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오는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음. 자괴감과 후회가 폭풍처럼 휘몰아쳤음. 눈 앞에 총이 있었다면 머리에 대고 당겼을지도 모름. 울부짖으며 바닥에 머리를 찧어대던 태오는 뒤늦게 올라온 사람들에게 붙들려서야 그짓을 멈췄음.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음. 태오는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기절할수도 없었음. 그렇다고 준호가 서있던 난간을 향해 다가갈수도 없었음. 밑을 내려다 보는 순간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음. 옥상에서 내려가지도 못했음. 멀지 않은 벤치에 앉아 준호가 뛰어내렸던 난간만 바라보았음. 뒤늦게 연락을 받은 최상무가 병원으로 달려와 사태를 수습하는동안 태오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난간만 바라보고 있었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준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음.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찢어지면서 떨어지는 속도를 늦춘 것임. 수풀이 우거진 잔디도 완충제 역할을 해주었음.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만 잔디가 풍성했음.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음. 최상무는 수술실 간판등이 켜지는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음. 솔직히 말해서 최상무도 많이 지쳤음. 태오의 뒤치다꺼리 자체는 늘상 해왔던 일이라 힘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는데 준호가 끼어드니까 존나 상황이 달라짐. 가뜩이나 지랄맞았던 태오에게 집착하는 대상이 생기니 감정기폭이 미친년 널 뛰듯 했음. 준호가 별장에 갇힌 이후로 주변 인들 입단속 하는 것만으로도 주름살이 두개는 늘었음.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싶어서 버텼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음. 형사들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겉으로나마 몸을 사려왔는데 그것마저 훌훌 던져버렸으니 고통은 최상무 몫이 되어버림.
살아 있어. 다른 어떤 말에도 반응하지 않던 태오가 고개를 휙 돌려 최상무를 보았음. 벌어진 입으로 갈라진 소리가 흘러나왔음. 뭐? 최상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음. 지금 수술실에 들어갔어. 높이도 어정쩡했고 수풀이 우거져서 운이 좋았대. 태오는 난간과 최상무를 번갈아 보며 다시 물었음. 정말이야? 꼭 어린애 같았음. 최상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음. 나중에 가면 다 밝혀질 거짓말을 왜 하겠어. 정말이야 지금 수술중이고 크게 위급한 건 아니래. 최상무의 말에 태오는 다시 난간으로 시선을 돌렸음. 하지만 저기서 떨어졌는데. 눈 앞에서... 물기가 담긴 소리가 허무하게 바스라졌음.
도철은 인상을 찌푸렸음. 자살한 여대생의 49제가 막 끝났음. 최상무가 손을 쓴 모양인지 여대생의 부모는 입을 꾹 다물었음. 이대로 가다간 조태오를 체포하기는 커녕 혹독하게 인력 돌려먹었다고 도철이 먼저 정직당할수도 있을 것 같음. 지금 모은 증거는 범위가 넓고 허술해서 신진물산측 변호사 앞에서 산산조각 날것임. 생각에 잠겨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가 왔음. 늘 듣던 벨소리와 다름. 도철은 정신이 번쩍 들었음. 준호에게 줬던 휴대폰 전용 벨소리였음. 도철은 다급히 비상구 복도 문을 열고 한적한 곳을 찾았음. 마지막 연락을 한지가 보름이 넘었는지라 혹시 마음을 바꾼게 아닐까 약간의 기대를 하며 전화를 받았음. 