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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away black sheep 2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샤아 아즈나블 X 아무로 레이

 

 

 

 

 

 

 

 

 

 

 

 

죽인 사람의 숫자를 하나하나 파악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존재는 별로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살아남기에 급급해 눈앞의 적기를 부수다 보면 본부로 복귀하라는 무전이 온다. 그제야 느끼는 것이다. 아, 드디어 끝났구나. 그런데 내가 몇 명의 적을 죽였지? 알 게 뭐람. 나는 살아남았는데.

 

카이 시덴이 저널리스트 활동을 시작한 것은 거창한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부패한 연방군의 폭정을 조용히 묵인하고자 하는 마음과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잡념을 없애고 지온군을 죽였던 과거에 대한 회의감을 저울질 한 결과였다. 그때는 미하일 같은 소녀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아서 싸웠고, 지금은 진실을 외면하지 못해 민완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제럴드 트리뷴 봤어요?”

“그새 인사를 잊어버렸나 본데.”

“안녕하세요, 카이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초저녁,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년이 뒤늦게 인사했다. 오래된 소파에 몸을 늘어트린 채 구식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카이가 손을 위로 뻗어 새를 쫓는 모양새로 훠이 휘둘렀다.

 

“들어 보세요! 멕시코 해안가에서 발견된 기체 잔해 말이에요.”

“꼬맹아. 의욕이 넘치는 것도 좋은데 그렇게 호들갑 떨며 흥분하는 건 나쁜 버릇이야. 훌륭한 기자가 되기 위해선 크나큰 걸림돌이지.”

“치! 무슨 말만 하면 기자가 되기엔 글러 먹었다고 하네. 그리고 자꾸 꼬맹이라 부르지 말아요. 믹이라고요. 저도 카이씨보고 아저씨라고 안 하잖아요.”

 

소년, 믹은 투덜거리며 품에 안고 있던 갈색 봉투를 냉장고 옆 탁자 위에 올렸다. 카이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별 대꾸가 없음에도 믹은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로 레이가 타고 나갔다던 뉴건담일거에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견을 여쭈어봐도 될까?”

“지구로 떨어진 모빌 슈트가 잔해라도 남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해요? 우주에서 싸우기 위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려면 대기권 돌입 시 버틸만한 장비를 다는 것보다 무기를 하나라도 더 꽂아 넣고 가는 게 좋잖아요. 실제로 이번 전투 때도 수많은 기체가 지구로 떨어졌다고 했는데 발견된 잔해는 하나도 없었어요. 마찰열에 다 녹아버렸겠죠. 그러니까 이번에 발견된 기체는 아무로 레이의 모빌 슈트인 게 당연해요.”

“그런 이유라면 뉴건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전투에 도움이 되는 판넬이나 빔포를 달고 나갔겠지.”

“나 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 뉴건담이라구요. 연방의 괴물 파일럿 아무로 레이가 직접 만든 모빌 슈트! 그 사람에게 대기권 돌입 정도야 별일 아니었을 거예요. 우주에서 샤아 아즈나블을 멋지게 해치우고 지구에 내려와서 귀찮은 연방 놈들을 피해 은거하고 있을걸요?”

“하하… 그런 거냐?”

“그런 거예요.”

 

믹은 고개를 끄덕이며 콧대를 높이 들었다. 카이는 피식 웃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소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믹이 떠드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는 ‘아무로 레이’라는 네임이 붙는 순간 그럭저럭 믿을 만한 가십지 기사가 되어 나왔다. 카이는 믹에게 붙인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없는.’ 타이틀을 떼주었다.

 

제2차 네오지온 항쟁이 끝났을 때, 아무로 레이의 사망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기자들은 연이어 소설을 쏟아 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그가 생존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과연 하얀 사신의 이름값은 대단한 것이다. 허나 몇 개월이 지나도 실종 상태에서 달라지는 게 없자 조금씩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는지 그의 죽음에 대해 논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믹은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봉투에서 식료품을 꺼내 사무실 한구석에 있던 구식 냉장고에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 며칠 전 멕시코 칸쿤에서 발견된 모빌 슈트로 추측되던 잔해는 연방과 네오지온 양측 모두가 소속 기체임을 부인하였으며, 무라사메 연구소에서 전수 조사한 결과 지구권 주위를 돌던 폐기된 위성임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입니다.]

 

때마침 카이가 보고 있던 텔레비전에서 칸쿤에서 발견된 기체 잔해에 관한 후속 보도가 흘러나왔다. 그럴싸한 과학적 설명이 덧붙여진 그래픽 모형까지 보여줬다. 발견된 잔해는 2차 네오지온 항쟁 당시 액시즈의 영향권에서 폭발한 인공위성 부품이었다는 것이다.

 

“에엑, 말도 안 돼! 역시 언론은 썩었어!”

 

그새 냉장고 정리를 마친 믹이 소파 뒤에서 두 팔을 늘어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카이는 소년의 높은 목소리에 제대로 직격타를 맞은 왼쪽 귀에 손가락을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믹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그의 한숨이 잦았다.

 

“꼬맹아.”

“믹이요.”

“믹, 좀 조용히 해주겠어?”

“정말 너무해요. 카이씨는 일 년 전쟁에서 그 아무로 레이와 함께 싸운 동료잖아요. 걱정도 안 돼요?”

“내가 마음 써봐야 녀석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 걸 두고 사서 고생이라고 한단다.”

“으으! 완전 냉혈한이야.”

“하하.”

 

소파 뒤에 서 있던 믹이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 몸을 늘어트리자 카이는 귀를 막던 왼손을 뻗어 소년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다.

 

“자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하얀 유령 가십은 그만 조잘거리고 록터한테 가서 헤링턴 공업 단지 폐수 유출 사건 리포트나 받으렴. 언제는 연예인 관련 유치한 기사는 취급하지 않는다며 조숙한 척하던 녀석이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는구먼.”

 

카이가 핀잔을 주자 믹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평범한 연예인이 아니에요… 그 아무로 레이라고요…”

“그래그래. 어쨌든 리포트 받으면 내 메일로 전송해. 그리고 당분간 여기 문 닫을 테니까 연락하기 전까지 집에 있어라. 레아 한테도 일러둬. 둘 다 괜히 와서 헛걸음 말도록.”

“엑?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놀란 믹이 몸을 일으켰다. 카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보름 정도 취재야.”

“뭐야. 그런 계획 없었잖아요. 자리 비울 일 있으면 최소 일주일 전에는 알려주더니…”

“긴급 취재.”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믹이 팔짱을 끼더니 눈매를 가늘게 했다. 카이는 턱을 쓰다듬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믹은 말이 많고 헛발질이 잦은 어수선한 꼬맹이였지만 눈치와 상황판단은 빨랐다. 그런 면은 예비 저널리스트로서 합격이었다. 나이를 먹고 경험이 늘면 헛발질은 줄어들 것이다.

 

“쓸데없는 가십에 정신 팔지 말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뉴스보이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어?”

“으아… 비열해.”

“어른이 되면 대부분 비열해진단다. 꼬맹아.”

“믹!”

“믹 꼬맹이.”

 

믹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긴 했으나 또래의 아이들처럼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거나 떼를 쓰진 않았다. 그것은 소년의 장점임과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카이는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그런 아이들이 만들어지는 현실을 혐오했다. 콜로니 테러로 부모를 잃은 흔하디흔한 전쟁고아 소년은 기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카이는 믹의 후견인으로서 그를 데리고 홍콩으로 오며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으면 대학 졸업장을 따오라는 것이었다. 믹은 신문 배달과 카이의 조수 일을 하며 받은 돈을 저축해 학비를 모으고 있다. 기브 앤 테이크. 스페이스 노이드든 어스 노이드든 세상은 그런 법이다.

 

“미리 말했어야죠. 우유랑 두부는 유통기한이 짧단 말이에요.”

“성장기 아이들에겐 좋은 음식이지.”

“…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리고 레아는 두부를 싫어해요.”

 

레아도 믹과 비슷한 시기에 거둔 전쟁고아였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둘은 금방 친혈육처럼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하하하. 너는 다 잘 먹지 않니. 그 애 몫까지 먹고 쑥쑥 자라서 하루라도 빨리 독립해라.”

“반드시 카이씨를 넘어서는 기자가 돼서 그 껄렁한 태도를 후회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믹이 당당하게 말했다. 가벼운 블러핑이 아니었다. 소년의 당당한 포부에 카이는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식사 잘 챙겨 먹어요. 레아가 말하길 카이씨는 영양 불균형이래요.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믹은 투덜거리면서도 더 파고들지 않고 상하기 쉬운 식재료를 다시금 봉투에 담아 가슴에 붙여 쥐고는 문손잡이를 돌렸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리하지는 마세요.”

 

짧은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카이는 대충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연방군은 제2차 네오지온 항쟁 당시 실종 군인 수색을 의제로 네오지온 측에 회담을 제의했습니다. 한편, 2자 회담은 잠정 중단된 상태지만 네오지온측의 협상을 총괄하는 마일스 외무성 제1부상이 스티븐 로스네즈 연방군 네오지온 정책 특별대표와 이틀 전 사이드1에서 회담하는 등 변화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아나운서가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지구권 돌입에 성공한 모빌 슈트는 없다. 삼 개월을 기점으로 수색 종료를 선언,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은 아직 실종 상태였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들이 생존하고 있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는 클로징 멘트 이후에 화면이 광고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카이는 알았다.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이 커다란 폭탄을 안고 생존하고 있음을. 언론은 썩었고 연방에는 끔찍한 비밀이 많다.

 

사건은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

 

 

 

 

***

 

 

 

 

3월 12일, 하늘을 수놓는 액시즈의 파편들을 보며 카이는 아무로의 죽음을 떠올렸다. 딱히 비관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사고의 결과였다. 민간인이 되었다고 우주에서 모빌 슈트를 조종했던 기억을 모두 날린 것은 아니다.

 

몇 달 전, 카이는 취재차 들른 폰 브라운 공장에서 운이 좋게도 아무로와 직접 만나 뉴건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기꺼이 과거의 동료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둘은 부대 내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가는 군인들이 아무로를 알아보고 거수경례를 하길 몇 번, 반항적인 눈매의 소년은 어디로 갔는지 존경을 받는 훌륭한 상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점을 지적하자 쑥쓰럽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아무로는 신형 건담의 안정성 부분을 테스트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빠듯한 일정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도 덧붙였다. “그래서 괜찮은 거야?” 카이의 의미 없는 질문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대답이었다.

