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토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천장이 인식되자 빠르게 부상한 의식이 간밤의 사건을 되새겼다. ‘대단한 미스치프의 신비한 마법이 원인이겠지? 망할 로키!’ 달시는 끙 소리를 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마를 짚자 축축한 뭔가가 닿았다. 억지로 잡아내리니 젖은 수건이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사라졌던 경계심이 돌아왔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에게 남자가 재빨리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몸에 손을 대진 않았다. 그는, 토르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배려심 가득한 행동이었기에 달시는 그를 믿고 몸에서 힘을 뺐다.
“진정하시오 레이디, 놈은 여기 없으니 걱정 말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여인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게 되었구려. 사과하겠소.”
놈은 로키를 말하는 것이다. 특유의 고상한 말투를 들으며 달시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는 그녀의 목까지 내려온 수건을 잡아 들고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은 샐러드 보울에 집어넣었다.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퍼졌다. 달시는 인상을 쓰며 ‘하필 가져와도 저걸.’ 타박하려다가 그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곤 때려치웠다.
“나 죽은거 아니죠?”
의외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정상이었다. 토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로키의 수작이오.” 마법의 귀재로 상대의 의식을 흐려지게 만드는 주문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고 설명하는 동안 토르는 네 번쯤 한숨을 쉬었다. 근심과는 거리가 먼 것 같던 호쾌한 사내가 동생을 대신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댁은 피해자고 그는 가해자인데 왜 당신이 저자세죠?’ 떠오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달시는 토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로키가 보여준 환상은 너무나 생생했다.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던 얼굴이 허덕이며 일그러진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 장면이 뇌리에 박혀서 잊기가 힘들었다.
“로키는 어떻게 됐나요?”
그가 두려웠다. 그럼에도 물었다. 달시는 그에게 쏘아주고 싶은 말이 아직 남아있었다. 토르는 수건을 꾹 짜 탈탈 털더니 반듯하게 접어 달시의 이마에 올렸다. 시원함이 피부 밑으로 전해져 온다. 열이 올라 어지럽던 시야가 조금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토르는 흐트러진 이불을 위로 올려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한테 맞아 기절했소. 건너 방에 누워 있지. 아마 당분간 깨어나긴 힘들 것이오.”
담담한 폭력의 고백이었다. 달시는 힘없이 웃으며 머리를 약간 들어 불편하게 눌린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미안하오. 레이디, 원래부터 그런 녀석은 아니었는데...”
“범죄자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쓰이는 문장이 뭔지 알아요?”
그녀는 사내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열이 내리자 복잡한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동시에 화가 조금 솟구쳤다.
“천성은 그렇지 않다. 원래 착한 아이였다. 환경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미안하오.”
“왜 그걸 당신이 말하죠. 우리 둘 다 로키에게 사과 받아야할 입장이 아니던가요.”
“당신은 특히.” 예리하게 지적하자 토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눈을 찡그리며 이마를 쓸어내리더니 “설마... 어제 녀석이.” 떨리는 목소리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수치와 고통이 함께 느껴졌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마른침을 삼키는 게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새파랗게 젊은 여인 앞에서 치부를 까발린 왕자님의 심경을 헤아려보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불편해 하는 것도 무리도 아니었다.
“미리 말하지만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었어요.”
“알고 있소. 그러나 녀석은 내 동생이오. 형 된 자로서 그대에게 사과해야하오.”
“아, 정말 답답하군요.”
짜증이 난 것과 별개로 달시는 제 옆에 앉아 우물쭈물 못하고 있는 남자를 타박하고 싶지 않았다. 피해자였다. 그것도 강간피해자. 우락부락한 남자고, 심지어 어딘가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토르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에 반해 로키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으며 사악한 계획을 세워 제 형을 몰아세운... 불쌍한 전 환자였다. ‘불쌍하다니! 정신 차려 루이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그를 향한 동정의 마음을 쉽게 버리기 힘들었다. 의식이 넘어가던 순간 보여준 황망한 표정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조금 식상한 표현을 하자면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았다. 입술을 떨며 눈을 일렁이는 로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통쾌했고, 또한 불쌍했다.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소. 하지만 로키가 갑자기 돌변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오.”
“뭐 설마 당신 탓이라고 하지는 않겠죠? 그거 전형적인 자기...”
“그렇게 단순하지 않소. 그저 불가항력이었지.”
여전히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불가항력이라니 무슨 뜻이지? 우주의 신비한 힘이 로키로 하여금 형을 강간하게 만들었다? 사실 꼭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둘은 정체 모를 에시르였고 달시는 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그래봐야 강간범이지만.’ 냉정하게 평가를 내리며 몸을 일으키려하자 토르가 앉은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다. 달시는 도움을 거절하고 끙끙거리며 일어나 뒷목을 주물렀다. 언덕을 구르기라도 한 듯 온몸이 뻐근했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밥 먹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달시는 침대에 앉아 토르에게 물었다. 토르는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제 양 볼을 탁 치며 “강간마 깨기 전에 밥이나 먹으러 가죠. 지금이 아침? 점심이군.” 탁자 위에 놓인 알람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생체리듬에 맞춰진 위장이 음식을 요구했다. 달시는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며 간호해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토르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팔다리는 멀쩡했고 몸이 좀 뻐근했지만 어디 골절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대상이 주먹질에 당해 기절했다는 사실도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기지개를 쭉 펴며 문으로 걸어갔다. 토르는 말없이 달시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무거나 좋소.”
“그렇게 말 할 줄 알았지. 잠깐 기다려줘요. 그런데 당신 동생 정말 못 깨어나는 거 맞죠?”
“아마도 그렇소.”
“아마도라니... 좀 눈대중 말고 정확하게 말해줘요.”
“확실히 그럴 거라 예상하오.”
“당신들 정말 형제로군요”
달시는 질린 표정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물기 젖은 이마를 손으로 감싸 쥐니 열이 많이 내렸다. 거울을 보니 눈 밑에 다크서클이 완연했다. 화장으로 가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시는 몇 번 더 물을 치덕이고 이를 닦은 후,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토르는 복잡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달시는 그의 곁을 지나며 또다시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현관 옆 옷걸이에서 회색 가디건을 내려 걸치고 고갯짓으로 토르를 불렀다. 앉아 있던 토르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듬직하고 잘생긴 사내였지만 ‘그때’ 이미지가 덧씌워지자 로키를 향한 더없이 끔찍한 마음이 솟구쳤다. 남몰래 좋아했던 남자가 근친강간범에 살신(?)마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제인의 예금을 들고 나른 행크보다 갑절은 나쁜 놈이었다. 달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필요 없다고 했죠. 사악하게 웃더라구요. 로키는 완전 끔찍한 놈이에요.”
“하하하.”
오만상을 찌푸리며 흉을 보자 토르가 동의하듯 웃었다. 사실 이런 식의 욕설을 동반한 가해자 까내리기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달시는 물론 토르에게도 말이다. 속이야 좀 시원할까, 카운슬을 받아 볼 생각은 없냐는 현실적인 권유는 무리였다. 둘 사이에 패인 골을 메울 수 있도록 도울 만큼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들은 아스가디언이다. 달시는 토르에게 어떤 방법으로 지배와 피지배에서 오는 강간의 상관관계를 읊어야 할 지 몰랐다. 그래서 택한 길이 감자튀김과 밀크쉐이크를 먹으며 로키 욕을 하는 정도였다. 토르는 호탕하게 웃으며 동생을 흉보는데 동참했다. 포크가 천천히 움직였다.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누구와는 다르게 알기 쉬운 남자였다.
“로키가 권능을 잃었다고 했나요.”
“지난 삼 년간은 그랬소. 그러나 오딘께서 용서한다 말하신 순간 녀석에게 가해진 금제는 모두 풀렸을 것이오.”
“그렇군요.”
입에 문 감자튀김을 우물거리던 달시는 토르가 말한 금제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녀는 삼 년간 로키를 지켜봤다. 로키가 센터에 들어왔을 때부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하얀 벽에 일정 간격으로 이마를 쿵쿵 박다가 결국 피를 볼 때부터 말이다. 그때의 불안정한 남자와 지금의 깔끔하고 고상한 로키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처음 만난 로키는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그를 돌보는 일은 무엇 하나 쉬운게 없었다. 알약 몇 개를 먹이는 것도 활동보조사들이 몇 명이나 달려들어 몸을 붙잡고서야 겨우겨우 해냈다. 초반에 달시는 꽤나 애를 먹었다. 로키는 사나웠고 제 몸에 손을 대거나 기척 없이 등 뒤로 다가오면 갑자기 돌변해 공격해왔다. 키는 컸지만 호리호리한 몸집의 사내치곤 제법 날카로운 손속이라 다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을 열고 일부러 큰 소리로 “409호, 지금 들어간다.” 라고 존재감을 어필해야 했다.
“천 년 전쯤에 오딘께서 미드가르드에 내려오신 적이 있었지. 나 역시 마찬가지고.”
