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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토르5

 

 

 

 

 

뮬리카 강의 중하부 베츠토 호 옆에 위치한 작은 경찰서는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20년 근속의 베테랑 존 경관은 약간의 타박상을 입고 횡설수설하는 젊은 트래블러에게 따뜻한 커피를 건냈다. 남자는 다소 흥분한 듯 보였지만 눈에 띄게 이상한 점은 없었다. 구조된 사람들이란 다들 저렇기 마련이다. 하지만 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아래 위로 스캔했다. 그를 데려온 구급대원이 넌지시 마약검사가 필요할 것 같다는 소견을 주었기 때문이다. 존은 찢어진 등산복과 휘어진 등산 스틱을 보며 질문했다.

 

-토르를 만나셨다구요. 어벤저스?

 

존의 말에 남자가 yes- 대답했다. 분명히 그였어요- 거기엔 같은 설명을 또 해야하는것에 대한 짜증이 섞여 있다. 학교 휴일을 맞이해 툼스 폰드 길을 따라 트래킹 하던 도중 남자-이하 제임스-는 호수와 만나는 갈림길에서 곰을 발견했다. 시선을 고정한 채 가방 뒤로 손을 뻗어 휴대용 곰 스프레이를 찾으며 기도하는 사이, 호숫가 자갈 바닥에 코를 박고있던 곰이 고개를 들어 코를 벌름거렸다. 낯선 인간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두발로 서서 제임스를 바라보던 곰은 곧 콧김을 뿜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스프레이를 써 볼 생각도 못하고 등돌려 달아나다가 바닥을 몇번이나 굴렀다. 살짝 돌아보자 곰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때 제임스는 자신이 죽을거라 생각했다.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퓨마가 제임스와 곰 사이로 끼어들었다. 의외의 상황에 곰이 자리에서 멈춰 킁킁거리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잠시간의 짧은 대치가 끝나고 곰이 달려들자 퓨마는 도망치긴 커녕 달려들어 곰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곰이 도망갔나요.

 

존이 흥미롭다는 듯 끼어든다. 제법 빠져드는 설명이었다.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 끌기도 안됐어요- 곰이 앞발로 세게 내리치자 퓨마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번에야 말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토르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바닥에 나뒹굴던 퓨마가 토르였어요.

-흠....

-...경관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제임스가 한숨을 푹 쉬며 이마를 짚었다. 몇 번의 주먹질과 함께 곰은 커헝- 소리를 내며 숲으로 달아났었다. 잠시 곰이 사라진 방향을 보던 토르는 빙글 몸을 돌렸다. 영상에서 본 토르와는 달리 짧게 잘린 머리였지만 어쨌든 제임스는 자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그가 고맙다는 인사를 꺼내려는 찰나, 토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너, 지금 아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드러난 어깨위로 말라붙은 핏자국이 신경쓰였다. 제임스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바닥을 뒹굴며 긁힌 상처와 관절부위에서 약간의 고통이 느껴졌지만 견딜만했다. 그러자 토르가 씨익 웃었다. [나는 엄청 아팠다.] 더이상 SF가 공상과학이 아니게 된 세계다. 제임스는 커뮤니티의 '누가 더 센가' 따위의 심심풀이 글에 한 표씩 행사하는 정도의 평범한 젊은이였다. 유튜브에서 어벤저스에 대한 분석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다. 거기에 나온 토르는 북유럽 신 답게 고전적인 말투를 쓰는 호쾌한 영웅이었다. 다소 현대와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하여튼. [토르 맞죠? 정말 고마워요. 죽을뻔했어요.] 제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자 또 토르가 고개를 갸웃한다. 처음 느꼈던 위화감이 다시 솟아났다. 어벤져스는 어디있나요? 이 근처에서 나쁜 놈들이랑 싸우고 있었어요? 제임스의 질문에 토르는 잠깐 인상을 쓰더니 입가를 쓸었다. [몰라.] 어눌하다. 제임스의 머릿속에 토르가 아닌가?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도 일단은 생명의 은인이다. 해를 가할 것 같지 않았다. 긴장이 풀린 제임스는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울겸 조잘조잘 떠들었다. 토르는 빙긋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동생- 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가 몸을 굳힌다. [그 왜, 당신 동생이요. 뉴욕이 완전 박살나는 줄 알았...] [로키...] 기대했던 반응에 제임스가 약간 흥분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얼마전에 아스가르드인들을 이끌고 돌아와서 노르웨이가 시끌벅적하다는 둥, 근처 관광상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는 둥, 영양가 없는 가십거리였지만 의외로 반응이 있었다. [My brother...] 제임스는 그가 토르임을 확신했다. 상태는 좀 이상했지만 애초에 이들의 존재 자체가 '이상함'의 정의를 부수고 있는 판국이다. 토르는 껄껄 웃으며 제임스를 근처 국도로 데려다 주었다. [저기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다소 야생동물적인 관점의 말을 남기고 토르는 제임스와 작별했다.