 

살아있을 리 없다.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파일럿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대목의 의미를 모른 척하기에 카이 시덴은 너무도 현실적인 남자였다. 아무로가 아무리 대단한 파일럿이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브라이트에게 짧은 메일을 받고 나서 아무로 레이의 죽음은 카이의 뇌리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브라이트는 아무로의 직접적인 생사에 관한 언급은 피했지만 그가 처했을 상황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는 가히 절망적이었다. 사실 카이는 아무로의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그도 하야토와 비슷할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도 전시 군인의 삶이란 다 고만고만하게 흘러가는 법이다. 특히나 아무로처럼 한가지 목표를 위해 최전방 돌격을 자처하는 괴짜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예상보다 빠르게 결과를 확인하니 참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는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할만한 메일을 하나 받았다. 발신자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자신을 쿠에르 파커라고 소개한 남자는 당장 출처를 밝히지는 못하지만, 믿을만한 증거를 바탕으로 연방 수뇌부들의 치부가 담긴 이른바 골든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 사기를 치는 인간은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휴지통에 넣을 수 없었다. 카이는 그가 남긴 메일의 마지막 줄에 주목했다.

 

또 다른 미하루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협력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하루 라토키에의 이름은 화이트 베이스 멤버들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극비였다. 당시 지온군의 첩자였던 미하루의 죽음 이후, 그녀의 직속 상관도 죽었고 관련 기록은 모두 삭제됐다. 이는 일 년 전쟁이 끝나고 전범 재판용 연방 데이터 베이스에 접속한 카이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고향에 남겨진 동생들의 안전을 위해 그가 직접 나선 일이었다. 그랬기에 메일 마지막 문장이 가지는 의미가 컸다.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화이트 베이스 크루 중에서도 극히 일부였다. 나아가 현재까지 살아있는 존재는 브라이트나 미라이, 프라우, 세이라 정도였다. 당연하겠지만 그들이 카이에게 이런 지독한 장난을 칠 리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범인은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아무로 레이.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을 터였다. 카이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정보의 진실성을 가늠하고 짧은 연산 끝에 결론을 내렸다.

 

카이는 쿠에르 파커에게 가까운 시일 내에 약속을 잡자는 메일을 보냈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답신이 왔다.

 

[청 레슁 빌딩. 1층 카페라운지. 13:00 PM]

 

이틀 뒤, 카이는 홍콩으로 온 쿠에르 파커와 직접 대면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더 일찍 나왔건만 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금발에 덩치가 큰 남자. 외모는 완전히 달랐으나 경박한 첫인상은 얼핏 슬레거 중위를 생각나게 했다. 직원을 불러 커피를 시키고 시간 관계상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쿠에르는 자신을 과거 지온군이었다고 소개했다.

 

“나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런 소개말은 넣어두는 게 좋았을 텐데요.”

 

카이가 꼬집었다. 때마침 직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탁자 위에 김이 오르는 잔이 둘 놓였다. 카이 시덴의 지온에 대한 혐오는 유구했다. 접선 이전에 뒷조사도 안해봤을리 없었다. 고로 의도된 소갯말이었다.

 

“혹 나중에라도 괜한 오해가 발생하는 상황이 없었으면 해서 미리 털어놓는 겁니다.”

 

쿠에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남자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신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날 카이는 듣고 싶었던 소식과 듣고 싶지 않았던 소식을 한 번에 알게 되었다. 쿠에르 파커도 브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아무로 레이의 생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다. 그는 아무로가 살았든 죽었든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교묘한 언변으로 정보에 살을 붙였다. 과거 기자였다던 본인의 말대로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카이는 그가 바라는 대로 따라줄 생각이 없었다. 이런 눈속임같은 가면극은 딱 질색이었다.

 

“개인적으로 밝혀낸 부분은 따로 표기해 뒀습니다.”

 

쿠에르의 말을 한귀로 흘리며 파일을 넘기던 카이는 오랜만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짧게 축약된 목차만 대충 훑어도 결코 비범한 내용이 아니었다. 연방군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음 직한 굵직한 이름의 인사들에서부터 그들의 뒤에서 암약하는 덜 알려졌지만 위험도 높은 주요 인물들까지, 리스트의 작성자는 군 내부인이 분명했다. 이런 방대하고 세세한 내용은 최소 내부인의 협력이 없고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머릿속을 떠돌던 무수한 정보의 파편들이 하나로 합쳐져 수면 위로 드러난 순간, 그것이 주는 충격은 상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독립부대 론도 벨은 전투에 있어서는 최강의 집단이었으나 연방 내에서 실질적인 입지는 좁았다. 높으신 분들의 눈 밖에 났다는 의미도 있었고 론도 벨에 딱히 권력에 관심이 없는 괴짜들이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고립을 자초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아무로 레이가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굳이 눈앞의 남자에게 말로 듣지 않아도 투명했다. 리스트의 작성자는 아무로가 분명했다.

 

그는 대형 폭탄을 남겼다. 비록 후속 조치를 제대로 못 하고 죽음, 혹은 잠적해 버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엄청난 일이었다. 카이는 평온을 가장한 목소리를 냈다.

 

“파장이 클 겁니다. 양측 다 쉽게 넘어가진 못하겠군요.”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정보원’에게 처음으로 받았던 자료에 이어 아카이브를 통해 후발로 들어온 내용은 더 어마어마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일개 민간인인 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닙니다.”

“정보원이라.”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지만, 서로 적당히 넘어가기로 합시다.”

“흠.”

 

카이가 듣고 싶지 않았던 소식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정보원이라 칭하고 있었지만 쿠에르 파커가 말한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자료의 전달자는 솔직히 뻔했다. 처음 그의 입에서 정보원이란 단어가 나왔을 때는 아무로를 돌려 말하는 것일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대화가 길어질수록 묘사하는 뉘앙스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길지 않은 연산을 통해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자 카이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하필이면 그자가 아무로와 함께 행동하고 있을 거라는 추측이 영 달갑지가 않았다.

 

카이는 샤아 아즈나블이 싫었다. 그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주제에 각오와 결의를 이상한 부분에서 발휘해 버린 어딘가 잘못된 인간이었다. 일 년 전쟁 당시 콜로니 낙하는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되는 인류의 과오라고 모두 인정했었다. 그 공포의 순간을 다시 재현하려고 했던 남자가 제정신일 리 만무했다. 평범한 각오와 이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 광적인 남자가 그때와 다를 바 없는 마음가짐으로 아무로의 곁에 있다면 시한폭탄은 두 개인 셈이다. 쿠에르 파커에게 리스트를 공개한 것도 네오지온의 부흥을 위한 밑 작업일 수도 있다. 그가 개입한 게 확실하다면 어느 쪽이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당신에게 연락한 것은…”

“압니다. 상당히 용기를 내셨겠군요. 미스터 파커라고 불러도 됩니까?”

“쿠에르로 좋습니다.”

“…쿠에르. 솔직히 말하자면 영 탐탁지 않습니다. 과거 지온 군에 복무했던 경력을 들먹이며 까탈스럽게 구는 것만은 아닙니다. 일 년 전쟁 당시에 민간인 마을을 폭격하고 훈장을 받은 기록을 숨기지 않았군요. 친절하게 색인까지 해둔 용기는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의 결심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리스트가 세간에 공개되면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카이가 삐딱하게 물었다.

 

“당연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처벌받을 각오도 되어 있고요. ‘정보원’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만약 제가 원한다면 과거의 치부를 가리고 공개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습니다.”

 

쿠에르의 대답에 카이는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십 년이 넘도록 숨기고 살다가 갑자기 휴머니즘이라도 각성한 것인지… 아. 이건 제 버릇입니다. 딱히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니고.”

“많이 참았군요. 기자 시절 당신 저널이 실린 잡지를 구독했었습니다. 급진적인 사상 중간중간 회의적인 멘트가 박혀 있는 게 꼭 살사 소스를 끼얹은 엔칠라다라도 먹는 기분이었지요. ”

“재미있는 비유로군요. 하지만 구독자라면 제가 ‘정보원’을 얼마나 비판적으로 다루었는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 언급은 피하자고 했…”

“어떤 것들은 계속 묻어둘 수만은 없는 법입니다.”

 

카이는 태도를 분명히 밝히며 까슬한 턱을 어루만졌다.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끊었던 담배가 생각났다. 카페 안은 대부분이 금연 구역이었지만 출구와 가까운 곳에 투명한 부스 형태로 격리된 흡연용 좌석이 있었다. 약간의 침묵 끝에 쿠에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카이씨가 걱정하는 일을 벌이지 않을 겁니다.”

“무슨 언질이라도?”

“직접 만난 그자는 제가 알던 세간에 알려진 네오지온 총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개인적인 판단이군요. 당신이 뉴타입이 아닌 이상… 아니 설령 뉴타입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 억지로 교정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제 눈에 그는 조용히 잠적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어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죠.”

 

카이는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하는 말이 보통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적? 확실히 전적이 있었다. 블렉스 준장의 사후, 에우고의 지도자로 손꼽혔던 그 남자는 약삭빠르게 도망쳤고 7년이 지나 신생 네오지온의 총수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단한 남자답게 스케일이 남다른 도피였다. 한때는 캐스발 렘 다이쿤으로서 일어서길 바랐던 적도 있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의 협력이 없었다면 이걸 손에 넣지 못했을 겁니다. 현재로선 다른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이용당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신뢰 없는 동맹이라…”

“못 본 척하실 겁니까?”

 

쿠에르가 입가를 쓸며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다. 문득 카이는 그가 이렇게까지 샤아를 비호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협력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샤아를 변호할 필요가 없었다. 적당히 카이의 말에 맞장구치다가 결정적 한 방을 날리면 되는 것이다. 그 정도도 못 할 정도로 순진한 남자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카이 시덴,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까? 리스트가 공개되면 보름도 안 돼서 완전히 매장당할 겁니다. 미디어의 폐해는 당신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왜곡된 보도에 관해서 누구보다 전문가인 당신이 불안요소 하나 때문에 거대한 폐해를 외면한다는…”

“샤아를 단순한 불안요소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됩니다.”

 

카이가 말을 가로챘다. 테이블에 놓인 커피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샤아 아즈나블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남자입니다. 동맹? 협력? 저에게 그 제의는 과거의 전철을 밟자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해를 못 하는 게 당연합니다. 샤아가 속을 드러내고 주위의 기대를 배반했을 때, 당신은 지온 군인이었던 과거를 세탁하고 안온한 현실에 몸을 맡기고 있었을 테니까요.”

 

비관을 넘어선 비난이었다. 쿠에르는 한참 동안 카이를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제 의도를 알고 싶으신가 봅니다.”

 

다소 늦은 대답에 카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첫인상과 다르게 감이 좋은 남자였다. 그는 카이의 영혼 없는 인신공격의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로 레이는…”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카이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훌륭한 사람이더군요.”

