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도시라 공기중에 소금기가 약간 섞여있었음. 깔끔하게 구역이 나뉜 길과 발달된 대중교통 덕분에 어렵지 않게 주소지를 찾을 수 있었음. 스티브는 입고 있는 푸른색 항공점퍼 목깃을 세우며 발을 바삐 놀렸음. 지도에 노란깃발이 표시된 위치는 시애틀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음
맨하튼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길거리에 사람들이 제법 많았음. 어쩌면 토르가 이 길을 지나다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음. 무엇하나 확실한게 없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음. 긴 시간동안 토르가 변했을 거라는 추측은 어찌보면 당연한 가정이었음.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음
스티브는 그에게 70년 이어진 해묵은 감정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음. 그냥 멀쩡하게 숨쉬고 웃고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만 확인한다면, 매일 밤 심장을 찢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음. 토르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했음. 하지만 살짝 욕심을 내서 만약 그가 환하게 웃으며 스티브를 안아준다면
보고 싶었다 그리웠다 속삭인다면, 그런 꿈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지도에 표시된 건물에 도착했음. 3층짜리 붉은 벽돌 오래 된 건물이었는데 외관은 허름했고 들어가는 칸이 나누어진 유리문은 아래쪽이 깨져있었음. 청소를 한지 얼마나 오래됐으면 서부영화처럼 먼지가 공모양으로 뭉쳐져 있었음
들어가기 전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요원이 있는 낌새는 없었음. 건물 안도 마찬가지였음. 사방이 고요했음. 기대하지 말라던 존의 말이 떠올랐음. 허탕일까? 뭐 그렇다면 처음부터 시작하면 됨. 어딘가에 그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중요했음. 잠시 숨을 돌리는데 1층 복도 구석에 철문이 하나 보였음
먼지 찬 복도에 성인 남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이 여러개나 찍혀 있었는데 모두 철문으로 이어졌음. 스티브는 문을 열었음. 큰 침대, 소파, 탁자, 수도관이 노출된 지저분한 벽돌 벽, 먹다가 그대로 올려둔 듯한 시들시들해진 포도와 오렌지, 맨하튼 스티브의 사저도 이 정도로 삭막하지는 않았음
생활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매우 건조했음. 다 버리고 확 떠날수도 있을 것 같았음. 스티브는 토르가 지냈을 공간을 돌아다니며 꼼꼼히 살폈음. 그러다가 소파 밑에서 발자국에 찍힌 뭔가를 발견했음. 비닐에 감싸여 찢어지진 않아 허리를 숙여 들어올렸음. 비닐에서 꺼내자 약간 번진 자화상임
군복을 입고 있는 스티브 로저스 대위, 씁쓸하게 웃으며 그림을 접어 품속에 넣었음. 로키라는 위험한 남자와 함께 있다고 했음. 연인이라고도 들음. 힐의 컴퓨터를 해킹한 존과 스티브는 본의 아니게 특급기밀의 실마리를 밟았음. 존은 로키의 위험등급표를 세어 내려가다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었음
오, 난 아무것도 못봤어요
자세한 세부정보는 힐 본인의 생체 인식으로만 열람이 가능했지만 스티브는 충분히 파악했음. 둘이 형제라는 것은 힐과 콜슨의 대화를 엿들어서 알았음. 또한 로키가 온갖 테러사건의 용의자라는 것도 알았음. 여튼 중요한 결론은 토르의 곁에 위험인물이 있다는 사실이었음
스티브는 현관 앞에 잠시 방 안을 둘러보다가 발걸음을 옮겨 건물을 등졌음
결국 허탕이었음. 각오는 했다지만 처지는 어깨는 어떻게 못하겠음. 스티브는 터덜터덜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코끝을 감도는 달콤한 과일향기에 고개를 돌렸음. 멀지 않은 골목에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음
손님들이 몇 명 길가에 서서 펼쳐진 가판대를 구경하고 있었고, 거기서 조금 들어간 골목 안쪽에 오렌지며 사과며 가득 진열되어 있는 가게가 있었음. 스티브는 아까 건물에서 보았던 시든 포도와 오렌지를 떠올리며 몸을 돌려 가게로 향했음. 배가 고팠고 근처엔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았음
겨우 그 정도의 동기였음. 가게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자 스티브는 걸음을 멈췄음
한 남자가 서 있었음. 약간 밑으로 내린 시선이 빈상자에 올라 앉아 종이 두장을 들고 즐거워하는 꼬마에게로 향해있었음. cctv 영상 출력물, 그리고 점퍼 안 주머니에 든 사진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외모의 남자였음
토미!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고맙습니다 아저씨
일부러 챙겨주다니 정말 고마워 젊은 총각, 어휴 이 녀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공만 차고 다닌다니깐, 토미! 내일 경기 보고 와서 숙제 열심히 하기다?
