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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토르 끝

 

 

 

 

 

헬라의 목적은 끝없이 계속되는 혼돈의 세상이었다. 토르가 타노스를 피해 숨어들수록 전쟁은 길어진다. 삶보다 죽음의 비중이 커질것이며 그로 인해 우주는 오랫동안 암흑기에 접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소울 스톤을 이용해 타노스와 맞서면? 우습게도 그것은 계약 위반이다. 아스가르드 백성들은 헬라의 손으로 떨어진다. 그녀로선 토르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이득인 셈이었다. 공정함을 강조했지만 현실은 교활한 장난이었다. 죽음의 신은 니플헤임의 깊은 곳에서 검게 물든 생명들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토르는 제 몸을 붙들고 여기저기 살펴보는 토니를 힘들게 떼어놓았다. 

 

-좀 진정해 스타크.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니 동생 아주 악질이야.

 

로키를 욕하던 토니가 통신으로 의사를 불러오라 소리치자 토르가 재빨리 끼어들어 필요없다는 말로 요청을 덮었다. 그 뒤론 옥신각신 난리도 아니었다. 아스가르드인에게 의사가 무슨 필요하냐고 토르가 호탕하게 웃자 토니는 불신에 찬 눈으로 회색 후드티를 까뒤집었다. 근육 위에 파랗고 빨간 멍이 가득하다. 토니는 경악에 찬 눈으로 토르의 얼굴과 몸을 번갈아 보았다. what the... 엉망이잖아! 잠깐... 목 뒤에 그건 뭐야, 잇자국인데...? 설마 이것도 로키야? 이런 정신나간 근친 호모사슴! 그 미친놈이 너한테 집착할때부터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미드가르드식 표현법은 무궁무진했다. 토르는 끌어올려진 옷자락을 내리며 곤란하게 웃었다. 

 

-토니, 할 말이 있어.

 

낯선 지구 문물에 적응하지 못해 시대와 뒤떨어진 면을 많이 보여주었던 토르는 어느샌가 부드럽게 화제를 바꾸는 방법을 터득했다. 불신에 찬 눈으로 천둥신의 위아래를 훑던 토니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걸 알려줘서 고마웠어. 그동안 신세 많이 졌다. 

 

토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워~ 꼭 다시는 못 만날 사람처럼 구는데. 만약 이게 영화였다면 모른척 무슨일있냐고 물어봤겠지. 소울 스톤이 댁 머릿속을 거시적으로 만들기라도 하나? 혼자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현자인 양 굴지 말라고. 그런 존재는 비전만으로도 족해.

 

숨 쉴 틈도 없이 다다다 쏟아진 말에 토르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오오-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심한 것만 골라서 배우는군- 가차없는 평가를 내린 토니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토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껄껄 웃었다.

 

-하하하 걱정 말게. 그냥 멀리 좀 갈거라 자네에게 먼저 인사한거야.

-멀리 뭐 어디? 죽으러라도 가나?

 

안그러려고 노력했지만 절로 퉁명스러운 말이 나온다. 토니는 턱을 쓰다듬었다. 입맛이 쓰다. 토르는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왜 죽으러 가겠나- 고개를 흔들며 부정한다.

 

-영웅의 길은 대체로 멀고 험난한 법이지.

-잠깐, 그거 영화 대사?

 

맞춰봐?- 실없는 조크였다. 토르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크게 웃었다. 토니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죄책감이 약간이나마 누그러지는게 느껴졌다. 그는 3인용 소파를 1인용처럼 쓰는 평소의 토르로 돌아와 있었다. 어색하게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몸을 잔뜩 움츠리며 불안에 떨지 않는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떠나야 한다는 말에 평소처럼 yes- 쿨하게 보내주자니 내키지 않았지만. 

 

-그리고...

 

토르가 어깨를 조금 늘어트리며 말했다. 

 

-자네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

 

어쩐지 확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토니가 뭔데- 라고 묻자 잠깐 머뭇거리던 토르는 이내 마음을 잡은 듯 눈을 감았다. 몸이 빛났고 순식간에-

 

-..........이런 장난 재미없어 토르.

