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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시 루이스 - 상


로키토르




달시에겐 꾸준히 신경 쓰이는 남자가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기고 흰색 가운을 걸친 그는 얼핏 의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달시가 남자를 보는 곳은 퀸즈 외곽에 위치한 정신의학 센터로 이곳의 의사들은 가운을 입지 않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환자들을 제압하려면 다리를 가리는 긴 옷은 방해가 될 뿐이다. 의사를 비롯한 간호사나 활동보조사들은 짧고 편한 유니폼을 입었다. 달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전하군."

카트를 끌고 들어오던 달시가 문턱에 걸려 몸을 휘청이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오만하게 말했다.

"트집 잡기는 정중히 사양할게요."
"그럴 마음 없었는데 방금 투지를 불러 일으켰어."

침대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안나가시나요? 날이 많이 풀렸는데."

달시가 약봉지를 들고 묻자 그가 피식 웃었다.

"지겹게 말했을 텐데. 서리거인은 서늘한 곳을 좋아해."

멀쩡한, 달시의 사심을 살짝 섞자면 우아하고 잘생긴 남자가 이런 중증 정신병동에 갇혀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자신을 아스가르드라는 신들의 세상에서 왔다고 말했다. 딱히 이상한 주장은 아니었다. 이곳에 머무는 많은 환자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세계를 꾸리고 있다. 달시는 차트를 들고 병실을 살피며 몇가지 항목을 체크했다.

“약은 잘 먹고 있죠?”
“물론.”
“제러드를 너무 놀리지 말아요. 당신 담당의잖아요.”
“그 멍청한 개미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잘도 명함을 달고 있더군.”
“그런 태도를 보이지 말란 거예요.”
“차라리 네가 날 전담하는 게 어때?”
“오, 로키. 달콤한 제안이지만 전 아직 인턴인걸요. 5년은 더 굴러야죠.”

달시는 싱긋 웃으며 샌드위치가 담긴 도시락과 플라스틱 물병을 건넸다. 오늘 환자들은 퀸즈 외곽의 작은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정기적인 바깥구경이었지만 그녀는 로키가 나가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해가 안 되네요.”

로키는 도시락과 수저를 대충 받아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리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루 종일 좁은 방에만 갇혀 지내면 지겹지 않나요? 흔치 않은 외출 기회인데.”

로키는 따분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미드가르드의 어디를 가도 아스가르드 반절의 감동도 느낄 수 없다.”

달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비죽거렸다. 참으로 한결같은 남자였다. 태도는 군더더기 없었고 행동은 고상하기까지 했으며 지식수준 또한 상당했다. 정신적으로 문제만 없었다면 완벽한 그녀의 타입이었다. 달시는 깨끗한 시트를 다른 깨끗한 시트로 갈았다. 하얀 시트가 동그랗게 바람을 품고 펄럭거렸다. 침대 모서리에 끼워 넣고 침대 중앙을 탁탁 치자 햇볕 냄새가 감돌았다. 가끔 달시는 로키가 말하는 아스가르드가 궁금했다. 그의 머릿속에 펼쳐져 있을 신들의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아스가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 번드르르한 남자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그가 상상 속에서 보았을 황금 궁전과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다양한 신들의 위용을 직접 눈에 담고 싶어진다.

“대단한 양반께서 어쩌다가 하찮은 미드가르드로 귀양을 오게 되었을까.”

이 또한 수없이 반복되는 질문이었다. 애시당초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로키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입을 다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

밀고 온 카트에서 그가 부탁한 책을 몇 권 꺼내서 건넸다.

“역시 쓸 만한 개미야. 힘을 찾으면 네 안전은 보장하지.”

네네, 건성으로 대답 하자 로키는 책을 받아 협탁 위에 올리고 다른 책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들 다 이해해요? 잠깐 봐도 뭐라는지 모르겠던데 대단하네.”

달시는 도서관 씰이 붙은 두꺼운 책을 받아 카트에 올렸다. 퇴근하면서 반납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로키가 서랍에서 다른 뭔가를 꺼냈다. 그녀는 시트를 둘둘 말아 카트 밑 칸에 쑤셔 넣고 빈 쓰레기통을 살피다가 뒤늦게 로키가 내민 작은 박스를 보았다.

“뭔가요?”

달시는 흘끗 살피고 인상을 찌푸렸다. 인턴으로 일하며 많은 규칙을 주지 받았고 가끔 사소하게 어기기도 했다. 그 중에서 반드시 주의해야하는 제 1 규칙이 있다. [환자가 주는 것을 받지 말라.] 로키의 손에 있는 것은 자그마한 초콜릿색 나무 박스였는데 금줄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척 보아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족도 없고 면회를 올만큼 아는 인물도 없었기에 어디서 얻은 것인지 궁금했다.

“경계하지 마.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 유능한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어.”

처방약 늘어나니까 저런 과격한 워딩 좀 쓰지 말라고 했는데, 달시는 입술을 비죽이며 상자를 받았다. 그래도 이젠 많이 익숙해진 말투였다. 상자는 한손에 감싸질 만큼 작았는데 이리저리 돌려봐도 홈이나 틈 같은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열죠?”

이어진 질문에 로키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고 눈매는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지더니 가볍게 큭큭 웃는 소리가 뒤따랐다.

“비밀이야.”

달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 됐어요. 집에 가서 해머로 부숴버려야지.”

그녀가 말하자 로키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짧은 틈이었지만 그동안 로키를 보아온 입장에선 흥미로운 동요였다. 달시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죽인다느니 고문한다느니 잔인한 말도 서슴지 않게 하시는 분이 해머로 부순다는 대목에서 뭘 그리 놀라요?”

로키는 멍하니 그녀의 손에 들린 박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이만 가보도록.”

손을 휘휘 젓는 제스처는 퇴장의 순간을 알려준다. 달시는 개구쟁이처럼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흔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선물 고마워요. 위저드.”

달시는 카트를 밀며 방을 나갔다. 목에 건 카드키를 갖다 대자 삑-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문이 닫혔다. 닫힌 철문에 조그맣게 달린 유리 너머로 로키가 침대에 앉아 책을 펼치는 모습이 보였다. 달시는 잠시 손에 들고 있던 나무상자를 보다가 주머니에 넣고 카트 손잡이를 잡아 밀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유행가 가사를 중얼거리며 텅 빈 복도를 지나갔다.





퇴근 후 시립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샀다. 6개월 전 헤어진 남자친구 제임스에게 받은 무쓸모 선물 2호 헬로키티 공구세트를 개시할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1호는 생일선물로 받은 빨간 리본으로 장식된 아담한 박스였다. 제임스가 제 배에 딱 붙여 들고 있는 상태로 얼른 열어보라고 재촉해댔다. 수상쩍은 눈길을 보내며 윗 뚜껑을 열자 역겨운 코끼리가 고개를 쳐들었다. 달시는 그 날 제임스와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으며 로키를 생각했다. 그는 삼년 전 신원불명 상태로 심신미약 판정을 받아 병동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멍하니 하얀 벽만 보고 있다가 반 년 정도 지나자 요상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생겼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두른 상태로 창고로 들어간 그녀는 먼지로 가득한 공구세트에서 헬로키티 해머를 꺼내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쾅 소리가 나게 여러 번 망치를 휘둘렀다.