“음, 로키도 왔나요?”
“그렇소. 하지만 녀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그럴 것 같았어요. 심심하면 지구 욕을 하며 아스가르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일장연설을 했으니까.”
달시가 투덜거리며 감자튀김을 머스터드 소스에 찍자 토르가 잠깐 멈칫했다.
“로키가 한 말이오?”
질문하는 목소리가 희미했다. 달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토르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녀석은 아스가르드만큼 지루하고 끔찍한 곳도 없다고 저주를 퍼부었지.”
“당장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지구 욕을 그렇게 하더니.”
달시가 투덜거리자 토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설득하면 돌아갈 수 있겠어. 녀석을 이곳에 계속 두는 것은 이 나라 백성들과 레이디 달시에게 못 할 짓이구려.”
“이런 말을 할 입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당신이 로키의 가장 큰 피해자인 것 같군요. 그 죽은 경비와 다친 백성들을 제외하면 말이죠.”
포크가 움직임을 멈췄다. 슬쩍 토르의 얼굴을 보니 화가 났다기보다 골몰하는 눈치였다. 달시는 자신의 주제넘게 나서고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럼에도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제 발로 관두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 퀸즈 정신의학센터의 인턴이었고, 다년간 쌓인 경험으로 견고해진 판단력은 눈앞의 남자의 도피를 정확하게 잡아냈다. 어째서 자신의 고통을 뒷전으로 돌릴까? 에시르, 그 중에서도 이 남자와 같은 왕족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본인의 아픔을 축소시키는 것인지 궁금했다.
“레이디가 걱정해주는 건 매우 고맙지만...”
“달시, 이름으로 불러줘요. 전부터 생각했지만 레이디라니, 듣기 엄청 민망해요.”
“...그러지. 여하튼 나는 괜찮소.”
“내가 안 괜찮아요!”
달시는 탁자 위를 탕 쳐버렸다. 평일 점심시간치곤 많이 한산한 레스토랑에서 몇 안 되는 손님들의 주목을 끌어버렸다. 당황한 쪽은 달시였다. 토르는 크게 놀란 기색 없이 둔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하지만... 보았단 말이에요. 제 의도와 상관없이 당신들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경험해 버렸다는 거죠. 빌어먹을, 나도 내가 이렇게 오지랖이 넓을 줄은 몰랐지만. 여튼 그런 광경을 간접 체험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라고요? 그건 힘들겠어요.”
“녀석에게 부탁하면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오.”
“젠장, 이젠 아주 사람 뇌를 화이트보드 정도로 여기네! 잘난 신이다 이건가요?!”
달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가를 닦은 냅킨을 던졌다. 짜증을 낼 생각은 없었는데 토르의 둔한 반응을 보니 답답해서 결국 속이 터졌다. 좀 과하다 싶은 투정이었다. 좋은 상담사 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뭐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남자는 절대로 자신을 탓하거나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로키의 고상함과는 종류가 달랐지만 토르는 약자를 위하는 면이 있었다. 달시는 약삭빠르고 눈치가 빨랐다. 그 점이 로키와 일맥상통하는 면이었기에 얼음 궁 지하에서 그의 감정과 동조해 복잡한 심리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바보 같은 토르, 그는 당신을 먹이로 여기고 있어요.’ 차마 못할 말이었다. ‘댁을 무슨 발라먹을 고기 정도로 생각한다고요.’ 적나라한 비유였지만 로키가 품고 있는 육욕을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이거 맛있군.”
“말 돌리시네.”
“하하하.”
달시는 투덜거리며 제 몫의 크로와상을 토르에게 내밀었다. “고맙소.” 짧은 대답과 함께 접시 위에서 빵이 사라졌다. 로키는 토르를 미련하다고 표현했다. 그녀 또한 그 점에 약간 동감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삐그덕거렸을 두 남자의 첫 특이점을 상상했다. 어긋남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로키와 달리 달시에겐 토르를 향한 깊은 애정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가정 해보면 역시 씁쓸하긴 했다. 하물며 이들은 몇 천 년을 살아왔다. 맞물리지 않은 애정의 일방통행은 상대를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을 것이다. 달시는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로키가 저지른 짓은 참작의 여지가 없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말이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둘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행히도 로키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토르는 로키가 누운 침대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달시는 열린 문 옆에 서서 그런 둘을 착잡한 눈으로 보았다. 굳이 심리학을 따지고 들지 않아도 이들의 관계는 정상이 아니었다. 오래 살면 저렇게 되는 걸까? 이들의 정신을 구성하는 물질은 지구인들과 다른 것일까? 로키의 시야와 동조함으로서 정신을 공유한 그녀는 그가 저지른 행위가 얼마나 끔찍하고 악마 같은 짓인지 알았다. 이들은 인간과 비슷한 도덕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관대하긴 했지만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특수성은 없었다. 형을 감금하고 탐하는 내내 로키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괴물이야.’ 마음의 외침이 계속 들려왔다. 그리고 로키는 그것을 무시했다.
“언제쯤 깨어날까요.”
“글쎄, 빠르면 이틀 쯤 걸릴지도 모르겠군.”
“이런 경험이 있나요? 당신이 로키를...”
“때렸던?”
“그래요.”
“어렸을 때 체술을 배우며 합을 주고받은 적은 많았지.”
역시 이들은 자신과 달랐다. 달시는 꼭 어디 먼 옛날 중세시대 왕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현대인인 그녀에겐 심정적으로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들과 함께 지내며 동화속 등장인물이 된 기분을 느낀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두 남자가 사는 세상은 그녀의 세상과 완전히 달랐다.
“레이디.”
“이름.”
“...달시,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소.”
“아까는 당장이라도 무릎 꿇을 것처럼 굴더니, 저와 이 자식을 단 둘이 둬도 괜찮겠어요?”
“혹시 몰라 금제를 가했소. 정신을 차리더라도 몸을 일으키진 못할 것이오.”
토르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로키의 머리맡에 동그란 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신통방통하네.” 달시가 중얼거리자 토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로키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던 손을 내려 용케 이마와 검은 머리카락을 슥슥 쓸어주더니 이내 방을 나갔다. 달시는 몸을 비켜 주었다. 저벅저벅 걸어간 토르는 현관에 세워진 검은 우산을 들었다.
“지금 몰래 데리고 돌아가면 안 되나요.”
“그건... 힘들 것 같군. 미안하오. 좀 더 신세를 지겠네.”
“뭐 그러세요. 근데 정말 못 움직이는 거 맞죠?”
“걱정 말게. 녀석에겐 이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소.”
“믿어 보죠.”
“아마 하루 정도 걸릴 것이오.”
토르는 우산을 쥐고 문을 밀었다. 헤임달이라는 문지기가 내려주는 무지개다리를 타면 주변에 불 탄 자국이 남아 폐를 끼친다나 뭐라나. 달시는 넓은 등을 향해 “숲에선 부르지 말아요. 불나겠다!” 소리쳐 주었다.
토르의 말대로 로키는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자니 부아가 치밀어서 죄없는 침대만 발로 찼다.
달시는 느긋하게 집안일을 하고 친구와 메신저로 수다를 떨다가 해가 넘어갈 때 쯤 로키의 방에 들렀다. 토르가 계속 앉아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협탁에 올려져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프랑스어로 쓰여진 책은 여전히 뭐라는지 알 수 없었다.
“개미.”
“으악!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릴 뻔 했다. 달시는 눈을 흘기며 목소리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책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두는데 로키가 말했다.
“형은?”
“잠깐 볼일이 있다고 나갔어요.”
“그렇군.”
“아예 안 왔으면 좋겠죠? 아쉬워서 어쩌나, 내일 쯤 돌아온대요.”
‘그러니까 얌전히 좀 있어.’ 조치를 취해뒀다곤 했지만 영 미덥지 못했다. 이 남자는 교묘한 수법을 부려 어떻게든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달시는 긴장을 풀지 못하고 로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몇 번 몸을 움직이려 시도했다가 머리 위에서 빛나는 연하늘색 돌을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 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형도 많이 교활해졌군.”
“오... 정말 못 일어나나 보네. 이거 하나만 있으면 짜증나는 환자들 못 움직이게 하고 약 먹이기 좋겠다.”
달시가 중얼거리자 로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 위에 약간 떠있는 돌을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거라 생각하고 어깨를 굳혔는데 의외로 잠잠했다.
“솔직히 날 죽이려 들까봐 겁먹었어요.”
“개미답군.”
“네네, 마음껏 비웃으세요. 누구들과는 다르게 보잘 것 없는 개미라서요. 근데 배 안 고파요? 하루 정돈 굶어도 상관 없을 것 같긴 해도... 뭐라도 먹여줘요?”
달시의 엉뚱한 배려에 로키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둔하다느니 한소리 할 것 같았는데 그의 입에선 더욱 두려운 말이 나왔다.
“마음만 먹으면 이깟 마법쯤은 쉽게 벗어날 수 있어.”
