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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nificent sanctuary 1

스팁토르 AU

 

 

 

 
 

토르와 스티브는 같은 포스트 케어홈에서 자랐다. 그들은 형제처럼 사이가 좋았는데 주로 몸이 약한 스티브를 한 살 많은 토르가 나서서 돌보는 편이었다. 내향적인 스티브와 달리 토르는 활기차고 붙임성이 좋아 함께 지내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포스터인 레베카는 몸이 약한 스티브보다 밝은 성격의 토르에게 먼저 가족이 생길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스티브의 입양처가 먼저 정해졌다.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사업가 로저스 부부의 선택이었다. 스티브는 숫기가 없고 말수가 적었지만 유순하고 똑똑했는데 그 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양부모의 차량 앞에서 울먹이는 스티브의 작고 마른 손목을 붙든 토르는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

네 부모님 엄청 좋은 분들 같아. 그러니 울지마. 넌 똑똑하고 착하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좋은 약 먹고 열심히 운동하면 금방 튼튼해질걸.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꼭 기억하겠다고. 그러니 나중에 너도 날 잊지 말라고 했던가.’

열두 살 스티븐 그랜트 로저스는 사업가인 부모님이 해외 출장을 간 틈을 타 베이비시터를 따돌리고 포스터 홈을 찾아갔다. 레베카는 스티브가 입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르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이야기만 전해주었다. 토르가 입양된 가정은 사업차 해외로 자주 다니는 부유한 집안이라고 했지만 알려준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보니 이미 오래전에 해지된 없는 번호였다. 거기까지가 소년에게 최선이었다. 토르는 잘 지내겠지,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본인의 삶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개개인이 먼저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고 그것을 실천하는 상류층 사람은 흔치 않다. 조지프 로저스와 사라 로저스 부부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겸손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스티브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후 아픈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숙지했고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면 유연하게 대처했다. 스티브는 부모의 지원으로 좋은 병원을 꾸준히 내원했다. 좋은 약을 먹고 체계적인 몸 관리를 했다. 덕분에 뼈만 남은 몸에 서서히 근육이 붙기 시작할 무렵엔 병을 견딜 수 있을만큼 단단한 몸이 되었다. 여전히 약이 필요했지만 튼튼해진 신체는 면역력이 높아져 합병증에 시달리는 일이 줄었다. 로저스 부부는 스티브의 멘토 역할도 무리 없이 해냈다. 덕분에 심성 곧은 소년은 부서지고 꺾이는 일 없이 우직한 정의를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내향적인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는 요령을 터득한 이후로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선 똑 부러지고 활발한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이 년쯤 지나서 생각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서로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로스쿨에 입학했다. 스물 일곱, 젊은 나이에 검사가 되기까지 양부모의 지원을 등에 업은 스티브는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 magnificent sanctuary

 



“관련 파일만 80박스가 넘는다며?”

선임인 샘 윌슨 수석 검사의 장난스러운 시비에 스티브는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우울하게 웃었다. 사흘째 이어지는 야근 때문에 몽롱해진 정신은 샷을 네 번 추가한 커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스티브는 컵을 책상에 내려놓고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사흘간 시신 안치소만 들락거리다 보니 영 죽을 맛이네요.”

투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샘 윌슨은 낄낄 웃으며 펜을 거꾸로 세워 책상을 장난스럽게 두들겼다.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이야. 가뜩이나 골머리 앓는 사건인데. 공보실 빅터 알지? 보도자료 준비하면서 아주 죽는 소리 내더라.”

말투는 짓궂었지만 후임이 특유의 대쪽 같은 정의감을 발휘해 상관에게 대드는 반역을 몇 번이나 수습해줄 정도로 좋은 사수였다. 스티브는 자리에 앉아 데스크탑 전원을 눌렀다. 뉴욕 전역에서 현재진행중인 속칭 [까마귀 살인마] 검찰은 최근 스티브 로저스를 담당 검사로 배속했다.