“잠깐 훑어본 바로는 당신 부인이…”

“아무로 대위는 제 아내 돌로레스의 은인이었습니다. 얽히고 꼬이긴 했어도 본질은 단순합니다. 뭐 어떻게 보면 흔하디흔한 이야기죠.”

 

카이는 쿠에르가 아무로의 이름을 꺼냈을 때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을 잡았다. 짐작건대 그것은 처음 보내온 메일처럼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케케묵은 과거의 원한은 잠시 접어두고, 겪은 대로 솔직하게 털어놓겠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아무로 대위를 만났습니다. 멕시코 칸쿤에 위치한 소도시치고는 제법 설비가 좋은 종합 병원이었습니다. 처음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인물을 보았을 때는 반반이었지요. 상태가… 영 안 좋더군요. 이틀이 지나고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그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쿠에르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당시의 그에게 아무로 레이는 샤아 아즈나블을 잡기 위한 미끼였다. 하지만 연방과 연락했을 때 그들이 아무로를 대하는 자세를 보고 쿠에르는 자신이 생각보다 썩은 문제를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대목에서 카이는 허무하게 웃어버렸다. 샤이엔에서의 7년간 연금 생활을 자세히 아는 자들은 드물다. 기사로 내고 싶어도 인터뷰 요청은 칼같이 거절되었다. 당시 안면이 없던 벨토치카 이루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카이 시덴 역시 거절당한 인터뷰어 중 하나였다. 아무로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리 없었다. 16세 소년이 22세 청년이 되기까지 어떤 대우를 받고 지냈는지 눈앞의 남자가 알 리 없었다.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습니다. 샤아 아즈나블이 대위를 구하러 올 거라고요. 화소가 낮은 감시 카메라로도 그자의 절박한 표정이 보였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오히려 피를 흘리고 의식이 없는 아무로 대위를 눈앞에 두었을 때 훨씬 더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더군요. 타인의 앞에서 드러나는 그런 면은 천성인 것 같았습니다.”

 

그날, 쿠에르 파커는 본의 아니게 최악의 지뢰를 밟은 셈이었다. 카이는 피 칠갑을 한 아무로를 구하기 위해 샤아가 등장한 장면을 상상하며 실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 연방은 이미 두 사람의 생존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죠.”

“그리하여 둘은 잠적했다, 라… 복수를 끝낼 좋은 기회를 놓치셨군요.”

“굳이 비꼬지 않아도 경솔했던 점은 충분히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저는 작은 위화감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있었지요. 하지만 그자는 달랐습니다. 아무로 대위가 살아있음을 확인한 뒤, 저를 천천히 몰아갔습니다. 우습게도 숨통은 터 주더군요. 만약 대위가 죽었다면… 저는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카이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반도 마시지 않은 커피잔은 한쪽으로 치워진 지 오래였다. 쿠에르는 조금씩 그러나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로 레이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샤아 아즈나블이라.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꼭 아무로 대위가 자신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더군요.”

 

쿠에르는 계속해서 핵심 주위를 겉돌며 눈치를 보았다. 카이는 지루한 탐색전을 끝내기로 했다.

 

“… 지금 당신은 샤아 아즈나블이 아무로 레이를 사랑한다고 말하려는 겁니까?”

 

카이가 황금사과를 던졌다. 쿠에르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곧 쿠에르는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천천히 내쉬었다. 고민이 깊어 보였다. 현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어떤 체념의 감정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카이는 점점 더 속이 복잡해졌다. ‘사랑’이라니, 스스로 뱉었지만 웃기지도 않았다. 뜬금없이 튀어나와 모든 의문을 종식해 버리는 마법의 단어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니. 확실히 그런 느낌을 받았죠.”

“방금 발언으로 내 안에서 댁의 평가가 바닥을 쳤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카이의 신랄한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쿠에르는 헛헛 짧게 끊어 웃었다.

 

“이해합니다. 제가 당신 입장이었어도 믿기 어려울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목격했습니다. 본인의 생에 대한 집착보다 대위의 미약한 반응을 우선시하던 모습을요.”

“어떤 경로로 아무로가 연방군의 치부가 담긴 리스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이용할 생각으로 납치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넘겨진 추가 자료는 아카이브를 통해 공개되었다고 했지요? 아무로를 확보한 후 생체 인증을 통과해 얻은 정보를 첨삭했다면? 그걸 위해서라면 일단 살아있어야겠죠.”

 

카이의 추측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한 냉정했다. 사랑이니 뭐니, 호르몬의 흐름에 의한 비논리적 감정의 폭발로 작금의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옛 동료의 피랍을 가정하는 편이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설은 몇 초도 되지 않아 깨졌다.

 

“미하루 라토키에는 당신이 보는 파일에 없을 겁니다.”

 

쿠에르가 말했다. 결정적 한 방. 카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정말 담배가 절실했다. 비논리적인 ‘사랑’의 성립 가능성이 불쑥 튀어 올랐다.

 

“피랍된 대위가 샤아 아즈나블의 강압에 의해 그녀의 이름을 댔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리 생각할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아무로도 마찬가지겠지요.”

 

카이는 마지못해 긍정했다. 만약 아무로가 샤아의 통제하에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정직하게 미하루의 이름을 밝혀서 카이를 위험한 상황에 빠트릴 리 없었다. 샤아는 고문을 가할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설령 고문을 당했더라도 아무로는 쉽게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다. 미하루가 메일의 마지막 줄에 붙었을 때, 사실상 이기지 못할 싸움에 끼어든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는 데 이골이 난 카이는 혹시 이 남자가 어떤 속임수를 써서 그녀의 이름을 알아낸 건 아닌지 의심하고 이 자리에 나왔다. 그러나 쿠에르 파커는 예상보다 진실된 남자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로는 자발적으로 샤아에게 협력 중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말하는 ‘사랑’이 사실이라면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 아무로 레이에게 협력하는 샤아 아즈나블, 어느 쪽이든 신기한 이야기였다.

 

“당연하지만 신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샤아가 배신할 거라는 전제하에 부분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저에겐 리더가 될 만한 자질이 없어서 말이죠. 당신이 나서준다면 안심입니다.”

“하하 이쪽도 딱히 남 위에 설 만한 재목은 아닙니다만, 당신의 말대로라면 ‘정보원’이 직접 위에 서서 지시를 내려야 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건 대위도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상황이 좀 복잡해집니다. 파일 뒷 부분을 살펴보면 일종의 코드가 있는데…”

“블랙쉽. 이것도 색인해 뒀군요.”

“… 당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추가된 정보가 없어 알고리즘을 알 순 없었지만, 혹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카이는 침묵했다. 색인 된 페이지에 등장하는 각종 증명사진과 짧은 프로필은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간간이 알아볼 수 있는 인물도 있었다. 카미유 비단처럼 그리프스 전역을 넘기고 개인적 사정으로 은퇴한 파일럿, 세이라 마스처럼 일 년 전쟁을 치르고 전역 후 딱히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민간인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민완 저널리스트 카이 시덴.

 

“글쎄, 잘 모르겠군요.”

 

사실 거짓말이었다. 리스트에서 세이라 마스와 나미카 코렐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칠 년 전, 카이는 블렉스 준장을 암살한 범인으로 티탄즈가 마련된 연극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나포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해 새로운 범인을 만들어낸 티탄즈는 카이를 풀어주었고, 그때 샤아 아즈나블의 ‘피붙이’를 들먹이며 협박했다. 나미카 코렐 역시 루오 상회와 티탄즈의 거래에 넘겨져서 살아남기 위해 무라사메 연구소의 강화인간 실험체와 관련된 가짜 정보를 언론에 흘려야 했다. 오랜 기억 속에서 잠들어 있던 정보들이 뉴런을 타고 연결되었다.

 

블랙쉽이란 결국 연방이 오래전부터 저질러 온 암살과 테러 사건의 범인, 혹은 관계자로 기획된 배우들을 지칭하는 코드네임이었다.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든지 계획이 흐지부지 폐기되어 운 좋게 살아남은 인간들은 언젠가 쓰일 예비 부속품으로서 본인도 모르는 새에 목록에 남아있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입막음 당해 불분명한 사유를 달고 화장되었다. 사진 옆 붉은 체크 표시가 무겁게 다가왔다.

 

아무로 레이는 자신이 모은 수뇌부들의 치부가 또 다른 연방의 어둠으로 도달하는 열쇠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네오지온 상부 인물이 아니면 알기 어려울 다자 회담 회의록 등이 첨삭된 걸 보면, 코드를 발견해 쿠에르에게 전달한 것은 샤아 아즈나블이 분명했다. 고로 앞으로 피어날 전란의 불씨는 둘의 합작인 셈이다.

 

“사랑이라.”

 

카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패드를 보고 있던 쿠에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14년간 이어져 온 두 남자의 인연에 특별한 감정이 끼어들 구석이 전혀 없었을까요.”

 

카이는 찌푸러진 미간을 감출 생각도 없었다.

 

“… 그자가 아무로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뭐, 아무로와 조금이라도 가깝게 지냈던 사이라면 둘의 인연을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비슷한 관계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결부시키는 건 너무 나간 상상이죠.”

 

카이는 주절주절 되는 대로 떠벌리다가 문득 쿠에르가 보고 있는 패드 화면에 시선이 닿았다.

 

특집!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을 낱낱이 밝히다.

지구연방군 VS 네오지온

우주세기의 최고 라이벌, 그들은 어디에?

함께 잠적?! 목격자 인터뷰 수록!

 

“대체 뭘 보는 겁니까?”

 

카이가 미간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쿠에르는 손가락을 움직여 패드에 뜬 가십지 페이지를 넘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의외로 도움이 됩니다. 이거.”

 

그는 큭큭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자와 대치했을 때 도발할 생각으로 떠본 말이 있었습니다. 론데니온 뒷골목 술집에서 밀회를 즐기던 두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죠. 제가 직접 목격하고 사진까지 찍었으니까 사실임을 보장합니다. 보좌관에게 들켜 다 지우는 바람에 증거는 없지만 말입니다. 하하, 아무튼 그때 전 특종을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연방 영웅과 네오지온 총수의 밀회, 그 둘의 만남은 엄청난 이슈니까요. 물론 당시엔 둘을 두고 섹슈얼한 관계라던지 하는 부분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 그랬는데 어쩌다가 생각을 바꾸게 되셨을까.”

 

카이는 피로감을 숨기지 않고 건성으로 물었다. 쿠에르가 고개를 들었다. 삼류 가십 기사를 읽던 것치곤 얼추 진중한 얼굴이었다.

 

“굳이 술집 이야기를 꺼낸 건 그때 목격했던 총수의 한껏 풀어진 모습의 의미가 제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그는 감정을 잘 감췄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끝까지 숨기진 않더군요. 쓰러진 대위의 상처를 살필 때 그자의 표정을 당신도 봤어야 합니다.”

