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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토르1

 

 

 

 

 

 

토르가 죽었다.

 

자신의 영혼을 매개체 삼아 아스가르드인들을 태운 우주선을 지구로 보내고 토르는 붉은 혓바닥이 날름거리는 니블헤임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시신은 고사하고 그를 기릴 수 있는 무엇하나 남기지 않은 채 그렇게 사라졌다. [폐하는 서거하셨소.] 헤임달의 혜안에 '혹시'라는 기대는 근거없고 무쓸모한 감정소모일 뿐이다. 그렇게 아스가르드인들은 살아남았다. 

 

위대한 영웅 토르 오딘슨.

 

 

 

 

 

 

 

 

-퍽이나.

 

로키는 싸늘하게 웃으며 술잔을 던졌다. 쩅ㅡ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멍청한 토르

 

싸늘한 목소리가 가차없이 넓은 홀을 퍼져나갔다. 미드가르드인들의 배려(가 없었더라도 강제로 이주할 생각이 만반했지만) 덕분에 노르웨이의 뻥 뚫린 절벽 어드메에 아스가르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로키는 임시로 마련된 왕좌에 몸을 깊이 파뭍었다. 녹빛 눈동자가 까맣게 가라앉았다.

 

-멍청한건 너야

 

평온을 깨는 불협화음에 로키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발키리의 임무는 왕을 지키는 거라지?

-흠.

-이젠 내가 왕이니 존경을 표하지 그래.

-난 이미 너를 향한 최대의 존경을 보여주고 있는걸?

-그것 참 과분한 영광이군.

 

한껏 비꼬는 언사에 쯧- 브룬힐데는 혀를 차며 회색 자루를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왕좌 앞에 떨어진 그것을 흘긋 보던 로키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묠니르?

 

어꺠를 으쓱하는 브룬힐데를 보며 로키는 몸을 일으켰다.

 

-이걸 어쩌라는거지? 

-아스가르드를 재건하는데 쓴다.

-뭐?

-부서져 힘을 잃었다지만 잘 가공하면 아스가르드를 띄울 토대가 되어줄거야.

-........

 

로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내려왔다. 평소 장난의 신 답지 않은 엄숙한 음울함에 브룬힐데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먼지 묻은 자루 사이로 묠니르의 은색 조각이 보였다. 죽어가는 별의 빛나는 파편으로 만들어진 최강의 망치. 누이의 손에 부스러지기 전 까지 토르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명실상부한 그의 파트너였다. 거기에 담긴 수많은 용기와 무용따위 로키는 알 리가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허락할 수 없다.

-로키!

-이건 내가 보관하지.

 

 로키의 손이 허공을 스치자 자루가 사라졌다. 브룬힐데는 이를 갈았다.

 

-네 형은 죽었다. 로키 오딘슨.

-덕분에 내가 왕좌에 앉아있지.

-그는 돌아오지 않아.

-...지겹군.

 

궁니르가 바닥과 마찰하자 쿵-하고 홀 전체가 크게 울렸다. 로키는 그를 지켜야 할 사명을 지닌 발키리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왕좌로 향했다. 브룬힐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놀랄 만큼 감정이 억제된 목소리였다. 

 

-백성이 있는 곳이 곧 아스가르드다.

 

강인한 목소리가 담담하게 퍼져나갔다.

 

-아스가르드인들의 삶이 곧 ‘전 폐하’의 의지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Your majesty

 

 

 

 

 

 

 

바람이 불어오는 절벽 가, 익숙한 작은 바위 옆에 선 로키는 올파더의 육체와 영혼이 아스라져 발할라로 떠나던 순간을 떠올린다. 감히 아버지의 영광스런 마지막이 아닌, 슬퍼하며 몸을 떨던 형의 모습만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정처없이 흔들리던 푸른 눈동자를 기억한다. 몰려온 먹구름 밑으로 서늘하게 가라 앉아 동생을 노려보던 형의 처절한 분노와 슬픔을 기억한다. [이건 다 네 탓이다.] 한 글자씩 씹어삼킬듯 내뱉던 분노에 찬 천둥의 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한 때, 난 널 아꼈지만...] 어딘가 홀가분한 것 같은 형을 기억한다. [너는 너, 나는 나니까. 서로 제 갈길 가자]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딱 잘라 못박은 주제에 바이프로스트에 도착한 '구원자'를 보며 믿고 있었다는듯 환하게 웃던 멍청한 형을 기억한다. [네가 진짜라면 안아줬을텐데.] 그런 형의 등에 칼을 박을 순간을 진심으로 기대했었다. 로키는 지리멸렬한 다람쥐 쳇바퀴를 부술 생각이 없었다. 평범한 형제 관계? 적당히 우애 넘치는 가족 연기?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선 안되었다. 철이 들면서부터 천천히 자각해온 어둡고 위험한 감정을 억누르며 로키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부정하고 밀어내는 것 뿐이었다. 그 따위 얄팍한 방법 뿐이었다. 

 

-묠니르 조각으로 아스가르드를 재건하는게 옳다고 생각해?

 

답이 없을 질문이 서늘한 북서풍을 따라 흩어졌다.

 

-알아 당연해. 그게 형이니까.

 

로키의 손이 공중에 우아한 선을 그렸다. 푸른 번개의 잔상과 함께 부서진 묠니르의 조각들이 나타났다. 잠깐 그것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로키는 금새 눈을 감았다. 

 

-인정할게. 내가 형을 사랑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푸른 번개가 튀는 묠니르를 바라보며 로키는 울듯이 웃었다.

 

-앞으로도 형은 내 안에서 영원을 살겠지. 나의 아름답고 강한 천둥의 신이여.

 

 

 

 

 

 

 

 

 

 

과거 죽어가는 별의 잔해였던 광석들은 아스가르드 최고의 석공과 건축가들의 작업장으로 전달되었다. 작업은 활기를 띄었고 막힘없이 이루어졌다. 고향을 잃은 이들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떠오르기까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을 가졌다. 

 

단 한 명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