서도철 입니다. 상대가 말이 없음. 도철은 잠깐 휴대폰 화면을 봤다가 다시 귀에다 댔음. 최준호씨? 몇 초 지나자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옴. [오랜만이네요.] 도철은 눈에 힘을 줬음.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임. 그래 존나게도 오랜만이다. 도철이 일부러 과장스럽게 말했음. 조태오가 전화를 걸어 온 것을 보면 준호의 신변이 걱정됨. [물어볼게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느릿했지만 별다를 것 없는 말투였음. 그럼에도 어쩐지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서 도철을 고개를 갸웃했음. 니가 나한테 물어볼 필요가 뭐 있어. 밑에 놈들 부려서 알아내면 되잖아? 도철이 툭 내뱉자 수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함. 명백한 도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반응이 없자 기분이 이상해졌음. [준호씨에게 어디까지 들었나요. 둘이 무슨 작당을 했죠.] 도철은 인상을 팍 씀. 그럼 그렇지 이새끼 하는 짓이야 뻔하지 라고 생각함. 덩달아 준호가 걱정되는 마음이 커짐. 너 최준호한테 뭔 짓 했냐? 아니다. 일단 사지 멀쩡하게 살려는 뒀냐? 도철이 쏘아대듯 말하자 수화기 너머로 마른 웃음소리가 들려옴. 평소처럼 누군가를 비웃는 소름끼치는 웃음은 아니었음. 오히려 좀 허탈하게 들렸음. 도철은 순간적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음. 야? 불안해진 도철이 예의없이 부르자 태오가 더듬더듬 말했음. [사지는... 멀쩡한데...] 잠시 말을 멈춤. 꼭 허공을 헤메는 것 같음. 도철은 인상을 팍 쓰며 뒷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었음. 너 그러면 안되는거다. 그 사람 신학생이야. 태오가 모를리 없었음. 그리고 이런 식의 감정 호소가 통할거라고도 생각 안함. 그러나 도철은 침묵이 흐르는 만큼 준호의 생명줄이 타들어간다는 강박적인 불안감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했음. 자기가 알아서 해결한다고 연락 끊긴지가 보름이 넘었다. 내가 너 새끼 빵에 쳐넣자고 몇 번이나 설득했는데도 끝까지 입 다물었던 사람이야. 니가 최준호에게 어떤 개짓거리를 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은 가거든? 그 사람 신변에 문제 생기면 맹세코 가만 안둔다. 도철이 이를 갈며 말했음.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로 헛웃음소리가 들려옴. 발끈하려는 찰나에 태오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음. [잘 알지도 못하는 새끼들 걱정하는 마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댁도 그쪽이었네. 김 베드로 신부도 그렇고. 김규남 그새끼도 그렇고. 그럼 뭐야. 결국 이상한 놈은 나였잖아.] 그러면서 큭큭 웃음. 도철은 인상을 찌푸렸음.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음. 드디어 천벌을 받아 맛이 갔나 싶음.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난 사실대로 말했다. 못 믿겠으면 너 그 뭐냐. 아 그래 통신사 받았다며? 통화 목록이라도 조회해 보던가. 개인정보 활용 동의니 뭐니 니새끼는 좆도 신경 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음. 도철은 인상을 쓰며 빈 종이컵을 구겼음.