허세라고 생각하면서도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사실이라면 중대한 사태였다. 달시가 조용해지자 로키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진정해, 그럴 생각 없어.”
“왜죠?”
“이 돌은 어머니의 유품이다.”
의외의 고백이었다. 달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을 바라보았다. 은은하게 빛을 내며 일정 속도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로키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억지로 마법을 깨면 돌은 부서져 버린다. 이제 내가 형을 교활하다고 한 이유를 알겠나?”
“흠, 똑똑한 것 같네요.”
“아직 멀었어. 어머니보다 형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누구보다 그를 사랑하면서." 달시의 심드렁한 확신에 로키가 입을 다물었다. 또 저런 표정, 읽기 힘든 복잡한 얼굴을 했다. 저런 모습의 로키는 생각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병동에서 생활하던 때도 그랬다. 어쩌다 가끔 늦은 밤 그의 병실에 들른 적도 있었는데 카트를 밀고 들어가면 그는 벽 높이 나있는 작은 창 너머 밤하늘을 저런 표정으로 응시하곤 했다. 이름을 기억해낸 후로 로키는 항상 냉철하고 시니컬한 태도를 고수했다. 철저하게 자신을 조절했다.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다행이네요. 난 또 어젯밤에 못 다한 칼질이라도 할 줄 알았지.”
“처음부터 널 죽일 생각은 없었다.”
로키의 목소리는 힘이 축 빠져있었다. 연기일까? 진심일까? 일단 이 남자가 약한 척 하면 의심부터 하게 된다. 달시가 눈을 가늘게 뜨자 로키가 입꼬리를 올려 부드럽게 올려 웃었다. 보기 드문 미소였다.
“내가 후회한다고 했었지.”
로키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 말이 맞아.” 담백한 수긍이었다. 달시는 긴장한 채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형을 사랑해.”
“에에- 그건 다 알고요. 좀 새로운 거 없습니까.”
달시가 깐죽거리자 로키가 어이가 없었는지 맥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아오면서 너처럼 겁 없는 인간은 처음이다.”
“영광입니다.”
“직접 보여주지. 손을 다오.”
“범죄자, 그것도 강간범에게 닿기 싫은데요.”
“갑자기 어머니보다 형을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커지네.”
“농담이에요. 어떻게 해요?”
“이마에.”
달시가 로키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리자 그가 눈을 감았다. 또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면 어쩌나 불안하던 달시는 순식간에 눈앞의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거대한 섬 모양 행성이었다. 행성이라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트인 시야로 들어온 장엄한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아름답지?] 로키가 말을 걸었다. 달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웠다. 넘실거리는 투명하고 맑은 물길 중앙으로 놓인 무지갯빛 다리를 따라가니 황금으로 지어진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중앙에 위치한 길쭉하고 기하학적 모양의 황금 왕성은 압도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침 노을이 지는 중이었는데 녹색 숲 너머로 붉고 노란 빛이 뒤섞여 한 폭의 유화 작품처럼 찬란하게 번지고 있었다. [당신 말 맞네요. 정말 예쁘다.] 달시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장면이 전환되었다. [왕성이야.] 로키가 말했다. 달시는 그의 시선으로 원형 정원을 둘러보았다. 황토색 넓은 광장 곳곳에 이름을 모르는 신기한 꽃과 식물이 가득했다. 인터넷으로도 본 적 없는 이국적인 풍경을 확인하며 이곳이 우주 저 너머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바이프로스트와 거대 행성의 새로운 문명을 목도한 첫 여행자가 된 달시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신들의 도시에 빠져 얼이 나갔다. [개미. 정신 차리지.] 로키가 말을 걸자 그제야 큼큼 목을 굴리고 시선을 집중했다. [당신 형이네요.] 멀리서 신비한 마법망치 묘묘를 돌리며 토르가 날아오고 있었다. [묠니르.] 로키가 명칭을 정정했다. [형이랑 똑같네.] 생각을 읽힌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연결을 끊고 싶진 않았다.
“로키! 늦었구나.”
“난 늘 제 시간에 왔어. 형은 참석률도 낮은 주제에 잘도 입을 놀리네.”
토르는 하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네 말이 맞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변함이 없네요.] 달시가 소감을 말했다. 대답이 없었지만 연결되어 있는 달시는 느낄 수 있었다. 본인의 기억을 짚어가는 과정임에도 형의 모습을 곱씹고 있었다. 이토록 놀라운 애정은 언제부터 품어온 것일까? 또한 이토록 열렬히 사랑하는 주제에 왜 그토록 잔인한 짓을 한 걸까.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뭔가 공표할 것이 있다던데. 장로들이 난리더라.”
“음, 글쎄다. 듣지 못했다만.”
“나도 모르겠어.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뭘 말해주지 않으니. 바나헤임의 특사가 올거라는 소문은 들었는데 어머니 때문일지도 몰라.”
“또 귀찮게 불려 다니게 생겼군.”
“무스펠헤임 좀 그만 가. 수르트가 깨어나려면 멀었어.”
둘이서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디선가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키가-달시가- 고개를 돌리자 서쪽 하늘에서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페가수스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오딘.] 로키가 이름을 읊었고 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다. 초로의 노인은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보였다. 로키의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이 느껴졌다. 존경과 두려움이 함께 느껴졌다. [위대한 아버지를 두셨네요.] 달시가 말하자 로키가 비웃었다. [입양된 자식이 잘못된 길을 걷도록 인도한 훌륭한 아버지지.] 비꼬는 것과 별개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연결되니 좋네요. 댁도 훨씬 솔직하고.] 로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좀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두 아들이 오딘의 양 옆에 나란히 섰다. 곧 다가올 프리가의 기일을 언급하며 오딘이 목소리를 높이자 많은 아스가디언들이 그의 주변으로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말은 느릿하게 이어졌다. 아홉 왕국의 평화 협정과 관련된 안건이 진행되는 동안 토르는 몇 번이나 하품을 했고 로키가 팔꿈치를 세워 그런 형의 허리를 찔러댔다.
“오늘은 중대한 경사가 있어 널리 알리려 하노라.”
[싫은 대목이군.] 로키가 진저리쳤다. 달시는 흥미롭게 상황을 주시했다. 오딘이 손을 올리자 동그랗게 둘러싼 사람들 중 한 여성에게 빛이 내려왔다. 지목당한 여성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레이디 시프와 나의 아들 토르의 약혼이 바로 그것이오. 이 둘의 신성한 맺어짐은 나 오딘에 의해 굳건히 축복될 것임을 이 자리에서 선포하노라.”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정작 당사자인 시프와 토르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 아버지?” “오딘이시여!” 둘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졌지만 크게 울려퍼지는 함성에 가려졌다. 로키는 석상처럼 굳어 제 옆에 선 토르만 바라보았다. 시야가 빨갰다. [윽, 돌아버리겠네.] 달시는 미친듯이 들끓어 오르는 엉망진창 내면의 회오리 속으로 휩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했다. 좌절과 고통, 그리고 뒤따르듯 엄청난 절망감이 뒤섞인 격류 속에서 얼기설기 엮은 뗏목을 타고 버티는 기분이었다. 그때 조용히 내려온 빛이 그녀를 감쌌다. 그 또한 로키였다. [고마워요.] [천만에.]
“기다려 주십시오. 오딘이시여. 저와 토르는...”
“아버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프와는 소꿉친구일 뿐입니다.”
“프리가의 유언을 잊었나? 그녀를 소중히 여기라는 네 어미의 조언을 되새기거라.”
오딘은 단호하게 항의를 잘랐다. 시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토르를 사랑하고 있다.] 로키는 담담하게 말했다. 또 다른 로키와는 달리 차분했다. 달시는 숲을 닮은 진한 청록 빛에 감싸여 상황을 지켜보았다. 나라의 대소사와 관련된 간략한 발표와 몇몇 안건이 조용히 오갔고 일을 마친 오딘은 타고 왔던 페가수스에 올랐다. 토르가 달려가 고삐를 잡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고개를 내저었다. 시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해서 환호성이 터졌다. 어디선가 나팔소리도 들려왔다. 토르의 친구들인 워리어즈가 모여들어 축하 아닌 축언을 건넸다. 토르는 멍하니 시프를 바라보다가 마른 얼굴을 쓸었다. [형 또한...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지.]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 과거의 로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 끝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미미한 고통이 느껴졌다. 미래의 로키가 쓰게 웃었다.
