽에 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진 규남의 말은 준호는 태오가 했던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음. 마음이 안좋음. 잘 다니던 직장을 고작 '임규남' 이름을 언급했다고 잃은 것임. 사실 준호의 잘못이라기보단 조태오의 변덕이었지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먹어지지가 않음. 규남은 준호의 분위기가 바꼈다는 것을 깨달음. 굉장히 괴로워 하고 있었음. 규남은 준호의 운전기사 및 경호원 일을 하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음. 선배들은 준호가 조태오의 곁에서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다고 했지만 규남이 보기에 태오는 준호를 무슨 애인 다루듯 대했음. 다른 사람들이 보는데도 아랑곳 않고 몸을 더듬고 노골적인 말을 하는 것임. 그럴때마다 준호는 조용히 얼굴을 붉히며 참는 것처럼 보였음. 둘 사이에는 필시 어떤 사정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무시해 왔던 규남이지만 일을 그만두게 된 상황에선 치밀어 오르는 궁금즘을 참을 수 없었음. 저, 실례인 줄은 알지만 혹시 조실장님과 애인사이신가요. 규남의 직접적인 물음에 준호는 화들짝 놀람. 손에 쥔 아이스크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함. 그... 그렇게 보입니까? 준호가 얼굴을 붉히고 참담하게 중얼거렸음. 규남은 어쩐지 굉장히 무례를 범한 기분이 들었음.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준호에게 건네주며 꾸벅 사과함. 말씀 안하셔도 됩니다. 제가 주제넘었어요. 그때 준호가 입을 열었음. 죄송합니다. 사실 규남씨가 일을 관두게 된 것도 제 탓이에요. 제가 괜히 태오씨에게 규남씨 말을 꺼내서... 규남은 고개를 갸웃거렸음. 제가 혹시 신경 거슬리게 한 부분이라도 있나요? 준호는 고개를 미친듯이 흔들었음. 무슨 모터같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준호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규남에게 말했음. 최대한 폭력적인 부분은 잘라냈음.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음. 그냥 좀 지쳤고 혼자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임계점이 온 것 같음. 둑이 터져 물이 쏟아지듯 그렇게 털어 놓았음. 김신부처럼 자신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이 아니라 더 쉬웠는지도 모름. 턴이 끝난 회전목마가 다시 돌아갔음.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인지 고작 회전목마 따위에 환호하며 좋아해주는 아이들이 귀여워서인지 알바생이 시간을 넉넉하게 더 준 모양임. 규남은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음. 폭력을 제했다지만 솔까 이건 완전 학대였음. 말을 마친 준호는 잠시 후련한 기분이 되었다가 저를 바라보는 규남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는 것을 보고 곧 후회함. 준호씨, 저랑 같이 경찰에 가시죠. 규남이 진지하게 말했음. 준호는 괜히 말했구나 싶어 얼른 변명함. 자신은 이미 서도철이라는 형사님과 이야기 중이라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지을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함. 물론 도철을 이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선 공권력이 최고었음. 규남은 불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임. 혹시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자신에게 연락을 달라는 말을 하며 명함을 건넸음. 김신부도 그렇고 도철도 그렇고 규남도 그렇고 참으로 좋은 사람들임. 준호는 괜히 울컥해서 연신 고맙다고 말했음. 꺄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림. 마침 실컷 타고 내려온 모양임. 여대생이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음. 어우 회전목마도 오래 타니까 머리아프네요. 준호와 규남은 웃었음. 예상했던대로 아이들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보고 발을 동동 굴렸고 규남은 계획했던대로 지갑을 높이 들어 흔들며 아저씨가 쏜다! 외치며 웃었음. 


해가 지고서야 별장으로 돌아가며 준호는 규남과 간단한 이별 인사를 했음. 심심하면 연락 달라며 쿨하게 웃는 규남은 좋은 사람임. 그렇게 별장 입구에서 준호를 내려준 규남이 차를 몰아 어디론가 향함. 신진물산 소유의 자동차이므로 회사에 가는 것 같음. 준호는 별장 피곤한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계단을 올라갔음. 태오가 있을지도 모를 시간이었지만 그는 없었음. 비싼 옷을 벗고 적당히 샤워한 준호는 태오 취향의 비싼 옷이 가득한 옷장에서 그나마 제일 평범해 보이는 아이보리색 니트와 면바지를 꺼내 입었음. 시간을 보니 9시가 넘어감. 오늘은 안오려나. 웬일인지 태오를 기다리는 기분임. 준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둔 성경을 꺼내 소파에 앉았음. 재학시절에 지겹게 읽었던 성경이지만 마음 잡는데는 이만한 것이 없었음. 그렇게 두어시간 성경을 보던 준호는 11시가 지나도 태오가 오지 않자 성경을 덮고 침대로 들어갔음.