 

토니는 눈앞에 나타난 인영을 확인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렀다. 그의 아버지, 하워드가 서있다.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리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소울 스톤이 단순히 겉모습만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님을 토니는 알고있다. 돌 안에는 우주를 이루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정보가 담겨 있다.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아버지인지 아닌지는 그의 이성이 이미 답을 내린 후였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 그리고 죽을때까지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말. 토니는 [자랑스럽구나.] 저를 안아오는 아버지의 낯선 포옹을 받았다. 솔직한 고백이 이어졌다. 본인의 모든 업적, 나비효과처럼 일어난 스스로가 심은 불행의 씨앗, 과오, 자식에게 짐을 떠넘긴 아버지로서의 비통함, 뒤따르는 솔직한 후회와 사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토니는 아버지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인물과 조우했다. 바에서 술을 들이키던 브룬힐데의 옆자리에는 그녀가 사랑했던 옛동료가 앉았다. 조깅하던 스티브는 벤치에 앉아 웃고 있는 페기를 만났다. 외로운 이들은 과거를 이야기했다. 후회나 고통은 잠시 잊는다. 듣고 싶었던 말을 듣고,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꿈같은 밤, 꿈같은 하루였다.

 

 

 

 

 

 

 

 

-정말 괜찮겠나.

 

벌써 세 번은 물어본 것 같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이 질문이 과연 토르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조금 헷갈렸다. 

 

-물론.

 

한결같은 대답이다. 토르는 닥터가 손목을 들어 올리길 끈기있게 기다렸다. 그리운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한 토르는 오딘이 떠난 노르웨이 절벽에서 닥터와 만났다. 멀지 않은 곳에 재건중인 아스가르드가 보였다. 날씨가 맑은 만큼 경치도 좋았다. 

 

-가지.

 

닥터가 말했다. 손이 올라갔고 그들은 사라졌다.

 

 

 

 

 

 

 

 

 

오딘은 첫 자식의 이름을 헬라로 지었노라 공표했다.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왕궁의 깊은 곳, 황금으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요람속에 갓난아기가 누워 있었다. 녹빛 눈동자 한쌍이 허공을 멤돌다 어느 한곳에 고정되었다. 그곳엔 언제부터 있었는지 한 남자가 서있다. 갈색 린넨 망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남자는 투박한 손을 들어 요람 속 아기의 볼을 쓰다듬었다. 

 

-미안하오, 시스터.

 

남자가 단검을 들었다. 강보에 싸인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채 꺄르르 웃기만 했다. 

 

그날 밤, 축제는 장례식으로 바뀌었다.

 

 

 

 

 

 

 

 

 

 

-고마웠다. 마법사.

-스티븐 빈센트 스트레인지. 스티븐이라고 부르게

-행운을 비네. 스티븐.

 

곧 헤어져야 하는데 이제서야 통성명이라니- 닥터가 허무하게 중얼거리자 토르가 손을 내밀며 예의 그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천둥의 신은 사소한 것에 신경쓰는 타입이 아니었다.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 토르 오딘슨은 더 먼 곳으로 갈 것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득한 과거로, 인피니티 스톤의 생성을 막기 위해 떠난다. 

 

-자네의 앞길에도 행운이 가득하길, 천둥의 신.

 

닥터가 손목을 들어올렸다. 작별의 시간이다.

 

 

 

 

 

 

 

 

 

 

 

 

 

 

 

 

 

 

 

-대단한 마법사치고는 허름한 곳에 사는군.

 

장작이 타는 소리가 요란하다. 고서를 정리하던 마법사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거의 잊고 있었던 이름 하나를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냈다. 돌아보자 예상했던 인물이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있었다. 각이 잡힌 검은 수트에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졌던 것일까. 마법사는 그에게 딱히 좋은 감정이 없었지만 칩거한지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완전히 '변해버린 뒤로' 저를 찾아온 첫번째 생명체가 하필 눈앞의 서리거인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나를 어떻게 찾았나.

-이래뵈도 천 년을 살아온 신이니까.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앉지.

 

그는 고개를 오만하게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마법사는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꽂았다. 

 

-그래 장벽을 몇 개나 뚫고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로키... 라우페이슨.

 

마법사의 말에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앞에서 대단한 마법사라고 한 말 취소해도 될까?