또 장면이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토르의 방이었다. [결정타로군.] 미래의 로키는 고통을 품고 있었다. 강렬한 후회를 포함한. 달시는 이어지는 프레임 속에서 과거 로키의 시야를 통해 그의 결말이 정해진 행보를 지켜보았다. 로키는-달시는- 형에게 매달렸다. “토르, 시프를 사랑해?” 철부지 동생의 불안이 전해진 탓인지 토르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로키. 그녀는 나에겐 아까운 여자야.” 안타깝게도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로키는 강하게 화를 냈다. “오딘의 아들이 아깝다니? 시프가 프레이아의 딸이라도 되는 건가?” 분노하는 목소리는 갈대처럼 흔들렸다. 이토록 동요하는 동생의 모습은 처음이었는지 토르도 혼란스럽게 얼굴을 굳혔다. “그녀를 사랑하는 군.” 로키는 지레 확정을 내리고 잔뜩 겁을 먹었다. 숙인 고개를 잠시 주억거리더니 느리게 뒷걸음질 쳤다. 토르가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로키는 마법으로 모습을 숨겼다. 미래의 로키가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래서 형을 납치했나요?] 달시가 묻자 로키는 고개를 저었다. [변명을 좀 하자면 시기가 안 좋았어.] 이어진 장면은 회색빛 채도가 흐린 장소였다. 주변엔 돌이 가득했다. 아스가르드와 달리 삭막했고 거센 바람에 회색 돌가루가 뒤섞여 날아다니는 황량한 곳이었다. [스바르탈프헤임. 말레키스가 다스리는 다크엘프들의 행성이다.] 로키는 이곳에서 어떤 엘프를 만나 작은 병에 담긴 약을 받았다. 작은 약병 두 개였는데 척 보기에도 불길해보이는 검은 액체가 들어있었다. 로키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면이 까맣고 어두워서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초록 빛 너머로 발을 디뎠다간 돌이키기 어려울 거란 예감이 들었다. [정확해. 그러니 얌전히 있어.] 달시는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연결된 마음으로 진심이 전해져 왔다.
[말레키스는 바로 오딘을 노리지 못했다. 그의 아들인 나와 토르로 눈을 돌렸지. 결과가 이 꼴이다.] 로키는 드물게 자신을 탓했다. [나 또한 엘프를 만난 순간 이미 술법에 당한 상태였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군. 증폭되었다곤 하나 모두 내 의지였으니.]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 놓은 욕망을 이룰 수 있도록 등 뒤를 가볍게 떠미는 싸구려 주문이었다. 불안정한 상태였던 로키는 아주 쉽게 당했다. 형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그를 빼앗긴다는 위기감이 점점 커졌다. 사랑은 질투로, 나아가 증오와 원망으로 변했다. 토르는 침대에 쓰러져 밭은 숨을 내뱉었다. 약효가 돌아 권능을 잃은 토르의 몸에, 아스가르드의 술은 독약처럼 그의 정신을 빼앗았다. 로키는 늘어진 토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평소 경멸해 마지않던 개미들처럼 연약해진 나의 형, 로키는 끝없이 사랑 한다 증오 한다 되 내며 정신을 잃은 토르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 뒤론 똑같아. 안 봐도 되겠지.] [그게 좋겠군요.] 달시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이유가 뭔가요?] 달시가 질문하자 로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로키의 의뭉스러운 태도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갑자기 의식이 급물살을 탔다. 갑자기 눈앞이 번뜩였고 다음 순간 그녀는 로키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허억!”
“이제 돌 좀 치워줘.”
“후... 어머니보다 토르를 더 사랑한다면서요. 그냥 깨버리지 그래요?”
“이런, 나의 과거를 보고도 그런 냉정한 말이 나오나? 네가 돌보던 가엾은 환자잖아. 동정심을 발휘해 보라고.”
“불쌍한 척 해봐야 당신이 저지른 악행은 사라지지 않아요.”
“맞는 말이야.”
깔끔하게 인정한 로키는 한동안 실없이 웃었다. 돌을 깰 생각은 없었는지 힘을 빼고 누워 있던 그는 웃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숨을 돌렸다.
“상자는 잘 가지고 있나?”
“물론이죠. 비싸 보이던데 안 열려서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건 나도 못 열어."
달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을 써도?”
“그래.”
짧게 대답한 로키는 입을 다물더니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달시는 더 질문하는 대신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툭툭 쏴아아-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나타난 그녀의 손에는 포도가 든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실눈을 뜬 로키는 인상을 찌푸렸고 달시는 얌전히 침대 옆에 앉아 포도를 먹기 시작했다. 스무 알쯤 먹고 나서야 로키의 입에 하나 넣어 주었다. 부루퉁한 남자는 피식 웃으며 포도를 받아먹었다.
다음 날 올 거라는 말과 달리 토르는 그날 밤 조금 늦은 시간에 돌아왔다. 달시는 마트에서 사온 것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는 중이었다. 집 안에 맴도는 공기가 쌀쌀했다. 토르가 우산을 옷걸이에 걸고 들어오며 인상을 찌푸리자 모포를 두르고 있던 달시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방기가 또 말썽이에요. 내일 라디에이터를 새로 사야겠어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토르는 이내 로키가 누워있을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샐러리 묶음을 야채 칸에 넣으며 그의 시선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정말로 단단한 남자였다.
“당신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어요.”
“...그랬군.”
“정말 일어나지 못하더군요.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하던데.”
“그런 말도 하던가.”
“왜요, 사실이 아닌가요?”
“아니 맞소. 하지만 모친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로키는 단 한 번도 관련된 화제를 꺼낸 적이 없었지.”
토르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로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 같으면 동생이고 뭐고 상종도 안했을 텐데.' 좋은 상담사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관뒀으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화제를 우스꽝스럽고 가볍게 변형시켰다. 외계인 강간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봐야 답이 안 나왔다. 달시는 로키가 아스가르드로 돌아가지 않으려하는 이유를 진작에 알았다. 연달아 보여준 환영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었지만, 기억을 못하던 로키의 반 년 간의 병동생활을 수발하며 달시는 수십 수 백 번의 징조와 행위를 목격했다.
'그는 죽고 싶어 해요.'
아마 토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스가르드로 돌아간다는 것은 '로키의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그랬기에 억지로 끌고 가지 못하는 것이다.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선물을 주고, 함께 머물고, 환상을 보여주고, 어떤 장치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로키의 사소한 행동은 본인의 마음을 풀기 위한 장난이기도 했으나 이따금 다른 의도를 품고 있기도 했다. 그가 선물로 준 상자를 포함해 이 집에 머물며 그의 형과 지리멸렬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도 뭔가 목적이 있을 거란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냉장고 정리를 마친 그녀는 식탁 위에 올려둔 오렌지주스 잔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새콤한 것을 좋아했다. 입안에 머금자마자 바로 느껴지는 알싸한 자극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영화 취향도 그랬다. SF나 판타지처럼 화려하고 특이한 것들을 좋아했다. 그녀의 취향이란 대체적으로 이런 쪽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지속적으로 자극을 찾았다. '이번 경우는 좀 과한 것 같지만.' 두 형제 외계인 중 한 명은 강간피해자, 한명은 강간범, 심지어 그 강간범은 제 죽음을 바란다. 주스를 반 쯤 비웠을 때 로키가 있는 방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꺼져, 내 눈앞에서 사라져,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로키였고 토르는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 묵묵부답 상태로 그의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겠지. 보지도 않았는데 눈앞이 선했다.
달시는 손을 비비며 호호 입김을 불었다. 싼 맛에 들어왔던 이 낡은 건물은 라디에이터가 고장 나니 곧바로 냉골이 되었다. 잰걸음으로 싱크대로 걸어가 빈 컵을 담고 물을 틀었다. 물색이 연한 황토색이었다. "빌어먹을, 녹물이잖아." 한겨울에 수도까지 이리되면 어쩌자는 건지. 위기가 겹치자 자연스럽게 토르가 준 금화가 떠올랐다. [더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시오.] 당당하게 선언하며 껄껄 웃었지. 달시는 수도꼭지를 잠그며 두 형제가 들어가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금화를 더 받아서 좋은 집으로 세를 얻자. 아니 이참에 새 집을 사버리지 뭐. 스타크 그룹 정도는 아니더라도 넉넉하게 챙겨서 떵떵거리며 사는... 젠장, 멍청한 루이스. 부끄럽지도 않냐.' 달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래서야 로키가 말했던 멍청한 개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넌 최고야,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살지. 넌 유쾌하고 대단한 인간이야.' 자존감을 높여주는 주문을 외우며 양 볼을 탁 쳤다. 너무 세게 쳐서 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난방이 안 되는 와중에 차라리 잘 됐구나 싶었다.
“이럴 필요까진 없어요. 사과도 받았고.”
“무슨 소린가. 이 녀석은 레이.. 달시 그대를 해하려 했소.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모르오.”
“음, 근데 저 사람 지금 숨 못 쉬고 있는 것 같은데...”
“아, 미안하구나. 로키.”
말과는 반대로 조금도 미안한 표정이 아닌 토르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러자 로키의 목을 감싸고 있던 두꺼운 금색 줄이 헐겁게 풀렸다. 로키는 숨을 켁켁 몰아쉬며 목을 죄는 제어도구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거칠게 흔들었다.
“아주 재밌나봐.”
“부정은 못하겠구나.”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몇 번을 말해. 댁이 나서서 난리를 부릴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허무한 변명은 그만둬.”