알았어요 마미
그나저나 이사간다니 아쉽네. 우리가게 미남 단골이 한 명 줄어들잖아
남자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음. 헐렁하게 묶은 금발이 가닥가닥 자연스럽게 삐져나와 있었는데 바람이 불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렸음
그래, 마지막까지 이름은 알려주지 않을 작정이야?
주인이 봉투에 사과와 바나나를 담아 건네며 샐쭉거렸음. 남자는 과일을 받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음
토르
꿈이 아닌, 환청이 아닌 현실에서 듣는 그의 목소리는 70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 눈앞의 토르는 신기루가 아니었음. 평범한 사람과 대화를 주고 받으며 사라지지 않고 서있었음. 스티브는 어색하게 발을 움직였음. 반쯤 빠져나간 넋을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스티브는 토르 옆에 섰음
가게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새 손님을 맞이했음
어머, 또 잘생긴 손님이 왔네. 어서 와요!
쨍하게 울리는 환영에 한 번쯤 돌아볼 법도 한데 토르는 계속 앞만 보았음. 주인은 스티브에게 손짓하며 특별히 찾는 과일이 있는지 물었고 스티브는 사과를 가리켰음
다섯 개만 주세요
토르는 주변에 누가 있든 상관하지 않는 듯 보였음
잘 지내시오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골목으로 들어감. 과거를 회상하던 스티브는 뒤늦게 사과가 담긴 봉투와 지폐를 교환하다시피 맞바꾸고 그의 뒤를 쫒았음. 손님! 이거 100달러잖아요, 거스름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음
그 사이 토르는 벌써 골목 끝 계단을 오르고 있었음. 스티브는 달려갔음. 짧은 거리였는데 숨이 찼음. 혈청을 맞은 몸이라 그럴리가 없는데도 호흡이 거칠어짐. 스티브는 토르의 손목을 잡았음. 이름을 부를까 했는데 돌아보는 푸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니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벌벌 떨렸음
토르는 자신을 돌려세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딱딱하게 굳었음. 스티브는 눈시울이 불거졌음. 정말로 살아있는 예전 그대로의 토르였음. 단순히 닮은 사람이 아니라. 토르. 힘겹게 부르자 남자가 두 눈에 맹렬하기까지 한 거부를 담고 으르렁거렸음
나의 호의를 이렇게 받아치는 것이냐
토르...?
네 성격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지만, 설마 대놓고 선을 넘을 줄이야
토르 저는...
그만
그만해. 토르는 엄숙하게 선언하며 손을 뿌리쳤음. 그탓에 들고 있던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져 사과가 돌바닥을 데구르르 굴렀음. 스티브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음. 토르는 지금 그의 동생 로키를 눈앞에 두고 있었음
더는 휘둘리지 않는다
처음 받은 거부였음
이제 전처럼 동요하지 않아. 다 지나간 일이다. 그러니 너를 사랑하는 내 심중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것도 이쯤에서 그만두는게 어떤가?