“나무가 아닌가?”

검지와 엄지로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벼운 상자였다. 망치로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았다. 심지어 차바퀴로 깔아도 흠집하나 없이 멀쩡했다. 금줄로 장식된 부분도 손상되지 않았다.

분풀이를 하듯 테이블에 맥주 캔을 거칠게 내려놓고 덜 마른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달시는 맥주 캔 옆에 놓인 나무박스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왜 안 열리지?”







[금속일수도 있어. 상자 안 내부 압력이...]
“나한테 물리학 강의할 생각 말아요.”

달시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로 다리를 쭉 뻗어 올리곤 맥주를 집어 들었다.

“아무튼 그 남자 이상하다니까요. 엄청 똑똑한데 어쩌다가 그렇게 됐을까.”
[네 인생에 참견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 좀 위험한 상태인거 알지?]
“음... 제가 너무 그 사람 이야기만 꺼냈던가요.”
[과하게]
“아아아! 솔직히 말하자면 그에게 호감을 느껴요.”
[달시]
“알아요. 멍청한 생각이라는 거. 하지만 제인도 거지같은 남자랑 사귄 적 있잖아요.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해줘요.”
[...행크를 말하는 거라면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나에게 접근했어. 이제와서 억울함을 호소할 생각은 없지만 이번 경우와는 다르잖아. 넌 이미 로키가 어떤 인간이고 그가 무슨 상황에 처해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완벽하게 논리적이라 마음이 아프네요.”
[아무튼 그에 대한 과도한 이입은 그만두도록 해. 상자가 궁금하면 언제든 연구소로 들려. 한번 알아볼게.]
“네네 고마워요 제인, 셀빅 박사님께 안부 전해줘요.”
[굿나잇]

폰을 내려놓고 조금 남은 맥주를 들이킨 달시는 캔을 꾹꾹 우그려 슛을 하듯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깔끔하게 들어가...지는 못하고 테두리에 맞아 튕겨져 나왔다. 달시는 한숨을 쉬며 비척비척 걸어가 맥주 캔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지하철을 타기 전까지는 화창했는데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달시는 인상을 찌푸리며 후드를 뒤집어쓰고 거리를 달렸다. 멀리 브롱크스쪽 하늘은 맑아 보였다. 날씨 한 번 얄궂었다. 갑작스런 비로 쫄딱 젖어 찝찝했기에 얼른 유니폼으로 갈아입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골목길을 돌아 멀리 병동 입구가 보이자 마법처럼 비가 멈추었다. 달시는 후드를 벗고 엉킨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쓸며 걸어갔다. 병동 정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헤진 청바지와 비슷하게 헤진 자켓을 걸치고 안에 검은 후드를 입은 후줄근한 복장이었다. 긴 금발을 뒤로 묶은 남자는 키도 덩치도 컸다. ‘엄청 미남일 것 같아.’ 그와 가까워질수록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생각했던 대로 훤칠하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머리색보다 약간 진한 수염이 멋들어졌다. 달시의 취향과는 약간 달랐지만 제인이 아주 좋아할 상이었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그녀에게 보여주면 반응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달시 루이스에요.”
“토르, 오딘의 아들이오.”
“오, 목소리.”

동굴 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낮고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바이킹식 인사법은 조금 웃겼지만 미남은 사소한 흠도 매력으로 커버가 되는 세상이다. 달시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호들갑스런 제스처를 취했다.

“여기서 일하니까 편하게 질문해요. 아니면 접수처로 안내해 드려요?”
“음.”

남자, 토르는 우물쭈물 고민하는 눈치였다. 달시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레이디, 혹시 여기에 검은 머리카락에.. 키는 나보다 조금 작고 사악하고 음험하게 웃는 남자가 있소?”

뜬구름 잡는 듯한 묘사였다. 달시는 코끝을 찡그렸다.

'연극배우라도 되나? 말투가 왜 이래.'
“검은 머리에 사악하고 음험한 남자는 많아요. 여긴 정신병동이니까요. 천사같이 웃던 사람들도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살짝 돌아버리죠.”

달시는 하늘을 가리키며 검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기억이 없을 가능성이 크오. 또한 많이 불안해하고...”

달시는 볼을 긁으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기억이 없는 환자, 음험하고 사악하고 검은 머리카락에 적당히 큰 키. 자연스럽게 로키가 떠올랐다.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전에 로키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에 그녀는 드물게 머뭇거렸다. ‘누군가 나를 찾거든 절대 알려주지 마.’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이었다. 달시는 잠시 고민하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일단 접수처에서 상담해보죠.”

보통 신원불명의 환자들을 찾는다면 이렇게 직접 병동으로 오지 않는다. 보호자는 경찰에 신고하고 접수가 되어 사건 번호가 나오면 복지단체와 협력해서 비슷한 시기 센터에 들어온 사람이 있는지 물색한다. 복잡한 서류작업을 거친 뒤 간추린 몇 명의 후보들을 정하고 나서야 최종적으로 방문하겠다는 등기를 보내고 찾아온다. 사전연락 없이 다짜고짜 들이닥치는 경우는 대부분 불법적인 부분과 연관되어 있었다. 토르는 ‘검은 머리의 사악한 남자’ 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일수도 있었다. 생긴 건 그렇게 안보였지만 센터에서 일한 햇수가 좀 되는 달시는 누군가를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잘 알았다.

“고맙소. 레이디.”

토르는 환하게 웃었다. 생긴 것만큼 밝고 시원시원한 미소였다. ‘제인이 이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던 그녀의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을 상상하며 달시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토르.. 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러시게 제이콥의 아들.”
“아들이 아니고 그냥 제이콥이에요.”
“알겠네. 제이콥의 아들이 아닌 자.”

달시는 접수처의 대럴과 옥신각신하는 토르를 보며 미덥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로키를 찾아왔을지도 모를 이 잘생긴 남자 또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던 달시는 멀리서 씩씩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남자를 보고 혀끝으로 볼 안을 찔렀다.

”무슨 일이세요. 선생님.”
”409호! 놈이 또 말썽이야.”
”음,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정말 못해먹겠군.”

달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러드 막스는 부임된지 2년 되는 초짜 심리상담사로 욱하는 기질이 많은 상관이었다. 달시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제러드는 환자들 위에 폭군처럼 군림하려 들었다. 로키가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그가 담당하는 환자였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로키의 평가는 정확했다. 상담을 하는 도중에 페이스에 말려든 제러드는 만족할만한 답을 찾지 못하면 책상을 내려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조금만 수틀리면 악담을 퍼부으며 환자를 상대로 유치하게 굴었다. 달시가 이 바닥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 계기도 제러드 막스의 승진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3기 환자잖아요.”
”네 희멀건한 태도가 놈을 부추긴다는 생각은 안드나 루이스?”

‘무슨 개소리야.’ 달시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겉으론 순종적인 표정을 지으며 사회인다운 명연기를 펼쳤다. 안타깝게도 제러드의 분이 풀리기엔 부족한 모양이었다. 요즘은 옛날처럼 환자에게 울분을 풀이 힘든 세상이다. 감시카메라가 하루 종일 돌아가고 사각지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신의학 센터 중에서도 최신식 설비를 갖춘 이곳은 연말마다 인권단체로부터 상을 타는 구색 좋은 병동이었다.