 

로키가 그로선 드물게 크게 웃으며 비꼬았다. 마법사는 눈을 크게 떴다. 10년만에 처음으로 놀랄만한 일이 생긴 것 같다. 

 

-설마... 로키 오딘슨인가.

-아마도.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미드가르드 개미치곤 성공했더군.

-흠?

-자식도 둘이나 있던데? 스티븐 빈센트 스트레인지.

 

오랜만에 남의 입을 빌어 듣는 본명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단어일 뿐이다. 마법사는 피식 웃었다. 

 

-이제 그 이름은 내것이 아니야.

 

목소리에 쓸쓸함이 담겨있다. 로키는 눈을 내리 깔았다. 

 

-이런 곳에 쳐박혀서 수호자 행세를 하고 있나.

-흠 그렇게 거창한 수식어는 네 아버지 오딘에게나 붙여. 나에겐... 그렇군, 감시자 정도가 적당하겠지.

 

로키는 소파 깊숙히 몸을 누이며 눈을 감았다.

 

-내 아버지는 오딘이 아냐. 그렇다고 로피도 아니지. 

 

알싸한 향이 피어올랐다. 로키는 눈을 반쯤 뜨고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보았다.

 

-들겠나?

-감사히.

 

잔을 들어올려 향을 즐기듯 여운을 주고 조금씩 들이킨다. 익숙해 보였다.

 

-네 형과는 취향이 반대군.

 

마법사의 말에 로키는 찻잔을 든채로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내 잔을 기울인다. 길길이 날뛰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감정의 동요를 기대했었다. 조용하다. 틈을 파고들 기회를 놓친 마법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찻잔을 들었다.

 

-용건을 말하게.

-멋대로 형을 보내버린 복수라도 할까 생각했는데... 어쩐지 미적지근해져서 말이야.

 

로키의 눈이 우울한 빛을 띄며 가라앉았다. 마법사는 가볍게 혀를 찼다. 눈앞의 남자는 생각보다 더 자신과 닮아있었다. 조약돌은 파도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버틸 뿐이다. 증오는 희석되어 뭉툭하게 변했다. 로키와 마법사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감시자' 로서 의견을 들려줘. 우주의 끝까지 보고 있다지? 타노스는 어때?

 

로키는 이야기를 조르는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장난의 신 답군. 생각을 입밖으로는 내지 않는다. 마법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순리니 흐름이니 말로 꺼내면 참으로 거창하다. 진실은 그보다 훨씬 단순한 것이었음에도 인간의 표현력은 고작 이정도다. 그래도 용케 말하는 법은 잊지 않았군. 자조적인 생각을 한다. 찻잔이 세 번 빌때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너는 어떻게 도르마무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

 

세상은 바뀌었다. 지금 인피니티 스톤은 이름도 없이 가공되지 않은 에너지의 집합체로 우주를 떠돌고 있다. 마법사는 소서러 슈프림으로서 우주가 질서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토르와 함께 도르마무를 만나러 가기 전부터 그는 이미 자신을 제외한 온 우주가 바뀐다는 사실을 인지했었다. 또한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키는 다르다. 그는 평범하게 인과의 굴례 안에 갇힌 존재였다. 

 

-...말레키스에게 들은게 있었어.

-에테르 말인가.

-콜렉터에게 넘어갔다고 들어서 추적했다. 뭐 여기까지 말했으면 더는 설명이 필요없겠지?

 

토르를 가두기 위해 만든 공간은 에테르, 즉 리얼리티 스톤을 이용한 것이었다. 로키는 오랫동안 텅 빈 오두막에서 지냈다. 형을 찾아가 다시 그를 가두고 처음부터 반복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그날 밤, 토르는 끝까지 '선'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다. 그 '선'을 로키에게서 보았다고도 호소했다. [우습군.] 일축된 차가운 말에 토르는 웃으며 로키에게 키스했다. [사랑한다 동생아.] 로키는 형에게 지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이기지도 못했다. 그렇게 형이 떠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오두막에서 나온 로키는 모든 것을 잃었다.

 

로키는 빠르면 몇 달, 늦으면 몇 년, 비정기적으로 마법사의 은신처에 들렀다. 가끔 외계 행성에서 구한 특별한 골동품 따위를 가져오기도 했다. 마법사는 답례로 차를 대접했다. 

