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토르는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루를 꼬박 잤음에도 몸이 무거웠다. 끙끙거리며 상체만 겨우 일으킨 토르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탁자에 켜진 미등 불빛에 숲 그림자가 을씨년스럽게 아른거린다. 낮의 안정적인 분위기와 전혀 다른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토니가 팔짱을 끼고 침대 옆 일인용 의자에 앉아서 잠들어 있었다. 얼굴이 잔뜩 구겨진 것이 자세가 불편한 모양이다. 토니에게 손을 뻗다가 멈칫 다시 물렸다. 악몽은 꾸지 않았지만 머릿속을 지배하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진정제 성분이 제법 독했는지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툭- 팔뚝에 고정되어 있던 주사바늘이 억지로 뽑히면서 핏방울이 튀었다. 아픔을 참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토르는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도 신지 않고 문으로 향했다. 바닥의 차가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다가 멈춰서서 끙- 하고 작게 고민한다. 토니- 이름을 되내며 다시 몸을 돌린 토르는 비척비척 걸어가 침구를 끌어 모아 의자에 앉은 친구의 몸위에 덮어 주었다. 으음- 토니는 짧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용케 잠에서 깨지 않았다. 거미줄에 붙잡힌 먹잇감처럼 담요에 싸인 토니를 보며 토르는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긴 삶 속에서 아주 짧게 반짝이는 시간들이 있었다. 토르는 머릿속을 떠다니는 그리움의 편린을 잡고 싶었다. 빨갛고 파란 방패를 들고 웃는 남자나 하늘을 나르는 붉고 금색으로 빛나는 기계, 어딘가 주눅든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다니던 남자, 그리고 그가 화를 내면 튀어나오던 크고 어린아이같은 덩치도, 날렵하게 몸을 날리던 여자도 있었다. 활을 잘 쏘던 남자도 있었지. 뺨을 쓰다듬어주던 웃는 얼굴이 예쁜 여자도 빼놓을 순 없다. 며칠간 토르는 그것들을 잡으려 애썼다. 놓치면 전부 잃어버릴 것같았다. 필사적으로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애를 쓰면 쓸수록 그것들은 안개처럼 흩어져갔다.
그는 지쳤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한가지 토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가 잊고 있는 소중한것을 지켜내야 했다.
반드시.
토르가 '불완전한 목표'를 떠올리고 실천하려 할 때마다 오른쪽 눈이 은은하게 빛났다. 빛은 몸속을 날뛰며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토르의 영혼은 조금씩 좀먹히고 있었다. 아스가르디언의 강인한 육체가 분투하는 중이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천둥의 신은 천천히 죽어간다. 헬라가 불어넣은 불꽃은 소울 스톤과 결합하여 계약서가 되었다. 토르는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있다.
토르는 본능적으로 스톤을 이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소울 스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혼의 기억을 담고 있다. 우주가 생성된 이래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의 혼에 담긴 정보. 토르는 숲에 사는 사슴이 될 수도 있었고, 갓태어난 미드가르드인이나 죽기 직전의 노인이 될 수도 있었다. 원한다면 우주 끝에 사는 멸종한 종족으로 변할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것을 잃겠지만.
달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웠다. 맨발에 밟히는 풀잎 느낌이 간지럽다. 사슴은 잠시 멈추어 고개를 돌렸다. 토니와 식사를 했던 식당 창문이 보인다. 딱히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이내 사슴은 별장을 등지고 빽빽하게 들어찬 활엽수림으로 발을 움직였다. 숲은 두려움이 느껴지는 녹빛이었지만 어딘가 그리운 구석이 있었다. 풀잎이 스치는 소라와 함께 사슴은 그렇게 사라졌다.
살아남은 아스가르드인을 이끄는 왕으로서 로키는 제법 잘해내고 있었다. 오딘을 미드가르드의 양로원에 쳐박아 두고 엉망진창으로 통치했던 때와 반대로 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로키는 아스가르드인이 아니었다.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오딘과 토르가 죽은 후로 이 모든 막중한 사명을 뿌리치고 훌훌 떠나버렸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키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평소 로키가 가진 '존경을 받는' '인정 받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작은 노력으로 큰 것을 원하던 장난의 신이 그 어떤 뒷공작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처리하는 모습은 가히 신기하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도 헤임달은 안보이는데?
-순찰중이에요.
-얼굴 보기 힘들군.
브룬힐데의 대답에 로키는 인상을 찌푸리며 펜대를 기울였다. 죽은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일거리가 늘었다. 피난 과정에서 원로원 장로들이 다섯명이나 죽었다. 오천년 가까이 살았으니 호상이라고 말했을때 발키리는 무서운 표정을 지었었다. 로키는 결제를 마친 문서 몇 건을 씰로 봉인했다.
