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호텔 라운지로 내려온 윌은 반갑게 인사하는 남자를 보고 인상을 썼어. 검은 셔츠에 검은 정장, 검은 구두, 장례식이라도 가는지 온통 검은색으로 빼입은 나이젤이 창가 옆 소파에 앉아 손짓하고 있었지. 묵는 곳을 알아낸 방법은 궁금하지도 않아. 윌은 잠깐 무시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터덜터덜 걸어가 웃고 있는 남자 맞은편 소파에 앉았어. 담배 연기가 지독해.
[저혈압인가 봐. 표정이 안 좋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갈색 머리가 곱슬져서 엉망으로 뻗쳐 있어. 커피를 마시고 체크아웃하려고 아직 짐도 제대로 안 챙겨뒀어. 스트레스 수치가 올라가는 것 같아. 불만스럽게 나이젤을 보던 윌은 단추 풀린 그의 정장 상의 속에서 익숙한 리볼버 케이스를 발견했지. 밑으론 검은 가죽으로 동여맨 손잡이. 뻔했어. 권총과 칼이야. 이건 그냥 대놓고 협박하겠다는 거지. 윌은 어이가 없었어. 잠깐 마주친 타인이 거슬린다고 이런 식의 거친 행동을 하는 건 고상하지 못해. 야만적이지.
[혹시 너 망할 경찰은 아니겠지.]
윌은 픽 웃었어.
[옛날에 비슷한 일을 했죠.]
[지금은?]
[당신을 귀찮게 굴 만큼 도덕적인 인간은 아니니 서로 제 갈 길 가는 게 어떤가요.]
나이젤은 웃음기를 지우고 누인 몸을 일으켰어.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분위기가 확 달라져.
[내 앞에서 겁먹지 않는 인간은 딱 세 종류야. 하나 내 타입 여자, 둘 쓰레기, 셋 경찰.]
넌 어느 쪽 인간이지? 나이젤의 물음에 윌은 다리를 꼬고 생각해. 경찰은 무슨 인터폴 수배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여자는 당연히 아니고. 그럼 쓰레기? 망가진 것들을 포괄해서 그리 부르니 얼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나이젤은 윌이 입을 꾹 다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짜증이 솟구쳐. 무기를 보여주며 겁먹을 분위기를 조성해도 꿈쩍도 안 해.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고 동업자도 아닌 것 같은데 공포를 느끼는 기관이 고장 났는지 단순히 담이 센 것인지 모르겠어. 결국, 답을 얻는 건 포기하고-그로선 대단한 양보야- 탐색전에 돌입했어.
[혼자 여행하면 무슨 재미야.]
[자유가 있죠.]
나이젤은 윌의 어느 부분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했어. 투덜거리는 말투? 솔직히 마음에 안 들긴 해도 그것과는 달라.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음울한 남자의 무엇이 자신을 자극하는지 모르겠어. 머리카락에 가려진 이마의 흉터? 수염에 섞여 잘 구분 가지 않는 뺨의 칼자국? 확실히 상처는 범상치 않았지만, 어딘가의 조직원이라기엔 윌은 너무 유약해 보였지. 처음 봤을 때부터 샌님 같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자들은 대체로 상대하기 번거로워. 나이젤은 시선을 윌에게 고정한 채 유리잔에 다 태운 담배꽁초를 집어 넣었지. 치직 소리가 났고 연기가 조금 올라왔어. 그러자 윌이 중얼거렸어.
[금연일 텐데...]
[알아.]
윌은 고작 다툼 구경 좀 했다고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굴 필요가 있는지 의아해. 그러거나 말거나 나이젤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어.