“하하하. 딱히 눈에 담고 싶은 광경은 아닌데.”

“직접 보셨다면 이해가 쉬웠을 겁니다. 그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제 말을.”

“아하… 결국 그겁니까?”

 

카이가 빈정거렸지만 쿠에르는 개의치 않았다.

 

“사랑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의… 대중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있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고전이 왜 아직 통할까요?”

“흠.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를 관통하기 때문에?”

“맞습니다. 만약 남녀가 서로의 성씨를 알게 된 순간 냉정하게 이별을 선언했다면 아무런 갈등도 비극도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두 가문은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눌 운명이었습니다. 소설의 묘사대로라면 머지않아 두 성씨 중 한 곳은 사라졌을 테죠. 어쩌면 공멸했을 수도 있고요. 청춘남녀의 사랑으로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입니다. 고전 명작은 비극으로 끝났으나 현실은 어떨까요?”

 

쿠에르의 말이 장황해질수록 카이는 점점 더 담배가 그리워졌다. 만남이 파하면 돌아가면서 담배를 사겠다고 다짐했다.

 

“하필 로미오와 줄리엣을 예시로 든 이유가… 아니 됐습니다.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다 떠나서 너무 작위적인 대입 아닙니까? 연방과 네오지온은 캐플렛과 몬태규가 아닙니다.”

“물론입니다. 똑같이 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각 집단이 처한 상황을 비교해 보자는 거죠. 줄리엣은 캐플렛을 버리기엔 용기가 없었고 로미오 역시 몬태규를 떠나기엔 우유부단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은 다릅니다. 이제 그들은 군인도 총수도 아닙니다. 연방과 네오지온의 속박에서 벗어난 둘의 발목을 잡을 자들이 있을까요? 예측 불가능해진 두 사람을 막을 존재가 없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의 억양이 조금 높아졌다. 진심으로 둘이 일을 저지를 미래가 궁금한 듯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이야기가 재미있긴 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식의 비유를 들어 그들을 이해해 보고자 접근한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 감성… 은 존중받을 만합니다. 상당히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졌군요.”

 

카이가 드물게 예를 차려 말했다. 그러자 쿠에르는 딱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짧은 침묵 끝에 말이 이어졌다.

 

“저에겐 딸이 하나 있습니다.”

 

뜬금없는 화제 전환이었다. 카이는 미간을 주무르던 손을 내리고 그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쿠에르는 카이의 의뭉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14년이 지난 지금 와서 왜 죄를 고백하냐고 물었지요.”

“밝히기 거북한 화제가 아니었습니까?”

“어차피 한배를 탔으니 딱히 상관없겠죠. 휴머니즘적 측면이란 말은 완전히 틀린 추측입니다. 아 물론 카이씨는 비꼬는 의미였겠지만요. 어쨌든 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훨씬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카이는 같은 병실 옆 침대에 누워 쿠에르 파커와 대화했을 아무로를 상상해 보았다. 끊임없이 입을 놀리는 그와 함께라면 심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소 과한 면이 있었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속도와 강약을 조절하는 부분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월간 잡지에 거짓을 가미한 미래지향적인 칼럼을 연재했다면 대성했을지도 몰랐다.

 

“샤아 아즈나블은 제 딸을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 살고, 어떤 학교를 다니며, 꿈이 무엇인지까지, 소름 돋는 일이죠. 심지어 저에겐 아무로 레이를 죽이려고 했던 전적이 있습니다. 곱게 보일 리 없겠죠. 원한다면 그 남자는 언제든 딸아이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습니다.”

 

약점이 잡힌 사람의 고백은 비참했다. 카이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샤아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 두더라도 그렇게까지 할 남자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뭐 당신에겐 가능성의 문제일 테니…”

“정확합니다.”

 

세상이 계획대로만 이루어진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이 틀어져서 샤아와 대립하게 되었을 때, 딸의 목숨을 쥐고 협박을 받거나 혹은 죽은 아이의 시신을 가슴에 안아야 한다면 쿠에르 파커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과거’ 또한 그러했다. 계속 숨겨봐야 또다른 약점밖에 되지 않는다. 차라리 당당히 밝히고 털어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쯤 되니 카이는 더이상 눈앞의 남자를 향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낼 수 없었다. 그의 바짝 엎드린 자세를 비판하기엔 이면의 사정과 내뿜는 감정이 너무나 처절했다.

 

“그게 당신의 사랑입니까?”

 

카이가 착잡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 그런 셈이군요.”

 

쿠에르는 낮게 웃으며 긍정했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었지만, 카이에겐 그를 매도할 자격이 없었다. 언젠가 다 자란 딸이 아버지의 앞에 서서 당신을 용서합니다, 혹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어느 쪽이든 좋으니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미래가 오길 빌어줄 뿐이었다.

 

“당신에겐 소중한 사람이 없습니까?”

 

쿠에르의 질문에 카이는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미하루를 시작으로 화이트 베이스 크루들의 얼굴,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 작았던 두 꼬마가 마지막이었다.

 

“몇몇 생각나긴 하네요.”

 

카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게 당신의 사랑입니다.”

 

쿠에르가 경박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카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 남자는 유쾌했으나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그 사람을 완벽하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쿠에르 파커의 사랑은 유치하고 불같은 면이 있었다. 부나방처럼 달려들어 복수를 택한 로맨틱한 남자는 장렬하게 패배했다. 나아가 앞으로의 삶을 복수의 대상에게 저당 잡혀 버렸다. 카이 시덴의 기준에 따르면 그는 엄청나게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사람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 다양성은 삶을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어 살아갈 원동력이 되어준다. 어리석은 쿠에르는 대체 샤아의 어떤 측면을 본 것일까? ‘사랑’ 같은 그 남자와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어를 입에 담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만약 쿠에르의 목적이 카이 시덴의 호기심을 끌어내 이 프로젝트에 깊숙이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라면 가히 성공적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하자 쿠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카이도 일어서서 마주 잡았다. 그는 손을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며 앞으로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미행은 없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멕시코에 자신의 대역을 두고 위장 신분으로 홍콩에 건너 왔다고 한다. 그는 조금이라도 불길한 낌새가 느껴지면 몸을 피해야 한다며 단단히 일렀다. 약속 장소에 오기 전 미행이나 협박 등에 대해 어느 정도 각오했던 터라 카이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사실상 그가 한 다짐은 쿠에르에게 받은 정보에 비하면 굉장히 빈약했다. 평생을 나눠 써야 할 각오를 이번 일을 위해 한 방에 결제해야 할 판국이었다.

 

쿠에르의 뒷모습이 길 너머로 사라지자 카이는 차에 올라 사무실로 향했다. 취재를 핑계로 당분간 문을 닫고 블랙쉽을 추적할 생각을 했다. 그는 담배를 파는 가게 앞에 잠깐 차를 세웠다. ‘건강을 생각하세요.’ ‘우우, 담배 냄새 싫어요!’ 두 꼬마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손가락을 까닥이며 가게 입구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동을 걸었다.

 

카이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피붙이와도 인연이 멀었다. 그런 의미에서 취재 중 발견한 전쟁고아 둘을 데려온 것은 그로선 상당히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경계심 강하던 소년과 소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친밀한 태도를 보였다. 하루 이틀이 지나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쿠에르 파커가 딸을 생각하는 만큼 절절하진 못하더라도 두 아이들 역시 카이의 마음 한구석에 입주할만큼 제법 큰 존재가 되었다.

 

그럼 그게 당신의 사랑입니다.

 

“망할.”

 

사무실 앞에 차를 주차한 카이는 핸들에 이마를 대고 한숨을 흘렸다. 흘끗 눈만 굴려 조수석에 둔 회색 파일을 보았다. 주머니에는 클라우드 주소가 담긴 보관장치가 있다.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서 만들어낸 합작품. 사람은 변한다지만 카이의 기준에 샤아 아즈나블은 평범한 사람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

 

 

 

 

쿠에르와의 짧은 만남을 가진 그날 저녁, 카이는 식료품을 안고 돌아온 믹을 내보냈다.

 

늘 조잘거리던 아이가 떠난 사무실은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카이는 텔레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덜미를 주무르며 냉장고로 향했다. 맥주캔을 꺼내 그자리에서 바로 따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시원한 액체가 넘어가며 목울대가 울렁였다. 탄산도 술도 담배도 일시적인 위안을 준다. 그는 반쯤 남은 맥주캔을 들고 방금까지 앉아 있던 소파를 지나쳐 서류뭉치가 수북이 쌓여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어느새 의자 위까지 침범한 잡다한 종이를 적당히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목을 양옆으로 기울이자 뚜둑뚜둑 좋지 않은 소리가 났다. 그는 잠금이 풀린 패드에 떠오른 명단을 확인했다.

 

믹은 쓸만한 기자가 될 자격이 있다. 칸쿤에서 발견된 기체의 잔해는 뉴건담이 맞았다. 둘은 기체를 파괴하고 즉시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그들이 어디로 향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아무로가 본인이 작성한 리스트를 끝까지 책임질 마음이 있다면 민간 용병기관이나 각종 대중매체 정보처리기관이 대거 위치한 이곳 홍콩도 가능성이 있었다.

 

“군 소속인 브라이트에겐 가진 않겠지.”

 

아무로의 성격상 브라이트 노아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클 것이다. 카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명단을 넘겼다. 점멸하는 패드의 화면에 프로필이 떠올랐다. 빼곡하게 들어찬 증명사진 옆에 붉은 체크 표시가 유독 많았다. 그중에서도 현재까지 살아남은 인원만 추려내니 두 페이지로 확 줄어들었다. 연방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적나라하게 확인하니 새삼스럽게도 부아가 치밀었다.

 

패드를 바라보던 카이는 느릿하게 상체를 돌리고 방금까지 앉아 있던 접대용 소파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물들어 원래 색을 알 수 없게 된 쿠션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남은 맥주를 털어 넣었다. 얇은 재생 알루미늄 캔을 한손으로 우그러트리며 카이는 명단에 있던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세일러 마스. 일 년 전쟁 당시 묘하게 시선이 갔던 그녀는 핏줄부터 행동력까지 감히 카이가 신경 쓸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은 지중해에서 아스트라이아 재단을 운영 중이다. ‘공유해야 할까?’ 만약 세이라가 어떤 식으로든 이번 일을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주소록의 숫자만 누르면 직통이었다.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번호였다. 화이트 베이스의 크루들 이라면 언제든 환영한다고 말했던 만큼 반드시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카이는 고개를 돌렸다. 자초지종을 밝히는 행위는 그녀에게 샤아 아즈나블의 생존 소식을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키지 않았다. 꼭 주제넘게 나서는 것 같았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진실로부터 괴리시키는 행위도 기만이었지만, 적어도 카이가 가질 죄책감의 크기는 크지 않았다. 더 큰 원흉이 있었다. 카이는 의도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잠갔다. 그가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었다. 비겁했지만 굳이 자학하는 취미는 없었다.