“특별 감호방으로 보내던지 해야겠어. 일단 노르프라민과 졸로프를 1.5배씩 늘리고!”

달시는 눈썹을 찌푸렸다. 로키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어투를 사용하는 부분만 빼면 폭력적인 성향이나 편집증적인 모습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지금 먹는 약이 필요한지조차 의문으로 여기던 참이다. 슬쩍 접수처에 눈길을 주니 대럴은 토르의 이름을 대기 줄에 올리고 그가 말하는 인물에 대한 짧막한 기록을 남기느라 이쪽을 보지 못했다. 달시는 입술 끝을 어색하게 올렸다.

“하지만 졸로프를 먹어야 할 정도로 불안 증세는 없잖아요.”
“토 달지마. 하여간 요즘 인턴이라는 것들은 대들기나 하고.”

‘빌어먹을 새끼.’ 달시는 억지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종류가 추가되면 의심받지 않겠어요?”
“상담기록은 이쪽 선에서 적당히 고칠 수 있어.”

갑자기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다. 제러드가 괴롭히는 환자가 꼭 로키라서는 아니었다. 달시는 여태껏 제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세상엔 힘들고 불안한 사람들이 많다. 달시는 자신이 성부 성자 성령처럼 고결하다고는 말 못해도 타인의 고통을 발판삼아 본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쓰레기들과는 다르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선생님. 인턴은 일지를 작성해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달시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행동을 학회에서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뜻을 파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대놓고 내지른 위협에 제러드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달시 루이스. 농담이라면 지금 당장 사과하는 게 좋을 거야.”
“오, 이게 농담이라면 선생님 상담은 서커스일걸요.”

‘드디어 사고쳤구나. 멍청한 루이스.’ 마음의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다음 순간 달시는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손바닥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퇴직-추방-제인에게 빌붙어 연구소의 조수로 취업 등 뒤바뀐 미래의 인생테크 B플랜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10초, 20초, 아무리 기다려도 응당 따라야 할 고통이 없었다.

“무얼 하는 건가.”

근엄한 목소리는 토르였다. 달시가 살그머니 눈을 뜨자 머리 위로 뻗어온 손이 제러드의 손목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러드는 안쓰러울 정도로 잡힌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려치지도 그렇다고 빼지도 못하고 온 몸을 꿈틀거리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당황한 대럴이 데스크에서 나와 손을 뻗으며 안절부절 못했다.

“놔...놔! 댁은 뭐요!”
“나는 토르 오딘슨이오. 자네는 이름이 뭐지?”
“그는 제러드 막스에요.”

슬쩍 비켜선 달시가 얄밉게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막의 아들이여 여성에게 이 무슨 난폭한 행동이오. 한심한 짓 마시게.”

달시는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 커리어를 날리는 시원한 웃음소리가 한산한 접수처 복도까지 퍼져나갔다.





“괜찮은가?”

달시는 토르를 데리고 3병동 라운지에 위치한 카페로 왔다. 마지막으로 본 제러드는 그녀의 등을 향해 당장이라도 해고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잘리기 전에 돼지 같은 그의 면상에 퇴직서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대해진 간만큼이나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커졌다.

“물론이죠. 평소에도 얼마나 짜증났는지. 하! 이제야 좀 속이 편하네요.”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상태라는 건 알았다. 달시는 흥분상태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여태껏 숙이고 살았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가볍게 느껴졌다. ‘진작 이럴 걸.’ 달시는 자몽주스가 담긴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빨대를 질겅질겅 씹었다.

“찾는 사람이랑 무슨 관계에요? 애인?”

스스로 내뱉고도 아차 싶은 농담이었다. 달시는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일정 선을 넘어갔음을 느끼며 컵을 내려놓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취소 취소- 말을 꺼내려는 순간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의 형이오.”

달시는 재빨리 손을 모아 주스 컵을 들고 빨대를 물었다. 토르는 천천히 설명했다. 동생을 찾으러 온 형. 집안 사정으로 인해 벌(?)을 받는다는 다소 믿기 힘들고 구시대적인 이야기다. 인상을 찌푸리며 주스를 쪽쪽 빨던 그녀는 토르의 다음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우리들은 아스가르드라는 곳에서 왔소.”

의심이 확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달시는 입을 떡 벌렸다. 끝부분이 갈라지고 지저분해진 스트로우가 입술에서 툭 떨어졌다. '가족력일까?' 이 남자도 어딘가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달시는 핑핑 돌아가는 뇌를 억지로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당신이 말하는 남자의 이름이 혹시 로키 인가요?’ 질문하려는 순간

“달시!”

호출이 있었다. 카페 입구에서 사수인 제리가 손을 흔들었다. 흐름이 끊겨 답답했지만 아직 퇴사 전이라 무시하기 어려웠다. 달시는 토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리는 잰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왜요, 벌써 자르겠다고 통보가 오던가요?”
“무슨 소리야? 그보다 지금 비상이야! 409호가 사라졌어.”
“뭐라고요?”

달시는 다시 입을 떡 벌렸다. 제리는 시끄럽게 울리는 폰을 꺼내 누군가와 다급하게 통화를 했다. 아직 찾지 못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사라진 환자를 찾는 내용이었다. 달시는 토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우두커니 앉아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상황을 궁금히 여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따라올래요?”

달시는 토르에게 409호의 사라진 환자가 로키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동행을 요구했다. 토르는 달시를 빤히 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철제 의자 밑바닥에 살짝 패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둘은 텅 빈 409호 병실을 확인했다. 시트는 잘 정돈된 채로다. 어제 준 도시락은 손도 대지 않았는지 플라스틱 스푼과 함께 협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달시가 토르를 데리고 접수처에 있을때 로키는 제러드의 오전 회진을 맞이했다. 분명 뭔가 거슬리는 소리를 했을 것이다. 분노한 제러드가 접수처에서 달시와 다툼을 벌이는 짧은 시간 동안 로키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문은 잠긴 그대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감시카메라도 짧은 순간 먹통이 되었다. 병실 문을 열려면 담당의 제러드와 달시를 포함한 몇 명의 행동보조사들이 지닌 카드키가 필요했다. 사라진 키는 없었다. ‘정말 마법사라도 되나.’ 달시는 빈 병실을 둘러보며 심란해졌다.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머리를 벅벅 긁는 달시의 뒤에서 토르가 평온하게 말했다.

“아주 큰 문제죠.”

달시는 투덜거리며 뒤돌아섰다. 문을 가로막고 있던 토르는 한박자 늦게 비켜 주었다. 태도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그녀의 불안 따위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달시는 그가 나중에 로키를 만났을때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조금 기대되었다.

“젠장, 어딜 갔을까.”