 

-정리하자면 어벤저스 양반이 망치를 빙빙 돌리며 당신을 구해서 헤몬튼 로드로 데려다 주었다.

-묠니르는 없었어요. 오 제발... 머리가 아프네.

-망치가 없는 토르가 퓨마로 변신해 당신을 구해준거군요. 근데 왜 하필 인적이 드문 국도였을까요. 거 선심써서 시내까지 데려다 주질 않고.

-제길.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어쨌든 전부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이제 댁 뒤에서 상자 들고 대기하는 양반한테 날 검사하라고 해요. 빌어먹을 영장따위 보여달라 안할테니 마음대로 피를 뽑아 가라구요.

 

이야기가 얼마나 허무맹랑하든지 간에 사고경위서는 사실대로 작성해야했다. 존은 직원이 건네준 우편물 따위를 받으며 데스크로 향했다. 어디에선 어벤저스라 자칭한 자들이 강도질하는 세상이다. 설령 젊은 하이킹맨의 말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나라에서 할 일이다. 아무리 한적한 시골이라도 언제까지나 평화로울 수만은 없다. 존은 커피를 한모금 들이키며 컴퓨터를 켰다. 

 

 

 

 

 

 

 

 

 

 

 

 

 

토르가 사라진지 일주일이 가까워지자 토니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그는 다소 서먹해진 스티브와 연락을 주고 받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윈터솔저를 찾은 스티브처럼 자신도 토르를 찾길 바랐다. 그러나 호수 바닥까지 투과해 피사체를 추적하는 첨단 기술력도, 할렘가 네트워크를 이용한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도 감감무소식이다. 토니는 약간의 죄책감에 시달렸다. 반강제적으로 그를 떠맡긴 했지만 어쨌든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의 정신상태로 달아날수 없을거라는 안일한 판단의 대가가 이꼴이다. 왜 자신을 부르지 않았냐는 브루스의 타박에 평소대로라면 마법사가 어쩌구 잔뜩 변명했을 토니지만 입을 꾹 다문 것도 그 이유다. 

 

별장 주변에는 CCTV가 없었다. 다만 방범용으로 쓰이는 작은 알람장치는 있었다. 그날 밤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다. 처음에 토니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고하이테크 기계도 아니었기에 오작동을 일으켜 감지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뉴저지 인근에서 발생한 조난 사건의 경찰보고서가 바튼을 거쳐 토니에게 전달되었다. 곰에게 습격당한 여행자가 자신이 퓨마로 변신한 토르덕에 살았다는 비교적 황당한 내용이었다. 토니가 마른침을 삼키며 화면에 집중하는 동안 타이밍 좋게 닥터 스트레인지가 나타났다. 토니는 그와 함께 온 인물을 보고 잠깐 인상을 썼지만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긴 설명이 끝나자 토니가 혀를 찼다.

 

-찾기가 쉽지 않겠군. 지나가다 밟아 죽인 개미가 토르일수도 있단 소리잖아.

-입 조심해 감히 그 따위 천박한 비유를 쓰다니.

-워워, 언제 그렇게 형님을 걱정하셨나.

-내 형을 미아로 만든 주범인 주제에 뻔뻔하기 짝이없군.

-그만들 해요, 제발.

 

브루스가 대꾸하려는 토니를 말리며 둘 사이를 중재하는 사이, 바튼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토르가 있을법한 위치를 연산해 스크린에 띄웠다. 아직 소울 스톤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테니 곤충이나 식물보다 포유류로 변해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닥터 스트레인지가 덧붙였다. 

 

 

 

 

 

 

 

 

 

 

 

 

 

 

 

황금색과 녹색이 어우러져 찬란하게 빛나는 아스가르드가 천년이고 만년이고 존재할 거라고, 어린 토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빼먹은 숙제 때문에 한소리를 듣고 긴 소파 가장자리에 꼿꼿하게 앉은 아이를 보며 프리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녀가 들고 온 에메랄드색 화려한 찻잔에서 기분 좋은 향이 피어올랐다. 토르는 차를 싫어했지만, 향내음은 아주 좋아했다. 프리가가 직접 배합한 잎으로 우려낸 차는 특별히 더 진한 향이 났다. 토르는 우아하지 못하게 코를 킁킁거렸다.

 

-향기가 너무 좋아요 어머니.

-언젠가 향 뿐만 아니라 깊은 맛도 즐길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치면 너무 쓴걸요.