“차라리 다시 주먹질이라도 하지 그래? 그것도 아니면 네 마법망치로 여길 노렸으면 좋겠군.”
로키가 빈정거리며 제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달시는 토르가 화를 참고 있는 모습을 불편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토르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로키를 내려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강한 남자의 버릇이었다. 시비가 붙으면 대화보다 손이 먼저 나갔던 철없던 시절, 천둥의 신으로 이름을 날리며 전장을 누비던 그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로키는 그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환상 속에서 심경을 토로했었다.
“사랑한다.”
소파에 앉으며 토르가 말했다. 새로 구입한 커피머신으로 처음 내린 커피 잔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쨍그랑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달시는 입을 떡 벌렸고 로키는 팔짱을 낀 채 굳었다.
“방금 뭐라고?”
“언제까지 모르는 채 할 거냐.”
“너 알잖아.” 토르가 부루퉁하게 불만을 터트렸다. 섬세함이라곤 전혀 없는 말투였다. 제법 고민을 했겠지만 부드럽게 표현하는 법을 찾지 못했는지 대놓고 내지르는 모습이 로키와는 정반대라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웃음이 나왔다. 달시는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피해 발돋움해 움직였다. 시선은 둘을 향한 채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오자 로키는 눈에 뛰게 당황했다.
“기억 돌아온 거 다 보인다. 답답한 짓 그만하거라.”
로키는 대답도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얼어 버렸다. 무슨 상황에서도 상대보다 우위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는데 적잖게 당황했는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눈치였다. 달시는 깨진 컵 조각을 줍고 걸레질을 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혼약은 올리지 않아. 시프와 난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었어. 말레키스는 죽었다. 도망갔던 엘프녀석도 잡혔고 곧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
토르의 담담하게 말했다. 로키가 조용하자 한숨을 깊이 쉬더니 연이어,
“너를 사랑한다니까.”
쐐기를 박아 넣어도 상대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신형 커피머신에서 칙- 추출음이 들려왔다. 달시는 허겁지겁 컵을 바꿔 넣었다. 경쾌한 추출음이 멎고 막 두 잔째 커피를 받는데 로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형을 사랑해.”
회피를 시도했다. 그러나 토르는 허용하지 않았다.
“동생으로서가 아니다.”
다음 순간 달시는 휴대전화를 방에 두고 왔음을 깨닫고 엄청난 아쉬움을 느꼈다. 사진을 찍어 박제해 두면 평생 놀려먹을 수 있을 만큼 로키가 엄청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달시의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까지 사진 한 장으로 대를 이어 에시르를 놀려먹는 행복한 미래를 상상해 버렸다. 방금 전까지 세상 괴로움 다 짊어진 비련의 주인공처럼 고뇌하던 남자는 고민의 대상인 남자가 휘두른 묵직한 직구에 맞아 완전히 녹아웃 되었다. 정말 엄청난 광경이었다.
“기억 안나.”
외통수에 몰린 미스치프가 멍청하게 발뺌했다. 백기를 흔드는 행동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대단한 로키가 멍청해 보이는 것은 흔치않았다. 달시는 처음으로 마음 편히 로키를 동정했다. 토르는 확실히 대단한 남자였다.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올라와 접촉하는 것도 두려워할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저를 그렇게 만든 대상에게 ‘사랑’을 속삭이다니, 범인의 머리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로키의 섬세함과 토르의 단순함이 맞물리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달시는 블랙코미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한 걸음 떨어져 둘을 보았다.
“그만 좀 하지.”
“뭘 그만해? 내가 한 쓰레기 같은 짓을 다 잊었어?”
“그럴 리가. 아직도 꿈에 나올 정도로 무섭다.”
토르는 솔직하게 밀고나가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천둥의 신의 입에서 ‘무섭다’는 원초적인 단어가 나오자 로키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달시는 커피 두 잔을 들고 극의 중심부로 향했다. 말없이 토르와 로키의 앞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뒷걸음질 쳤다. 심각한 와중에 토르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참으로 신사적이시네요, 당신 정말 대단해요.’ 달시는 양 엄지를 세워 보이며 그를 응원했다.
“브라더, 좀 단순하게 생각하자꾸나.”
토르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너는 말레키스의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어리석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완벽한 본연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니야. 나는 늘 형을 억지로 휘두르고 싶었어... 그러고 싶었어.”
로키의 눈이 몽롱하게 흐려졌다.
“생각해보면 철이 들기 전부터 한결같이 형을 바라보고 있었지. 씹어 먹을 듯 그 머리통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훑고 있었다고. 요툰헤임의 차가운 얼음 궁 지하에서 있었던 일은 실제로 몇 백 몇 천 번이나 상상해왔던 일이야. 내 머릿속에서 넌 늘 그때처럼 허덕였어.”
바라보는 녹빛 눈이 그때와 비슷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토르는 움찔하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형을 강간하고 싶었고, 그걸 이루었을 뿐이다. 결국 모두 내 의지였어.”
로키가 단호하게 말을 쏟아냈다. 솔직한 욕망의 고백이었다. 다만 좀 더 끈적거리고 음습해야 했는데 대상인 토르가 가볍게 넘겨버리고 있어서 파괴력이 반절로 줄었다.
“으, 그건 좀 징그럽구나.”
“젠장, 토르. 그러니까 날 두고 꺼져. 제발 나를 내버려 둬.”
토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감을 표하자 로키는 넌더리나는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제발 가!”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늘 상대를 놀려먹던 능글맞은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는 광경을 보니 아무래도 좋아졌다.
“날 버리라고...”
“싫다.”
“멍청하긴! 네 삶에서 꺼져준다고 하잖아!”
지독하게 말이 통하지 않았다. 토르는 바위처럼 버텼고 로키는 거기에 계속 쏘아대기만 했다. 달시는 커피를 홀짝였다.
“널 사랑한다.”
토르는 몇 번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둔한 남자는 ‘사랑’의 고백이야말로 동생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수단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로키는 그런 단순한 성격이 아니었다. 달시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로키처럼 섬세하고 엉망으로 꼬인 남자는 저 정도로 만족하지 못한다. 실제로 지금도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었다. 로키의 손끝이 일인용 소파 팔걸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세 달 전에 할부 끝난 소파인데.’ 등 뒤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둘 사이에 놓인 커피가 천천히 식어갔다.
“사실이야?”
로키의 입술 끝이 조금씩 떨렸다.
“그래.”
토르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로키는 눈을 내리 깔았다. 팔걸이를 파고들던 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토르는 양손을 깍지 껴 뒤통수에 대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둘의 대비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달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냉장고에 기대 커피를 마셨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로키였다.
“달시.”
“아, 나요?”
개미가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뜻밖의 지목에 달시는 경계심을 두르고 대답했다.
“상자.”
“...난 댁 물건 보관해주는 사람 아니거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커피 잔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기분탓인지 전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달시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로키가 앉은 소파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건네주자 로키는 상자를 빙글빙글 돌려보다가 토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묠니르라면 이걸 깰 수 있어.”
그제서야 병동에서 상자를 받을 때 로키가 보였던 굳은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집에 가서 해머로 부숴버려야지.’ 라고 했었다. 무심결에 정답을 맞춰버렸던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달시는 볼을 긁적였다. 열쇠는 헬로키티 해머가 아닌 묘묘였다. 토르는 로키의 손바닥에 올려진 상자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가서 옷걸이에 걸어둔 우산을 잡자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묠니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키가 상자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 상자를 받은 토르는 그것을 땅에 내려놓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망치가 아래를 향해 내리꽂혔다. 엄청난 소리에 반해 집 바닥은 흠 하나 없이 무사했다. 상자는 깨졌고 장식되어 있던 금실은 빛을 잃더니 검게 변해갔다.
“이게 뭐지?”
상자에서 나온 것은 아주 작은 병이었다. 겨우 새끼손가락 정도일까, 조그마한 병 안에는 검은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로키는 느릿하게 큭큭 웃었다.
“이미 한 번 겪어봤잖아.”
토르의 눈이 커졌다. 달시는 입을 조금 벌렸다. 로키가 할 다음 행동이 예측되었다. 굉장히 불길했다.
“당신... 후회할 짓 하지 말아요.”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달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좋지 못했다. 저 병에 든 것은... 예전에 토르가 마셨고 그로 인해 권능을 잃어 지옥을 겪었던 바로 그 약이었다.
“원래는 몰래 마시려고 했어.”
“로키.”
“형은 구제불능이야. 덕분에 힘들게 세웠던 계획이 전부 무너져 버렸잖아.”
토르는 작은 병을 손에 쥐고 로키를 노려보았다. 처음과 달리 그는 분노를 참지 않았다.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갑자기 창문 너머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네 녀석.”
