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부는 담배를 물고 별장을 올려다 봤음.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구름이 잔뜩 낀게 을씨년함. 멀리서 덩치 큰 수행원들이 김신부에게 걸어 오고 있음.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는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끔. 수행원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김신부는 앞장 서 걷는 남자들을 따라감. 터덜터덜 걷는데 별생각이 다남. 상황이 영 안좋음. 신식 별장 안에서 코너를 세 네번 지났을까. 접견실이 보임. 약간 떨어진 벽에 닫혀 있는 큰 문이 있음. 수행원이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림. 익숙한 목소리라 김신부는 인상을 쓰며 수행원이 열어준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감. 제일 먼저 보인 건 조태오임. 방글방글 웃으며 문 바로 앞에 서 있었음. 그리고 그 뒤로 병원에서나 보던 침대에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있는 준호가 눈에 들어옴. 김신부는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음. 무슨 짓을 당했는지 가뜩이나 마른 놈이 더 비쩍 꼴아있음. 잘 보면 여기저기 붕대에 반창고에 상태가 완전 개판임. 씨ㅂ... 혼자만 들리게 욕을 내뱉은 김신부는 태오가 건네는 인사도 씹고 준호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음. 준호는 김신부를 본 순간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를 못함. 문이 닫힘. 준호 옆에 선 김신부가 흘낏 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태오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이쪽을 삐딱하게 보고 있음. 김신부는 한숨을 한번 푹 쉼. 아가토. 준호기 어깨를 움찔 떰. 저 자식이 뭐라고 하더냐. 얼마 남지도 않은 내 앞길을 막아버리겠다고 하더냐? 준호는 김신부를 올려다 봄. 눈밑에 퀭해서 보고 있자니 속이 쓰림. 신부님... 정말 아닙니다. 제가... 준호기 우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함. 그때 태오가 나섬. 최부제님이 약물 중독 증세를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 제가 대신 말씀 드려도 되겠죠? 태오의 말에 김신부가 한쪽 눈썹을 꿈틀 올림. 약물중독?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음. 사실이냐 아가토. 김신부가 내려다 보면서 물음.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음. 허- 김신부는 기가 막힘. 변명이라고 내놓은 게 저 따위라니 믿어주는 척 하기도 힘듬. 그래 그러니까 카톨릭대 7년생인 부제가 사실은 마약쟁이였다 이거지. 김신부가 비꼬자 준호가 고개를 푹 숙임. 태오는 여전히 웃고 있음. 증세가 심해서 자해도 하시고... 그래도 지금은 많이 진정되신 겁니다. 태오의 말에 김신부는 준호를 곁눈질로 훑어봄. 검지와 엄지로 헐렁한 환자복 천을 슬쩍 들춰보니 가슴에 뭔가 둘둘 말려 있음. 자해를 해서 이꼴이 난거다? 태오가 정확히 김신부의 손을 바라보며 목 뒤를 주물럭거림. 입은 여전히 웃고있음. 깁스했네? 너 뭐 뼈도 부러뜨렸냐? 준호를 보며 말하고 있지만 주어는 다른 사람이었음. 태오가 진하게 웃음. 준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챔. 마음이 급해짐. 신부님, 저 정말 괜찮습니다. 그.. 다 당분간 여기서 치료하다가 나중에 다시 연락 드릴테니까 그때... 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신부가 툭 내뱉음. 그때 뭐, 나더러 니 시체 치우란 소리냐? 쾅- 큰 소리가 들렸음. 김신부도 준호도 한 곳에 주목함. 태오가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머지 한 손으로 문을 친 것임. 두 분 다 진정하시고... 일단 김신부님, 지금 부제님이 많이 힘들어 하시네요. 궁금한 내용은 다 해결되셨을 것 같으니 이쯤에서 마무리 짓죠. 김신부는 헛웃음. 야, 넌 정말 내가 이녀석이 마약쟁이란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냐? 헛 참, 어린 놈이 세상 쉽게 살려고 하네. 태오는 웃음을 지움. 검지로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눈을 감는데 존나 심기 불편해 보임. 준호는 저 모습이 폭발하기 직전 신호라는 걸 눈치 챔. 신부님. 잠시... 그때 태오가 눈을 뜸. 목소리가 가라앉아 음산하게 울림. 안되겠네. 면대면으로도 안믿으시니까... 이제 어쩐다?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의미가 담긴 문장 이었음. 