지나간 일- 스티브는 눈을 내리깔았음. 70년을 순식간에 넘어온 자신과 달리 토르는 평범하게 시간을 따라 흘러왔음
그가 나이를 먹지 않는 특별한 존재라고 전과 같은 마음을 요구하는 것은 과한 이기심임을 앎. 그러나 토르가 말하는 사랑의 대상이 쉴드의 최고등급 위험인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짐.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차마 하기 힘든 말을 꺼내서라도 과거의 연인에게 경고해야 했음
토르
스티브가 부드럽게 속삭였음. 목소리가 퍽 진지해서 토르는 눈썹을 움찔 떨며 입을 다물었음. 멀리서 천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음. 갈매기가 우는 소리도
단 하루라도 당신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로키, 그만두라고 말했..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이별은 영 힘들더군요
저와 달리 당신에겐 긴 시간이 흘렀어요. 이제는 전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토르가 행복하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요
스티브는 품속에서 그림을 꺼냈음. 발자국은 비닐을 뚫고도 자국을 남겼고 콩테가 번져 상태가 좋지 못했음. 토르는 고개를 기울이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음
가지고 간다고 말 한 주제에, 나를 잊고 사람을 만나라고 한 주제에, 이제와서 이러니 체면이 안서네요
그림을 내밀었음. 스티브 로저스의 자화상. 토르는 그림과 스티브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눈썹위를 꾹꾹 눌렸음. 입을 조금 벌렸는데 목 너머로 숨을 삼키는 소리만 들려옴
미간에 주름이 졌다가 펴졌다가 반복했음. 그로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음
하지만.. 너희들은..
저는 깨어난지 얼마 안됐지만 당신은 계속 살아왔겠죠.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 지금 여기서 해도 괜찮을까요?
허락은 없었지만 기어코 꺼낸다
사랑해요, 토르
사랑해요. 두 번을 반복했음
이마를 누르고 있던 토르의 손이 조금 떨렸음. 몇 번 쥐락펴락 하다가 아직도 내밀어진 그림을 느리게 잡았음. 황망한 푸른 눈이 아래를 향함. 그러다가 무뚝뚝하게
자네는 정말 스티브인가?
라고 물었음. 토르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스티브는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음
환상이나 닮은 사람이 아닌 70년 전의 토르였고, 자신 역시 70년 전의 스티브 로저스 였음. 숙인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돌바닥이 검게 물들었음. 스티브는 떨리는 목소리로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대답했음
맞아요, 브루클린 뒷골목의 약골
표만 전해주고 떠나려 했음. 로키가 중요한 볼 일이 있어 일주일 쯤 자리를 비운다고 했기에 브라질에서 만날 약속을 했음. 공항으로 향하는 도중에 주머니를 뒤적이다 축구경기표를 발견함. 과일가게 아들 토미의 생일선물로 주려고 했던 것임. 주인과 단골손님의 관계였지만 토르는 그 모자가 좋았음
정을 붙이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감정이 흘렀음. 둘을 볼때마나 얼굴 모를 어머니와 동생이 떠올랐음. 토미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 했음. 가끔 부둣가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발견하고 인사를 나누기도 했음. 토미는 다섯살이었지만 어른용 축구공을 찰 줄 안다고 허세를 부렸음
토르는 웃으며 아이의 어설픈 묘기를 감상했음. 그 정도의 사이였음. 그냥 휙 떠나버릴 수도있었지만, 토르는 시애틀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음
스티브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그의 죽음 이후 두 번째였음. 중요한 볼일이 있다고 해놓고 그게 자신을 놀리기 위한 작업이었나 싶어 모든 게 허무해졌음
하지만 이어진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음
사랑해요, 토르
사랑해요. 2차대전의 영웅 캡틴 아메리카와 함께 바닷속에 수몰되었을 그림을 내밀며 그의 얼굴로 웃었음. 로키의 치밀한 장난? 기억을 읽어내 스티브의 자화상까지 조작해서 새로운 실험을 반복하는 것인가? 질 나쁜 가정이었음
어디선가 경고음이 울렸음. 가장 냉정해야 할 이성이 눈 앞의 사내가 스티브가 맞다는 어이없는 결론을 내렸음
자네는 정말 스티브인가
'하지만.. 자네는 죽었잖아. 70년 전에 내 곁을 떠났잖아.'