그의 살인은 조용하게 시작되어 조용하게 끝났다. 첫 번째 피해자는 브루클린 앞바다에 떠있는 부표에 걸려서 발견되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낚시꾼은 검은색으로 뒤덮힌 부표를 목격했다. 덩어리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는 것이다. 가까이 배를 몰아가자 그것들이 모두 까마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겁을 했다. 오 년 넘게 수사에 진척이 없어 경찰의 무능력함을 증명한다는 불명예스러운 사건. 일년 전 사건이 FBI로 이관된 후, 경찰은 까마귀와 관련된 화제를 쉬쉬했다.

가슴과 복부 중앙, 명치에 깊은 자상, 이 바닥에서 몇십 년을 구른 강력계 형사들도 신기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현장은 완벽하게 절제되어 있었다. 물적 증거로는 족적 두 점이 전부였다. 발 크기로 미루어 키가 6피트 이상인 남성이라는 것이 현재로선 유일한 단서였다. 피해자들 사이의 연관성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혹 살인청부라면 주변인들과의 불화나 돈, 애정등에 얽힌 커넥션이 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모니터를 보는 중에 익숙한 알람음이 울렸다. 스티브는 양복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터치했다.

[새로운 정보가 있어요. 저녁 8:00, 도슨 호텔 카페라운지에서.]

FBI 프로파일러 마거릿 앨리자베스 카터 요원은 기준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서른아홉 노련한 수사관인 그녀는 추측만으로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스티브는 일정을 확인했다.

 


“맨해튼 거주, 스물 중반에서 서른 초중반까지의 나이, 형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스티브가 파일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리는 동안 페기는 찻잔을 기울였다. 둘 사이로 은은한 로즈마리 향이 감돌았다. 호텔에 딸린 작은 카페 라운지에 앉은 그들은 각각 커피와 허브 티를 앞에 놓고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버밍엄 부부 사건을 프로파일 하신 겁니까?”

파일을 내려다보던 스티브가 눈동자만 올려 페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격자가 있는 케이스는 이례적이라 다른 현장보다 더 매달렸죠.”
“아이에게 시각장애가 있다는 걸 알고 여유를 부렸을까요?”

스티브의 질문에 페기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서 패턴을 바꿨다기엔 그는 이미 완성되어 있어요.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미처 죽일 수가 없었던 거라고 추정합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박자가 느린 재즈음악이 흘러나왔다. 연령대 높은 고상한 손님들이 자주 찾는 도슨 호텔 투숙객들의 취향에 맞춰 카페에는 50-60년대 빅밴드 재즈곡이 자주 나왔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라이브 공연도 있었다. 물론 스티브와 페기는 공연을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곳이 접선 처로 자주 이용되는 이유는 FBI 맨해튼 지부와 검찰청 간의 거리를 따져 보았을때 가장 합리적인 절충안이었기 때문이다.


곡이 바뀌었다. 잔잔한 재즈 피아노 곡, 흔히들 긴장을 풀어준다고 알려져 있는 재즈 곡은 안타깝게도 신경줄을 졸라 매고 있는 젊은 검사에겐 효과가 없었다. 스티브는 자꾸만 풀어지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페기는 유리잔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쓸며 말을 이었다.

 

“시각이 마비되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죠. 창틀을 넘나드는 발소리, 밖에서 뭍혀온 냄새… 꼭 눈에 보이는 부분이 아니더라도 증거로 연결될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보다 한 달이 지났는데 면담 요청이 계속 반려되는 건 좀 이상하네요.”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자는 버밍엄 부부의 외아들이었다. 고작 여덟 살 피터 버밍엄에겐 가혹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앨라배마에 살고 있는 친할머니가 피터를 돌보기 위해 올라와 병원에서 함께 지내길 어언 한 달, 아직 조사에 응할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이유로 조서 작성을 미루는 중이다. 스티브는 커피잔을 내려 놓고 미간을 꾹 눌렀다. 눈을 찡그리는 그를 빤히 응시하던 페기가 찻잔 테두리를 더듬던 손가락을 거두고 팔짱을 꼈다.


“로저스 검사,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스티브는 느릿하게 볼을 쓸었다. 손바닥에 닿는 피부가 퍼석했다.

“티가 났습니까.”