-왕을 감시하는 것도 발키리의 임무인줄은 몰랐어.
-흐음.
돌려 말한 축객령에 브룬힐데는 간단한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늘어난 일을 처리하기 위해 견습 서기관까지 동원해야할 정도로 아스가르드는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잡무를 처리하겠다 자청한 로키의 행동은 의외였다. '전 폐하의 죽음' 이후 로키는 권력에 아무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식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대관식에서도 조금도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미지근하게 굴었음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랬던 그가 아스가르드를 세우기 위한 마법수식을 기록하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돌계단을 내려와 슬쩍 올려다보니 집정실 창문이 열려있다. 그 너머로 로키의 뒷모습이 보인다. 브룬힐데는 크게 쉼호흡을 하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진심으로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서 헤임달은 굳은 표정으로 금색 눈을 빛냈다. 긴장된 침묵이 흐르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헤임달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닥터는 드물게 소파에 기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이미 떠난 에인션트 원의 조언이라도 구하고 싶을 정도였다. 티벳으로 찾아온 아이언맨이 토르의 실종을 알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가 별장 근처 와튼 주립 삼림공원, 나아가 뉴저지 전역을 뒤졌음에도 토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토르는 감쪽같이 증발했다. 모든 CCTV를 뒤졌고 무인기를 동원해 산과 강 바다를 수색했다. [댁이 그 기발한 마법을 이용해 어딘가 다른 행성에라도 빼돌린거 아니야? 오 제발 우리 기술력 탓은 하지 말아줘.] 라고 투덜거리던 토니 스타크를 억지로 돌려보냈었다.
-잘 되어가고 있나요?
문을 열고 들어온 브룬힐데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헤임달은 고개를 저었다. 젠장- 그녀는 어깨를 늘어트리며 축축한 돌벽에 기대었다. 담수호 근처에 만들어진 인공 동굴 속. 공기가 답답한 것은 결코 환경 탓만은 아닐 것이다. 닥터는 잠시 뜸을 들이다 알아낸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소울스톤' 그것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손목에 자리잡은 '타임 스톤'과 같은 힘을 지닌 것이다. 그것의 대단한 힘. 다가오는 위협. 타노스의 존재. 그의 목적. 먼지가 된 지구와 우주를 빅뱅 이전으로 환원시키려는 계획. 미드가르드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엇 하나 가벼운 것이 없었다.
-토르 오딘슨은 계약을 했어. 소울스톤을 매개로 했으니 엄청난 효력을 발휘할테지. 거스를 순 없어.
-계약의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나요?
브룬힐데의 다급한 물음에 헤임달이 대신 답했다.
-왕께서 정하신 일이라 저는 따를 뿐입니다. 전 페하께서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했고, 저는 페하의 선택을 되돌리거나 불응할 순 없으니까요. 그건 당신도 동의한 내용인걸로 압니다. 브룬힐데.
-그렇군. 고마워.
브룬힐데의 입가가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동시에 헤임달이 눈썹을 찌푸렸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재빨리 구식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다.
-...페하.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군?
-로키!
브룬힐데의 발 밑으로 황금빛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긴 얼음벽이 튀어나와 입구를 막아버렸다.
-오 설마, 같은 수에 또 당하겠나.
로키가 우아하게 공중에 떴다. 사방에서 문이 열렸지만 그것들은 번번히 로키의 얼음벽에 가로막혔다.
-그녀는 무사합니까?
헤임달이 침착하게 물었다.
-걱정마. 과거 연인과 미드가르드 어딘가에서 데이트라도 하고 있을테니. 아주 즐거울거야.
로키는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페하...!
-역겹군!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주제에 잘도 그따위 호칭으로 날 부르는구나.
-오해입니다. 당신은 아스가르드의 위대한 왕이시며 이는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천하의 헤임달이 아첨이라...
로키가 조소하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건 이제 됐어... 토르를 빼돌려 무슨 짓을 하려는거지?
-....
문을 여는 것을 멈춘 닥터가 뒤로 물러서 머리를 짚었다. 오 미치겠군, 남의 나라 왕실 다툼따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솔직한 소감이다. 오랜만에 인간처럼 말하며 닥터 스트레인지는 헤임달과 로키의 대립을 관전했다.
-말해라 헤임달. 아홉개의 왕국을 잇는 수문장이여. 내가 아스가르드의 진정한 왕이라면 너는 내 물음에 진실을 고할 의무가 있다.
-저와 한가지만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까.
로키의 눈썹이 꿈틀였다. 못마땅하지만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동의를 표한다.
-무슨 말을 듣더라도 토르 전 페하의 의지를 막지 말아주십시오.
-...약속한다.
[약속따위.] 로키는 코웃음 치며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헤임달도 그런 로키의 속마음이 보였지만 체념한듯 입을 열었다.