말을 꺼내려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음. 그때 눈앞의 남자가 얼굴을 푹 숙였음. 우는 것 같았음
그것이 스티브 답지 않아서 억지로 의심을 해봄. 토르가 아는 스티브 로저스는 언제 어느 때나 굳세고 당당했음. 쉽게 눈물을 보이는 사내가 아니었음
맞아요, 브루클린 뒷골목의 약골
숙인 채로 그렇게 중얼거렸음. 토르는 멍하니 스티브를 바라보았음. 70년, 생각해보면 그리 긴 세월도 아니었음
설움인지 환희인지 기쁨인지, 온갖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마음 속 바다가 거칠게 일렁거렸음
당신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어요
사내의 말처럼 토르 또한 마찬가지였음. 의식적으로 잊으려 노력했을 뿐이지 어쩌다 스티브를 연상할만한 상황이 되면 바로 어제처럼 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음
불멸에 가까운 아스가디언의 특성 때문일까. 언젠가 로키에게 아스가디언의 수명에 대해 물어보니 '거의 영원에 가깝지.' 조금은 애매한 대답을 들었음. 생명체라면 끝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래선 신과 다를바 없지 않느냐 되물었고 로키는 대답하지 않았음
토르 잠깐 저와 가줄래요?
스티브가 말했음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토르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스티브는 유순한 미소를 지으며 손목을 잡았음. 잡힌 살이 따뜻해서 그제야 좀 실감이 났음. 로키의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스티브라는 것을 확신하게 됨. 어쩐지 감격스러움. 인간의 삶과 죽음은 셀 수도 없이 봐 왔지만 부활은 처음이었음
스티브는 토르를 잡아 끌며 자신의 소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음. 토르는 순순히 끌려가면서도 잡힌 손목을 빤히 내려 보았음. 악력이 제법 셌음. 놓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단호한 의도는 필사적이기까지 했음
잠시 손
아, 미안해요 아팠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이대로 가요
그래야 제가 편해요
못 본 사이에 조금 뻔뻔해졌다 싶어서 토르는 피식 웃었음. 마음만 먹으면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음. 잡힌 손을 통해 맥박이 느껴졌음.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볼을 살랑였음. 옛 연인의 뒤를 따르며 오랜만에 과거의 향수에 사로잡혔음.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억지로 눌러둔 것에 가까웠나 봄
한 번 풀어지니까 터지는 옛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음. 토르는 한참을 스티브에게 손목을 붙들려 좁은 보도를 걸어가다가 한참 만에 목적지를 물었음. 스티브는 머뭇거리며 주변에 대화를 나눌만한 카페를 찾는다고 했음. 돌아다니면서 많이 봤었는데 막상 필요하니까 안 보인다고 버벅거렸음
그 모습이 유쾌해서 웃었더니 귀를 붉히며 부끄러워함. 커피의 도시 시애틀에서 카페를 찾아 헤메다니- 토르가 껄껄 크게 웃자 스티브는 발을 멈추고 몸을 돌렸음. 그는 울듯 말듯 어슴푸레한 표정을 지었음. 왜 그러지? 미소지으며 묻자, 오랜만에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니 좋아서요. 대답했음
결국 토르가 앞장서서 부둣가의 작은 카페로 안내했음. 자주 들르던 곳인가요? 스티브가 묻자 토르는 고개를 저었음. 직접 들어오는 건 처음이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주문하는 행동엔 군더더기가 없었음. 둘은 창가자리에 앉았음. 김이 오르는 잔을 앞에 두고 토르가 스티브의 커피에 시럽을 넣었음
아마 이 정도였지. 스티브는 내밀어진 잔을 받았음. 입을 대더니 눈을 휘둥그레 뜸. 기억하고.. 있네요. 조금 감격해서 스티브가 말하자 토르는 말없이 미소지었음. 스티브는 테이블에 올린 토르의 손 위를 제 손으로 덮었음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토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음