그의 말에 페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요. 우리 같은 직업은 휴식도 중요하다는 거 아시죠?”
“부끄럽군요.”
“여유를 가져요. 조급하게 생각하다간 많은 것들을 놓칩니다.”

스티브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정말 피곤했다. 사흘 간 현장과 검시소를 넘나들며 하루에 세 네 시간씩 운전대를 잡았고 복잡한 의학적 지식이 잔뜩 담긴 진술서를 독파하기 위해 반나절을 매달려 있는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었다. 페기 카터는 넓은 시야를 가진 유능한 프로파일러였다. 그녀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했다. 다만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지적하고 조언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녀는 본인의 바운더리에 속한 사람들을 챙기는 행동에 익숙했다. 바꿔 말하면 본인 기준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겐 사무적으로 응대 한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제 사람’ 기준은 그물망처럼 촘촘하고 좁았다. 스티브 로저스는 후자였다. 그러나 만난 지 두 달도 안 된 신임 검사보의 적극적인 자세는 그녀의 꼼꼼한 기준에 의례적인 구멍을 만들었다. 스티브는 미소와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오피스텔 문을 연 스티브는 집 안을 어색하게 둘러보았다. 머문 지 삼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영 익숙하지 않았다. 잦은 출장과 야근으로 잠을 자는 장소 이상으로 사용한 적이 없어서 서먹하게 느끼는 것도 있었지만 스티브에겐 그만의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다.

스티브는 포스트 케어홈을 떠나오던 당시부터 본인이 뿌리를 내리는 곳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다. 물론 로저스 부부는 좋은 부모였고 빼빼마른 고아소년의 행운에 감사했다. 하지만 폭신한 침대에서 고급 이불을 덮고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옷을 입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삶과 괴리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다소 도피적인 망상을 했다.


그리고 거기엔 반드시 토르가 있었다. 저보다 색이 연한 금발의 푸른 눈을 휘며 환하게 웃는 소년.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록 스티브의 머릿속에서 토르는 계속 소년으로 존재했다. 그를 기억하면 숲을 헤치며 손바닥을 간지럽히던 부들부들한 억새의 감촉과 실컷 놀고 케어홈으로 돌아갔을 때 포스터 레베카 손에 쥐여주던 쿠키 냄새가 함께 떠올랐다. 밤나무 숲 구석의 좁은 동굴을 아지트 삼아 드나들며 놀던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한참을 산과 들에서 뛰놀다 스티브의 몸에 열이 오르면 토르는 울상이 되었다. 그는 괜찮다는 스티브를 기어코 들쳐 업고는 험한 숲을 지나 케어홈으로 돌아왔다. 토르는 스티브의 상태가 이상해지면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가 구해준 목숨이 몇 개나 될까? 당장 생각나는 것만 꼽아도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토르는 커다란 배를 타서 바다로 나가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선장이 되고 싶어? 물고기도 잡고 게도 잡는.] 언젠가 스티브는 알래스카 베링해의 대게잡이 선원들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었다. 집채만한 파도와 싸워가며 게를 낚아올리는 선원들, 스티브는 토르가 그런 위험한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다행인지 토르는 어부생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바다에서 살고 싶어. 하루종일 배 위에 있다가 땅으로 내려오면 구름을 밟는 것처럼 바닥이 폭신폭신하게 느껴진대. 신기하지? 식량 가지러 육지에 들를 때를 빼곤 배를 타고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는 거야. 엄청 즐거울걸?] 토르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 배를 유지하려면 돈이 많이 들거고 계속 바다에만 있다가 다치거나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위험하고…’ 꿈과 현실을 구분할 줄 알았던 스티브는 비관적으로 생각했지만 자신만만하게 포부를 밝히는 토르를 응원했다. [너도 태워 줄게. 어른되서 건강해지면 같이 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기분을 망치기 싫었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운 날이면 형처럼 따랐던 소년이 그리워졌다. 이제는 건강해졌지만 토르는 없었다. 그는 아련한 과거로 남았다. 스티브에게 토르는 일종의 스트레스 측정기였다. 추억에 잠겨 들면 들수록 상태가 최악임을 뜻했다.