공기 중에 찌릿한 정전기가 느껴졌다. 당황한 달시는 붕 뜨기 시작한 제 머리를 감싸고 내리눌렀다. 토르는 난폭한 분노를 가감 없이 발산하고 있었다. 밖에서 커다랗게 천둥이 울렸다. 번쩍이며 하얀 번개가 내려와 순식간에 집안을 새하얗게 물들였다가 바로 사라졌다.
“또다시 네 죽음을 들이밀며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로키는 답이 없었다. 다만 그는 서글픈 눈으로 형을 바라보다가 제 가슴을 가리켰다.
“난 너처럼 뭐든 쉽게 넘겨버리지 못해. 이 안은 늘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복잡하거든.”
달시는 그 말에 공감했다. 로키의 내면은 끔찍하게 어지러웠다. 생각은 끝없이 꼬리를 물었고 온갖 비관적인 자아의 외침에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가장 최고의 계획... 뭔지 알아?”
로키가 음습하게 웃었다. 창밖으로 비 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번쩍- 또 한 번 번개가 쳤고 켜져 있던 불이 모두 꺼졌다. 차단기가 내려간 모양이었다. 삽시간에 주위가 까맣게 물들었다. 당황한 달시가 벽을 더듬는데 다시 번개가 쳤다. 번쩍이는 찰나의 순간 하얗게 물든 로키의 얼굴은 눈물이 가득했다.
“그걸 마시고 허약해진 나를 토르 오딘슨이 죽이는 것.”
토르는 이를 부득 갈았다.
“저질스럽고 망가진 최후로군.”
“그래. 맞아.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너는 절대 날 잊지 못하겠지. 나는 네 죄책감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툭툭 튀어나올 테고. 정말 완벽한 결말이라고 생각 안 해?”
토르는 약병을 쥔 손을 폈다. 빤히 내려다보고 있자 로키가 말을 걸었다.
“그걸 줘.”
조곤조곤 속삭였다. 깜짝 놀란 달시가 소리쳤다.
“듣지 말아요!”
“저런, 개미가 다급하군. 토르, 넌 할 만큼 했어. 미쳐버린 동생의 욕망에 휘둘려 엉망진창이 된 몸을 질질 끌고 또 이렇게 찾아와 나를 설득하잖아. 그건 대단한 거야.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할지 몰라도 난 달라. 몇 번이고 말 할 수 있어. 토르 오딘슨은 위대해.”
로키가 손을 내밀었다. 번개가 칠때마다 석상처럼 붙박인 모습이 유령처럼 흔들렸다.
“형이 날 사랑한다 말했을 때 행복했어. 하지만 한순간이야. 금세 또 의심하고 독을 속삭이겠지. 그럼 형은 점점 지쳐가고... 우리의 마지막이 죽음은 아닐지언정 끝없이 반복되는 지옥일지니. 그러니까 여기서 끝내자. 이제 지쳤어. 죽여 달란 소리는 안 해. 알아서 처리할게.”
로키가 한걸음 다가오자 토르가 뒤로 물러났다. 번개가 치는 간격이 줄어들고 있었다. 토르는 참으로 솔직한 남자였다. 단단한 남자의 내면에 흐르는 분노는 형상화되어 비와 번개로 나타났다. 토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네 앞에서 피해자가 된 적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단 한번도! 내가 받을 고통보다 네 안부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이 비열한 자식아!”
토르는 뼈를 씹듯 외쳤다. 비애를 품은 낮은 목소리가 습기에 섞여 질척하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하늘이 뚫린 듯 빗줄기가 거세졌다. 뒤따르는 천둥소리도 훨씬 요란해졌다. 로키는 손을 내밀고 계속 발을 움직였다. 애원하는 눈으로 매달려오는 동생을 보며 토르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중 가장 크고 긴 번개가 번쩍였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순간 토르는 병에 든 액체를 삼켰다. 뒤로 넘어간 목울대가 크게 울렁이는 실루엣이 드러났다.
“토르!”
병이 카펫 위를 굴렀다. 토르는 가슴을 쥐고 천천히 쓰러졌다. 번쩍번쩍 번개가 미친 듯이 튀었다. 벽을 짚고 있던 달시가 다급히 달려갔다. 로키는 석상처럼 붙박여 섰다. 토르는 몸을 둥글게 말아 바닥에 엎드렸다. 짐승이 신음하는듯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달시는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손을 아래로 집어넣고 다급히 이마를 짚었다. 피부가 불덩이 같았다. 아니 얼굴 전체가 그의 몸 전체가 활활 타오르듯 뜨거웠다.
“뭘 빤히 보고만 있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
달시가 비명을 지르며 악을 쓰자 로키가 비척비척 걸어왔다. 토르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머뭇머뭇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달시는 고개를 숙여 계속 그에게 말을 걸었다.
“토르 괜찮아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정말 마셨어... 이런 바보 같은...”
로키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는 영혼이 빠진 것처럼 멍한 얼굴로 토르의 등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그 꼴이 못마땅한 달시가 소리를 빽 질러도 반응이 없었다.
“그.. 헤임달인가 뭔가 하는 양반 불러서 아스가르드로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웅크리고 숨을 헐떡이는 토르 옆에서 달시만 안절부절 못했다. 전직이라지만 의료계 종사자 앞에서 독극물을 마시고 쓰러지다니, 그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는 사이 토르의 뜨겁던 피부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대로 완전히 차가워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일정 온도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는 듯 했다. 거짓말처럼 비가 멈추었고 집 안의 전원이 돌아와 순식간에 밝아졌다. 웅크린 남자의 등이 떨리고 있다. 로키가 형의 힘 빠진 팔을 잡아 들었다. 주륵 딸려 올라온 팔뚝을 잠시 부드럽게 쓸어내리나 싶더니 손톱을 세워 살을 파고들었다. 피가 비쳐나왔다. 의미를 파악한 달시가 굳어졌다.
“내가 미쳐버리면 어쩌려고 이랬어.”
로키가 사납게 말을 걸었다. 팔이 잡힐 때부터 흠칫 떨었던 큰 몸이 다시 퍼드득 움직였다. 토르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이마를 짚은 달시의 손을 잡아 내리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소.” 그러나 달시는 전혀 괜찮지 않다고 생각했다.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는 스스로 궁지에 몰리길 선택했다. 결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힘의 밸런스가 깨졌다. 이젠 로키에게 잡힌 팔을 뺄 힘조차 사라졌다. 그를 보호해주는 장치는 아무것도 없다. 권능이 사라지며 묠니르를 들 수조차 없는 연약한 개미가 된 것이다.
“둘 다 짜증나.”
달시가 투덜거리자 토르는 씁쓸하게 웃었다.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눈앞의 로키를 바라보았다. 향하는 시선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없었다. 최악을 달리는 상황이었음에도 언제나처럼 당당했다.
“죽지 마라. 로키.”
그렇게 말하며 잡힌 손을 움직였다. 움직임에 맞추어 구속하는 힘이 풀리자 자유를 얻은 오른손이 스르륵 올라가 로키의 뺨을 쓸어내렸다. “제발 죽지 마. 응?” 푸른 눈에 따뜻한 빛이 서렸다.
“왜 그랬어.”
로키가 중얼거렸다. 토르는 눈을 내리깔았다.
“날 몰아세운 건 너인데 그로 인해 상처 받는 것도 너로구나. 우습지 않느냐.”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 토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면 로키는 웃지 않았다. 그저 무릎 꿇고 형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달시는 한숨을 쉬며 느릿하게 일어났다. 아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말 그대로였다.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진 둘을 보며 달시는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로키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또 전처럼 토르를 구속하려들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나를 사랑한다고?”
로키가 황망한 얼굴로 물었다. 달시는 로키의 말에 함축된 의미를 알았다. [형을 그 꼴로 만들었는데도 나를 사랑한다고?] 후회라고 표현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후회란 잘못된 선택으로 발생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간을 돌려서라도 다른 길을 택하고자 하는 감정이다. 그러나 로키는 달랐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 로키는 후회하면서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임을, 달시는 로키의 정신에 휩쓸리며 그의 검은 욕망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토르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누구보다도.”
다음 순간 로키가 토르를 껴안았다. 토르는 흡- 하고 숨을 들이키며 “아프다...” 낮은 신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도 불구하고 그는 떨지 않았다. 투정이 통했는지 팔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토르는 편안하게 숨을 쉬며 로키의 등으로 손을 둘렀다. 달시는 조용히 자리에서 멀어졌다. 존재감을 어필하며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그녀에게 흘끗 시선을 주며 로키가 말했다.
“개미, 형을 치료해라.”
“아, 왜 또! 그냥 둘이 행복한 허그 계속 하면 안돼요? 그리고 난 당신 부하 아니니까 명령하지 말아요.”
“제발.”