입이 험한 편이었지만 직장에서는 말을 조심하던 그녀였다. 마음속으로 그만두는 것을 확정하자 달시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환자’가 아닌 ‘로키’가 어디로 갔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예전에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스가르드가 얼마나 대단한지 뽐내듯 설명하던 로키는 왕성 뒷 편에 황금빛으로 물드는 호숫가를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꼽았다. 그래서 달시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있는 호수를 알려주었다. 어린 시절 잠깐 살았던 곳이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호수라는 대목을 듣자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스가르드는 안봐서 모르겠지만 석양이 질 때 물결을 따라 수면이 금빛으로 고즈넉이 물들죠. 제가 살아오면서 본 가장 예쁜 풍경이었어요.] 그렇게 말하자 로키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달시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감쪽같이 사라진 이상한 남자. 갑자기 나타나 ‘아스가르드’ 공통분모를 말하는 남자. 둘 사이를 잇는 구심점이 된 달시까지. 흔하디흔한 영화의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었다. 퀸즈에서 웨스트체스터까지 가려면 거리가 제법 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끌고 오는 거였는데.’ 달시는 휴대폰을 꺼냈다.

“도움이 필요한가?”

제리에게 전화를 거는데 토르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녀는 확 짜증을 부리려다가 그냥 빈손을 휘휘 흔들어 쫓았다.

“제리? 죄송한데 차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네. 알아요. 어..엇 무슨 짓이에요!”

토르는 그녀의 휴대전화를 위로 슥 들어 올려 빨간색 통화 종료 버튼을 터치했다.

“짐작 가는 곳이 있다면 내가 데려다 주겠소.”
“차가 있나요?”
“훨씬 더 좋은 게 있지.”

달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라도 타고 가려고?’ 아스가르드의 신족-에시르-들은 페가수스를 아주 잘 탄다는 로키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토르는 입 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사람을 설레게 하는 미소를 지었다.

“높은 곳이 무서우면 눈을 감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달시는 발밑으로 촘촘히 보이는 미니어처 도시를 보며 경악의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지금 토르에게 허리를 달랑 들려 신비한 매직 해머의 이끌림에 따라 브롱크스 위를 지나는 중이었다.

“레이디, 이쪽이 맞소?”
“어..어어어 어어 마 마 마 맞아요.”

달시는 감았던 눈을 힐끔 떠 5초정도 주위를 둘러보다가 금방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은 제대로가 맞았다. 속도가 너무 빠르니 조금 천천히 가달라고 소리지차 토르가 예의 그 쾌남 미소를 지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이 이가 드러나는 웃음을 보니 더 어지러워졌다.

“와... 세상에, 내가 지금 꿈을 꾸는건가.”

'‘약쟁이들이 말하던 하늘을 나는 기분이란 이런 게 아닐까?’ 물론 다를 것이다. 그들은 맨몸으로 하늘을 날아본 경험이 없으니 오로지 상상에 의존해 붙인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중독자보다 더 중독자 같은 경험을 하는 거네.’ 엉뚱하게 튀는 사고는 그녀의 특별한 점이었다. 로키는 [넌 우매하지만 지루하진 않아.] 라고 평가했었다. 욕하는 거냐고 투덜거렸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약간 우매하지만... 으로 바꿔주지. 만족하나?] 의미 없는 단어를 끼워 넣어 달시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저기에요. 숲 옆에 작은 수문이 보이죠?”

달시는 옆을 스쳐지나가는 새를 구경하다가 황급히 손가락으로 작은 보문을 가리켰다. 토르는 망치-묠니르를 잡은 손의 방향을 바꾸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하강할 때처럼 몸이 아래로 훅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토르가 손을 놓아주자 흙바닥에 두 발을 내려놓았다. 순간 스펀지처럼 푹신하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에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네. 묘묘? 어쨌든 그것만 있으면 출퇴근 걱정은 없겠네요.”
“묠니르.”

대충 발음했더니 토르가 엄격하게 고쳐주었다. 달시는 못들은 척 무시하고 주위를 살폈다. 정돈되지 않은 풀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종아리까지 올라와 사락거렸다. 금발 미남의 허리춤에 짐처럼 달려 날아왔더니 더는 로키의 이야기를 허무맹랑하다고 치부하기 어렵게 되었다. 토르가 찾는 이는 로키가 확실했다. 그리고 로키 역시 평소 자주 말하던 자칭 마법사임에 틀림없었다. 신묘한 마법을 부려 감쪽같이 도주했을 것이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토르.”
“볼 일을 마치면 말하시오. 자네를 데려다 주고 다시 동생을 찾아야 하오.”

담담한 목소리였다. 달시는 얼른 로키를 찾아 저 여유 있는 태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금발미남에게 원한이 있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에겐 살짝 짖궂은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그 점이 미스치프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가 여기에 있다는 확신은 없어요. 단지 좀 걸리는 게 있어서 와 본 거에요”
“지나치지 않는다면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는 것도 좋소. 내면의 외침을 계속 무시하다 보면 결국 터져버리고 말지.”

개인적인 경험일까, 토르가 물결이 잔잔하게 흔들리는 호수를 응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달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풀을 지나 호숫가를 걸었다. 그녀의 감은 이곳에서 로키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스가르드의 호수를 보고 싶군.’ 감정을 내비치지 않던 로키가 일순간 보여준 쓸쓸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기에...”

달시는 이름을 말하는 대신 토르의 헤진 자켓을 당기며 손가락으로 큰 나무 밑을 가리켰다. 호숫가에서 자라나는 나무들 중 가장 큰 것으로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네가 달려 있었었다. 두꺼운 나뭇가지에 녹슨 줄만 반 정도 남아 바람이 불때마나 흔들려 탁탁 소리를 내고 있었다.

“....로키?”

달시는 토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가 다시 스르르 풀리길 여러 차례 반복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이 크게 뜨였고 푸른 눈동자가 완연히 드러났다. 헤진 자켓을 잡고 있던 탓에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로키!!”

거칠고 사납지만 어딘가 절박함이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달시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동요였다. 한적한 호숫가에 토르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고목에 기대 팔짱을 끼고 호수를 바라보던 남자는 이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토르는 넓은 보폭으로 그를 향해 달려갔다. 달시도 뒤를 따랐다. 멀찍이 멈춰 선 토르가 우물쭈물 말했다. 큰 어깨가 아래로 축 쳐져있다. 격하게 반가워하는 것 치고는 둘 사이로 벌어진 거리가 꽤 넓어 보였다. 달시는 조금 옆으로 이동해 둘의 모습이 잘 보이도록 자리를 잡았다.

“걱정했다.”
“당신 누구야.”

한순간에 흐름이 끊겨버렸다. 달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풀잎이 나부끼는 소리만 가득했다. 토르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가 용서하셨다. 이제 돌아와도 좋다고 하셨어.”
“날 찾으러 온 거로군. 루이스.”

로키는 토르를 무시하고 시선을 돌렸다. 달시는 로키가 연기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오만한 남자는 달시를 비롯한 그 누구도 이름이나 성을 부르지 않는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자의 지칭은 ‘개미’로 통일될 뿐이었다.

“잊었다고 해도 어쩔수 없지...”
“이 자는 누구지? 하는 꼴을 보아하니 새로 들어온 환자인가?”

로키는 천연덕스럽게 운을 띄웠다. 달시는 얼떨결에 그의 연기에 합을 맞췄다.

“이분은 토르 오딘슨이고 당신의 형제라는군요.”