 

 

 

 

 

 

아스가르드를 파괴할 수르트의 해골은 오딘의 비밀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죽음의 신 헬라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은 없다. 그저 오래 전 오딘의 첫 자식이 '헬라' 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바로 그날 살해당했다는 한 줄 글로만 전해지고 있다.

 

끊임없이 흐르는 강 위로 우뚝 서있는 아름다운 나라. 아홉 왕국의 수호자인 오딘이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아스가르드. '첫째' 왕녀인 토르 오딘슨은 요툰헤임의 로키 라우페이슨과 맺어졌다. 왼쪽으론 꽃잎이 날리고 오른쪽으론 옅은 눈이 내리는 특별한 결혼식이었다. 정략 결혼임에도 두 예비 부부사이 사이에는 신뢰와 사랑이 넘쳐 흘렀다. 모친인 프리가를 닮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공주, 예민해 보이지만 쑥쓰럽게 웃고 있는 요툰헤임의 왕자 로키 라우페이슨. 여기저기서 팡파레가 터졌다. 발키리들이 페가수스를 타고 모여드는 퍼포먼스까지, 아주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잊혀진 자가 그 모습을 지켜본다. 

 

타임 스퀘어가 보이는 작은 카페 2층, 로키는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넘겼다. 토니 스타크가 성공적으로 스타크 인더스트리 경영권을 이어 받았다. 캡틴 아메리카 추모 기념 행사가 성황리에 치뤄졌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신문을 접고 김이 오르는 커피를 들었다. 

 

지적 생명체가 사는 곳엔 갈등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린아이들이 뭉툭한 나무칼로 투닥거리는 것은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전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드가르드는 물론이었고 아홉 왕국도 종종 내분에 휩싸였다. 넓은 우주는 제각기 북적였고 잉태된 생명이 아슬아슬 끝까지 살아남기도, 허무하게 꺼지기도 했다. 그것이 세상의 순리였다.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는'가장 큰 위협' 이 사라졌을 뿐, 삶은 여전하다. 로키에겐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지만.

 

로키는 넓은 우주에서도 굳이 미드가르드에 자주 오곤 했다. 젊었던 오너가 손자에게 가게를 물려줄때까지 로키는 타임 스퀘어 구석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토니 스타크가 은퇴 했고 딸이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몸이 안좋다고 하던가? 로키는 스타크 그룹에 가해지는 몇 건의 테러를 막으며 그가 병마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제인 포스터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듣자하니 자는듯이 편하게 갔다고 한다. 장례식도 다녀왔었다. 명망있는 과학자이자 좋은 부모이기도 했던 그녀의 장례식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나타샤는 브루스 배너와 함께 여행중이다. 가끔 위험지역을 건널때는 몰래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일련의 행동은 토르가 말했던 '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 두기도 했고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도 나서서 막지 않았다. 그저 토르가 사랑했던 자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의미없는 집착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굳이 제 행동을 검열하지 않았다.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했다. 

 

두 세기가 더 지나서야 인간은 외계인의 존재를 알았다. 아스가르드에서도 가끔 지구로 내려왔다. 침략이나 전쟁 같은 야만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화적으로 원만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형이 사랑했던 자들은 이미 떠난지 오래다. 이제 미드가르드엔 그들의 후손이 살아간다. 토르를 떠올릴만한 것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에도 로키는 지구를, 아스가르드를 떠나지 못했다. 

 

 

 

 

 

 

 

 

 

 

-네 쪽에서 먼저 부를 줄은 몰랐는걸.

-사정이 있어서.

 

늙은 마법사가 소파에 앉아 웃는다. 로키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건너편 앉아 건내주는 찻잔을 받았다. 풍겨오는 향기가 어딘가 익숙하다. 

 

-자네 고향의 것이네. 어렵게 구했지.

-...고맙군.

 

어린 시절 어머니가 타 주었던 차였다. 어른들 앞에서 의젓하게 보이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시곤 했다. 이제는 차의 맛에 대해 평할 만큼 자랐음에도 지식을 논할 대상이 한 명밖에 없다. 찻잔을 입에 대는 로키를 보며 마법사는 주름이 가득한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그러고보니 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늘 오래된 고서나 두루마기 따위를 어지럽게 펼쳐놓았었는데.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로키는 본능적으로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다음 소서러 슈프림이 나타났어. 