사실 나이젤은 지금 좀 압박을 받는 상황이야. 부쿠레슈티에서 운명의 사랑과 결별하고 떠돌다가 이제야 좀 마음을 추스리고 정착해서 막 거래를 트는데 상대 조직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거든. 마약 운반책 둘이 죽었지. 4평 남짓한 좁은 방 안은 두 남자의 피와 내장으로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어. 단순한 살인사건이었다면 다행이야. 문제는 거래예정이던 코카인 8kg이 자취를 감췄다는거야. 조직은 발칵 뒤집혔지.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는데 나이젤이 정착하자마자 사건이 터지니 의심의 목소리가 커져. 확실히 타이밍이 묘했지. 의심 받을 상황이라는 건 알았지만 나이젤은 얼굴도 모르는 남자 둘의 죽음과 좀도둑질에 끼워 넣어지는 상황이 불쾌했어. 역지사지 자체가 통하지 않는 인간이기도 했고. 하여튼 두 남자의 죽음을 마피아들 간의 분쟁으로 본 경찰은 살인범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어. 목격자들 입단속을 게을리하지 않은 조직의 노력도 한몫했지. 공권력의 힘을 빌자니 마약거래가 걸리는 상황이었거든. 자체적으로 해결할 심산인 거지. 나이젤은 알리바이가 있었어.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런 종류의 비지니스는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아. 부하를 시켰든 전문 킬러를 고용했든 물건을 빼돌리기 위해 사주했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어. 그 탓에 부하들은 비공식적인 조사에 응해야 했지. 파견나온 조직원들이 사무실을 헤집었어. 그게 나이젤의 자존심을 건드린거야. 순도 높은 코카인이 8kg. 그에 비하면 사람 둘의 목숨쯤이야 가벼워. 부하들은 부쿠레슈티에서부터 함께 했기에 일과 관련해선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이야. 나이젤은 그들을 의심해 봐야 시간 낭비라는 걸 알았어.
상황이 이러하니 신경이 날카로울 수 밖에 없었지. 그러다가 윌을 만난거야. 겁없이 자기를 빤히 쳐다보던 이국인. 나이젤은 의심스러운 것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확실하게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부하를 시켜 윌을 미행하게 했지. 그러나 별다른 게 나오지 않았어. 나이젤과 헤어진 윌은 트레비 분수 근처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곧장 호텔로 돌아갔어. 라운지에서 치케티를 먹으며 신문을 보다가 룸으로 올라가서 그대로 취침. 호텔비는 현금으로 계산했는데 관광지에선 흔한 일이니까.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었지. 몰래 외출하거나 누군가와 접선하지도 않았다고 했어.
나이젤은 멀뚱히 저를 보는 윌에게 부드럽게 툭 던져.
[같이 아침이나 먹으러 갈까?]
윌은 느리게 눈을 끔뻑이다가 인상을 팍 쓰며 의아하게 물었어.
[지금 그거 농담인가요?]
나이젤은 말없이 씩 미소 지었지. 윌은 하핫- 작게 웃으며 소파에 등을 푹 기대고 손끝으로 수염을 쓰다듬었어. 총과 칼을 보이며 건네는 데이트 신청이라니.
[방금 조금 웃겼어요.]
입가가 느슨해. 눈꼬리가 나른하게 내려앉자 그를 감싸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졌어. 문득 나이젤은 자신이 윌의 이런 반응을 원했다는 것을 깨달았어. 뒷목을 잡아 테이블에 박아버리자 일순 당황스러워하던 어제처럼 속에 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한 모습을 보고싶었지. 그것은 익숙한 집착이었어. 게비와 함께 있을 때 종종 즐기던 미션이었지. 듣고 싶은 말, 보고 싶은 행동을 유도해 그것이 성공하면 보상처럼 돌아오는 은밀한 쾌감.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의 일부분을 잡자 나이젤은 욕심이 났어. 좀 더 맛보고 싶었지.
[현지인과의 우정 쌓기는 여행의 묘미잖아.]
[협박을 동반한 우정 말인가요.]
말은 그렇게 해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은 이 상황을 재미있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어. 빛을 받은 곱슬 브루넷이 윤기 있게 빛났어. 멋대로 뻗어 엉킨 부분도 많았는데 나이젤은 그게 자연스럽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까의 음울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 편하게 웃고 있는 윌은 순하고 곧은 느낌이었지. 꼭 강아지처럼 무해한...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이젤은 아차 했어. 이건 좀 위험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진 못했어. 억지로 봉제된 마음은 한 번 터지기 시작하자 막을 수 없었지.
[괜찮은 가게를 알아. 맛있어서 환장할 걸.]
나이젤은 거칠게 말하며 웃었어. 윌은 한니발과 같은 얼굴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나이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해. 위험한 냄새가 난다는 것도 알았지만 윌은 잃을 게 없었지. 그래서 충동적일 수 있었어. 담배 꽁초가 또 다시 유리잔으로 들어갔지. 새 담배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는 나이젤을 보며 윌은 현지인과의 우정이라는 그의 헛수작을 받아들여 보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