삑- 삑- 삑- 일정간격으로 들리는 기계음이 불안함. 태오는 산소 호흡 관을 삽입하고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누워 있는 준호를 바라보고 있음. 최고급 병실에 최고급 장비 등 무엇 하나 최고가 아닌 것이 없었음. 지금 태오가 앉아 있는 의자마저 부드럽고 푹신했음. 그러나 태오는 병실 안에서 단 한번도 편한 적이 없었음. 노크 소리가 들렸음. 태오가 대답이 없어도 문이 열림. 어깨를 늘어뜨린 최상무가 들어왔음. 입단속을 시키느라 힘들었음. '자살시도' 가 아닌 '사고' 로 정정했음. 최상무는 최근 입을 막을 사건이 많아져서 조금 불안했음. 깔끔하게 처리한다곤 했지만 가지가 많으면 그만큼 소홀해지기 마련임. 태오야. 이제 좀 쉬어. 최상무가 말했음. 태오는 준호가 수술실에서 나와 병실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까지 이틀동안 잠을 거의 자지 않았음. 병실은 시계초침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고요함. 대답없이 준호만 노려보고 있는 태오를 최상무는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음. 또라이에 사랑을 더했더니 아주 상또라이가 나왔음. 최상무는 한숨만 푹 쉼. 이제 어떻게 할까? 계속 여기 입원해 있기엔 보는 눈이 많아. 나중에 정신 차리면 별장으로 옮길 거야? 설마 진짜 그렇게 할거냐는 반어적인 물음임. 비난이 은은하게 느껴짐. 태오는 흠칫 고개를 돌렸음. 그럴까. 입술이 맞물려 어색하고 자신없는 소리가 나왔음. '그러자. 그래. 그렇게 해' 도 아닌 그럴까. 거기에 담긴 망설임을 읽은 최상무는 눈알을 굴렸음. 여기서 태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적당히 설득한다면 준호를 포기하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름. 최상무는 입을 열었음. 그럼... 그러나 태오가 더 빨랐음. 됐어. 최상무는 눈을 꿈뻑임. 소리가 워낙 작아서 잘못 들었나 싶음. 이제 됐어. 준호를 보는 눈을 돌리지도 않고 태오가 말했음. 최상무는 아리까리함. 그냥 네 말이 듣기 싫으니 입닥치라는 것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집착을 그만두겠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음. 나가 봐. 언제나와 같은 명령이지만 힘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음. 최상무는 무어라 한마디 덧붙이려다가 그냥 밖으로 나갔음.
문이 닫히자 다시 고요해짐. 태오는 멍청하니 준호 얼굴을 바라보았음. 떨어지면서 나무에 쓸려 생채기가 났는지 왼쪽 눈 위에 밴드가 붙어 있었음. 살짝 벌어진 입안으로 연결된 호스가 불편해 보임. 코 밑에 붙어 길게 늘어진 관도 마찬가지임. 그냥 모든게 불편하고 어색했음. 누워 있는 준호 근처에만 가도 피냄새가 나는 것 같음. 태오는 도철의 말을 떠올렸음. '알아서 해결한다고 연락 끊긴지 보름이 넘었다.' 서도철을 옹호하려는 것은 맹세코 아니지만 태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음. 딱 준호다웠기 때문임. 분노에 가려져 있던 베일이 벗겨지자 진실이 보였음. 그래서 모든 오해가 밝혀진 지금 조태오씨는 어떤 심정입니까? 누군가 물었음. 여기서 누군가란 예전에 '이럴 필요 까지는 없었잖아.' 라고 말을 걸었던 마음 깊숙한 곳에 사는 녀석임. 태오는 뜬금없이 픽 웃었음. 허공에 대고 외치고 싶었음.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난 그냥 최준호가 좋았을 뿐이라고! 그러나 조태오는 가해자고 최준호는 피해자인 결과가 명백한 사건임. 핏기 없는 얼굴에 새겨진 상처와 말라 비틀어진 하얀 입술 사이로 호흡기를 달고 희미한 숨을 쉬고 있는 최준호. 그가 저 꼴이 된 것은 누구의 탓인가. 당연히 조태오의 작품임. 준호를 절벽 끝으로 몰아 넣은 짐승은 태오임. 사냥감이 자살을 시도했다고 괴로워하는 것은 솔직히 우스운 일임. 그가 준호로 하여금 옥상에서 뛰어내리도록 만들었음. 새삼스러울 것도 없음. 그러나 태오는 변명했음. 준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음. 그대로 두면 자신을 버리고 가버릴 거라 겁이 났음. 그랬기에 자신이 제일 잘하는 행동을 한 것임. 혓바닥이 길어질수록 사면초가임.
부제님이 너무 좋은데... 방법을 몰랐어. 그냥 같이 있고 싶었어. 다른 놈들 신경쓰지 말고 나만 봐주고... 씨발...