-....

-이제 짐을 내려놓을때가 온 거야.

 

마법사는,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홀가분하다는 듯 미소지었다. 로키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후임은 아직 어리지만 총명해. 옛날의 나보다 훨씬 사려깊고 강해. 

-그런가?

-홀대하지 말고 잘 보살펴주게,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거라고 자부하지.

-흥! 그래봐야 개미는 개미지.

 

닥터는 눈을 감고 차를 들이켰다. 말은 저렇게 해도 도와줄 것임을 알 수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로키가 가져온 책을 펼쳐보지도 않고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이제 나에겐 필요없는 것이야- 찻잔을 내려 놓고 가빠오는 숨을 골랐다. 

 

-알아낸 것이 있네.

-힘겨워 보이는데? 사라지기 전에 빨리 말해.

 

퉁명스러운 비꼬기에 닥터는 희미하게 웃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이 상황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네 형.

 

고작 한 단어에 로키는 잠깐 숨쉬는 것을 잊었다. 

 

-흔적을 발견했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거야. 로키는 눈가를 찌푸리며 이마를 쓸어올렸다.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찻잔을 옆으로 밀어 놓고 동그란 레이더 장치를 내려 놓았다.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이자 위잉- 소리를 내며 스크린이 떠올랐다. 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자자리 성운이다. 

 

-그럼 내가 할 말은 끝난 것 같군...

 

닥터는 숙였던 등을 꼿꼿이 폈다. 몸이 소멸 직전의 별처럼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로키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잠깐만...

 

닥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앞에 선 장난의 신을 보았다. 그는 화를 내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무슨 감정을 표현해야 할 지 조차 잊은 것 처럼 보였다.

 

-나는...형을...

 

말라 비틀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의 그와 달리 자신감이나 오만함은 조금도 품지 않고, 로키는 드물게 망설이고 있었다. 미련한 친구여- 아마도 처음으로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로키를 그렇게 불렀다.

 

-더는 후회하지 말게.

 

 

 

 

 

 

 

 

 

 

 

 

 

 

 

어둡고 축축한 동굴 속에서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잠들었던 로키는 얼굴에 떨어진 물방울의 차가움에 억지로 눈을 떴다. 거친 화강암 벽에 기대 앉은 그는 지도를 펼쳐 다음으로 가야할 곳을 체크했다. 새로운 소서러 슈프림의 처소에 들르지 않게 된 것이 어언 30년이었다. 사자자리 성운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들 사이를 헤멘것은 50년 쯤 된 듯 하다. 지구의 시간으로 치면 천년은 지났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신경쓰지 않게 된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름 모를 수많은 행성에서 그의 기준으로 미개하기 짝이없는 생명체들을 통해 얻은 정보들을 조합한다. 물로 가득찬 행성에서는 꼬박 일주일은 바닷속에서 지내야 했고 밤마다 중력이 역전되는 행성에서 압사당할뻔도 했다. 철없던 어린시절에 형과 함께 상상해왔던 위험한 모험들을 지금 로키는 혼자서 체험하고 있다.

 

사자자리 성운에서도 거의 끝에 위치한 작은 행성. 위성이 두개나 딸려 있었고 환경도 지구와 비슷했음에도 이곳의 생명체들은 미드가르드와 다르게 진화가 더뎠다. 원주민들은 나라의 개념이 없이 작은 부족사회를 이루고 정착없이 이동하며 수렵행위를 했다. 이들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로키는 잔다르에서 사온 통역기를 두어번 흔들어 모래를 털어냈다. 그가 쫒는 것은 최근 갑자기 나타난 어떤 '신' 이었다. 이곳 원주민들은 외계 문명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약간의 문명의 잔재만 보여도 위대한 존재라고 찬양하며 두려워했다. 

 

잠을 잘못 잤는지 몸 여기저기서 뚜둑- 거리는 소리가 났다. 로키는 얼른 의문을 해결하고 이 행성을 뜨고 싶었다. 모래 섞인 바람을 막으려 하루종일 몸 주변에 베리어를 켜고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지긋지긋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발을 멈추지 않는다. 