준호는 파랗게 질림. 그래서 뭐 어쩔건데. 패 죽이기라도 하게? 깡패새끼처럼? 김신부가 턱 끝을 들며 도발하듯 말했음. 그러자 태오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음. 팔을 깍지껴 기지개를 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그게 무슨 무서운 말씀입니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부님에게 폭력을 쓰다니요. 말도 안되죠. 그런 천박한 짓이 아니라... 잠깐 말을 멈추고 준호를 바라봄. 태오가 김신부에게 위해를 가할까봐 잔뜩 쫄아있었음. 오른손이 김신부의 옷자락 끝을 꼭 잡고 있는 게 거슬려 순간적으로 짜증이 팍 치솟았지만 그럭저럭 참아냄. 태오는 말을 이었음. 보여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사실 좀 내키지 않지만 신부님이 의문이 많으시니... 뭐 그 영상을 보시면 이해하기 쉬우실거라 생각합니다. 마치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 끝을 흐렸음. 어..? 준호가 멍청하게 반문함. 잠깐 침묵이 흘렀음. 어색한 기류가 흐름. 김신부는 태오와 준호를 번갈아가며 바라봄. 저게 뭔 소리냐? 아가토? 눈썹을 찌푸리며 김신부가 물음. 준호는 멍하니 태오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덜컥임. 신부님. 가세요. 제발. 제발요. 부탁드립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 말고 가세요. 정신이 반쯤 나가보이는 준호를 보며 당황한 김신부는 붙들린 팔을 억지로 잡아 떼며 진정시키려고 노력함. 야, 아가토, 왜 이래. 이제 준호는 바락바락 악을 쓰기 시작했음. 덜덜 떨며 제발 제발 소리만 반복함. 최준호! 김신부가 버럭호통쳐도 준호는 막무가내임. 가라구요! 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합니까! 약물중독 맞습니다. 제가 약을 했어요. 치료중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가세요! 절규하는 준호를 진정시키기 위해 어깨를 감싸려고 손을 뻗던 김신부는 팔목이 잡힘. 힘줄이 튀어나온 손을 잠시 내려 보던 김신부는 시선을 위로 올림. 태오가 웃으며 김신부의 행동을 막고 있음. 부제님 상태가 안좋네요, 신부님도 이쯤하시죠. 김신부는 옷자락을 잡은 준호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다가 방긋 웃는 태오에게로 고개를 돌렸음. 얽혀 있는 셋 사이가 조용해진 와중에 준호가 헉헉이며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 들림. 제발 신부님. 가세요. 이젠 거의 자지러지려고 함. 김신부는 화가 나다못해 울컥함. 그러나 닥달할 수 없었음. 경기를 일으키며 필사적으로 외치는 준호를 보니 이대로 태오가 말한 '영상’ 에 대해 파고들다간 정말 큰일나겠다 싶음. 아가토 진정해라. 네 말대로 할거다. 그제서야 준호가 힘을 뺌.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김신부를 바라봄. 눈에 눈물이 고여 있고 입술이 덜덜 떨림. 김신부가 준호를 잡고 있던 손을 떼자 태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섬. 김신부는 깊은 한숨을 내쉼.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냐. 김신부의 말에 준호가 입술을 달싹임. 다 도망가도 돌아올 놈은 정해져 있다고 했지. 나한테 넌 그런 녀석이다. 믿는다. 준호는 고개를 숙임. 학교는 걱정하지 마라. 학장신부와 말 맞춰 놨으니. 어깨를 툭툭 두 번 두드리고 김신부는 태오를 바라봄. 할 말 끝났다.
아직도 심장이 미친듯이 뜀. 준호는 닫힌 문을 보며 멍하니 생각함. 약물중독이라니 솔직히 김신부가 그걸 믿으리라곤 생각 안했음. 그래도 이유를 숨기고 지리멸렬하게 구는 자신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고는 예상함. 그런데 현실은 ‘돌아올 놈은 정해져 있다’ 는 소리를 들음. 믿는다는 말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음. 조태오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낌. 생각에 잠긴 사이 김신부를 마중(?)하고 돌아온 태오가 준호 옆에 앉음. 설마 내가 김신부님에게 보여줄거라고 진심으로 믿은 건 아니죠? 태오가 말하자 준호는 물끄러미 바라봄. 속으로야 당연하지 미친놈아, 하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임. 의외의 반응에 놀랐는지 태오가 고개를 갸웃함. 준호는 한숨을 쉼. 좀 쉬고 싶습니다. 정말 지친 듯 보였음. 땀이 가득한 얼굴에 머리카락이 잔뜩 달라붙어 있음. 태오가 손을 뻗어 정리해줌. 준호는 피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음. 태오는 코끝을 찡그림. 어쩐지 이상했지만, 정말 이상했지만 조용한 준호가 마음에 들어서 별 말 하지 않았음.