스티브는 정장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넥타이를 좌우로 흔들며 느슨하게 풀었다. 씻고 누워야 한다는 생각은 정말 생각으로만 끝났다. 스티브는 양말도 벗지 않고 쓰러지듯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매트리스에 삼켜지듯 몸이 푹 가라앉자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꿈을 꿨으면, 거기에서 토르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밀밭을 가르고 씩씩하게 나타나 함께 놀자고 손을 내밀어 준다면 이 끝없는 공허함이 조금은 채워질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스티브와 페기는 FBI 지정 병원에 입원한 피터를 만나길 청했으니 번번히 거절당했다. 여전히 증언을 할 만한 상태가 안된다는 이유였다.

“두 달이 지나도록 이렇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다니…”

페기의 답답함에 스티브도 동의했다. 둘은 조용한 병원 복도를 걸었다. 복도 창문 너머 생존자 소년이 있을 병동 근처를 지나는 철문 앞에 건장한 체구의 경관 둘이 뒷집을 진 채 지키고 서있었다. 보안이 지나치게 철저했다. 또한 부모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졌을 소년의 정신상태를 감안하더라도 두 달이나 지났는데 간단한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쪽은 개인적으로 좀 알아볼게요. 얼마 전에 버밍엄 부부의 친인척 관계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하더니 뭔가 나온 게 있나요?”
“친가 쪽과 퀸즈 재개발 건물 상속 관련해서 근저당권 분쟁이 있었는데 빚은 다 갚았고 은행 대출도 거의 끝난 상태라 크게 의심 가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의심 가는 부분이 없다라…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군요.”

수사가 지지부진해진 현재로선 생존자의 증언이 중요했다. 치밀한 범인이 처음으로 남긴 빈틈이었다. 그걸 윗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잠에서 깬 스티브는 고개만 돌려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에 올려진 전자시계를 보았다. 8시 20분, 대략 7시간쯤 잤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침대 밑으로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어 휴식모드를 해제하니 부재중 통화 다섯 건이 떴다. 모두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다. 샘 윌슨.

[일어나면 연락해.]

스티브는 통화버튼을 누를까 고민하다가 껄끄러운 입안이 거슬려 우선 욕실로 들어갔다.

 

 


[그보다 더 높은 선에서 내려온 것 같아.]
“이해가 안 돼요. 고작 두 달, 성과를 내지 못해서도 아니라면 대체 이유가 뭐죠? 갑자기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한테 따지지 마.]

스티브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번 일은 샘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면서도 분통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도살자같은 연쇄살인범을 반드시 잡아야 했다. 물러나라니. 억울했다. 스티브는 넥타이와 자켓을 팔에 걸치고 현관문을 거칠게 열었다.

 

 


라우페이

차장 검사의 개인 오피스 앞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도 아는 인물이었다. 스티브는 노크 하려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멈칫 귀를 기울였다. ‘라우페이, 무슨 뜻이지?’ 속으로 단어를 곱씹는데 대화가 멈췄다. 

“들어와요.”

노크를 하지 않았음에도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티브는 문고리를 돌렸다. 집무실 안에는 마리아 힐과 키톤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있었다. 본청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다. 니콜라스 조지프 닉 퓨리 총장.

“이만 가보겠네.”

그는 스티브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힐에게 고갯짓 하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스티브는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혔다. 스티브는 힐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양손을 깍지 껴 복부에 모아 붙이고 삐딱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내일까지 정리하세요.”

그녀는 젊은 검사가 저를 찾은 이유를 꿰고 있었다. 테가 없는 안경 너머로 눈꺼풀이 깜빡였다. 스티브는 다급하게 양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잠깐만요. 여태까지 조사한 것만이라도 우선…”
“로저스, 혹시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요?”

힐은 가차없이 말을 끊었다. 평소에도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스타일이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찬바람이 불었다. 재고할 일언의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스티브는 씁쓸하게 입가를 쓸었다. 물고 늘어지는 것은 특기였지만 선임인 샘을 통해 사건에서 물러날 것을 지시 받았기에 그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다.