 

 

 

 

***

 

 

 

 

“잠들었나.”

 

카이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책상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의식이 끊기는 경험은 의욕이 넘치던 초창기 인턴시절에나 그랬다. 카이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거나하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벽시계를 보니 오전 9시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눈을 감기 전 바짝 친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오늘 걸 얼핏 본 기억이 났다. 침대로 가서 조금 더 눈을 붙일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카이는 몸을 돌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불안은 멈출 줄 몰랐다. 서랍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열어 총을 꺼냈다. 장전은 끝나 있었고 잠금도 미리 풀어두었다. 총을 가슴에 바짝 당겨 쥐고 신발 뒤축이 땅에 닿지 않도록 도둑처럼 살금살금 걸어갔다. 현관은 철문이었지만 잠금은 구식이었다. 작정했다면 타이머 폭탄을 터트려 돌입해 들어올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카이는 문에서 조금 떨어져 섰다. 현관이 열리거나 터지면 바로 발포할 수 있도록 총구를 앞을 향해 겨누었다.

 

“누구냐.”

 

카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문 너머에 누군가 있었다.

 

“내가 가진 무기는 확산형 소형 빔 포다. 철문쯤은 뚫어.”

 

목소리가 음산하게 대기를 갈랐다. 빔 포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문 너머의 존재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위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때였다.

 

“여전하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카이는 순간적으로 “하!” 긴장된 숨을 내뱉었다.

 

“망할 자식…”

 

문을 열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무로 레이였다. 그는 볼을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카이의 입매가 미묘하게 우그러졌다. 살아있다는 말만 듣다가 실제로 확인하니 역시 감회가 남달랐다. 눈물을 흘리며 껴안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카이는 자신의 감성이 메마른 편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는데 사정이 좀 생겨서…”

“변명치고 궁색하단 생각은 안 드냐? 네 녀석 정말…”

“하하. 미안.”

“일단 들어와.”

 

연갈색 선글라스를 낀 아무로는 흰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어딘가의 한가한 관광객이라도 되는 듯한 편안한 차림새였다. 그는 카이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와 사무실을 둘러 보며 발을 움직였다. 좁은 사무실은 두어 발자국 내딛는 것만으로도 접대용 소파(주로 카이의 텔레비전 시청용으로 이용하는)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커피? 침출차에 거부감이 없다면…”

“아. 차는 됐어. 아까 마셨거든.”

“일단 좀 앉아봐. 물어볼 게 잔뜩 있으니까.”

 

아무로는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팔을 두르고 상체를 살짝 돌려 카이를 바라보았다. 몇 개월 전에 우주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실종된 사람이라기엔 상당히 여유롭고 근심 걱정 따위 조금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라 어쩐지 괴리감이 느껴졌다. 카이는 물을 담은 머그잔을 가지고 소파로 가 그에게 내밀었다. 아무로가 컵을 받자 카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 대형 폭탄을 투척하고 혼자만 쏙 빠지려고 하셨다?”

“하하하.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양심에 걸려서 말이야.”

“아까부터 잘도 웃는구먼. 그보다 무슨 사정?”

“사실 도움을 청하려고 왔어.”

 

아무로의 말에 카이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일단 말해봐. 듣고 나서 결정하겠다.”

“동거인이 납치당하는 바람에 구하러 가야 해. 케네디 전쟁 박물관에 전시중이던 몇몇 기체를 테슬라 4번 부두 근처로 옮겼다고 들었어. 모빌 슈트를 한 대 빌릴 수 있을까?”

“… 너.”

 

위치까지 정확히 짚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루오 상회와 연락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스테파니는 쉽지 않은 여자였다. 이득이 되지 않는 거래는 승낙하는 법이 없었다. 일단 그녀와 엮이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카이가 연산를 하는 사이 아무로는 한가하게 말을 이었다.

 

“보관용 창고에 간단한 수리나 개조를 위한 설비도 갖추고 있다고 하던데 요행을 기대해도 될지 모르겠군.”

 

그는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카이는 한숨을 쉬었다. 하얀 사신은 못 본 사이 상당히 뻔뻔해졌다.

 

“별로 묻고 싶진 않지만… 네 그 동거인이라는 거.”

“아. 샤아야.”

“아~ 샤아야?”

 

카이는 아무로의 말꼬리를 잡으며 억양을 과장되게 올렸다. 얼핏 일 년 전쟁 당시의 익살스러운 모습처럼 보일수도 있었지만 그는 나름 진지했다.

 

“저기 말이다. 둘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몇 달 전에 그 녀석 죽이려고 우주로 나갔던 건 기억하고 있어?”

“음, 하하하 그랬지.”

“어이. 좀 진지해지라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남자에게 무슨 협박이라도 받고 있나?”

 

카이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멍청한 말을 입에 담는 자신에게 넌덜머리가 났다.

 

“카이한테 그런 질문을 받다니. 나도 갈 데까지 갔는걸.”

 

아무로는 끝까지 이런 태도를 고수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손 두발 다 들어야 하는 쪽은 슬프게도 카이였다. 원래 아쉬운 사람이 더 내야 하는 법이다. 아무로는 입만 살짝 축이고는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시 들어 올릴 일은 없을 것이다. 카이는 거의 줄지 않은 물을 바라보다가 못이긴 척 입을 열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된 모빌 슈트 몇기를 양도받긴 했지만 거의 고철 덩어리야.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의 의미다. 가동 안 한 지 10년은 거뜬히 넘었으니까. 수리로 어떻게 할 만한 수준이 아닐 거야. 계약만 아니었으면 폐기였어.”

“그래도 폐기하지 않았잖아.”

“루오 상회가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 협조한 것 뿐이야.”

“음. 이년 뒤 엑스포 말인가… 일단 좀 볼 수 있을까?”

 

아무로는 개의치 않은 듯 보였다. 카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 따라와.”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구석에 있던 장식장으로 향했다. 서랍을 열어 프라우에게 받은 뒤로 처박아두고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버튼식 구식 키를 집어 들었다. 고리에 달려 있던 다람쥐 모양 청동 종이 딸랑이는 소리를 냈다. 키카가 만든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전부 가동 불가능한 상태라면 어떻게 할 거지?”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카이가 먼저 나가며 질문했다. 아무로는 그의 뒤를 따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무기를 챙겨서 맨몸으로라도 가야지.”

“하하… 미치겠네.”

 

카이는 이마를 짚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둘은 한동안 만을 향해 달렸다. 차량 내부에 라디오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물간 구식 팝과 중간중간 흘러나오는 중년 BJ의 시시콜콜한 멘트가 조용한 분위기를 중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카이는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라디오 주파수를 돌렸다.

 

[… 오늘 오전 9시경, 침사추이 22번 거리에서 ‘반정부’ 테러가 또다시 벌어졌습니다. 테러단체가 밝힌 성명은 ‘콜로니 강제 이주법’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는데요. 룽원 빌딩이 대파되고 민간인 희생자 21명이 발생하는 등 테러가 점점 과격해 지고 있습니다.]

 

“이거로군.”

“연방 놈들도 애가 닳았나 봐. 우리 둘을 잡자고 도심 한복판에서 당당히 테러를 일으킬 줄은 몰랐어.”

“홍콩은 여러 반정부 단체들 주도로 크고 작은 테러가 계속 일어나니까. 그들 틈에 묻어가려 했군.”

“… 등교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제는 오기가 생겨서라도 조용히 잠적하진 못하겠어.”

 

목소리에서 은은한 노기가 느껴졌다. 카이는 핸들을 꺾어 국도로 진입하며 물었다.

 

“브라이트한텐 말 안할거냐?”

“아무래도 힘들지. 그는 연방에 반기를 들 입장이 아니야.”

 

아무로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흘끗 그의 손목에 시선이 닿았다. 왜 이런 날씨에 긴 셔츠를 입고 있나 했더니 보기만 해도 움찔할 정도로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아직 군데군데 검붉은 딱지가 보이는 게 다 낫지 않은 듯 했다. 추락했을 당시 다친 상처라기엔 국소부위의 벌건 자국이 일정 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어 조건에 맞지 않았다. 카이는 쿠에르 파커가 자백한 ‘아무로 레이를 죽일 뻔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했다.

 

“보기보다 아프진 않아.”

 

아무로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카이는 그가 뉴타입이란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샤아 녀석, 거의 전문 의료인 수준이더라고. 중간중간 무리하는 바람에 상처가 번졌는데도 생각보다 빨리 아물었어.”

“… 그건 확실히 의외네. 모빌 슈트를 타고 사람을 죽이거나 특유의 재수 없는 말투로 남을 깔아뭉개는 짓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하하하! 맞아. 그 인간, 타인을 깔보는 데 있어선 대단한 전문가라니까.”

 

샤아의 험담에 앞장서 맞장구치며 아무로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보였다. 카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로는 변했다. 항쟁 이전의 아무로 레이와 지금의 아무로 레이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나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좀 더 솔직해졌고 좀 더 잘 웃게 되었다. 분위기도 유연하고 서글서글한게 전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필이면 그 남자로 인해서 이런 변화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젠 안 그럴 거다.”

 

아무로가 조수석 창문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 자신 있게 말했다. 단언하는 목소리였다. 카이는 문득 아무로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쿠에르 파커의 말대로 정말 ‘사랑’인 것일까? 갈등이 해소되는 마법의 단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화학적 폭발. 달콤한 감정에 휩싸여 자신을 잃은 샤아 아즈나블이 아무로를,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는 것일까?

 

“미리 말해두지만 그 녀석 못 믿어.”

 

카이는 일부러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뉴타입이 아니었지만 제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아무로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어릴 때부터 운이 나빴지만 감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어. 이게 아니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테지. 그런 내 감이 말하고 있다. 샤아는 쉽게 변할 인간이 아니야.”

 

아무로는 바라보기만 할 뿐 이렇다할 대답이 없었다. 카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오로지 너와 함께 하는 것이 녀석의 목적이다? 말은 뻔지르르하군. 그렇다면 어째서 오명 가득한 가명을 버리지 못하지? ‘샤아 아즈나블’이 아닌 ‘캐스발 렘 다이쿤’으로서 서야 하지 않나? 그자는 일 년 전쟁이 끝나고 샤아 아즈나블로서 액시즈에 틀어박혔어. 데라즈 분쟁이 끝난 뒤에는 기다렸다는 듯 크와트로 바지나라는 가짜 신분으로 나타났고. 모두가 놈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보란 듯이 배신당했지. 인생이 가짜인 인간이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비관적인 인간에겐 그 나름의 생존방식이 있다. 카이는 타인을 쉽게 믿지 않는 것으로 위험을 피해갔다. 그러다 보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패턴이 눈에 보였다. 샤아 아즈나블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카이의 패턴이 주는 답이었다. 사랑? 설령 그가 아무로를 사랑하는 게 맞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반드시 배신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때 아무로 레이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 카이는 모른다. 그 누구도 모른다. 그랬기에 안타깝고 답답한 것이다.

