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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토르2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토니는 답지 않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트를 점검했다. 손끝이 화면을 스치자 파츠가 미세하게 착-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래프는 안정적인 수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법무팀의 귀찮은 면담도 큰맘먹고 해치운 참이다. 오늘은 페퍼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토니는 반쯤 남은 소다캔을 원삿하며 한손으로 스크린을 훑었다.

 

끼익-

 

불편한 소음이 작업실 벽을 때렸다. 

 

-오...제발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토니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댁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는 잘 알겠지만... 말없이 사적인 공간에 침입하는건 삼가해달라 분명 전하지 않았던가? 

-미안하게 됐군. 급하다보니.

-아~ 그래그래. 미리 말해두겠는데 예의 그 세계여행은 거절하겠어.

 

토할뻔 했다고-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수트의 파츠 접합을 마무리하며 토니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삑-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수트가 철컥철컥-기분좋은 소리를 내며 조립되었다. 신경질적으로 뒤돌아선 토니는 마법사와 함께 온 익숙한 인물을 보고 조금 놀랐다.

 

-토르?

 

토니가 무의식적으로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자 토르라 불린 인영이 눈에 띄게 뒤로 물러섰다. 

 

-잠깐, 설명이 필요할테니 일단 좀 앉지.

 

'마법사'가 손을 휘젓자 소파가 나타났다. 또 이거- 토니는 윽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풍스러운(촌스러운) 가죽 소파에 앉게 된 토니는 불만족 스러운 얼굴로 초콜릿색 소파의 가죽 손잡이를 꽉 잡아 쥐었다. 내뱉고 싶은 온갖 말을 꾹 참았더니 처음보다 훨씬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토니는 그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으로 닥터 스트레인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눈은 흘끗 그의 뒤에 서있는 토르를 보면서. 주눅든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행동거지가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천둥의 신과 달라보여 의아하다.

 

-당분간 자네가 토르 오딘슨의 거처를 책임져 줬으면 해.

-뭐?

 

토니가 뭐라 더 입을 열기도 전에 닥터 스트레인지가 손바닥을 향하도록 오른손을 뻗었다. 토르는 머뭇머뭇 두꺼운 손을 들어 닥터의 손 위에 겹쳤다. 닥터가 고개를 까닥이며 이끌자 토르가 주춤거리며 걸어왔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 어색했지만 토니에게 그보다 더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토르의 태도였다.

 

-토르 오딘슨. 이 자를 따라가도록 해.

-따라가...?

 

근사한 테너톤, 완벽한 성인남성의 목소리가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며 어눌하게 흔들렸다. 토니의 입이 저도 모르게 조금 벌어졌다. 

 

-토니 스타크야. 앞으로 널 도와줄거다. 뭐하나 스타크. 

 

어? 나 뭐?- 토니가 멍청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손을 잡아주게.

 

닥터의 말에 토니는 엉거주춤 일어나 손을 뻗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하마터면 휘말릴 뻔 했다. 

 

-잠깐잠깐, 기다려봐.

 

토니는 정색을 하며 이마를 짚었다. 도무지 이해 안되는 것 투성이다.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 양반이 '직장 동료'의 손을 잡아서 무슨 신랑에게 신부를 건내주는 아버지처럼 굴고 있다. 더 환장할 것은 토니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흠칫 놀란 토르가 닥터의 손을 꽉 잡고 그의 뒤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대단하기 짝이없는 자칭 '가장 센 어벤저스'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 큰 덩치로 저러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우스꽝스러웠지만 마음껏 놀릴 수도 없었다.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눈 앞의 마법사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당하지만 이는 분명 심각한 상황이다.

 

-아스가르드인들이 노르웨이에서 그들의 왕국을 재현하기 위해 힘쓴다는 건 알고 있나?

-알다마다, 덕분에 귀찮게 불려다녀야 했는걸. 가뜩이나 너덜너덜한 쉴드가 인력난에 시달리...

-그럼 토르 오딘슨이 죽었다는 사실은?

-...로키가 전해주었지. 솔직히 믿기진 않았어.