조용한 혼잣말이 이어졌음. 태오는 어색하게 말을 더듬으며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죄를 털어 놓았음. 옥상에서 무릎을 꿇고 했었던 고백의 연장선임. 그때 준호의 손가락이 움직였음. 태오는 어색하게 굳어서 자리에서 일어났음. 처음에는 손가락이 약하게 꿈틀거리더니 가슴이 평소보다 크게 부풀었음. 속눈썹이 파들거리자 태오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음. 입술이 달싹거리는 걸 보고서야 사람을 불러야 겠다는 생각을 했음. 침대 옆에 붙은 너스콜 버튼을 거칠게 누른 태오는 다시 안절부절 못했음. 두려운 마음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남. 눈을 뜬 준호가 자신을 보고 무슨 말을 꺼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연신 얼굴을 쓸어 내리던 손은 준호가 으으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자 주먹을 꽉 쥐고 멈췄음. 마침내 준호가 눈꺼풀을 들어올렸음. 태오는 도망쳤음.
[조태오 입니다.] 김신부가 태오의 전화를 받았을때 이미 시간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음. 너 이새끼 또 뭔 개지랄을 떨어서 준호를 괴롭히는 거냐고 거품을 물고 난리를 치려던 김신부는 상대가 말이 없자 조용히 귀를 기울임. 전처럼 준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음. 그러나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고 시간이 지나 흘러나온 목소리는 태오의 것이었음. 김신부는 기가 막혔음. 병원 이름만 툭 내뱉고 끊어진 것임. 불안해진 김신부는 인상을 빡 쓰고 겉옷을 걸쳤음.
김신부가 병원에 도착해 로비로 들어가자 최상무가 맞아줌. 최상무는 지금 준호의 상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음. '사고' 라는 대목에서 헛웃음을 짓는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음. 최상무는 김신부가 생각보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성직자라는 사람들은 다 이런가 싶었다가 서늘한 안광이 서린 얼굴을 보고 생각을 정정함. 그는 그저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말을 줄이고 있는 것임. 고집스러운 얼굴을 가진 선이 굵은 중년의 남자는 수많은 비이성적인 것들을 상대해가며 지금까지 왔음. 구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최상무는 어쩐지 껄끄러워서 최대한 빨리 브리핑을 끝냈음.
준호가 있는 병실 앞에 도착한 김신부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음. 태오가 병실 문 옆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음. 그 모습이 꼭 엉망진창으로 당한 패잔병 같아서 김신부는 태오의 멱살을 잡아 올려 짤짤 흔들 마음이 사라졌음. 오셨습니까. 고개도 돌리지 않고 태오가 말했음. 꼬락서니 하곤 쯧. 김신부의 내려보는 말에도 태오는 되돌려 줄 생각이 없는 모양임. 절 보면 주먹부터 날릴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독기 빠진 목소리에 김신부는 피식 웃었음. 내가 너같은 양아치 새낀 줄 아냐. 어린 놈이 생각하는 게 그쪽 밖에 없지. 그렇게 말하곤 저벅저벅 걸어가 문 손잡이를 잡았음. 태오는 미동도 하지 않음. 김신부도 굳이 더 쏘아대지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음. 탁- 닫히는 소리가 나자 태오는 무릎을 세워 그 사이로 고개를 파뭍었음.