대답하면서도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서 하나를 속이다니 치사하고 유치했다.

“나에게 형제가 있었나.”
“로키.”
“그렇다면 웃기는군. 여태 쳐박아두고 찾지도 않은 주제에 용서를 들먹이며 가족이라는 말을 입에 담다니... 하! 어이가 없잖아. 그렇지 않나, 루이스?”
‘묻지 마!!’
“그런 것... 같군요.”

달시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단 맞추기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토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고개가 땅을 향해 숙여질수록 옆으로 삐져나온 몇 가닥의 금발이 어깨에서 흘러내려 바람에 흔들거렸다.

“기억에 없겠지만 너는...”
“꺼져.”
“그럴 순 없다.”
“허락이 없었다면 계속 버려두고 있었겠군.”

로키가 빈정거리자 토르는 안색을 굳혔다. 달시는 이 둘 사이에 있었던 과거를 쉽게 짐작하기 힘들었다. 마법 망치니 아스가르드니 에시르니 신화 이야기까지 모든 정보를 한 번에 받아들이자니 뇌에 과부하가 걸렸다.

“너와 다투면 늘 나만 바보가 되는구나.”

토르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로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토르의 어깨를 넘어 잔잔하게 물결치는 호수를 향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형제라고?’ 달시는 콧대를 긁적이다가 슬쩍 뒤로 물러나 휴대폰을 꺼냈다. 단축번호를 눌러 제리에게 연락해 조기퇴근 의사를 밝히자 시끄럽게 왁왁거리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달시는 휴대폰을 귀에서 약간 떨어트리고 “좋은 하루 되세요!” 활기차게 소리쳤다.

“자자 레이디들 여기서 이러지 맙시다.”

달시는 두 팔을 벌리고 토르의 말투를 흉내냈다. 두 에시르의 묘한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그녀는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한 번에 많은 일을 겪었더니 한 바퀴 돌아 침착함을 되찾았다.





달시는 둘을 데리고 맨해튼 제 집으로 향했다. 자꾸 울리는 핸드폰은 받지 않고 무음으로 돌려버렸다. 묠니르를 들어 올리는 토르를 만류하며 택시를 불렀다. 운전수가 룸미러로 뒷좌석의 남자 둘을 보다가 앞에 앉은 달시에게 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제 유니폼에 퀸즈 정신의학 메디컬센터라고 프린팅 된 글자를 가리키며 기사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 사나?”

달시는 로키의 표정에서 미미한 멸시를 읽었다. 익숙한 태도였다. 달시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삼 년간 지냈던 방 면적을 떠올려 봐요.”

토르는 집 여기저기를 훑었다. 큰 몸이 소파랑 테이블에 부딪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쓰러질뻔한 스탠드등을 잡아 세우는 남자는 로키와는 달리 혐오 라던지 멸시의 표현은 보이지 않았다. 병동에서 처음 만났을때 부터 본 무심한 표정만 비칠 뿐이다. 얼른 로키를 데리고 아스가르드로 돌아가고 싶은 듯 보였다. ‘나도 당신들이 가줬으면 좋겠는데.’ 달시는 속으로 불평하며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마실 것은 묻지 않았다. 커피 머신은 고장 났고 냉장고를 열어봐야 오렌지 주스밖에 없었다.

“아스가르드인들은 다들 그런 마법망치 같은 거 들고 다녀요?”
“이건 선택받은 자만 들 수 있소.”

토르가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근엄하게 말했다. 은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망치를 정말로 사랑하는 모양이다. 달시는 입술을 비죽이며 시선을 돌렸다. 일인용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로키가 팔을 세우고 손등에 턱을 괸 채 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병동에 있을 때는 늘 건조하고 고고하더니 형을 향한 시선엔 읽기 힘든 격한 감정이 가득했다.

“이제 그를 옆구리에 끼고 하늘을 날아서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네요.”

센터는 난리가 나겠지만 미련이 없어진 그녀에겐 전혀 문제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우뚝 선 채로 로키를 내려다보았다. 로키는 그 시선에 당당히 맞섰다. 만약 달시의 삶이 영화였다면 이쯤에서 적절한 대화가 흐르거나 나레이션의 친절한 해설로 과거를 추론할 수 있는 플룻이 드러났을 것이다. 일단 지금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달시는 소외감을 느끼며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 컵에 따랐다. ‘댁들 안 줄 거야. 나만 마셔야지.’ 어린애처럼 생각했다. 답답한 침묵이 흐르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풀룻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로키가 입을 열었다.

“쫒겨 난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그게 뭐지?”

달시는 그가 참으로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로키는 지금 즐기고 있었다. 병동에 지내던 시절 그는 형제가 있다 던지 어째서 지구로 왔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아스가르드에서 왔고 잘난 마법사이며 지구는 미개하다는 감상만 드러냈을 뿐이다. 그러나 달시는 로키를 오랫동안 지켜봐왔다. 베베 꼬인 남자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때 반드시 우위에 서려고 했다. 달변가인 그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모르는 문제가 생겨도 직접 묻지 않았다. 살살 달래고 말을 돌려가며 상대가 먼저 밝히도록 만들었다. 그런 남자였다. 달시는 잔을 기울여 주스를 입에 머금었다. 그에게 질문한 ‘추방’의 이유를 로키는 이미 알고 있을것이다.

“그건.. 네가..”

듣기 좋은 저음이 망설임을 품었다. 로키는 끈질기게 토르의 입술을 응시했다. 녹빛 눈동자가 집요하게 따라붙자 토르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그러나 로키는 허용하지 않았다. “왜 대답을 못하지?” 반복해서 묻는 태도는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토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흥분한 듯 볼이 약간 붉고 어깨를 잘게 떨었다.

“아주 쓰레기였나 보군!”
“로키!”
“상황을 보아하니 끔찍한 놈이었다는 걸 알겠어.”

방금까지만 해도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던 남자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가라앉혔다. 그 또한 연기임을, 달시는 딱히 어려움 없이 읽어내며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내가 저 남자를 좋아하긴 했나봐.’

“다 용서하셨다.”
“당신은 그렇지 못한가봐. 브라더?”

로키가 비꼬자 토르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용서한다고 하면 너는 저의를 의심할 것이다."

그런 녀석이다, 토르는 지쳐보였다. 달시는 그들이 겪었을 사연이 궁금해졌지만 쉽게 알아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오렌지주스를 두잔 째 마시며 둘을 주시했다. 로키의 연기는 계속되었다.

"그 따위 어색한 추론으로 눈앞을 흐리지 마. 당신은 이 자리에서 내가 저지른 쓰레기같은 짓을 밝히고 떠나면 돼."

기어코 그의 입을 통해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체 뭐길래?' 달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들어왔던 아스가디언 대해 떠올렸다. 신족의 세상. 몇 천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살고 육체는 단단하기 그지없으며 강인한 전사, 혹은 위대한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종족. 위그드라실의 자비를 받고 살아가는 위대한 에시르.

"...왕실 경비병 둘을 죽이고... 다섯의 백성들에게 씻기기 힘든 부상을 입혔다. 왕자의 지위를 들어 이러한 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생각보다 더 악질인데? 내가 왜 그랬을까."