-토르님은 니플헤임으로 떨어진 헬라와 계약을 했습니다.
로키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 이름을 또 들을줄은 몰랐는데.
헤임달은 헬라와 토르의 계약에 대해 털어놓았다. 소울 스톤을 눈에 품고 타노스의 손에서 도망갈 수 있다면 토르의 승리, 소울 스톤을 빼앗기게 된다면 패배. 승리한다면 '모두' 살아남을 것이고 패배한다면 전 우주가 멸망한다. 나아가 아스가르드인들은 헬라의 손아귀에서 자유를 빼앗긴 죽음의 병사로 억만년을 살 것이다. 로키는 가만히 곱씹었다.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뭔가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왜 형을 데려오지 않았지?
-아, 그건 내가 설명하지.
관전중이던 닥터 스트레인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인피니티 스톤은 같은 자리에 모여선 안돼. 원래라면 테서렉트를 가지고 있었을 네 근처에 와선 안되었지만... 뭐 그건 이미 타노스의 손에 넘어갔을테지.
닥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로키를 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타노스의 함선에게 멸망당할 일촉측발의 위기 상황에서 로키와 토르는 아스가르드인들을 이동시키기 위해 테서렉트를 사용했다. 우주 공간에 두고 왔으니 타노스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로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가진 타임 스톤과 토르 오딘슨의 눈에 박힌 소울 스톤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험하다. 그래서 최대한 안전한 곳에 보호하려 했네.
-고작 미드가르드 개미들의 땅굴에?
-당신을 가두고 묵사발 낸 개미들의 세이프하우스지.
맹랑하군!- 로키가 버럭 외쳤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발언은 제 과거에 대한 조롱이었다. 로키는 주먹을 꽉 쥐고 건방진 인간 마법사에게 어떤 끔찍한 주문을 걸어볼까 고민했다.
-어쨌든 재건중인 아스가르드에는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 그런 곳에서 소울 스톤을 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잘난 외계인들께서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에게도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네. 머리를 잘라내도 자꾸 살아나는 단체라던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로키의 녹빛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개인적으로 토르를 찾아보겠다 말하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헤임달은 고개를 숙이고 브룬힐데에게 건 마법을 풀어달라 청했다. 로키는 기꺼이 그녀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주겠노라 약조했다. 헤임달이 뭐가를 숨긴 것이 아닐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천천히 알아내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로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토르의 생사였다. 브룬힐데의 속마음을 읽었을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살아있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멍청한 바보 형에게 이렇게나 동요해버린다.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미 인정해버렸으니 뭐 어쩌겠는가. 로키는 사무치는 그리움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토르를 찾아내면 이번에야말로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끔찍한 절망감에 몸서리치지 않을 것이다.
숨이 막혔다. 네 다리를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애쓸수록 포식자는 더욱 강하게 목을 조여왔다. 눈앞이 희고 까맣게 점멸했다. 토르는 이 느낌을 안다.
-커허어엉!
퓨마는 자신이 물고 있던 사냥감이 어찌된 일인지 쉽게 죽지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잠깐 턱에 힘을 빼고 크게 울부짖으며 비틀거리는 사냥감이 어서 포기하기를 바랐다. 이빨이 빠져나가자 피가 튀었다. 포식자의 뜨거운 입김이 식어가는 목에 닿으면 어떤 사냥감이든 죽음에 순응한다. 노련한 퓨마는 잘 알았다. 다시 목을 물려는 순간 갑자기 사슴이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퓨마는 근처 수풀속으로 납작 엎드려 숨었다. 사슴이 있던 자리에 인간이 서있다. 넝마가 된 흰 티는 피와 흙이 묻어 엉망이었고 찢어진 바지 군데군데 생채기가 선명하다. 남자가 손을 들어 목을 쓸어내리니 피가 흥건하다.
-아프다.
오랫동안 뮬리카강 근처에서 살아온 퓨마는 인간을 제법 본 적이 있었다. 주로 자전거 하이킹을 하거나 단체로 몰려와 야영을 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건드린 동족들이 사냥당하는 것도 보았다. 어째서 사냥감이 인간으로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퓨마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피했다. 그것은 토르에게도, 이 포식자에게도 다행인 일이었다.
토르는 피를 대충 닦아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슴으로서 며칠을 보냈더니 생각보다 밤눈에 익숙해졌다. 축축한 부엽토가 발바닥에 달라붙었다. 며칠전 토니의 저택에서 나왔을때보다 달빛이 밝다. 토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실없이 웃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와서 그것을 손등으로 거칠게 훔쳐냈다. 시야가 마구 일렁거렸다. 이름 모를 벌레소리가 요란하다. 다시 변하고 싶은데 오른쪽 눈이 너무 아파서 잘 되지 않는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목이 마르단 것을 깨닫는다. 결국 토르는 변신을 포기하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멍하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