 

“이름 따위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사실 그런 개인적인 부분까지 이해해 달라고 말하긴 힘들지.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아무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설득이 먹힐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실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싱거운 반응인데.”

“뭐, 카이는 샤아를 싫어하니까. 굳이 억지로 설득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돕고 있잖아. 명단 속 생존자들을 추적한다고 했다며.”

“하! 신뢰 없는 동맹은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야.”

 

차량이 20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대교로 접어들었다. 멀리 마카오 페리터미널이 보였다. 아무로가 어딘가 헐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뢰가 왜 없어.”

 

출근 시간이 지난 대교는 막힘이 없어 차량은 쌩쌩 나아갔다.

 

“나를 못 믿나?”

 

아무로의 질문은 반칙이었다. 이렇게 나오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논리가 어떻고 자가당착의 오류니 뭐니 따지고 들어봐야 바보가 될 뿐이다. 막다른 길에 몰린 카이는 길게 한숨을 쉬고 결국 정해진 대답을 꺼냈다.

 

“너는 믿어. 하지만…”

“그거면 됐다. 내가 네 몫까지 그 녀석을 믿지 뭐.”

“하하하! 이젠 나도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대교를 벗어난 차량은 십여 분을 더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창고의 문이 열리자 벽을 따라 주르륵 늘어서 있는 여기저기 녹이 슨 구식 모빌 슈트들이 둘을 반겨주었다. 고철 덩어리들의 향연이었다. 카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로를 바라보았다.

 

“만족하나?”

“그럭저럭… 생각보단 괜찮은데.”

 

높이가 있는 창고 안쪽까지 샅샅이 시선을 꽂던 아무로가 천장의 기계를 가리켰다.

 

“저 메인 크레인은 작동해?”

“아마도.”

 

냉방 시스템을 켜지 않은 창고는 후끈한 열기와 불꽃이 튀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무로는 벗은 셔츠를 허리에 둘러 묶고 런닝 차림으로 열기를 견디며 작업을 이어갔다. 그탓에 손목의 흉터와 어깨와 팔에 자잘한 상처가 드러났다. 전보다 마른 몸은 여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카이는 아무로의 목에 돋아난 울긋 불긋한 자국이 어쩌다 생겼는지 상상하지 않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써야 했다.

 

아무로가 굵은 전선에 연결된 조정 스위치를 한손으로 조작하자 크레인이 끼긱거리는 불안한 소리를 내며 예비 버니어를 들어 날랐다. 용접을 마친 철덩어리들은 하나 둘씩 바닥에 놓여 녹슨 건담의 새로운 부품으로 재탄생했다. 여유롭지만 막힘없이 이어지는 작업은 언제 보아도 경이로웠다.

 

카이는 구석의 떼어낸 양산형 자쿠 머리 위에 앉아 아무로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가 도울 일은 별로 없었다. 운이 좋게 한 대의 모빌 슈트가 정상 가동했고 몇몇 자잘한 문제는 상정 내였다. 카이는 다음 달 받게 될 전기세 고지서를 루오 상회로 청구할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아무로는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RX-79 육전형 건담의 등에 보조 버니어를 달고 에너지 차징까지 끝내고는 출격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

 

“그런데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냐?”

 

카이가 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아무로는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동전 크기의 작고 동그란 검은 장치를 살짝 누르자 공중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삑-삑- 일정 간격으로 점멸하는 붉은 점이 어느 지점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무로가 몇 번 버튼을 조작하자 붉은 점은 항공국에서 사용하는 ACC나 해상관제탑에서 사용하는 VTS처럼 도식화된 지도 위에 이동 행적을 그렸다.

 

“추적 장치를 붙여 뒀어.”

“언제는 믿는다더니.”

“서로에게 달았다. 딱히 그를 감시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음, 제대로 설명하자니 이게 좀 복잡한데… 대충 샤아가 나에 대해서 불안증세가 있거든. 조금만 멀리 떨어져도 달가워하지 않는…”

“아, 뭔가 불길하군. 굳이 말 안 해도 돼.”

“역시 카이는 눈치가 빨라서 좋아. 놈들에게 붙잡힌 순간 가지고 있던 조작 장치는 알아서 부수거나 처리했을 거다. 그런 면에선 빈틈없는 남자니까. 역추적 당할 걱정은 없다고 봐. 그보다 지금쯤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을 거야. 빨리 가야겠어.”

 

아무로가 웅얼거리며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그는 붉은 점의 위치가 좌표로 변환되는 짧은 시간도 못 참고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느긋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못한 이중적인 태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로의 행동을 주시하던 카이는 팔짱을 끼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그 자식한테 단단히 빠졌나 보군.”

 

그의 말에 아무로는 뜨악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허… 뭐? 그렇게 보인다고?”

 

아무로는 정말이냐는 듯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찡그러진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물었다.

 

‘지금의 반응도 포함해서 말이지.’

 

일 년 전쟁의 영웅이자 전 동료의 조금 특별한 모습을 목격하자 카이는 점점 더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그 감정’은 쌍방인 모양이었다.

 

“어. 대단히. 엄청나게. 굉장히.”

“카이 시덴 특유의 시니컬한 오버인 것 같은데. 나를 놀려먹는 건 14년 전에 졸업하지 않았나?”

“냉정하게 진실을 보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만.”

 

카이는 손을 훠이훠이 흔들다가 고갯짓을 해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창고 왼쪽 모서리에 놓여 있던 작은 컨테이너였다. 공구나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창고로 이용되고 있었다.

 

“노멀 슈트도 몇 벌 있을 텐데 입고 가지?”

“아까 그라인더를 찾으러 들어갔을 때 있길래 입어 봤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 하나는 너무 크고 다른 하나는 사이즈도 안 맞거니와 방호 기능이 거의 없었어. 허리랑 등 부분이 찢어졌더라고.”

“… 아하, 뭔지 알겠네. 전시용으로 넘겨진 거라 수선하지 않아서 파일럿들이 입던 그대로다. 특히 그 찢어진 녀석은 제법 희귀했어. 알다시피 파일럿들은 슈트를 챙겨 입든 안 입든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기체에 탄 채 폭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슈트의 주인은 부상은 입었지만 살아남아 귀환했거든.”

“오. 그건 대단한걸. 그 파일럿 지금쯤 은퇴했겠네.”

 

아무로가 홀로그램을 보며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빨간 점이 점멸을 멈췄고, 모든 좌표가 변환되었음을 알리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GPS 변환 장치는 샤아의 현재 위치를 오차 확률 플러스 마이너스 0.2km 이내로 줄여주었다. 만족할 결과를 얻은 아무로는 장치를 눌러 홀로그램을 껐다. 그때 카이가 입을 열었다.

 

“아니. 죽었어.”

“…음.”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으리라 생각했던 슈트 주인의 뜻밖의 결말에 아무로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어쩌다가?”

“다른 젊은 놈들을 지원해 주겠답시고 나섰지.”

 

카이는 컨테이너 창고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너도 아는 녀석이야.”

“……”

 

아무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둘 사이에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카이는 차에서 꺼내 왔던 생수병을 건넸다. 아무로가 그것을 받으며 혀끝에서 맴돌던 이름을 입 밖에 냈다.

 

“하야토.”

 

아무로는 뚜껑을 딴 병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냉방이 안되는 밀폐된 장소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더니 탈수 증세가 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습게도 그는 병 주둥이가 입에 닿기 직전까지 목이 마른 줄도 몰랐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니 몸이 조금 편안해졌다.

 

“몸 조심해.”

 

카이 시덴은 거의 늘 삐딱선을 타고 세상을 바라보는 허무주의자였다. 그래도 지금 순간만큼은 켜켜이 쌓인 비관적인 껍데기를 깨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또 죽지 마라. 아무로.”

 

아무로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그를 바라보았다. 미약하여 얼핏 느끼지 못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로는 그의 걱정과 염려를 바로 알아챘다. 꼭 뉴타입적인 감이 아니더라도 감정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그럴 일 없으니 걱정마. 내가 죽으면 그 남자 미쳐버리니까.”

“와우.”

“미친놈을 무책임하게 세상에 풀어 놓을 수는 없지.”

 

아무로가 덤덤하게 말했다. 진실이었고, 그랬기에 좋은 대답이었다. 여태까지 이성과 감성 사이를 오가며 냉정하게 이해타산을 따지던 카이 시덴도 믿고 싶은, 아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확신에 찬 당당한 태도였다. 아무로는 다 마신 생수병을 꽉 쥐었다. 재생 플라스틱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졌다.

 

“제길… 정말 사랑이 넘치네.”

 

카이는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물류 창고의 전면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그림자 너머에서 5년이 넘도록 모습을 드러낸 적 없고 10년이 넘도록 가동된 이력이 없던 전시용 모빌 슈트가 플라잉 아머에 올라 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기체에는 일 년 전쟁 당시 지구에서 싸웠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군데군데 녹이 잔뜩 슬어 움직이긴 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건담이었다. 모빌 슈트를 태운 플라잉 아머는 굉음을 흩뿌리며 홍콩 외곽 부둣가를 벗어났다.

 

 

 

 

***

 

 

 

“… 라는 이야기다.”

“케네디 전쟁 박물관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은 들었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나.”

“따지고 보면 당신도 얽혀 있어서 불편한 화제거든. 그만 말하면 안 될까?”

“자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얼마든지.”

 

샤아는 고급 소파에 앉은 채로 우아하게 허리를 굽혔다. 눈에 띄니까 저런 짓은 그만두라고 말했는데도 도무지 들어 먹지를 않았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아무로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멀찍이 떨어진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그들은 기계처럼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아무로가 푹신한 소파에 몸을 축 늘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 부자, 아무래도 화해하긴 그른 것 같지?”

“글쎄다. 아직 완전히 틀어진 사이는 아닌 듯하니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더 돈독해질 수도 있겠지.”

 

이곳은 홍콩 한복판에 있는 루오 그룹 빌딩에서도 최상층 스카이라운지였다. 한쪽 벽이 강화유리로 이루어져 도심지 풍경이 멀리까지 보였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아 빌딩 숲에 불빛이 하나둘 떠올라 점차 화려한 야경을 뽐내기 시작했다.