준호는 볼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흐릿한 눈을 떴음. 으응... 힘이 없는 신음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옴. 어제 피곤해서 그런지 눈이 잘 안떠짐. 몸도 잘 안움직임. 응? 느릿하게 중얼거리며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태오가 몸 위에 올라타 있었음. 주위는 불이 켜지지 않아도 얼굴이 보일 정도는 됨. 새파란 걸 보니 새벽녘 같음. 준호는 태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자 오른 손을 들어 눈을 비볐음. 아니 그러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는데 안움직임. 어? 당황한 준호가 오른손 팔목을 확 당겼음. 철컹거리는 소리가 남. 삐걱이는 목을 억지로 옆으로 돌렸는데 팔목이 수갑에 묶여 침대 모서리에 고정되어 있음. 헉. 깜짝 놀란 준호가 자유로운 왼손으로 수갑을 풀기 위해 더듬었지만 이미 잠긴 구속구가 벗겨질 리 없음. 잠깐 그렇게 애를 쓰던 준호는 다시 태오를 향해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음. 새파란 배경에 새파란 태오가 준호 몸 위에 올라타 허리를 세우고 웃으며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음. 늘 단정하게 무스를 발라 넘겼던 머리도 산발이었고 얼굴에 무언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는데 어둠에 적응된 눈은 그것을 '피'로 보았음. 잠이 달아난 준호는 비정상적인 상황에 놀라 입술을 달싹였음. 태...오씨? 준호가 불렀지만 태오는 대답하지 않음. 그냥 조용히 웃음 짓고 있었는데 새벽녘+잠이 덜꺰 콤보로 굉장히 기괴해 보였음. 고요속에서 알 수 없는 공포를 키워가던 준호에게 태오가 입을 열었음. 어젠 재미있게 잘 놀았어요? 마치 '밥 잘 먹었어요?' 라거나 '잠은 잘 잤어요?' 같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상적인 질문이라 준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음. 그러자 갑작스럽게 고개가 옆으로 확 돌아감. 짝- 하고 큰 소리가 났음. 태오가 뺨을 때린 것임. 준호는 억-소리를 냈음. 정신이 확 듬. 뺨을 맞은 순간의 고통보다 후에 일어날 일들이 무서워서 머리털이 쭈뼛 섰음. 임규남씨와 작별인사는 잘 했어요? 또 평범하게 묻자 잠시 망설이던 준호가 고개를 끄덕임. 그러자 이번엔 반대쪽 뺨에서 불이 났음. 어느정도 대비하고 있어서 소리는 내지 않았음. 쓴맛이 느껴지는 것이 입안이 터진 모양임. 준호가 물었음. 왜... 왜이러십니까. 정말 모르는 목소리임. 허- 태오가 헛웃음을 지었음. 그보다 오늘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 같은데 규남씨 힘드실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태오가 말했음. 준호는 등골이 오싹했음. 태오는 계속 말했음. 서도철이란 형사님과 이야기 중이니까 규남씨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도청이었음. 저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음. 태오는 끅끅거리며 미친놈처럼 웃었음. 언제 꺼냈는지 침대 밑에 넣어 두었던 도철과의 연락용 핸드폰을 들어 올림. 깜쪽같이 속았어. 우리 부제님. 하핫- 태오의 말에 잠깐 멍하던 준호가 급히 입을 염. 잠깐만요. 태오씨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저 정말 도철 형사님과 통화 몇 번 안했어요. 그마저 최근엔 앞으로 연락 안한다고 제가 먼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손이 준호의 입을 덮쳤음. 거칠게 얼굴을 뭉게며 태오가 비틀비틀 몸을 흔들었음. 쉬-쉬쉬쉬- 잠깐 조용히 해봐요. 어디선가 재미있는 소리 안들려? 귀를 기울이는 모션을 취함. 준호가 태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 뭔가 희미하게 억억하는 소리가 남. 태오가 클클 웃으며 뒷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폰을 꺼냈음. 영상이 하나 재생되고 있었는데 소리가 작음. 태오는 스피커를 키웠음. 그리고 영상이 잘 보이게 준호 눈앞에 들이댐. 린치 장면임. 다수가 한 남자를 둘러싸고 미친듯이 각목을 휘둘러대고 있음. 뻑 하고 굉장히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남. 영화와는 달리 훨씬 간결하고 무게감 있는 소리임. 준호는 알 수 있었음. 규남임. 입이 막혀 하는 말마다 읍읍 억눌려 나옴. 준호가 몸을 비틀며 반항하자 태오가 들고 있던 폰을 침대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빈 손으로 배를 내리쳤음. 컥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냄. 무지막지한 고통이 느껴짐. 배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산소를 요구했으나 입이 막혀 숨을 들이키지 못함.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하는 준호를 무표정하게 보던 태오가 손을 탁 놓음. 준호는 숨을 들이키며 컥컥 연이은 신음을 내질렀음. 태오는 잠시 손바닥을 내려봄. 터진 입에서 흘러나온 피와 침이 잔뜩 묻어 있음. 그걸 핥으며 태오가 말했음. 솔직히 지금 좀 무서워. 내가 홱 돌아서 준호씨 죽일까봐 무서워. 죽이면 안되거든. 살살 적당히 조절해야 하니까... 그게 좀 힘들어. 태오의 말에 준호는 완전히 두려움에 잠김. 제 제발 하지마세요. 맹세코 태오씨가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왼손으로 배를 감싸쥐고 준호가 억눌린 목소리를 냈음. 태오는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눈을 감음. 아.... 좋다. 그래. 이런 게 좋지. 씨발 좆같이 어울리지도 않는 연애질 한답시고 병신처럼 굴었더니. 태오는 말을 끊고 눈을 떴음. 그리고 뒷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뭔가를 꺼냈음. 그걸 입에 물고 중얼거렸음. 나랑 놀자. 부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