 

토니는 얼마전에 본 로키의 모습을 떠올렸다. 치타우리를 대동하고 침략자의 신분으로 지구에 왔을때조차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로키는 손대면 찔러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가시를 잔뜩 세우고 토르의 죽음을 알렸다. 토니는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이 차올랐다. 바튼도 활 대를 잡았었다지. 무슨 소리냐며 추궁하려던 찰나 로키와 함께 온 배너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재하는 바람에 다들 입을 다물었었다. 

 

-음 그럼 됐군. 토르 오딘슨은 사실 살아있었고 머리를 다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네. 그러니 당분간 자네가 돌봐주게. 어디 데려가지 말고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말고 은밀하게 말이야. 알겠나?

-그거 조크야?

 

어이가 없어진 토니가 반문하자 닥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세한 건 나도 확실히 아는 게 없어. 그러니 일단 토르 오딘슨의 거처문제부터 해결해주게.  

-너무 막연하잖아.

-지구의 운명과 관계되어 있다고만 말할 수 있겠군.

-....

 

닥터 스트레인지의 입에서 나온 '지구의 운명' 이라는 부끄러운 단어에 토니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토니의 비상한 상황판단력과 대처력은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가히 비범하다고 표현해도 옳겠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풀리는 이야기는 그런 토니 스타크의 이해범주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0과 1사이, 숫자로 표현 가능한 딱 떨어지는 과학을 신봉하는 그에겐 이 상황 자체가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일단 알겠어. 장발 양아ㅊ... 토르. 그래 머리를 다쳤다고?

 

자포자기 상태로 내민 토니의 손을 물끄러미 보기만 하던 토르는 닥터의 뒤에 숨어 나올 줄 몰랐다. 닥터는 괜찮다며 토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린애를 어르는 것 같은 모습에 토니는 벌써부터 속이 터졌다.

 

-그의 동료들에게 가지 않고 나에게 온 이유가 뭐지?

 

합당한 질문이었다.

 

-아는 자는 극히 적어야 해. 

 

핵심을 피해가는 대답에 토니는 위가 쿡쿡 쑤셔옴을 느꼈다. 내민 손이 계속 비어있다. 그 손을 물끄러미 보던 닥터는 등 뒤에 서있는 커다란 아기를 억지로 떠밀었다. 배부른 사자같던 당당함은 어디로가고 초식동물처럼 경계하는 토르를 보며, 토니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성큼 앞으로 나가 겁먹은 사자의 손을 꽉 잡았다. 맞닿은 살을 통해 퍼드득 떨리는 긴장감이 전해져 온다.  

 

-손은 왜 잡으라는 거야.

-사람에게서 떨어지면 불안해하니까. 퇴행환자의 방어기제지.

-의사선생님처럼 대답하십니다?

-...부정은 않겠네.

-토르는 아스가르드인이잖아.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

-아, 그것 말인데. 토르 오딘슨은 지금 평범한 인간 상태야. 그 점도 유의해서 보살펴주도록.

-...뭐? 이봐, 잠깐 기다려!

 

토니는 허망한 얼굴로 닥터가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보다가 퍼뜩 손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토르가 불안해하며 이쪽을 보고있다. 토니는 문득 토르의 한쪽 눈동자가 푸른색이 아닌 주황빛으로 빛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와서 더 놀라기도 새삼스럽다. 악당들과 싸운 것도 아닌데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게 굉장히 피곤하다. 토니는 주머니를 뒤지다 멀지 않은 탁자 위에 놓인 폰을 발견했다. 겨우 다섯걸음이었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는 토르를 족쇄처럼 달고 가려니 쉽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며!- 토니의 내적 외침은 허무의 공간을 갈랐다. 

 

-그래도 죽은게 아니라니 기쁘다 해야하나.

 

듣는 자가 멀쩡한 상태라면 결코 못할 말을 내뱉어 본다. 솔직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토니는 내선번호를 누르며 픽 웃었다. 