 

 

 

 

 

-#@^%$$#$

 

검고 푸른 돌로 이루어진 산 위를 지나고 있던 로키는 어디선가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가파른 절벽 아래에서 원주민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짐승무리에게 쫒기고 있다. 땅을 몇바퀴 구르기도 하면서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아이는 퍽 애처로와 보였다. 그러나 로키는 고개를 돌려 그것을 무시했다. 아직 발달되지 않은 문명에 관여할 수 없다는 다큐멘터리 제작자 같은 심정은 결코 아니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함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해도 로키는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변덕을 부리는 것도 그만둔지 오래였다. 살기위해 버둥거리는 몸뚱이 따위 심장이 멎으면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로키는 그저 모든게 지겨웠다. 

 

그때였다.

 

쾅!

 

폭발음이 들렸다. 나무와 돌이 터지고 흙이 파헤쳐져 공중으로 흩어지는 강렬한 파공음. 로키는 큰 동요 없이 고개를 돌려 절벽 아래를 보았다. 원래라면 아이를 잡아먹었을 검은 털의 짐승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다. 부족원들이 온 것일까? 아니 그렇다기에 저 폭발은 그들이 일으킬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긴 창이나 활 끝에 불을 붙여 짐승을 사냥하는 수준이었을 텐데.

 

-괜찮니?

 

먼 거리였음에도 예민한 귀가 그것을 캐치해냈다. 로키는 심장이 덜컥이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손끝의 솜털까지 느껴질 정도다. 

 

-네 가족을 찾아주마.

 

익숙한 목소리. 로키는 오래전 잃었다고 생각한 뜨거운 감정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터져나오는 것을 억눌렀다.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신중해야 했다. 실망이야말로 지금의 로키에겐 가장 버거운 것이었다. 믿음이 산산히 부서지고 뒤따르듯 자신의 멍청함을 자각하는 과정. 끔찍한 경험임에 틀림 없다. 

 

짐승 한마리가 죽지도 않고 비척비척 일어나 으르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이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때 가려진 나무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러운 갈색 망토를 뒤집어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살려줄 구원자에게 뛰어갔다. 남자는 아이를 제 뒤로 감추었다. 검은 짐승의 발이 한발자국씩 내딛어 질때마다 로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쾅- 하는

 

 

 

 

푸른 번개

 

아- 로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환희인지 설움인지 모를 짖이겨지는 소리가 목 너머 저편에서 비틀비틀 밀려나왔다. 토르, 토르... 토르- 머릿속을 맴도는 형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아주 크게. 누구라도 들을 수 있도록

 

-토르!!!!!!

 

남자가 절벽 위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얼굴을 감추고 있던 망토가 벗겨지고 거기엔-

 

-로키...

 

어떻게 절벽을 뛰어내려갔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니 로키는 토르의 앞에 서있었다. 달리느라 몇 번 굴렀는지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아까 도망치던 아이가 넘어질때는 싸늘하게 비웃었던 주제에 로키는 지금 자신이 울고 있는 것도 몰랐다. 

 

-엉망이구나 brother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비록 담긴 의미는 로키의 brother 보다 훨씬 담백한 것이었음에도.

 

-머리... 길었네. 눈은 여전한데? 그... 인피니티 스톤이 계속... 아니 아니지, 그보다 몸은 어때?

 

본인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주절주절 되는대로 떠드는 동생을 보며 토르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가 빨간 눈으로 로키를 흘끗 보다가 다시 토르의 뒤로 몸을 숨긴다.

 

-일단 이 아이를 마을로 데려다 주자.

 

토르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 로키는 형의 뒤를 따랐다. 토르에게 안긴 아이는 어깨 위로 목만 빼꼼 내밀며 로키를 본다. #$@#?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방긋 웃었다. 로키는 통역기를 켤 생각도 못하고 얼떨결에 따라 웃어주었다. 