스티브는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음. 그의 입에서 로키의 이름이 나왔을때 토르는 딱딱하게 굳었음. 로키는 쉴드에서 지정한 최고등급 테러 용의자에요. 그의 말에 토르는 미간을 찌푸렸음. 스티브와 로키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음.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는 듯한 기묘한 울림이었음
콜슨의 이름을 댔을 때 신뢰도가 올라감. 스티브의 말은 전후 관계가 맞아떨어졌음. 신뢰를 주는 목소리는 여전했기에 토르는 그가 말한 로키와 자신이 겪은 로키를 저울질해야 했음. 그런 비교 자체가 배신 같아 괴로웠음. 함께하며 겪은 크고 작은 미심쩍인 부분들이 떠올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음
스티브는 손을 올려 토르의 뺨을 쓰다듬었음. 토르는 조금 흠칫 했지만 손길을 피하지 않았음. 로키와는 반대로 따뜻한 손이었음. 하지만 토르는 스티브의 손을 잡아 내렸음. 그럴리가 없어. 로키는 가벼운 남자지만 그런 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야. 스티브는 마음이 안 좋았음
토르의 말에는 로키를 향한 신뢰가 가득했기에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해야 함이 고통스러웠음. 하지만 스티브는 알려야했음. 로키는 위험한 남자였음. 존이 설명한 로키의 위험등급은 웬만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선 쉽게 꿰어찰 수 없는 자리였음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요. 함께 맨하튼으로 가요
맨하튼은 로키와 약속한 장소가 아니었음. 토르는 머뭇거렸음. 결코 돌아갈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뉴욕, 믿기 힘들었지만 단호하게 뿌리칠 수 없는 의혹, 토르는 콜슨과 통화하는 그를 빤히 보았음. 그는 정말 살아있음. 로키가 해준 이야기에 등장하는 골렘이나 인간이 개발한 로봇같은게 아니었음
따뜻하고, 심장이 뛰는 생명체, 그런 스티브가 로키를 부정하고 있음. 그를 범죄자라고 말하고 있음. 과거 토르가 경험했던 수많은 악한들과 하등 다를바 없다고 강력하게 매도하고 있음
스티브는 직원에 물어 이곳의 주소를 콜슨에게 알려주었음. 흥분한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새어 나왔음
스티브는, 그건 미안하게 됐군요.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달랬음. 여기까지 온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음. 토르는 주머니에 든 리우행 티켓을 만지작 거렸음. 출발은 오늘 밤이었음. 선택의 기로에 놓임. 맨하튼과 브라질
함께 가요
스티브가 말했고 토르는 결국 눈을 피하지 못했음
콜슨이 도착하기까지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음. 힐 요원의 사물함에서 당신의 사진을 보았다는 말을 하자 토르는 고개를 갸웃거렸음. 힐? 처음 들어 보는데, 스티브도 잘 모르는 눈치였음. 스티브는 70년간 변함없이 살아왔다는 것보다 도날드 블레이크가 토르였다는 사실에 더 놀랐음
당신같은 강한 존재를 지킨다고 잘난척 했던게 부끄럽다고 스티브가 말하자 토르는 눈을 내리깔았음. 그때는 제법 기뻤지. 솔직하게 대답함. 지금도 그런가요?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한다면? 스티브의 물음에 토르는 잔을 내려 놓았음. 그는 이런 식으로 상대의 영역에 훅 하고 예고없이 들어왔음
아마 스티브에게 묻는다면 그 역시 토르를 똑같이 정의내릴 것임. 둘은 예고없이 서로의 공간을 침범했음. 그런 행동은 둘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서로가 비슷하게 다정했고 구김이 없었으니까. '로키와는 다르게 말이지.' 이런 비교가 너무하다는 것은 앎. 그럼에도 토르는 멈출 수 없었음
로키에겐 분명 비밀스런 부분이 존재했고 그는 그어 둔 선 너머로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음. 불현듯 콜슨의 마지막 부탁으로 침입한 곳에서 몰살당한 사람들이 떠올랐음. 금색 창에 관통당한 청년의 부릅뜬 눈. 모든 상황이 토르로 하여금 로키의 '선 너머'를 파헤치도록 부추기고 있었음.