살해라니, 달시는 안색을 굳혔다. 전부터 위험한 남자란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가 저지른 악행을 들으니 얼떨떨했다. 로키는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토르는 로키가 경비를 죽인 이유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 죄없는 이들을 죽였나? 그렇다면 확실히 관대한 처분이군!”

생각보다 내 죄는 더 끔찍했고, 로키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계속 벌을 받겠다고 전해 줘."
"그럴 순 없구나."
"안쓰럽게 굴지마. 내가 뜻을 밝혔으니 아스가르드의 제 1왕자로서 당신의 책임을 다해야하지 않겠어?"

로키는 쓸쓸하게 눈을 내리깔더니 양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후우- 한숨을 쉬며 "돌아가."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이다. 달시는 그가 참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연기임을 간파한 그녀마저 한순간이었지만 쓸쓸하고 안타까운 느낌을 받았다.

"로키."

제대로 통한 모양이다. 토르는 머뭇거리며 다가가 소파에 앉은 로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껍고 큰 손으로 로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어색하게 그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좀 낯뜨겁긴 해도 형제라 생각하면 가능한 위로였다. 로키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양손을 내려 토르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그의 포옹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그러자 토르가 몸을 퍼뜩 떨었다. 거부감이 짙어 보였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먼저 껴안은 주제에 희안한 반응이었다. 로키는 손을 둘러 넓은 등을 쓰다듬더니

"돌아갈 수 없어."

서글픈 목소리로 연기를 계속했다. 토르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그렇다면 네가 괜찮아질때 까지 곁에 머물도록 하마."

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토르의 어깨에 턱을 괴고 있던 로키는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웃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달시와 마주했다. 달시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자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리더니 검지를 세워 입가에 대고 '쉿' 제스처를 보였다. 그 순간까지도 로키는 천사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달시는 미소 너머에 감춰진 어두운 장막을 보았다. 로키의 묘한 집착은 진흙처럼 축축했으며 또한 음습했다. 그는 마치 거미처럼 토르를 끈적하게 휘어 감고 있었다. 달시는 주스잔을 내려놓았다.





로키가 사라진 병동은 난리가 났다. 모두가 정신 없는 와중에 달시만 평온했다. 출근한 달시는 제리의 호통섞인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느긋하게 웃었다. 품에는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제러드의 면전에 직접 던져줄 작정으로 대충 휘갈겨 썼다. 마지막 근무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솟아 담당 환자들에게 평소보다 친절하게 굴었다. 투덜거리는 제리와의 점심 식사도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근무일지를 대럴에게 주자마자 곧바로 제러드의 사무실에 들어가 사직서를 던졌다. 얼굴을 노렸는데 목에 맞고 튕겨나가자 좀 아쉬웠다. ‘내가 그럼 그렇지 뭐.’ 다트같은 건 영 자신이 없었다. 다시 주워서 얼굴을 노려볼까 하다가 유치하고 과하단 생각에 관뒀다. 모든 행동이 일사천리였다. 개인 물품을 박스에 챙겨 담은 그녀는 동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기분 좋게 병동을 등졌다.





집으로 돌아온 달시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주방에서 뭔가 펑펑 튀는 소리가 났다. 로키는 소파에 앉아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는 달시가 병동에서 건네준 책을 보고 있었다. 그가 웨스트체스터 호수에 있을 때 병동의 방에서 확인했던 책이었다. 언제 빼돌린 것인지 재주도 좋았다. 분명 위대한 마법사의 신비한 포탈이라던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달시는 겉옷도 벗지 못하고 가방을 대충 바닥에 던져놓은채로 주방으로 달려갔다.

"뭘 하는 거에요."

토르가 큰 몸에 앞치마를 두르고 후라이팬을 든 채로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렌지에서 펑펑 튀는 소리와 함께 회색 연기가 솟았다. 팝콘? 달시가 중얼거리자 토르가 눈을 깜박였다. 작은 봉투를 팝콘이라고 하는 부르는 것이오?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야." 달시는 재빨리 달려가 렌지를 껐다. 손잡이를 당기자 검은 숯덩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1분 30초만 돌리라고 적혀 있잖아요!"

액정을 보니 돌아간 시간은 10분이 넘었다. 달시는 검은 팝콘을 싱크대 옆 쓰레기통에 쏟아부으며 토르를 노려보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건드리지 말죠."

달시는 토르가 든 후라이팬을 거칠게 뺏었다. 너무 냉정한가 싶었지만 적절한 대처였다. 세를 주고 살고 있는 집인데 주방에서 불이라도 냈으면 화제보험도 안든 낡은 건물에 대한 책임은 꼼짝없이 그녀에게 돌아올 것이다. 군식구인 신비한 에시르들은 살아남겠지만.

"로키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말이오."
"돈은 없어요? 근처에서 뭐라도 사먹지."
"이걸로 지불해도 되겠는가?"

토르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는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달시는 금화와 토르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진짜 금이에요?"

토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드가르드인들은 금을 가짜로 만드오?" 라고 되묻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다.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하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토르에게 달시는 배알이 뒤틀렸다. '잘난 신이다 이거지?' 뭐라고 반박하려는 찰나 토르가 달시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팔을 빼내려는데 손바닥위에 금화를 올려주었다.

"이걸로 당분간 신세를 지도록 하겠네."
"어? 어 음 자 잠깐만요."

달시는 버벅이며 자신은 이 금화가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녔는지 몰라서 받기 힘들다 했는데도 토르는 껄껄 웃으며 주머니에서 금화를 두개 더 꺼냈다. 달시가 손바닥만한 금화 세 개를 양손에 쥐고 멍해진 사이 토르는 벌써 냉장고를 뒤적여 오렌지주스와 아보카도를 꺼냈다. 그는 주스곽을 식탁에 올려두고 아보카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어떻게 먹는 것이오?"

멀리서 나직하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닮은 면모가 없어 보이던 형제에게 의외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뻔뻔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달시는 한숨을 쉬었다.





저녁은 집 근처 작은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로키가 까탈스럽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도 삼 년간 병동에서 식사를 해결했기에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달시는 포크로 쓸어모은 감자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토르는 앉은 자리에서 다섯 접시를 순식간에 해치웠고 지금 막 한 접시 더 받은 참이다. 찹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시간이 체감 0.2초쯤 되었다. 달시는 처음 보는 신비한 광경에 금발 미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면 로키는 익숙한 듯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들어가죠?"

남자는 대답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달시는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꺼둔 핸드폰을 켜고 쌓인 메일을 확인하기 싫었다. 로키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냅킨을 집어 토르에게 건넸다.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돌린 그는 냅킨을 받았다. 그러다가 손가락 끝이 살짝 스쳤는데 토르가 움찔 떨었다. 로키는 바로 손을 치웠다. 순간 달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동생을 걱정해 그와 함께 지상에 남기로 선택한 주제에 사소한 접촉을 두려워하다니, 그에게서 본능적인 불편을 읽은 달시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토르는 조금 남은 양파조각과 버섯을 포크로 한 번에 찍어 야무지게 먹어치우고는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로키가 턱 끝을 들었다.

“일어날까요?”