 

 

 

 

 

 

 

보라색 풀이 자라고 모래 섞인 바람이 지나가는, 드문드문 검고 푸른 돌들이 가득한 화려한 행성. 이곳의 밤은 미드가르드의 사막처럼 기온이 낮았다. 로키는 세 번째 환상 속에서 뜨겁고 차갑던 사막을 떠올렸다. 토르와 함께 있으니 터지는 옛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괜찮은거야?

 

로키는 청색 각진 운모위에 앉아 먼곳을 응시하는 형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이 주황색으로 빛난다. 그것은 그가 가진 '저주'가 끝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일까. 로키는 아는 것이 없다. 예전에는 모든 것을 제 손안에 두어야만 만족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다. 그것은 포기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타협에 가까웠다. 못 본 사이 토르는 더 차분하고 조용해졌다.

 

-잠을 오래 잤다. 너무 많이 자서....

 

토르가 말 끝을 흐렸다. 로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불때마다 토르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황금빛이다. 길어진 머리카락은 날개뼈까지 내려와 있었다. 전처럼 정돈해 묶지 않고 갈기처럼 마구 풀려있다.  

 

-아스가르드에 가봤어?

 

갑자기 토르가 물어왔다. 로키는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대답했다. 무사히 강성하고 있어- 토르의 친구들은 결혼을 했으며 아이를 낳았다. 전쟁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아홉 왕국은 매우 평화로웠다. 성은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났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 위그드라실의 자비로 마력이 깃든 나무가 도시의 근간을 세우는데 이용되었다. 착취는 없었고 지배도 없었다. 정복은 그들과 거리가 먼 단어가 되었다. 토르 오딘슨과 로키 라우페이슨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토르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상처가 되는 이야기였으므로. 로키는 아스가르드 도서관에 숨어들어 보았던 여러 역사를 읊었다. 목소리가 다정했다. 이야기꾼 동생의 말에 토르는 솔직하게 기뻐했다. 

 

로키는 토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인피니티 스톤이나 타노스, 눈에 박힌 소울 스톤은 왜 그대로인지 따위의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토르와 함께 있었으므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로키.

-말해.

-네가 오는 걸 봤어.

-...꿈에서?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누님을 죽였다.

-형은 제 할 일을 한거야.

-그녀는 아주 작았어.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숨을 쉬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주 연약했어. 내가... 볼을 이렇게...건드리니까 웃더구나.

 

정말로 눈앞에 있는 아기를 건드리듯 손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난 그런 누님의 목에 칼을 박았어.

-토르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세상을 지킨거야. 형이 입버릇처럼 지겹게 말하던 영웅.

 

로키가 초조하게 말했다. 토르는 로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색이 각기 다른 눈에서 눈물이 잔뜩 흘러내렸다. 토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노라, 지금 이 순간 왜 숨을 쉬고 있는지 어째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노라 처절하게 고백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원주민들의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로키는 몸을 일으켜 토르의 앞에 섰다. 고개 숙인 토르는 기척과 그림자에도 움직임 없이 조용히 앉아 있다. 로키는 대답 대신 형의 머리를 감싸 안아 주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토록 원하고 바라왔던 토르다. 고개를 숙여 황금색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마른 모래냄새가 났다. 토르가 손을 뻗어 로키의 허리를 감쌌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토르의 말에 로키는 나도 그래- 진심을 털어 놓았다. 

 

토르는 망가졌다. 그것은 로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 넓은 우주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결코 존재를 허락받지 못했다. 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것이라곤 토르에겐 로키, 로키에겐 토르, 서로의 존재 뿐이었다. 피가 섞인 것은 아니었지만 형제로서 함께 자란, 나아가 몸까지 섞은 무어라 간단히 정의내릴 수 없는 이상한 관계. 

 

어디로 갈까?

모르겠다.

생각해본 곳이 있어?

없어.

그럼 일단 잔다르로 갈까. 좋은 우주선을 한대 뽑아서 우주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거야. 딱히 목적이 없으면 뭐 어때. 형이 좋아하는 영웅놀이도 눈감아 줄게.

...그것도 좋겠지.

 

토르가 고개를 들며 힘없이 웃었다. 로키는 형의 머리를 감싸던 손을 내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드러난 이마에 키스했다. 두개의 달이 은은하게 빛났다. 

 

사랑해 토르.

사랑한다... 로키.

 

외로운 둘은 떠날것이다. 어디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