도착한 콜슨이 토르를 살피며-옷깃을 잡아당기거나 팔을 만져보는 등 엄청 진지했음- 정말 토르 맞나요?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고 토르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음. 스티브, 지금 콜슨이 나를 가짜라고 의심하는건가? 콜슨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스티브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토르가 물었음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 같군요. 스티브가 씁쓸하게 대답했고 콜슨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음. 셋이 탑승한 차량은 몇 분인가 달려 간척지의 군용 비행장에 도착했음. 콜슨이 앞장서서 넓은 비행장에 중앙에 세워진 전용기로 둘을 안내했음. 검은 수트를 입은 요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셋은 전용기에 올랐음
토르는 웃으며 가지고 있던 과일봉투를 한 요원에게 건네주었음. 먹게. 왕실 경비병들들처럼 필요한 동작만 보여주던 그들은 콜슨의 눈짓에 그것을 받았음. 토르는 전용기 곳곳에 새겨진 쉴드마크를 보며 수염을 쓰다듬었음. 많이 변했군. 짧은 소감에 콜슨이 어깨를 으쓱거렸음. 지금은 21세기에요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죠. 토르가 자리에 앉자 스티브가 맞은편에 앉았음. 콜슨은 그들의 건너편 좌석에 앉았음. 많이 늙었군. 토르가 말하자 콜슨이 소스라치게 놀람. 가뜩이나 주름진 미간에 몇 줄 더 추가됨. 콜슨은 매우 불안해하며 정말 토르 맞는지 다섯 번을 물어옴. 토르는 열심히 끄덕여줌
쉴드는 더욱 발전했어요
그 말은 이제 요원들 목숨을 파리취급 하지 않는다고 들리는데, 그렇다면 다행이군
토르의 말에 콜슨은 큼큼 기침소리를 냈음
캡틴이 오해하겠어요. 당신이 맡은 미션랭크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그렇게 느껴졌나 보군요
당황한 콜슨이 수습하려하자 토르는 껄껄 웃었음
하하하! 맞아, 정말 너무했지. 활기찬 대답에 스티브의 얼굴이 일그러졌음. 맙소사, 대체 쉴드에선 토르에게 무슨 임무를 줬던 겁니까? 그 말에 토르가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임무를 읊었음. 콜슨은 창 밖을 바라보았고 스티브의 표정이 점점 굳어감
러시아 극동지방의 영하 40도가 넘는 지역에서 방한포 한장으로 이틀 버텨가며 요인감시, 몸무게가 150키로를 넘는 대부호를 30미터 앞에서 발사되는 머신건으로부터 지켜내기, 90도 절벽에 악력만으로 이틀 매달려 대기 등등 끝이 없었음. 콜슨은 주먹을 세워 입가에 대고 큼큼 소리만 반복했음
미리 말해두지만 토르가 특별한 경우였고 모두 퓨리 국장의 지시였어요. 아예 책임을 미루었음. 토르는 얼음 든 바스켓에서 샴페인을 꺼내며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스티브의 쉴드를 향한 불신이 1그람 추가됨
전용기는 속도가 빨랐음. 셋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맨하튼에 도착함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마중나온 에릭과 제인이 셋을 맞이했음. 토르는 총알처럼 쏘아져 나온 제인을 얼떨결에 마주안고 토닥여 주었음. 그동안 왜 안왔어요, 암호같은 엽서나 보내고! 18세기의 제인 포스터와 꼭 닮은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토르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음
그러다가 다리를 조금 절며 걸어오는 에릭을 보고 눈을 조금 깔았음. 부정적인 반응을 눈치 챈 에릭이 가볍게 혀를 참. 오해하지 마, 고칠 수 있었지만 이쪽에서 거절한거야. 네 뒤에서 무게잡고 있는 저 양반이 몇 번이나 권했지. 지팡이 끝이 콜슨을 가리켰음. 토르는 왜 치료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음
에릭은 어깨를 으쓱했음. 유동식은 지긋지긋해. 무슨 의료용 나노머신이니 뭐니 이상한 걸 주입해서 관리해야 한다는데 몇 달간의 식단 관리와 금주를 어떻게 버티겠나. 라고 대답함. 에릭이 혀를 차며 투덜거리자 토르는 머쓱하게 웃었음. 스티브는 요원들 이랑 침입이니 해킹이니 이야기를 나누었음
[로키가 당신의 동생인 건 알고 계셨습니까?]