영혼 없는 plz 였다.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에게 로키는 조용히 토르의 팔을 들어올렸다. 살이 깊게 패여 상처부위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게 조절 좀 하지 그랬어요.” 입이 댓 발 튀어나온 달시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발을 움직였다. 거실 구석에 놓인 서랍장 두 번째 칸을 열어 구급상자를 꺼냈다. 토르가 로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사랑해.” 무슨 부두 주술 주문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해 형.” “사랑해.” “이제 괜찮아.” “그래그래, 사랑한다.” 이쯤 되자 달시는 이 영화의 장르가 궁금해졌다. 정신병동 사이코 스릴러-미스터리 공포물-이루어지지 못할 비련의 로맨스-중세시대 치정스릴러-블랙코미디, 결말은 로맨스인가? 여기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일지도 궁금했다. 이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 사랑의 촉매, 그것도 아니면 단순한 이물질, 오랜만에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구급상자를 든 달시는 허리를 숙이고 토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저기 일단 좀 떨어지죠.”
“하하하, 그러겠소.”
토르가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해도 로키가 허락하지 않았다. 몸이 꿈쩍도 하지 않자 당황한 토르가 두른 팔로 등을 두들겼다. 달시는 한숨을 쉬었다.
“...됐어요. 그냥 그러고 있어요. 눈꼴 시리지만 보기 좋네.”
빙글 돌아간 달시는 카펫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구급상자를 열었다. 핀셋으로 집은 솜에 알코올을 묻혀 두꺼운 팔을 붙들고 환부에 두드리자 움찔 떨리는 반응을 보였다. 로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봐도 아픈 건 내가 어떻게 못해줘요.”
둘은 꼭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한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보기 좋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졌다. 이제와서 질투같은 무의미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아니었다. 달시는 두 형제의 미래를 떠올리고 말았다. 로키는 안주하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의심하고 땅을 파고 가시를 세우다가 결국 토르를 찌르고 지금과 비슷한 한심한 소동을 일으킬거란 확신이 그녀에겐 있었다.
‘하긴, 무슨 상관이야. 적어도 나 죽을때 까지만이라도 행복하게 사세요. 그 뒤는 내 알바 아니고.’
필멸자는 두 불멸자를 향해 한정된 축복을 내렸다.
셋은 웨스트 체스터 호수로 놀러갔다. 달시와 토르는 낚싯대를 휘둘렀고 로키는 녹슨 사슬이 매달린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달시는 아버지에게 배웠다며 릴을 요령 좋게 던지는 방법을 토르에게 가르쳐 주었다. 토르는 몸을 쓰는 일은 곧잘 따라했다. 로키는 책을 읽는 도중에 간간히 둘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정확히는 토르를 향해서였다. 눈치 빠른 달시는 “댁 형님 물에 안 빠지도록 잘 간수할 테니 걱정 마시죠!” 놀려대며 낄낄 웃었다. 로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토르는 라즈베리 파이를 좋아했다. 로키는 라임 파이 쪽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디저트로 나온 파이의 맛을 평가하며 셋은 눈이 쌓인 배터리 파크를 걸었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가는 중이었다. 로키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뭔가를 잡았다.
“나 어렸을 때는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면 곧잘 소원을 빌었는데.”
“시시하군.”
“뭐 어때요. 이루어질지 누가 알아. 뭐든 빌어 봐요.”
로키는 낙엽을 토르에게 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은 토르는 작은 잎을 빙글빙글 돌렸다.
“소원 따위 이제 없다.”
“으윽 잘났어.”
달시는 코끝을 찡그렸다. 토르가 손끝으로 낙엽을 튕겼다. 공중에서 핑그르르 돌아간 잎은 눈 쌓인 보도블럭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달시가 장갑 낀 손을 모아 얼굴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보고 있던 토르도 따라했다. 로키는 나직하게 탄식하며 손끝을 움직였다. “뭐야 어떻게 한 거예요?” 훈훈한 온기가 몸을 감싸자 달시가 신기하다며 방방 뛰었다.
“이제 제법 잘 조절 하는구나! 이 녀석 옛날에 제 방을 홀라당 태워먹을 뻔 하고 울상이 되었다오.”
“푸하하! 정말요? 그런 거 더 없나요?”
“물론 많지. 숲에서 길을 잃은 로키가..읍 읍으읍.”
로키는 마법으로 토르의 말을 차단해 버렸다.
라디에이터를 샀다. 최신형이었다. 욕망에 굴복한 그녀는 돈이 거의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은 금화 두 개 중 하나를 또 팔아야 할까 고민하는데 소파에 앉은 로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피식 웃었다.
“돈이 필요하면 말해.”
“괜찮아요.”
반 년, 토르가 힘을 되찾기까지 걸릴 시간이라고 로키가 말했다. 셋이 지내기엔 집이 좁다고 생각했음에도 이사를 갈 수 없었는데, 거기엔 좀 황당하고 바보같은 이유가 있었다. 토르가 상자를 부수고 별 생각없이 바닥에 내려놓은 묠니르 탓이다. 권능을 잃은 토르는 망치의 주인 자격도 함께 잃었다. 묠니르는 현관 앞에 거꾸로 놓여 그들이 드나들 때마다 제 위용을 자랑했다. 자꾸 걸리적 거렸기에 자루 부분에 산타클로스 모자를 씌워 놓았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너는 자격이 있어.”
“대가라...”
달시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뭐든 그냥 얻는 법은 없다. 이들에게 제공하는 안락한 잠자리와 지구 문물 지식에 대한 대가를 몇 푼의 돈으로 받는것도 썩 나쁘진 않았다.
“그냥 둘이 나가서 살아도 되잖아요. 나는 뭐 필요 없지 않나요?”
자기비하가 아니었다. 그냥 현실이 그랬다. 로키는 충분히 적응했고 능력이 있었다.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할지라도 제 형을 데리고 힘이 돌아올 때까지 운신하기엔 차고 넘쳤다.
“무슨 소리오! 달시 그대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오.”
솜사탕을 우적우적 뜯으며 현관문을 연 토르가 말했다. 슬리퍼를 신으며 묠니르에 걸려 넘어질 뻔 하면서(실제로 다섯 번 중 세 번은 넘어진다.) 저벅저벅 걸어온 그는 솜사탕 두 개를 각각 로키와 달시에게 내밀었다. 당연하게도 로키는 받지 않았고 달시는 기꺼이 나무막대를 잡았다. 파스텔톤 무지개색 솜사탕을 턱으로 누르자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로키의 것은 토르의 입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저럴 작정으로 세 개를 사온 거겠지. 달시는 킥킥 웃으며 솜사탕을 와구 베어물었다.
“날 높이 평가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제인과 셀빅, 친구 몇 명, 당장 손으로 꼽자면 한 손에 들어올 만큼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병동에서 지내던 당시 로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쓸모 있는 개미라는 평도 빼놓을 순 없었다. ‘넌 최고야,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살지. 넌 유쾌하고 대단한 인간이야.’ 그녀가 즐겨 외우는 주문이었다. 달시 루이스는 평범하게 자라나 운이 조금 모자랐는지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그녀를 맡아준 친척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교우관계도 원만했고 적성에 맞는 대학도 들어갔다. 비록 때려치우긴 했지만 일자리도 구했었다. 어디 텔레비전 삼류 드라마에 나오는 가엾은 고아소녀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랬기에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천성일지도 몰랐다.
“별나라 왕자님들 칭찬은 기분 좋게 받겠어요.”
이들과의 생활은 즐거웠다. 현실의 복잡한 시름을 잊고 든든한 두 존재들을 보살피고 보살핌 받는 하루하루는 그녀가 좋아하는 동화적인 삶이었으므로.
“그런 의미로 오늘 저녁은 좀 근사하게 먹읍시다.”
이대로 안주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달시는 기분 좋게 솜사탕을 뜯었다.
달시는 볼티모어에 위치한 한 메디컬 센터에 취직했다. 직원용 사택이 딸린 병원으로 그녀에겐 딱 맞는 곳이었다. 퀸즈 병동에서의 막무가내식 사표에 대해선 어째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아마도 로키가 눈속임 쳐준 것이었으므로 괜히 따지고 들지 않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달시는 로키와 토르에게 맨해튼 집의 계약서를 넘겼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묘묘를 지켜야죠.” 토르는 매우 아쉬워했고 로키는 미묘한 얼굴로 그녀를 보긴 했지만 딱히 말리지도 떠밀지도 않았다.
거리가 멀어졌다고 사이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로키에겐 휴대전화가 있었고(토르는 세 개째 부숴먹어서 포기했다.) 달시도 휴일마다 맨해튼의 옛집으로 들렀다. 현관문이 열리면 뒤집힌 묘묘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토르가 간식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인사를 했고 로키는 대답이 없었지만 토르와 수다를 떨다보면 조용히 나와 지정석인 일인용 소파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를 보러가거나 일박으로 한적한 강가에서 캠핑을 하기도 했다. 박물관에도 들르고 미식축구 경기도 보러 갔다. 웨스트 체스터 카운티의 호숫가에서 황혼을 구경하며 낚시를 하는 것도 즐겼다.