 

 

 

 

 

 

 

 

 

 

 

 

 

 

 

페퍼에게 잔소리로 흠씬 두들겨 맞은 결과 일주일 정도 시간을 벌었다. 토니는 토르를 데리고 뉴저지 외곽에 위치한 작은 별장으로 향했다. 스타크사나 쉴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서류상 깨끗한 장소였다. 산림공원을 끼고 흐르는 강의 상부에 위치한 인적이 드문 작은 별장. 토니는 제 손을 잡고도 모자랐는지 정장 자락을 꽉 쥐고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토르를 이끌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황량함과 초췌함이 감돌았지만 믿을 만한 고용인 너댓명이 도착하는 내일을 전후로 바뀔 것이다. 토니는 참을성 있게 토르를 이끌고 나무 계단을 밟았다. 굴러다니던 낙엽이 밟혀 파삭거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여기 어디야?

 

닥터 스트레인지와 작별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 만큼은 그가 아는 토르라 어쩐지 안타까워졌다. 

 

-당분간 네가 지낼 곳.

 

토니는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언젠가 쉴드나 다른 단체의 눈에서 피해야 할 날이 올 때를 대비해 은밀히 마련해 둔 곳이었다. 구입 당시에 수리를 좀 해두긴 했다. 그래도 건장한 두 남자가 들어가자 삐걱이는 소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토르의 손을 겨우 떼어내고-비싼 정장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소파와 가구에 씌워진 흰 천을 벗겼다. 먼지가 나풀거리며 퍼져나간다. 토니의 정장을 붙잡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토르가 조금 기침을 했다. 

 

-내일이면 사람들이 올 거야. 수리도 제대로 할거고... 식사는 인스턴트로 적당히 떼우자. 

 

토르는 답 대신 손을 뻗어왔다. 낯뜨거운 기분이 들었지만 토니는 어른답게 손을 내어주었다. 꼼지락 거리는 둔한 손을 잠깐 멍하니 내려다보던 토니는 이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 앉아서 기다려, 끝나고 손잡아 줄테니- 아이를 돌보는 것은 자신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은 천장과 좁은 공간이 안전감을 준 덕일까. 소파 한구석에 얌전히 앉아서 시선만 이쪽을 향해 고정시키고 있다. 

 

천을 치우고 불을 켜고 라디에이터를 작동시키는 등 매뉴얼로만 알고 있던 집안일을 직접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청소하는 토니스타크라, 하! 사진이라도 찍히면 장당 10만달러는 받겠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별 무리 없이 해낸다. 

 

그날 밤, 토르는 토니가 가져온 라임파이와 슈와마를 먹었다. 말없이 우적우적 먹는 토르를 곁눈질로 살펴보지만 그 어떤 징조조차 없었다. 토르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지구 뿐만 아니라 그가 종종 자랑하곤 했던 아스가르드의 황금빛 위용조차 집요한 물음에도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자 허헛- 하고 낮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것이 너무 순수하고 무해해서 토니는 답지 않게 먹먹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자네와 내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잖아?

 

토니의 우울한 독백에 토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슈와마를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그냥... 만나면 전처럼 같이 영화나 몇 편 보고... 멍청한 농담따먹기도 하고 그러려고 했지. 그 왜 자네랑 있다 보면 나도 단순해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참 편했어. 사실 얼마 전에 여러가지로 좀 힘든 일이 있었거든. 

 

조금 과장된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하던 토니는 문득 제 앞에 내밀어진 두터운 손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토르가 예의 그 잘생긴 접객용 미소(토니는 난봉꾼이라고 폄한)를 짓고 있었다. 타이밍이 참 기묘하다. 토니가 아무 생각없이 손을 잡자 토르가 꽉쥐고 갑자기 아래위로 붕붕 흔들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하더니 토르에게 있어선 보통보다 한참 위인 것 같다. 잠깐 저항하던 토니는 에라 모르겠다 힘을 풀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토르가 하는데로 떠오르는 손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좋아졌다. 

 

-오늘 나는 살아온 중 최고로 멍청한 토니 스타크가 된 기분이야.

-멍청한 토니 스타크.

-나쁜 말이야 따라하지마.

-멍청한 토니 스타크는 나쁜 말이다.

 

토니는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