[마리아는 쉴드의 요원이 되었어요]
[사랑한다? 그래 맞는 말이야, 한때는 나도 로저스를 사랑했었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인간은 금세 죽어. 나는 또 잃을 것이고 너희들과 궤를 달리하는 시간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겠지!]
[Brother]
[나는 못해, 이런 과업... 형처럼 잘 할 자신이 없어. 제발, 나를 불안하게 하지 마]
[무서워, brother]
[ㅡㅡㅡ, 출전을 허락해 주소서]
펄럭이는 붉은 망토
완전하지 않은 기억의 일부
작은 응접실에서 재생되는 목소리는 콜슨과 토르였음. 재생이 끝나고도 토르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 장치만 노려보았음. 조작이 아니냐 묻는다던지, 혼란스러워 하거나 분노하는 등의 예상했던 반응을 일체 보이지 않았음. 스티브가 테이블에 올려진 토르의 손등을 토닥였지만 묵묵부답임
모두가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우물쭈물 고민하는 와중에 토르가 고개를 들었음
로키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분위기였음. 스티브는, 토르 괜찮아요? 조심스럽게 물었음.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음. 자네 말이 맞았어. 로키가 나를 속이고 있었군. 목소리에 힘이 없고 허무한 기색이 있었지만 그뿐이었음
토르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음.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걱정하며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보았음. 그러더니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음
자 이제 내가 뭘 해야하지?
말이 떨어지자 콜슨이 홀로그램을 재생했음. 마리아. 토르가 중얼거렸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리움이 담기자 홀로그램 속 철을 닮은 여성이 미소지었음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쉴드에 들어왔을 줄은 몰랐구나
[실망하셨나요]
네가 선택한 길이라면 언제나 응원한다
[그렇게 대답할거라고 생각했어요]
힐은, 마리아는 진중하게 설명했음
[로키는 아버지를 속였어요, 기억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당신과 형제임을 감췄고, 당신을 돕는 척 뒤로는 테러단체를 지원해 왔어요] 주르륵 떠오르는 자료들을 읽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알았음. 토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음. 그래, 로키를 잡아야겠군
모두 걱정했지만 토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껄껄 웃었음. 그 녀석 호되게 날려줘야겠다. 반응은 그걸로 끝이었음
그 날 저녁엔 조촐한 파티가 있었음. 에릭이 쉴드의 주방을 빌려 칠면조를 튀겼고 토르와 스티브는 밑재료를 다듬었음. 제인은 음료와 식기를 세팅했음. 안면있는 쉴드 요원들도 도왔음
토르의 반응이 지나치게 약하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음. 그러나 웃고 떠들며 과거를 이야기하는 즐거운 모습에 다들 경계심이 흐려졌음. 토르는 로키에게 배웠다는 작은 마술을 보여줬는데 공간이 열리더니 술병이 나왔음. 껄껄 웃으며 컵에 조금 따르더니 술병은 다시 어딘가로 넣어버림
에릭이 입을 떡 벌리며 다시 마법을 부려보라고 닥달했고 토르는 껄껄 웃으며 박사 기질 나왔다며 단호하게 거부했음. 오늘은 즐거운 날이잖아. 복잡한 수식은 치워두게. 그러더니 갑자기 콜슨을 붙들고 왜 내가 아닌지 못 알아챘냐며 능글거리며 긁어대기 시작함. 토르에겐 그늘이 없었음
다음 날, 드물게 퓨리 국장이 나왔고 스티브와 토르는 헬리케리어에 올랐음. 입담이 걸한 토니 스타크와 몸을 숙인 배너 박사, 나타샤와 바튼을 만났음. 퓨리는 전부터 논의해 왔던 프로젝트를 설명했음. 다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음. 토르는 구석에서 가라앉은 눈으로 퓨리가 띄운 영상을 주목했음