그 날 이후 준호는 생각을 바꿈. 태오가 뭐라 지랄하건 다 받아줌. 얼핏 자포자기 한 것 처럼 보여도 그것과는 달랐음. 방법을 바꾼 것임. 김신부와의 대면 이후 준호는 겉으로 내비치던 칼을 철저히 숨김. 얌전히 앉아서 부러진 뼈가 붙길 기다림. 태오는 김신부 이후로 갑자기 변한 준호를 의심하면서도 얌전하게 제 말을 들어주는 모습이 좋음.
준호가 별장에 온지도 어느덧 두달 가까이 되어감. 학장신부님께 말해서 재학 사정을 봐준다고 해도 이 이상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함. 그리고 솔직히 말해 준호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음. 처음에는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지만 이쯤되자 마음이 바뀜. 준호는 태오를 용서할 수 없었음.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되갚아주고 싶었음. 그것은 성직자와는 거리가 먼 마음가짐이었고 스스로도 잘 알았음. 준호는 쿨하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인정함. 사실상 학교에 돌아갈 생각도, 성직자로서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도 포기함. 모든 흐름은 태오의 궤도에 말려 들면서부터 정해진 수순이었음.
뼈가 적당히 붙자 준호는 목발이 없이도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함. 그러자 태오는 준호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음. 처음 싱글벙글 웃으며 에스코트 할때는 또 저세상 퇴폐굴에 데려갈까봐 걱정했음. 뭐 해요, 부제님. 가요. 태오가 손짓함. 준호는 별장 문 앞 빛과 그림자의 경계선에 서서 망설였음. 이 곳을 지났던 마지막 기억은 태오의 머리 위에 석고상을 냅다 드랍하고 제정신 아닌 상태로 도망쳤던 때임. 준호가 우물쭈물 서 있자 태오가 성큼 다가와 준호의 손목을 잡아 끌었음. 아. 발을 내딛음. 태오는 실실 웃으며 준호의 손목을 잡은 채로 앞장 서 걷기 시작함. 따뜻하고 좋네요. 이제 곧 겨울이니 산책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둬요. 준호는 태오의 입에서 나온 부드러운 말들이 어색함. 아직 부러진 갈비뼈가 다 붙지 않은 상태라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서 자꾸 멈춰섰음. 태오는 끈기 있게 준호가 숨을 고르길 기다려줌. 둘은 자갈이 박혀 있는 아담한 돌길을 걸었음. 우습지만 태오는 별장의 주인이면서도 이 산책로를 이용한 것이 처음임. 잘 만들었다 싶음. 몸이 많아 좋아져서 다행이에요. 태오가 말했음. 고마워요. 준호가 대답함. 그러자 태오가 발걸음을 멈추고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음. 조금 긴장한 준호가 태오에게 잡혔던 손목을 주물거렸음. 태오가 돌아봄. 웃고 있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한테 고마워?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당연한 의심이 담겨 있음. 준호는 눈을 깔고 대답했음. 그냥...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 같아서요. 그 말에 태오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임. 말의 진의를 의심하는 것 같음. 잠깐 침묵하던 태오가 다시 입을 염. 맞아요 뭐 아무래도 상관 없긴 해요. 흐리게 웃음. 가죠. 태오가 앞장 섬. 이번에는 팔을 잡지 않음.
몸이 많이 좋아진 준호를 붙들고 태오는 이런 저런 것들을 주절댔음. 살아온 이야기, 좆같은 놈들 뒷담, 가족관계에 대한 허무함 등등 온갖 구질구질한 내용도 다 이야기함. 처음에는 왜 자기한테 이러나 싶어 얼떨떨했다가도 계속 듣다보니 나름 코멘터리를 해주는 수준까지 발전함.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기분이었음. 뭐 아무리 그래봐야 준호는 신부가 아니었고 조태오는 신도가 아니었기에 죄는 사해지지 않겠지만. 여튼 준호는 태오가 주절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여러 사정을 간접적으로 전해듣게 됨. 물론 아무리 그래 봐야 준호에게 태오는 개새끼였음. 기회만 온다면 죽일 각오까지도 함. 마음 속으로는 선을 넘어도 몇 번이나 넘음. 오늘도 태오는 식탁에 앉은 준호 맞은 편에서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있었음.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 꼬투리만 잡아 오는 임원진들을 욕하는 내용이 주였음. 준호가 그 애새끼스러운 모습에 별 생각 없이 피식 웃자 태오가 말을 멈췄음. 별이 몇개라는 유명 호텔 주방장의 고기요리를 썰어 입에 넣으려던 준호가 갑작스러운 침묵에 고개를 들자 태오가 이쪽을 빤히 보고 있음. 왜... 불안해진 준호가 작게 묻자 태오가 대답했음. 웃는 거 처음 봐요. 역시 잘생겼네 부제님. 준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씀. 태오가 밝게 웃었음. 그 표정은 별로에요. 웃어요. 웃는 게 예뻐. 전과는 다르게 성적인 늬앙스가 전혀 없는 순수한 칭찬이었음. 준호는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고기를 썰었음.