문이 열리고 닫히는 별 거 없는 일련의 과정도 굉장한 주목을 끌 정도로 병실 안은 조용한 침묵이 흘렀음. 준호는 약간 세워져 있는 침대의 등허리 부분에 몸을 기대고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음. 사실 김신부는 불안했음. 문을 열면 악취가 날까봐. 악마의 사자들이 창 밖에 옹기종기 모여 이쪽을 감시하고 있을까봐. 스승을 잃고 힘들게 얻은 보조사제마저 똑같은 방법으로 잃을까봐.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김범신에게 있어 유일한 트라우마라 칭할 수 있을 것임. 그러나 병실 안은 악취가 나지 않았음. 오히려 은은한 꽃향기가 널리 퍼져 있었음. 지켜보는 까마귀도 없었음. 십자가도 치워지지 않고 침대 헤드 위에 잘 걸려 있었음. 신부님. 메마르고 갈라진 소리가 흘러 나왔음. 오랜만에 들어보는 보조사제의 목소리에 김신부는 입가를 느슨하게 하고 침대로 다가가 근처에 있는 의자를 당겨 앉았음. 아이쿠 고급 병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의자도 겁나 편하다. 여기에 비하면 스승인 정 가브리엘 신부의 병실은 무슨 정신병동 수준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음. 준호는 조금 웃었음. 잠깐의 침묵이 흘렀음. 꼴 좋다. 말의 원뜻과 다르게 다정한 억양이었음. 준호는 다시 힘없이 웃었음. 그래 뛰어내려서 자살시도까지 하고, 이제 도망치려는 사령만 있으면 아주 부마자겠다. 김신부가 투덜거리며 창밖을 살피는 시늉을 함. 사령 여기 있잖습니까. 갈라진 목소리에 김신부가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실실 웃고 있음. 못 본 사이에 더 능글능글해졌다 너? 김신부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준호가 하핫- 크게 웃었음. 쿨럭- 그게 부담이 간건지 쿨럭이며 몸을 뒤틈. 김신부는 재빨리 일어나 준호를 부축했음. 세워져 있던 침대 윗 부분을 살짝 내려가도록 조정하자 그제서야 숨을 쉬기가 편한 모양임. 준호는 입술을 모으고 후우- 바람을 뱉어냈음. 잠시 숨을 고르던 준호가 입을 열었음. 신부님. 갑자기 움직인 바람에 꼬이기 직전의 링거줄을 정리하며 김신부가 대답했음. 듣고 있다. 준호는 그런 김신부의 손놀림을 멍하니 보며 말했음. 고백하고 싶습니다. 김신부는 멈칫 준호의 얼굴을 바라봄. 고해성사가 아닌 고백이라고 했음.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고백? 김신부가 되묻자 준호가 고개를 숙이고 네- 라고 대답함. 링거 액이 떨어지는 양을 확인한 김신부는 의자에 앉아 몸을 편안히 했음. 해라. 여기 너 탓할 사람 아무도 없다. 준호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음. 눈빛이 침울하게 가라앉음. 무릎 위에 올린 김신부의 양손에서 장미 묵주가 돌아갔음.
저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말해라.
약을 하고 남자와 몸을 섞었습니다.
그것은 네 탓이 아니다.
그자로 인해 죽고 다친 사람이 있었음에도 어떻게든 그의 편에 서서 변호하려고 했습니다.
네 성정이 여리고 착하기 때문이다.
제가 해결할 수 있을거라 믿고 내밀어준 많은 손을 무시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솔직했던 것이다.
동생의 얼굴이 희미해요. 대신 그자의 얼굴만 떠오릅니다.
그런 경험을 했으니 당연하지.
견딜 수 없어서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단순히 도망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뛰어내린 것이 아닙니다.
아가토.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더 비열하고 사악한.
...
그가 절 휘두른 만큼 이번에는 제가 그를 휘두르고 싶었습니다.
방어 본능이었을 뿐이다.
아니에요! 그런게 아닙니다... 저는 그가 상처받기를 바랐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 인해서! 한때 제가 그랬던 것처럼 괴롭고 절망스럽기를... 내 죽음을 통해 고통받고 몸부림치길 원했습니다. 맞아요. 전 조태오에게 복수하고 싶었어요.
준호야.
제 목숨을 담보로... 흔들고 싶었어요. 저는 늘 그가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반대였나봅니다.
...
절 좋아한대요. 사랑... 한다 했어요. 하하... 미친놈. 악마같은 새끼.
네가 살아난 것은 신의 안배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
근데 전 성부 성자 성령과는 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최준호.
더 부정한 소리를 해드릴까요. 신부님?
...
제가요. 그 미친놈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너...
어떡하죠?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이상합니다. 너무 이상해요.
너 임마 좀 진정해. 숨 제대로 쉬고, 뒤로 천천히 기...