 

“부자관계는 어려워. 제대로 된 관계 형성 과정을 거치지 못해서 그런가.”

“이쪽도 마찬가지다.”

 

샤아가 느긋하게 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이곳은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장소로 오너인 스테파니 루오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나 중요한 위치의 인물들만 출입 코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둘은 라운지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오너를 기다렸다. 아무로는 양팔을 소파 등받이에 두르듯 걸친 불량스러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상아색 최고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의 거리가 굉장히 멀었다. 통상 건물의 3층 정도를 하나로 합친 여유로운 공간 활용 인테리어는 루오 상회가 가진 부의 크기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나저나 카이 시덴이 이번 일에 끼어들 줄은, 자네를 도울 거란 생각은 했지만 리스트는 솔직히 좀 놀랍군.”

“이제 와서 뭐라는 거야. 병원에서 날 데리고 온 그날 쿠에르 파커한테 카이 메일 주소를 넘겼던 사람이.”

“그건 운이 없어 탈출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이름을 바꾸고 과거를 숨긴 채 도피했던 남자라면 딸을 데리고 그대로 잠적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하지만 우리가 연방에 붙잡혔다면 자네의 존재가 그자의 죄책감을 자극할 거란 생각은 했다.”

“이름을 바꾸고 과거를 숨겼다는 부분… 스스로 말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아?”

“하하하.”

 

아무로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샤아는 그 시선을 익숙하게 받아넘기고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사기잔이 달각이는 소리가 넓고 높은 공간을 타고 제법 멀리까지 퍼졌다. 기다리기 시작한 지 30분 남짓, 예정에 없던 방문이긴 했다. 고용인에게 차나 다과를 더 들겠냐는 말을 들은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아무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목소리를 낮췄다.

 

“당신은 웬만하면 카이와 대면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정말 싫어하니까.”

 

샤아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댔다. 실제로 카이는 몇 시간 전, 이곳에 들러 연락 수단을 적은 메시지를 데스크에 전달한 뒤 돌아갔다. 당분간 사무실 문을 닫고 취재를 가장할 생각이라고 했다. 라운지에서 기다릴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분명 샤아가 원인이었다. 그에게 샤아 아즈나블은 거북한 남자였다.

 

“그렇겠지. 전부터 꾸준히 나를 비난하는 칼럼을 실어 왔으니. 총수로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시기에도 끈질기게 말이다.”

“호오… 그것 참 거슬렸겠어. 당시엔 거칠 것도 없으셨을 텐데 어떻게 잘도 살려 뒀네?”

“… 자네는 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던 건가?”

“인류에 실망한 나머지 자신에게도 실망하고 방법을 찾지 못해 자포자기한 남자 정도일까.”

“험담이 상당히 구체적인데.”

“험담이 아니라 사실이거든. 그렇게 행동한 주제에 이제 와서 발뺌하지 마라.”

 

루오 그룹은 서비스가 좋았다. 에어컨이 제 기능을 못 하는 고철 건담 콕핏에 탄 두 남자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상회 소유 격납고에 발을 내딛자 고용인들은 5분도 채 안 되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주었다. 데렉과 헤르만은 신분증이 확실하지 않아 따로 이동되어 대기 중이다. 아무로가 설명해 두었으니 심한 대우는 받지 않을 것이다.

 

“좀 늦네.”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상대를 기다리게 만드는 수법도 있지”

“흐음, 당신들을 상대로 손자병법을 운용할 정도로 머리를 굴리고 싶진 않다만.”

“스테파니.”

 

소리 없이 열린 문 너머에서 한 여자가 둘의 대화를 이어받으며 걸어왔다. 조용한 라운지에 토퍼 뒷축이 대리석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일정 간격으로 울려 퍼졌다. 회색 정장을 차려입고 풍성한 커트 금발을 잘 손질한 그녀는 샤아와 아무로가 앉은 소파 옆 일 인석에 앉아 한 손을 어깨 너머로 팔랑였다. 그 신호에 멀찍이 떨어져 대기 중이던 고용인이 왜건를 끌고 왔다.

 

“연방과 네오지온 정치인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서 말이야.”

“이번 건도 피곤한 거래이긴 마찬가지일 텐데.”

 

아무로가 그녀의 말을 지적했다.

 

“딱히 그렇진 않아. 당신들은 내가 아니었으면 홍콩은커녕 칸쿤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을걸.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부터 우위를 뺏긴다는 건 속상한 일이지.”

“우리는 수평적 관계 아니었나?”

“표면상은 그렇지만 솔직해졌으면 좋겠군. 당신이 아무리 유명한 영웅이라도 특급 테러리스트를 데리고 잠적 중인 사람과의 거래라니… 이쪽이 손해라도 한참 손해야. 카라바때의 안면만 아니었어도 이번 일, 진작에 거절했어.”

 

스테파니가 샤아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샤아는 그녀에게 빙긋 웃어 주고 왜건을 밀고 온 고용인이 내미는 잔을 받았다.

 

“심지어 영웅 타이틀도 허울뿐이지. 윗선에선 댁을 붙잡아서 해부용 물고기 취급할 생각 만만이니 말이야.”

“스테파니… 성격 좀 변하지 않았어?”

“상회를 전문 경영인에게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나 이사회 활동이나 하란 소리를 5년간 들으면 당신도 이렇게 돼.”

 

스테파니는 레몬을 띄운 홍차를 한모금 삼키고 소파에 기댔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로와 샤아를 차례차례 바라보았다.

 

“설마 실물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어드레스를 통해도 될 걸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나 들어볼까? 격납고는 몰라도 라운지까지 허가할 생각은 없었는데. 혹시라도 시답잖은 소리를 하면 이 계약 다시 생각해볼까 해. 저 사람들도 가끔 일을 해줘야 하니까 나쁘진 않군.”

 

스테파니가 고갯짓으로 문 옆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한 분위기가 그녀가 겪어 온 세월을 느끼게 했다. 이사진의 높은 지분율로 인해 골머리 썩으면서도 그리프스 전역 이후 미묘한 위치에 있던 루오 상회를 여기까지 끌어온 걸 보면 대단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만나게 되서 영광입니다. 미스 루오. 계약엔 문제가 없다만 한 가지 항목을 추가할까 합니다.”

“흠?”

 

입을 연 것은 아무로가 아닌 샤아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다리를 꼬고 깍지 껴 잡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는 평온하게 말했다.

 

“앞으로 몇몇 인물들을 상회로 보낼 테니 그들을 보호해 주십시오.”

“… 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아무로 레이.”

“하하. 말 그대로다. 특약 조로 추가해 줬으면 해.”

 

아무로가 멋쩍게 웃으며 코를 긁적였다. 스테파니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샤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편해하는 아무로와 달리 그는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샤아 아즈나블은 무시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리스트의 ‘코드’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인가요?”

“맞습니다.”

“그들을 나더러 뭐 어쩌라는 거지요?”

“그건 앞으로 찬찬히 설명하겠습니다. 듣기로 루오 상회 소유 콜로니에 몇몇 비밀스러운 구역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당분간 보호해 주시면 됩니다.”

“지금 이게 제대로 된 계약인가?!”

 

스테파니는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샤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애너하임을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좋은 계약입니다. 한낱 암거래 상으로 시작해서 거기까지 올라간다면 경영인으로서 최고의 업적 아닙니까?”

“샤아!”

 

도발을 더 강한 도발로 받아치는 샤아를 보며 깜짝 놀란 아무로가 그를 저지했다. 스테파니는 당장 눈앞의 남자를 끌고 가라며 경호원에게 소리치는 대신 홍차를 마시며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대범한 성격이긴 했으나 아무로와 계약하고 ‘리스트’를 공유받았을 때 손을 떨었을 정도로 제법 놀랐다. 늦어도 10년이었다. 10년 뒤, 잘만 한다면 연방은 뒤엎어질 것이고 뒤따르듯 정부는 신뢰를 잃을 것이다. 말랑하게 뚫리기 쉬운 상태가 된 정부와 의회를 굶주린 이리떼들이 멀쩡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반정부주의자와 네오지온의 망령들은 신이 나서 물어뜯을 것이다. 루오에겐 약속과 기회의 시기였다.

 

“좋은 계약이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지요. 이대로 당신들을 연방에 넘기고 내 몸 보신을 꿰하는 게 나을지, 앞으로 정도를 모르고 추가될 요구를 받아들이며 입 하나 벙끗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함께 매장당하는 게 나을지, 고민이 커요.”

“미스 루오. 당신은 큰 배포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기업인으로서 실패를 가정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계약을 받아들인 이상 성공 쪽으로 마음을 쏟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연방의 압박은 더 심해질 텐데, 혹 오늘처럼 잡혔다가 입을 잘못 놀려 우리의 연결이 세간에 탄로 날까 두렵군요.”

“협박이랍시고 하는 소리인가요?”

“곡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서로 솔직해지자는 의미입니다. 따지자면 우리는 계약으로 묶인 수평적 관계가 아닙니까? 단언컨대 추가요구는 이게 마지막일 겁니다. 저와 아무로는 서로의 안위를 챙기기에도 바빠서 ‘코드’ 인물들까지는 바운더리에 넣기 힘듭니다.”

 

아무로가 이마를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스테파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해지자’ ‘수평적 관계’ 언급에서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 샤아 아즈나블, 설마 아까 아무로 대위에게 했던 내 말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공격하고 있는 건가요?”

“하하하. 그럴리가 있습니까. 그저 되짚어 보자는 겁니다. 이번 계약은 특히나 대등한 관계에서 진행되어야 하죠.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리스트의 작성자는 아무로고 그와 저는 물 밑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겁니다. 미스 루오는 공개적으로 ‘스피커’를 지지해주어야 하는 중요한 역할입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아랫사람이 된다면 의도치 않은 분란이 발생했을 시 온전히 루오 그룹이 책임져야 할 텐데… 감당하기엔 좀 버겁지 않습니까? 책임 분담이란 중요하니까요.”

 

샤아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무로는 이제 포기했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야금야금 집어 먹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잔을 내려놓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매주 열리는 이사회에서 임원진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껄였던 수행과도 같은 앵무새 소리를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주주총회만 열리면 입에 지퍼라도 채운 것처럼 조용해지는 그들과 샤아 아즈나블은 공통점이 없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건반을 치듯 팔뚝을 두드렸다.