금화 두 개를 돌려주었다. 팔아버린 것도 되찾고 싶었지만 전당포에 갔더니 이미 어디론가 넘어간 뒤였기에 아쉽게도 회수하지 못했다. 굳이 금화를 돌려준 것은 그녀가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달시는 이들에게 ‘대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의도 있다는 것을 베베 꼬인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로키는 토르가 금화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비웃지도 그렇다고 칭찬하지도 않았지만 달시는 만족했다.
기분 좋은 하루였다. 담당 환자인 알렌도 얌전히 약을 먹었고 딱 한 번만 토했다. 내원한 환자에게서 사소하지만 심상치 않은 증세를 짚어내 상관에게 칭찬을 받았고, 사탕을 꿀꺽 삼켜 목에 걸린 마일로를 하임리히 응급법을 사용해 무사히 구해냈다.
내일이 휴일이었기에 아껴뒀던 반차를 냈다. 달시는 사택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연락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나왔다. 휴일이면 별도의 연락 없이 맨해튼에 들르곤 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주차된 차에 올랐다.
퇴근시간을 피한 평일 오후의 맨해튼은 신호만 잘 받으면 쌩쌩 달릴 수 있었다. 달시는 익숙한 도로를 달려 익숙한 건물 앞에 주차했다. 열쇠는 가지고 있었지만 잘 쓰지 않았다. 예전에 막무가내로 들어갔다가 둘이 발가벗고 있는 꼴을 보았기에 눈을 찌르며 도망갔던 경험이 있었다. 휘파람을 불며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쿵쿵 감출 기세 없는 토르의 발자국소리나 시끄럽다고 타박하는 로키의 투덜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달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다. 조용했다. 열쇠를 꺼내 문고리에 넣었다. 문이 열렸고 휘파람이 멈췄다.
묘묘가 없었다.
집안은 조용했고 깔끔하게 정리된 듯 보였다. 그들이 앉던 소파는 새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푹 꺼지고 가죽이 벗겨졌다고 투덜거렸던 과거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로키가 늘 앉던 일인용 소파의 팔걸이 부분도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꼭 꿈만 같았지만 라디에이터는 최신형이었고 커피머신도 그녀가 직접 구입한 새것이었다. 달시는 테이블 위, 방, 주방, 창고방 등 구석구석까지 살폈다. 쪽지 한 장 없었다. 저장된 로키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없는 번호였다.
믿기 힘든 만남처럼 이들은 순식간에 그녀의 일상에서 사라졌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크게 서럽진 않았다. 찔끔 고인 눈물도 금방 말라버렸다. 달시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모든 이야기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첫 만남도 갑작스럽지 않았던가. 토르와 로키는 아스가르드로 돌아갔다. 괜찮은 결말이었다. 달시는 쓸쓸하게 방을 훑다가 집 밖으로 나왔다. 저녁은 근처 단골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연극을 보러 갈 요량으로 사둔 표는 세 장 중 한 장만 사용되었다.
그 뒤로도 한 달 정도는 맨해튼의 집으로 들렀다. 문을 열면 여전히 묠니르는 없었다. 달시는 집착하는 병자가 되기 싫었기에 슬슬 방문을 멈출 생각을 했다. 두 달 뒤에는 맨해튼에 오긴 했지만 제인과 셀빅의 연구소에만 들렀다.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고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했다. 가끔은 웨스트 체스터 카운티의 호수로 가기도 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수면을 한동안 감상하다가 하늘이 남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볼티모어로 돌아갔다.
새벽에 잠에서 깼다. 탁상시계가 네 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달시는 꿈자리가 별로라는 생각을 하며 바람 빠진 풍선같은 소리를 냈다. 몸을 일으키는데 굳은 자세로 잔 탓인지 허벅지가 땡겼다. 전날 밤, 술을 진탕으로 마시고 휴일의 특권인 늦잠을 누리겠다 선포하며 매트리스 위로 뛰어들었는데 본의 아니게 일찍 일어나 버렸다. 달시는 엉망으로 뻗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팍팍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심장이 멈출뻔했다.
“안녕, 레이디.”
가까스로 비명을 막은 달시는 가슴을 정 중앙을 손으로 눌렀다.
“시프.”
“나를 아는가?”
브루넷을 질끈 묶은 이국적인 갑옷을 입은 여성, 시프와는 첫 만남이지만 로키의 환상으로 그녀를 알았다. 달시는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다가 안색을 굳혔다.
“그... 로키가 당신에 대해 알려줬어요.”
그러자 시프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극히 혐오스러운 뭔가를 본 얼굴이었다. 거대 바퀴벌레를 목격한 자신과 비슷한 반응이라 달시는 그녀의 안에서 로키의 평가가 얼마나 바닥을 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 미드가르드의 시간을 고려하지 못했던 내 탓이야.”
“천만에요.”
시프는 강인하고 멋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달시는 흐트러진 제 모습이 민망하단 생각을 하며 침대에 앉은 채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요약하자면 ‘아스가르드 관광’이었다. 로키와 토르가 불렀다고 한다. 말 한마디, 이메일, 문자 하나, 쪽지 하나 남겨두지 않고 간 주제에 뒤늦게 미안하단 생각을 든건지, 부루퉁하게 입술을 비죽이고 있자 시프가 물었다.
“지금 갈텐가?”
“음, 저 씻고 옷 좀 갈아입어도 되나요?”
“물론이야.”
달시는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같은 여자 앞이었지만 하의를 입지 않고 속옷만 걸친 차림새가 부끄러웠다. 이상하게 가슴이 자꾸 두근두근 설렜다. 시프는 거실로 나갔고 달시는 방에 딸린 샤워부스에서 간단히 씻고 나왔다. 아끼는 옷을 입고 가볍게 화장도 했다. 쭈뼛거리며 거실로 나가자 시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 어지러우면 눈을 감고.”
달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와 딱딱한데 부드러워!’ 동시에 성립이 불가능한 단어의 조합이 내면의 외침으로 터졌다. 갑자기 눈앞이 순식간에 번쩍였고 눈을 뜨자 사택의 옥상이었다. “헤임달, 부탁해요.” 시프가 달시의 허리를 꽉 껴안고 손을 높이 뻗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토르의 옆구리에 끼어 하늘을 날았을 때보다 훨씬 빨랐다.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비명을 지르자 목소리를 남겨두고 이동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내적 비명을 어느정도 터트리다가 조용해져서 눈을 뜨니 아스가르드의 전경이 펼쳐졌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그들이 있을거야.”
“솔직히 믿기지 않네요. 남자도 임신이 가능하다니.”
“미드가르드 인들과 우린 많이 다르지.”
“흐음...”
토르가 권능을 찾은 건 좋은데 임신을 하는 바람에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 달시에게 전할 틈도 없이 아스가르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시프가 알려주었다. 달시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작은 돌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끝 부분에 큰 나무가 보였다.
“그 둘을 만나고 나서 당신을 또 볼 수 있을까요?”
“일정은 없지만 특별한 용무라도 있나?”
“저 시프가 마음에 들어요.”
“뭐...?”
시프가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강인한 전사가 당혹스러운 감정을 드러내자 달시는 활짝 웃었다. 좀 정신나간 표현을 덧붙이자면 눈에서 핑크빛 사랑의 기운이 뿜어지는 것 같았다. 달시는 감정에 솔직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진하는 고백이 언젠가의 토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프의 마음은 다를지도 모르겠니만 뭐 어떠랴, 옛부터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전사는 곧 인상을 풀고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토르의 임신이라, 곱씹을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신비한 외계인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물렁물렁했던 지구인 달시 루이스의 가치관이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렸다. 현실과 동화의 경계에 서서 그녀는 돌길을 따라 걸었다. 로키의 환상으로 본 풍경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꽃인지 뭔지 처음 맡아보는 좋은 향기도 진하게 풍겼고 스쳐지나가는 바람도 지구의 그것과 다른 소리를 냈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풀은 고만고만한 연녹색이었지만 드문드문 피어난 들풀들은 빛의 방향에 따라 총천연색으로 반짝였다. 발밑에 구르는 작은 돌멩이조차 환상적이었다.
멀리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로키가 말한 위그드라실?’ 떠올린 생각은 금방 지워졌다. 언덕에 위치한 나무 너머로 훨씬 거대한 몸체가 보였다. 나무라고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거리감이 있었음에도 한 눈에 다 담기지 않을만큼 거대했다. 검은 은하수까지 어우러진 장엄한 풍경을 감상하며 달시는 느긋하게 걸었다. 나뭇잎이 부대끼며 나는 소리가 물이 담긴 유리잔을 두들기는 것처럼 맑고 청량했다.
모포를 두른 토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서있던 로키가 달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고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저 잘난 껍데기 안에 든 처절하고 불쌍한 한 마리의 짐승을. 달시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로키가 고개를 숙이고 비웃는 모양새로 웃었다. 토르는 자고 있는 듯 보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베이비 샤워급은 힘들더라도 아기 신발 정도는 사오는 거였는데, 약간 아쉬운 심정으로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로키가 한 손을 배 밑에 대고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와, 달시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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