제가 조태오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제서야 김신부는 준호가 어째서 고해성사가 아닌 고백이라 말했는지 알 것 같았음.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것. 준호는 마지막 규율을 지킬 수 없을거라 생각한 것임. 보속은 필요 없겠죠? 자조적으로 웃는 준호를 보며 김신부는 속이 쓰려 오는 것을 느낌.
김신부가 병원에 들를 때마다 태오는 늘 그자리에 있었음. 준호 병실 앞 말임. 집 지키는 개새끼도 아니고. 김신부의 싸늘하게 중얼거렸음. 너 임마 신진물산 대표 아니냐? 무슨 새끼가 내가 올 때마다 있어. 바지사장이냐? 김신부의 도발에 태오가 낄낄 웃었음. 저같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돈이 굴러들어오거든요. 이제보니 세상 사는 법 모르는 건 신부님이십니다? 태오의 비아냥에 김신부는 헛- 가볍게 웃었음. 이놈 보게? 어이가 없다. 누가 누구한테 세상물정 운운이야. 그래. 그렇게 잘 아는 새끼가 애를 저 꼬락서니로 만들고 한 번도 얼굴을 안비쳐? 그 말에 태오가 흠칫 굳음. 부제님이... 제 이야기를 하던가요. 조태오는 김신부의 이해 범주를 벗어나는 잔인한 또라이 새끼인데 준호 이야기만 꺼내면 꼬리를 내리고 시무룩해짐. 그럴 때마다 김신부는 화가 팍 식어버림. 뭐랬을 것 같냐. 김신부는 질문을 돌렸음. 태오는 벽에 머리를 툭 기대고 눈을 굴리며 골똘히 생각함. 절 죽이고 싶다고 하지 않던가요? 증오스럽다고 끔찍하고 악마같다고. 꼴도 보기 싫다고 했겠죠. 하는 행동은 비정상인 주제에 내뱉은 말은 정상적이기 그지 없음. 정작 추론의 대상은 완벽하게 선을 넘어가 버렸지만 말임. 뭐 비슷하다. 김신부의 중얼거림에 태오는 머리를 감싸쥐고 푹 숙임. 애새끼임. 김신부는 한숨이 푹 나옴. 사실 김신부도 딱히 상식적인 인간은 아니었음. 구마사제에게 상식이란 적당히 늬예늬예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로는 발로 뻥차서 깨버려야 하는 것임. 김신부는 세상을 적당히 꼬아볼 줄 알았음. 너 그렇게 최준호가 좋냐. 김신부가 툭 내뱉었음. 태오는 잠시 침묵했음.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간이 침대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음. VIP 병실이 있는 층이라 소음도 적음. 그래요. 좋습니다. 좋아서 아주 미쳐버리겠네요. 김신부는 태오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쓰게 웃었음.
문제가 생겼음. 준호의 '사고'를 목격한 눈이 많았기에 관할 경찰에서 조사가 들어간 것임. 박철민 쪽을 처리하느라 보고를 늦게 받은 최상무가 뒤늦게 알아차렸을때는 이미 늦어버렸음. 발빠른 기자 하나가 준호의 진단서를 빼돌림. 의사의 소견서에는 '자살 시도' 와 약물중독으로 인한 상세한 증세가 친절하게 좌르륵 읊어져 있었음. 신진물산의 조실장과 함께 다니던 성직자 두명 중 하나, 그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이틀도 채 걸리지 않음. 비록 빵에서 나온 상태라지만 조태오의 행적은 아직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음. 방점이 찍히자 언론이 들썩였음. 성직자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인 자살과 약물중독을 카피라이터로 방송국에선 제멋대로 소설을 써댔음. 어떤 리포터는 강남의 모 클럽에서 조실장과 함께 있던 남자가 그 사제가 아닌지에 대한 추론을 방송에 내보냄. 제각각인 목격자의 증언 때문에 금새 가라앉긴 했음. 그런거 아냐? 아님 말고~ 식의 기사가 마구잡이로 쏟아지기 시작함. 도철 팀의 노력으로 준호의 신상이 보호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였음.