-후후, 로키는 아주 좋아하던걸?

-걘 그냥 어른 흉내를 내는 거에요!

 

프리가가 웃으며 심통난 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로키는 흉내 내는걸 참 잘해. 그렇게 계속 남을 따라 하다 보면 본심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단다. 자신을 곧이곧대로 못 보게 돼.

 

토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프리가가 미소지었다.

 

-어른인 '척' 하는 네 어린 동생을 잘 받쳐주렴. 그 아이가 흔들릴 때마다 지탱해주는 강한 형이 되어서.

-물론! 꼭 그럴게요. 전 로키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 아이도 널 많이 사랑한단다.

-우움...

 

토르가 끙 소리를 내며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왜 그러니?

-...그치만 걘 뱀으로 변해서 절 찔렀단 말이에요.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배가 너무 아팠어요. 열이 나고... 로키는 절 싫어하나봐요.

 

프리가가 고개를 기울였다. 

 

-로키는 네가 아주 좋아하는 '예쁜 금색 뱀'으로 변신했어. 형의 관심이 받고 싶었으니까. 

-그치만 날 찔렀다구요! 나... 난 너무 아파서...

-알아, 토르 그건 분명 로키가 잘못했어. 하지만 동생도 마음고생을 했단다. 얼마전에 고백하더구나.

-....뭐라고 했어요?

-형을 찌를 생각이 없었다고 정말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은데 형이 받아주지 않을까봐 굉장히 무섭다고 말했어. 너에게 버림받는게 가장 두려운 아이야.

 

프리가의 말에 토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있을때 로키가 햄이 잔뜩 든 보리빵과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었다. 토르는 심통이 나서 일부러 고개를 반대로 홱 돌렸었다. 로키는 [미안해...] 라고 겨우 한마디만 하고 돌아갔다.

 

-어쩌면 오늘 밤에 네 방문을 두드릴지도 모르지.

 

프리가가 윙크하며 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날 밤, 막 잠이 들기 직전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토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번째 노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활짝 열었다. 거기엔 금색 뱀을 든 로키가 긴장한 채 서있었다.

토르는 활짝 웃으며 사랑하는 동생을 맞이했다.

 

-안녕, 로키.

 

 

 

 

 

 

 

 

 

 

 

 

 

-안녕, 토르.

 

어두컴컴한 숲 속의 밤은 고요했다. 간간히 울리는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요한 적막이 안개와 함께 바닥에 깔려 으스러졌다. 우뚝 솟은 바위 옆으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상수리 나무가 수분에 먹혀 썩어가고 있었다. 낮에도 볕이 들지 않아 이끼가 촘촘하게 뒤덮인 죽은 나무 뿌리 따위가 널려 있는 작은 구덩이 속. 무채색 숲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명체가 있다. 또아리를 틀고 있는 황금색 뱀.  

 

-이런 곳에서 자는거야?

 

신사용 검은 구두가 축축한 부엽토 위를 스치는 소리가 났다. 로키는 오른쪽 커프스를 우아하게 걷어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팔을 뻗어 잠이 든 금색 뱀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본다. 금색 비늘이 피부에 착 달라 붙어왔다. 로키는 조심스럽게 제 형을 팔에 감아 들어 올렸다.

 

-어릴때 내가 선물로 줬던 녀석... 이름이 뭐더라. 난 이제 기억도 안나.

 

로키는 팔에 감긴 뱀의 얼굴을 보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서늘한 뱀의 비늘 너머로 뜨겁게 타오르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황금색, 토르의 색. 애틋함이 가슴을 저밀며 치밀어 오른다. 그 마음에 답을 한 것인지 뱀이 눈을 떴다. 푸른 시선을 정면으로 받자 환희로 온몸이 떨려온다. 

 

[로키]

 

뱀은, 토르는 검은 정장 위를 부드럽게 감고 올라왔다. 로키는 그가 좀 더 쉽게 움직이기 쉽도록 오른손을 굽혀 자세를 바로잡았다. 팔뚝을 타고 팔목 위까지 거침없이 올라오더니, 쟤 머리를 로키의 손등에 붙이고 기분 좋게 혀를 날름거렸다. 거부 따위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솔직한 반응이 유쾌하기까지 했다. 이럴 땐 내가 서리거인인게 도움이 되는군- 로키는 왼손으로 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키스했다. 

 

-변신이 풀리면 얼마든지 날 찔러도 좋아. 

 

토르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로키는 토니에게서 받은 발신장치를 바닥에 버렸다. 콰직- 구두 뒤꿈치로 가볍게 밟자 산산조각이 난다. 

 

녹빛 안개가 피어오르고 둘이 사라진 숲은 정적만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