달시의 목소리가 조용한 분위기를 깼다. 탄산수 잔을 내려놓은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로키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시는 둘을 위해 이것저것 쌓아둔 손님용 방을 비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가면 방 정리하는 것 좀 도와줘요.”
”좋소!”

그녀가 말하자 로키는 코웃음을 쳤고 토르는 흔쾌히 동의했다.

“미련하긴. 집세로 받은 금화면 집안일을 거부할 만큼의 충분한 가치가 있을텐데.”

로키가 비아냥거렸다. 달시는 못들은 채 휘파람을 불었다. 셋은 건널목을 두 번 건너 공용주택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셋이서 지냈다. 달시는 둘을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마법 망치를 빙빙 돌려 하늘을 나는 남자와, 귀찮은 집안일이라도 시킬라 치면 몰래 마법을 사용하는 남자까지, 영화 속 등장인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들은 정체불명의 낯선 존재들이었고 달시는 특별한 구석이 없는 지구인 여성이었음에도 별다른 불안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언맨이 날아다니고 거대한 초록괴물이 건물을 부수는 세상이다. 신비한 능력을 지닌 신들과 함께 하는 삶은 쉽게 못해볼 경험이었다. 달시 루이스는 자신에게 어른아이적 구석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달시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토르가 과자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는 몸을 꿈틀거리며 다리를 굽혀주었다. 빈 자리가 생기면 토르가 앉았다. 손에 든 간식-과자나 치즈볼 따위-을 내민다. 내킨다면 한웅큼 쥐어 가고 내키지 않으면 손을 저어 물렸다. 그는 이제 팝콘을 곧 잘 튀겼다. 전자렌지 사용법을 익힌 뒤로 뭐만 있으면 거기에 넣었다. 텔레비전은 계속 켜진 채다. 주로 영화나 드라마, 가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오늘은 영화였다. 토르는 소파에 푹 기대 과자를 먹으며 브라운관을 바라보았다. 도중에 합류하면 전까지의 줄거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오늘도 그런 경우였다. "방금 저 남자가 복수를 맹세하고 성을 탈출했어요.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를 돕다가 잡혔네요." 영화가 막바지를 향해가자 로키가 방에서 나왔다. 손에는 책을 들고 있다. 지정석이 된 일인용 소파에 앉더니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책을 펼쳤다. 토르가 치즈볼을 내밀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거절했음에도 매번 권했다. 로키가 불쾌하단 표정을 지으면 달시가 피식 웃으며 손을 까닥였다. “주세요.” 토르는 그녀에게 통을 내밀었다. 한웅큼 집어 올려 냠냠 먹다보면 손에 가루가 묻어 엉망이 된다. 테이블로 손을 뻗으면 토르가 대신 물티슈를 집어 주었다. 로키는 혀를 차며 그녀의 게으름을 비웃었다. “병동에서는 빠릿빠릿하고 쓸모 있어 보이더니.” 달시는 대답 대신 양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퇴사자의 트로피를 내보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토르가 준 금화는 보증서가 없는 탓에 그저 그런 전당포를 통했음에도 제법 큰 액수에 팔렸다. 덕분에 어마어마한 식비를 무리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 로키의 책값도 댔다. 금화라면 얼마든지 더 있다고 했지만 아직 팔지 않은 두 개가 남았기에 받지 않았다. 일을 관두고 시간적 여유가 늘어나자 친구들도 자주 만났다. 요가교실에 등록하고 제인네 연구실에도 자주 놀러갔다. 로키에게 받은 상자는 가져가지 않았다. 약속이 없으면 토르와 로키를 데리고 뉴욕을 관광하기도 했다. 로키는 싫어했지만 토르가 간다고 하면 꼭 뒤를 따랐다. [미드가르드의 어디를 가도 아스가르드 반절의 감동도 느낄 수 없다.] 과거에 했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로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둘의 뒤를 따랐다. 반면 토르는 제법 즐거워했다. 전망대에 올라 전경을 구경했고 유람선을 타고 브루클린 브릿지를 지나기도 했다. 배가 고프면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주점에 들러 취하지 않는 술도 마셨다.

셋은 바에 앉아 술을 마셨다. 토르는 씨익 웃으며 품에서 꺼낸 작은 병을 기울여 빈 술잔에 넣었다. 달시가 궁금해해도 “이건 레이디가 감당할 수 없소.” 라고 말하며 절대 마시게 해주지 않았다. 로키는 느긋하게 토르를 놀려댔다. 달시는 데킬라 선라이즈를 한 잔 더 시켰다. 기분 좋게 시작해서 기분 좋게 끝나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길거리를 지나다 가끔 보이는 앰뷸런스나 불편한 몸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지긴 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되도 않는 신념을 품고 살아왔던 현실이 흐려지고 동화속 신비한 세상이 그녀를 반겼다.

[지금 좀 위험한 상태인거 알지?]

'무슨 뜻인지 알아요. 제인, 그래도 즐거운걸요.'




“언제까지 머물 건가요?”

소파에 앉은 달시가 물었다. 토르는 팝콘을 건네며 음? 낮게 굴리는 소리를 냈다. “불편한가?” 토르의 질문에 달시는 고개를 저으며 팝콘을 받았다.

“제 눈에는 당신이 많이 참고 있는 듯 보여요.”

퇴사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졸업함과 동시에 삼 년간 센터에서 인턴생활을 했다. 심리상담이라면 적어도 제러드 막스보단 잘 할 자신이 있었다. 하늘을 날고 마법을 쓰는 존재들이었기에 들어맞는단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인 셈이다.

“강제로라도 데려갈 수 있으면서 왜 머무는거죠?”

‘그 남자는 당신을 알아요, 기억이 있다구요.’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병동에서 그를 관찰해가며 느꼈던 일종의 동정심이 발목을 잡았다.

“...녀석은 견디지 못할 것이오.”

약간의 침묵 끝에 애매한 대답을 받았다. 뜻을 고민하던 달시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현관에 로키가 서 있었다. 유령처럼 소리없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슬픈 것 같기도 했고 화난 것 같기도 했다. 입술을 달삭이려는 사이 로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없더군.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토르가 고개를 돌렸다. 로키는 머플러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우아하게 신발을 털었다. 달시는 브라운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선을 넘은 느낌. 그리고 선 너머에는 거미가 살고 있다.





늦은 밤이었다. 쉽게 잠들 수 없었던 달시는 목이 말라 밖으로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냈는데 문을 닫자 로키가 있었다. 소리없는 비명이 목 언저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달시는 손에 든 물병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왜 그렇게 놀라지?”

로키는 부드럽게 말했다. 눈빛은 다정다감했고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정말로 연기를 잘한다 이 남자는.

“그러는 당신은 왜 그렇게 화가 났죠?”

질문에 반문하는 것은 좋은 상담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달시는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딱히 화가난 건 아냐. 나는 개미를 싫어하지만 너는 제법 좋아해.”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요?”
“물론,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겠군. 나는 아스가르드의 왕자니까 말이야.”
“당신 형에게도 똑같이 말하시죠.”
“역시 담이 세.”

로키는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위험한 공기는 여전했지만 당장 해를 가해올 정도로 급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달시는 병을 식탁에 올렸다.

“지금까지는 거슬리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 뒀는데 조금씩... 한계가 보이고 있어.”