 

“크와트로 대위라고 불리던 시절과는 딴판이네요. 생각보다 공격적이고… 솔직한 사람이군요. 좋은 말이지요. 대등한 관계. 하지만 당신들이 나의 하수인이 된다고 해서 그게 뭐가 나쁠까요? 혹 일이 잘 못 되어도 나 혼자 뒤집어쓸 일은 없어요. 당신, 생각보다 자기 이름값을 과소평가하고 있군요. 설마 나를 꼬리도 못 자를 정도로 무능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닙니다. 당신의 역량은 치솟는 주가가 검증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일이 잘못되면 심각한 소송 분란에 휩싸이게 될 겁니다. 저와 아무로는 감옥과 연구소 행이겠지만 사회에 남아 이 모든 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기업을 이끄는 미스 루오, 당신입니다. 혈혈단신인 우리와 다르게 말입니다.”

“후후. 오랜만에 나를 상대하며 물러나지 않는 사람을 보는군. 요즘은 이사회가 열려도 늙은이들이 영 힘이 없어 괴롭히기 미안했는데 당신이라면 부족함이 없겠어.”

“하하하.”

 

둘 다 신경줄을 팽팽하게 당기고 한치도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그때 손 하나가 둘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스테파니. 미안하다. 이 녀석 말버릇이 나빠서…”

 

아무로는 한심한 눈초리로 샤아를 쳐다보았다.

 

“그만 좀 해라.”

“자네가 그러길 바란…”

“그것도 그만.”

 

아무로는 테이블 너머로 몸을 드밀어 샤아의 이마를 주먹으로 가볍게 때렸다. 잠깐 멍하니 있던 샤아는 픽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반대로 스테파니는 눈을 크게 떴다.

 

“미안했습니다. 미스 루오.”

 

샤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스테파니는 잠시 샤아의 의도를 가늠하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여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 정도 언사로 얼굴을 붉혀가며 계약을 파기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물론 당하기만 하고 얌전히 물러날 성격도 아니었다.

 

“…… 뭐 더 해도 상관없지만. 그리고 딱히 두 사람을 하수로 본 적 없어. 미행이 붙었을지도 모를 덤을 둘이나 달고 상회 소유 격납고까지 온 데다가 한술 더 떠 당장 날 만나겠다고 연락까지 넣은 당신들의 그 안하무인함에 질렸을 뿐이지. 덕분에 이쪽은 계획된 일정까지 접고 하노이에서 일시에 귀국했는데 한가롭게 앉아 관계의 우위니 뭐니 기분 나쁜 소리나 해대네?”

“아… 그거… 참… 미안하군.”

 

아무로는 쏘아대는 그녀를 두려운 눈으로 보며 드문드문 사과했다.

 

“어쨌든 좋아. 그 건은 받아들이지. 하지만 샤아 아즈나블. 한가지 대답해 줘야겠어. 콜로니에 기밀 구역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어느새 말이 짧아진 그녀의 질문에 샤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총수 시절 알게 된 정보입니다.”

“아.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으시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멜라니 휴 캐바인을 통해 들으시는 것도.”

“… 또 그 양반인가. 애너하임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공유는커녕 협력사 기밀을 마음대로 누출하고 다니다니.”

“그러고 보니 스테파니. 애너하임이 최근 연방에서 큰 계약을 수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알고 있나?”

 

아무로가 불쑥 끼어들었다. 스테파니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새로운 사이드 건설이야.”

“사이드 제로를 말하는 건가. 그건 조감도만 나온 채로 몇 년간 방치되었던 거로 아는데 슬슬 발동을 걸려나 보군.”

“당신도 몇 달 전까지 군인이었으니 알 수도 있겠네. 향후 5년간 사이드 개발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위임받는다는 계약을 맺었어. 정 궁금하면 카이 시덴한테 물어봐. 애너하임 쪽 비리도 파헤친 걸로 안다.”

“… 음, 그랬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전 군인’을 보며 샤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자네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모를 만도 하다. 그리고 미스 루오. 기밀 구역에 대해선 뭐가 있는지 무얼 위한 공간인지 전혀 알지 못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교활한데.”

 

잠깐 멈칫했던 스테파니는 헛 짧게 끊어 웃었다. 샤아가 굳이 ‘기밀 구역’에 코드의 생존자들을 넣어 보호하자고 제안한 것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함정에 걸려들 뻔한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과연 뱀 같은 남자였다.

 

“당신 같은 남자는 질색이다.”

“안타깝군요. 사실 루오 상회의 비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는데 계속 하자니 서로의 신뢰에도 마이너스적인 영향만 끼칠 것 같고 쉽게 걸려들 분도 아니라… 역시 미스 루오는 어렵군요.”

“미안하다. 스테파니.”

 

샤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이어 사과하는 아무로를 보며 스테파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곧 아무로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 표정… 고단수가 아닐까?”

 

따지고 보면 시작은 아무로였다. 그를 타박했더니 샤아가 나섰다. 대화 도중 끼어든 아무로로 인해 그녀의 경계심이 조금씩 풀어졌다. 이 사람 좋아 보이는 남자는 생각보다 더 영악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대단할 정도였다.

 

“뭐?”

 

아무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스테파니는 탄식하며 증폭된 생각을 지웠다.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이들과는 한배를 탄 몸이었다.

 

“… 아니야. 그보다 오늘 묵을 곳은 있나?”

“음. 그것도 부탁하려고 했지. 새 아이디가 나오기 전까진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야.”

 

이들이 추적당한 경로는 칸쿤의 공항이었다. 폭발한 뉴건담의 잔해를 발견한 연방이 둘이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멕시코 주변 공항에서 새로운 인식 프로그램을 사용한 것이다.

 

“옆 블럭 세이렌 호텔로 가서 내 이름을 대.”

“고맙다.”

 

아무로가 감사를 표했다. 아무로는 스테파니에게 많이 변했다고 했지만 사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스테파니는 싱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스위트룸으로 줄게. 베드는 하나로 괜찮겠지?”

“………”

 

그녀의 차분한 공격에 아무로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가는 파트너를 대신해 샤아가 화려하게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미스 루오.”

“그 호칭은 접으시죠. 늙은이들한테 욕 먹던 기억이 나서 기분이 좋지 않으니. 이름으로 불러요.”

“그러죠. 스테파니.”

 

스테파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멀리 있던 수행원이 빠른 걸음으로 와서 그녀에게 겉옷을 내밀었다. 샤아도 아무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잘해봐요. 죽거나 납치되면 수습 귀찮으니까 오늘 같은 일은 없었으면 하고.”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싱긋 웃었다. 그리곤 남은 스케줄을 소화하러 응접실을 등졌다. 아무로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샤아가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정신을 현실세계로 되돌렸다.

 

“상처를 봐야 하니 호텔로 가도록 하자.”

“괜찮아. 이제 다 나았어.”

 

그러자 샤아가 대답 대신 아무로의 왼팔을 잡아 올렸다. 왼쪽 손목의 커다란 딱지가 떨어져 피가 배어나와 소맷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몰랐다. 전혀 느끼지 못… 아니. 일단 가자.”

 

샤아는 급격하게 노선을 변경하는 아무로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의 볼에 키스했다. 몸이 펄떡 뛰었지만 전처럼 격렬하게 밀어내지는 않았다. 경호원들이 보고 있으니 그만 좀, 우물거리는 말을 느긋하게 무시하며 샤아는 아무로의 귓가에 속삭였다.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웠다.”

“… 아까 했던 소리잖아.”

“그건 사랑한다는 말이었지.”

“으윽. 역시 면역이 안 돼서 힘드네.”

 

라운지의 문을 열면 바로 앞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아무로는 자꾸 달라붙는 샤아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꾹꾹 밀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샤아는 기꺼이 밀려나 주었다.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어차피 곧 살을 맞댈 것이다.

 

“확신이 느껴지는 오늘이란 좋군.”

“흠… 확신이라. 당신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 아냐?”

 

아무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버튼을 누르며 대꾸했다. 샤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샤아는 끝없이 의심한다. 오늘 느꼈던 감정을 내일 또 느끼기 위해 계속해서 닥달할 것임을 안다. 샤아는 미래의 믿지 않는다. 그는 현재를 신봉한다. 지금 당장 아무로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고 해도 결국 순간의 감정일 뿐이다. 그는 머지 않은 미래에 상황이 극단적으로 바뀔지 모른다고 끝없이 의심한다. 그렇지 않다, 제발 믿어달라, 사랑하는 사람이 간곡하게 부탁하더라도 겉으로는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지언정 결코 신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샤아 아즈나블이란 인간이 가지는 불확실성이었다. 다행히도 아무로는 그 점을 잘 알았다. 만약 몰랐다면 둘은 영원히 그 절벽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샤아가 먼저 들어갔다. 그러나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도 아무로가 타지 않았다. 샤아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무로?”

 

그 소리에 엘리베이터 앞에 멍하니 서있던 아무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런… 살짝… 긴장이 풀려서.”

 

그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것이 정말 피곤한 모양이었다. 샤아는 버튼을 누르고 아무로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많이 노곤했던 것인지 별다른 저항의 기색이 없었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지.”

 

아무로가 샤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중얼거렸다. 피곤함에 절인 목소리가 시들시들하게 늘어졌다. 샤아는 구불구불한 머리를 부드럽게 쓸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고생이 많았겠군. 그 짧은 시간에 모빌 슈트를 손봐야 했으니.”

“사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크레인이랑 권상장치도 멀쩡했으니… 후아암. 뭐… 칸쿤에서 지낼땐 음식도 당신이 떠 먹여줬고 힘을 쓴… 일이라곤 땅에 꽃이나 심었던 게 다니까.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당신이 판 땅에 모종을… 갖다 넣기만 했었네… 오랜만에 제대로 움직이긴 했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무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샤아의 어깨에서 머리를 뗐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쓰러지지 않고 걸어갔다. 뒤를 따르던 샤아는 몇 번이나 헛발질할 뻔한 모습을 못마땅한 듯 지켜 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왼편에 서서 어깨를 돌려 안았다. 아무로는 몇 번의 힘없는 저항을 끝으로 샤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로비는 데스크에 앉아 있는 고용인 몇 명과 무기를 체크하는 경비들을 빼곤 아무도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둘을 향해 눈길도 주지 않았다. 투명 인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거리는 간판과 조명의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했고 도심 한복판답게 사람들로 들썩였다. 빌딩에서 나온 두 남자는 행인들 틈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샤아는 아무로의 가슴 주머니에 꽂혀 있던 선글라스를 꺼내 꾸벅꾸벅 조는 얼굴에 씌우곤 자신도 넣어두었던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아무로는 많이 피곤했는지 눈을 거의 감고 있었다. 얼굴 위로 뭔가 닿는 감촉이 있었을 텐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샤아는 그의 턱을 부드럽게 붙잡아 좀 더 편한 자세로 어깨에 기댈 수 있게 위치를 정돈했다.

 

거리는 자동차 경적소리,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 여기저기서 터지는 사람들의 수다 소리로 가득했다. 그런 도심의 인파들 사이로 피곤한 두 남자가 신기루처럼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