도철은 침대에 누워 창 밖만 보는 준호에게 다가가 큼큼 목을 울렸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죠? 도철의 말에 준호가 대답함. 그렇네요. 도철은 가지고 온 과일바구니를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의자를 끌어다 앉았음.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제서야 고개를 돌림. 도철은 파일에 넣어두었던 준호의 사진을 떠올리고 그 간극에 깜짝 놀랐음. 해맑게 방긋 웃고 있던 잘생긴 청년은 어디로가고 섬뜩한 냉기를 품고 가시를 두른 냉정한 청년이 있음. 죄송합니다만 형사님. 제가 몸이 안좋아서요. 대놓고 거절의 표현임. 도철은 딱딱하게 굳었음.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했음. 도철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설명했음. 언론에선 준호를 조태오의 피해자가 아닌 동범처럼 다루고 있었음. 조실장의 타락한 파트너. 약을 즐기며 유흥에 빠진 퇴폐하고 불미스러운 관계. 준호는 피식피식 웃었음. 상상으로만 생각했었던 것들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음. 지옥이 여기구나- 준호는 생각함. 도철은 간곡하게 말을 이었음. 당신은 피해자입니다. 조태오 그자식이 당신을 납치해 감금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문을 가한 거란 말이에요. 피해자로서 증언하라는 도철의 말에 준호는 입을 다물었음.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림.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간 꼴임. 도철이 보기에 준호는 그랬음. 도철은 김신부를 만나 준호에 대해 이야기했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고. 이대로 가다간 신학대로 돌아가기는 커녕 태오와 엮여 감옥에 갈지도 모름. 김신부는 눈썹을 찌푸렸음. 리얼 살-자가 실패했다고 이젠 사회적으로 자살하려고 함. 미치고 환장할 노릇임.
도철과 헤어진 김신부는 그대로 준호가 입원한 병원으로 갔음. 오늘도 여전히 망부석이 되어 있는 조태오가 눈에 들어옴. 김신부는 혀를 찼음. 존나 저새끼 때문에 애 인생 뒤집어지게 생김. 아니 이미 뒤집어졌지. 여튼 태오를 무시하고 병실 문을 열려는데 말을 걸어 옴. 부제님이 왜 증언을 안하는걸까요. 혼란스러운 목소리임. 김신부는 문고리를 돌리던 손을 멈추고 태오를 내려다 보았음. 내가 다 저질렀다고 그대로 경찰에 말하면 되는데 왜 안그러는지 모르겠네요? 막지도 않는데. 김신부는 고개를 들고 천장을 보며 한숨을 팍 쉬었음. 니가 저 꼴로 만들어 놓고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뭐 답이 나오냐? 심퉁맞은 소리가 흘러 나왔음. 존나 패서 쫒아내고 싶은데 그래봐야 다시 돌아와 집 지키는 개가 될 게 뻔함. 야. 김신부가 퉁명스럽게 불렀음. 태오가 짜증스럽게 올려봄. 준호가 너 좋단다. 어떻게 생각하냐. 태오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음. 그게 말이 되냐는 듯 존나 어이가 없는 얼굴임. 김신부가 픽 웃었음. 그게 내 심정이다 또라이 새끼야. 나는 최준호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네 생각은 어떻냐. 존나 선문선답임.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음. 김신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문고리를 돌렸음.
데스크에 앉아 덜 익은 라면을 꾸역꾸역 입에 넣던 도철은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와 소리치는 윤형사의 말에 사례가 들릴 뻔함. 조태오가 왔어요! 도철과 오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음. 뭐? 걔가 여길 왜 와? 혹시 어디 탈세라도 하다가 걸렸대냐?? 도철의 말에 윤형사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급하게 소리침. 그게 아니라! '자수하러 왔으니까 서도철 형사님 불러 주세요~' 라고 하더라구요. 아 깜짝 놀라서 진짜. 도철은 입에 든 라면을 뿜어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