로키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다정한 말투였지만 달시는 날카로운 단검에 목줄기를 겨눠진 기분을 느끼며 긴장을 풀지 못했다.

“심리 분석은 네 환자들에게나 해.”
“당신 때문에 관뒀는데요.”
“음, 그 쓸모없는 의사를 치워줄까?”
“치운다는 말이 죽인다는 뜻과 같다면 그럴 필요 없어요.”
“하 아쉽군. 뭐 좀 복잡하지만 알아서 제발로 그만두도록 만들수도 있어.”
“갑자기 친절하시네요. 절 병동으로 보내 바쁘게 만들고 싶은 이유라도 있나요?”
“오, 달시 루이스. 정말 똑똑하구나. 칭찬을 바란다면 얼마든지 해주지. 그래도 말이야. 내가 호의를 보내는 대상은 그렇게 많지 않아. 간단히... 이렇게.”

로키의 손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식탁위에 올려둔 유리병의 입구가 사악-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깨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분리되었다. 단면은 날카롭고 매끄러웠다. 물이 조금 찰랑거렸지만 넘치진 않았다.

“하는 편이 좀 더 쉽겠지만 말이야.”
“...이딴 위협까지 하는 이유가 뭐죠?”

떨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었고 당연한 반응이었다. 우주적 존재의 터무니없는 힘을 마주하면 다들 비슷하게 행동할 것이다.

“내가 추방된 이유를 알려줄까?”

로키가 부드럽게 질문하며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반면 달시는 뒤로 발을 뺐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로키는 입을 다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어.”

달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러서다가 싱크대에 등허리가 닿았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더듬어 서랍을 열었다. 식칼의 손잡이를 겨우 쥐고 앞으로 내밀자 로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 부드럽게 말하며 손가락을 까닥이자 식칼이 휙 날아가 벽에 꽂혔다. 서늘한 손가락 끝이 이마에 닿았다. 달시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소리는 퍼져나가지 않았다. 목소리는 로키와 달시 사이 한정된 공간에 머물렀다.

“궁금할테니... 특별히 알려줄게.”

듣고 싶지 않다고 외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형을 강간했다.”

달시는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공기는 계속 들어오는 중이었고 폐는 평소처럼 커졌다 줄어졌다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시는 목이 꽉 졸리는 느낌을 받았다. 숨을 쉴 때 버석이는 두려움이 함께 들어와 서서히 온 몸을 잠식해갔다. 이마위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로키는 진하게 웃었고 퍼즐의 한 피스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달시는 여태 토르가 로키를 향해 보였던 묘한 거부의 몸짓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잔인하게 범했다. 그가 제 힘을 쓰지 못하도록 비열한 수를 써서 손발을 묶었고 힘줄을 잘라버렸지. 그렇게 한 달 정도 가둬두고 마음껏 유린했어. 토르는 아스가르드 제일가는 강인한 전사야. 그가 울며 애원하는 모습을 본 자는 나 밖에 없을 것이니...”

귀를 막을수도, 눈을 가릴수도 없었다. 로키의 고백은 실감나게 이어졌다. 달시는 토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로키의 시야로 생생하게 체험했다. 총천연색으로 나타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달시가 서 있는 곳은 얼음궁전 가장 밑바닥, 더럽고 축축한 지하 감옥 이었다. 금발의 남자는 온 몸이 상처가 가득한채로 쇠사슬에 발목이 묶여 감금되어 있었다. 로키가-달시가- 한 발씩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남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더는 물러설 공간도 없었지만 그는 양손으로 바닥을 밀며 벽으로 파고 들었다. 입에서는 연신 제발, 그만 둬, 정신을 차려, 애처로운 말이 흘러나왔다. 달시의 앞에선 여유롭고 호탕하게 웃던 남자가 상처 가득한 몸으로 벌벌 떨며 몸을 웅크렸다. 로키가 흥분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더없이 유쾌한 장면이었다. 토르는 로키의-달시의- 밑에서 벌레처럼 바르작거렸다. 토르의 허리 위에 주저앉은 로키는 그가 고개를 돌리면 뺨을 후려쳐 시선을 마주보게 했고 힘없는 손이 의미없는 반항을 품고 뻗어오면 손목을 반대방향으로 꺾어버렸다. 끄윽! 고개가 젖혀지자 팽팽하게 당겨진 목울대가 아래위로 꿈틀거렸다. 남자의 고통에 반응해 심장이 미친듯이 쿵쿵 뛰었다. 달시가 아닌 로키의 것이었다. 귓가에서 누군가 북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탄력있는 허벅지가 파드득 경련했다. 피가 끓는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친숙한 동생의 얼굴이 낯선 악마로 변해 자신을 욕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약해진 남자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격렬한 비애가 패닉의 빠진 남자의 목구멍에서 터져나왔다. 로키는 무자비하게 토르를 강간했다. 다정했다가도 어느순간 갑자기 몇 번이나 허리를 몰아붙였다. 뭉근하고 상냥한 키스는 토르가 패배를 철저히 체감할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들였다. 토르는 쾌락에 무너진 헤픈 얼굴을 보였다. "이건... 내가 아니야..." 부정하는 쉰 목소리가 흘러 나올때마다 로키는 비웃었다. "아니야, 위대한 전사의 몸뚱아리 속에 숨겨진 천박함이 드러난 것 뿐이지. 모두 너야. 네 천성이야, 마이 브라더." 더할나위 없이 다정했고 끔찍했다.

"알아채고 구하러 온 경비 둘을 형의 눈앞에서 죽여 피를 마시게 했고.”

철저하게 굴복시켰다. 울고, 절규하고, 체념했다가 다시 희망을 가지고, 도망치려 하는 걸 억지로 붙잡아서 몇 번이나 말이다. 로키는 행복한 과거를 회상하듯 환희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달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주르륵 흐르자 로키가 웃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신음을 참아내더군. 너덜너덜해진 입술에 키스하면 피맛이 났지. 종국엔 쾌락에 못이겨 울며 매달리는 천박한 꼴이 되었어. 제법 즐거웠는데.”
”미쳤어!”
“맞는 말이야. 하지만 끔찍하게 농락당한 주제에 질리지도 않고 달려와 허구의 동생을 찾는 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로키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낄낄 웃었다. 달시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시야가 계속 일렁거렸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시는 마음 먹은 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한 방 먹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샘솟았다. ‘삼 년간 댁을 관찰해온 내 집념을 무시하지 말라고!’ 하루에 한 번씩 비번을 제외하곤 그의 병실에 들렀다. 확연히 드러난 증거를 주워 모았더니 과거 의미불명이었던 그의 사소한 행동이 새롭게 보였다. 하물며 호감을 가진 상대였다. 이제는 다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지만.

“후회하는 주제에...”

떠오른 말을 시원하게 쏟아내진 못했다. 그래도 까무룩 의식이 넘어가는 상태에선 나름 최선을 다한 일격이었다. 냉장고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는 그녀를 향해 로키가 일순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벽에 박혀 있던 식칼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 소리는 막히지 않고 텅- 멀리 퍼져나갔다. 멀리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흐려지는 시야로 비치는 남자의 동요한 모습에 달시는 통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