그는 테서렉트를 연구 중이며 셉터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음. 토르는 콜슨의 부탁을 받아 몇 군데의 하이드라 기지를 습격했던 경험과 암기했던 셉터의 정보를 떠올렸음. 괜찮아요? 스티브가 손을 잡으며 말을 걸어왔음. 나는 괜찮아 스티브. 토르가 웃으며 잡힌 손을 마주 잡았음. 걱정해줘서 고맙네
토르의 불멸성과 강력한 힘을 목격했음에도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취급하는 건 70년 전과 다를바 없었음. 둘이 마주보고 웃자, 여기 누구 로맨스 영화 좋아하시는 분? 저쪽에서 실시간 상영중이네. 토니가 깝죽거렸음
토르는 마리아와 마주하고 30년만에 아버지와 딸로서 포옹했음
당신이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알아요, 이렇게 되서 마음이 아프네요
유려한 위로에 토르는 쓰게 웃었음
괜찮다. 다 잘 될거다. 반드시
토르는 주위를 둘러 보았음. 모두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 '네가 필멸자들에게 과한 관심을 주는게 마음에 안들어.' 로키의 말이 떠올랐음
스티브는 토르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음. 평소 담백한면이 있었다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감정을 잘 표현하는 남자였음. 이 정도로 절제된 모습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음. 당장 분노를 쏟을 대상이 눈앞에 없기 때문일까? 짐작해 보지만 깊이 생각할수록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음
토르는 적어도 50년 전부터 로키와 함께 지냈음. 로키가 본성을 철저히 숨겼다고 가정했을때 토르가 받을 충격의 크기는 쉬이 짐작하기 어려웠음.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음. 끓는 감정을 속으로 삭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게 당연했음. 둘은 지금 연인 이하의 미묘한 관계였음
물론 스티브가 손을 뻗으면 거부하지 않았음. 그러나 '거부하지 않는다.' 와 '받아들인다.' 는 의미가 달랐음. 적어도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음. 토르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음. 스티브는 강요하지 않았음. 그럴 마음도 없었음. 토르는 1942년의 스티브 로저스를 보고 있었음
하지만 스티브는 21세기에 깨어났음. 토르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고 싶었음. 그저 과거 연인에 대한 연민을 내세워 그를 붙잡고 싶지 않았음. 그래서 기다리겠다 마음먹었음. 미련한 것 같아도 원래 참고 버티는 것이 특기인 브루클린 약골이 아니었던가
어느날 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스티브에게 토르가 미드(Mead)를 권했음. 스티브는 그가 내민 작은 잔을 받아 바로 들이켰음. 속이 타는 것 같다고 소감을 말하며 눈을 찌푸렸음. 토르는 그의 옆에 앉아 자신도 미드를 들이켰음. 넓은 소파였지만 덩치 큰 남자 둘이 앉으니 자연스럽게 몸이 밀착했음
빠르게 오르는 취기에 출처 모를 용기가 솟아난 스티브는 주사를 부렸음.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토르. 발음이 엉망으로 뭉개졌지만 별로 걱정되지 않았음. 왜냐면 토르가 옆에서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사랑하네, 스티브. 그렇게 말하고 키스해 주었음. 입술이 아니라 이마였음
열오른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오자 토르는 슬그머니 웃으며 손을 낚아채 손바닥에 몇 번이고 키스해 주었음. 긴 금발이 얼굴에서 살랑이는 것을 느끼며 스티브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음
다음 날, 토르가 사라졌음. 시애틀에서 만난지 딱 5일째 되는 날이었음
ss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