잔잔한 날들이 계속되었음. 준호는 태오의 스킨십이 일정 이상(손을 잡는다거나 무릎에 기댄다거나) 진도를 나가지 않자 조금 안심이 됨. 그래도 완전히 경계를 푼 건 아님. 또 언제 돌변할지 모름. 밤 11시가 넘은 시간 준호는 시계를 확인하고 읽던 책을 덮었음. 얼마전에 준호가 심심할까봐 고용인들을 시켜 여러 책들을 잔뜩 날라 놨었음. 평소에도 딱히 독서를 즐긴 건 아니었지만(만화책은 예외임) 그래도 할 게 없으니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읽게 됨. 준호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책을 올리고 눈을 비볐음. 슬슬 졸려서 잘까 하고 눕는데 갑자기 문이 덜컥거림. 평소처럼 삑- 하고 한 번에 열리는 게 아니라 몇 번이나 실수를 하는지 흔들림. 준호는 살짝 긴장해서 몸을 반쯤 일으킴. 그때 드디어 문이 열렸음. 조태오가 비틀거리며 들어옴. 부제님 저 왔어요. 가까이 다가올수록 알콜 냄새가 개쩔게 남. 준호는 인상을 쓰며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함. 아아, 안그러셔도 되요. 앉아 있어. 나 곧 나갈거야. 태오가 어눌한 발음으로 중얼거리더니 갈지자로 걸어 옴. 준호가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는데 태오가 침대위로 몸을 휙 던짐. 억- 몸을 뒤집어 허벅지에 머리를 턱 올리는 태오의 행동에, 많이 나았다지만 아직 땡기는 근육이 비명을 지름. 어어~ 미안해요 부제님. 내가 지금 조절이 좀 안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일어나지는 않음. 힘이 풀린 머리의 무게가 허벅지로 전해짐. 뻔뻔한 그 모습에 준호는 한숨을 내쉬고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음. 준호를 베고 누운 태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실없이 웃음. 뭐 웃는거야 평소에도 그렇다지만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늘 보이던 미간의 주름까지 완벽하게 펴져서 편안해 보임. 술 많이 드셨으면 가서 잘 것이지 왜 여기서 이럽니까. 준호가 불만스럽게 말하자 태오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올려다봄. 우리 부제님, 여전히 까칠하시네. 뭐 그럴만해요. 내가 한 짓이 있잖아. 끔찍한 범죄 고백을 하면서 하하 웃는데 준호는 그 당당한 태도에 몹시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태오를 내려봄. 그래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술냄새 나는 입으로 하는 사과임. 준호는 지금이라면 저 목을 졸라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함. 안될 것 같음. 술에 취했어도 여전히 의식이 있는 격투 만렙 조태오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음. 탈출 시도 후에 방 안의 장식물도 다 없어졌기에 무기로 쓸만한 것도 없었음. 준호가 진지하게 체력 차이를 따지고 있는데 태오가 다시 입을 열었음. 심심하지 않아요? 책만 보면? 티비 넣어 줄까? 영화 발작 사건 이후로 태오의 입에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임. 왜요, 또 제가 강간당하는 비디오라도 틀려고 그러십니까? 그간의 사건들로 인해 멘탈이 강해진 준호가 시니컬하게 응수했음. 태오는 눈을 동그랗게 뜸. 잠깐 뜸을 들이더니 푸하하 크게 웃음. 준호는 이제 화가 나려고 함. 뭐라 입을 열려고 할 때 태오가 다시 말했음. 그거 없어. 뜻밖의 말에 준호가 반문함. 뭐라고요? 태오가 다시 입을 염. 애가 칭얼거리는 것 같음. 이제 그거 없어. 내가 다 없앴어. 준호는 말문이 막힘. 부제님. 최준호. 기도해줘요. 태오가 중얼거렸음. 목소리가 조금씩 느려짐. 잠이 오는 모양임. 웃으..면서... 기도해줘요. 준호는 멍하니 태오를 보다가 입가를 조금 쓸었음. 기도해요. 눈을 감고도 계속 중얼거리고 있음. 준호는 가만히 태오를 내려 보다가 입을 열었음. 느릿하게 주기도문이 흘러나옴. 웃지는 않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