까마귀를 쫓기 전, 스티브는 브루클린 공장지대에서 벌어진 16세 소녀의 성폭행 사건의 구형을 맡았다. 형량을 줄여 준다면 유리한 증언을 하겠다는 가해자의 카드를 받아들이지 않고 법정 최고형을 밀어붙였다. 스티브는 제 소견을 관철했고 뒷수습은 함께 조사를 진행한 샘이 해야 했다. 그때 배운 융통성이 지금은 물러날 타이밍이라고 머릿속에서 필사적인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결국 스티브는 꾸벅 인사를 하고 힐의 집무실을 등졌다.

 


오후의 햇볕이 반쯤 열린 환기창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빛이 절반쯤 내리쬐는 휴게실 한구석에서 스티브는 샘이 준 커피컵을 받으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여섯 번째야. 늙은이도 아니고.”

정작 지적하는 본인도 한숨을 푹 쉬었다. 검사 생활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왕왕 있다는 샘의 위로에 스티브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조용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샘을 생각하면 공식적으로 나설수는 없으므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누군가 알량한 정의감이라고 비웃어도 상관 없었다. 정의와 규범을 지키는 것은 스티브가 추구하는 가장 큰 가치이자 질서였다.

“늘 가던 웨일즈 커피가 아닌가 봅니다.”
“마음에 안 드나?”
“커피는 거기가 나아요.”

스티브의 지적에 샘은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팍 썼다.

“평소에는 주는 족족 잘 받아 마시더니 갑자기 입맛이 까칠해 지셨어.”
“잘 보일 필요가 있던 시절에나 그랬죠.”
“어 그래, 졸업 축하한다.”

스티브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뻔뻔함에 샘은 픽 웃고 말았다. 벤티사이즈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커피가 절반으로 줄어들자, 스티브는 텅 빈 복도를 살피며 목소리를 깔았다.

“저 좀 도와줘요.”
“시말서 애절하게 잘 쓰는 법 강좌는 가능해. 넌 50% 특별가에 모실게.”
“샘.”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좀 마.”
“제이크 더글라스 부탁해요.”
“타임즈 기자? 직접 안하고 왜 날 시켜. 설마 벌써 자문 자격 박탈 당한 거야?”
“그럴 예정이죠. 지금 제 걸로 들어가면 흔적이 남아요. 그러니 선배 권한으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도비 게이트건으로 임시 아이디 발급 받은 거 압니다. 그거 본청에는 기록 안남죠?”
“와, 무섭네.”
“빠른 시일내로 부탁해요. 급합니다.”
“아주 봉처럼 부려먹는군.”
“늘 감사하고 있어요.”

얼굴에 철판을 백 장은 깐 듯한 스티브의 인사에 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스티브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멀지 않은 복도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샘은 조금 남은 커피를 한 번에 꿀꺽 마시곤 빈 컵을 휴지통에 넣고는 “알아서 몸 사려.” 에두른 승낙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 년 전부터 시작된 연쇄 살인 행각으로 밝혀진 것만 총 스물다섯 명이 죽었다. 까마귀는 소리 없이 나타나 흔적없이 사라졌다. 사용한 흉기는 1센티 두께의 특수 제작한 걸로 보이는 나이프. 6피트 이상의 장신의 남성, 스물다섯에서 서른다섯 사이, 결벽증이 있거나 그에 가까운 강박적인 성격. 물적 증거로는 희미한 족적 두 점. 이런 상황에서 버밍엄 부부의 살인사건 현장에서 생환한 그들의 일곱 살 난 아들은 전환점이었다. 그런데 판도가 뒤바뀔 계기를 눈앞에 두고도 진술서 작성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이젠 아예 담당 검사가 물러나는 지경까지 왔다. 스티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쯤되니 근거 없는 음모론을 싫어하는 원칙주의자라도 ‘어떤 흑막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사건을 맡기 전까지 스티브는 두 달간 휴가를 냈다. 힐은 스티브의 휴가계를 별말 없이 수리해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FBI 아이디는 힐의 사무실에 들른 그 날 오후 바로 막혔다. 출력물은 남아 있어 수기로 정리했다지만 각종 영상은 그렇지 못했다. ‘몇 번 더 샘에게 신세를 져야 하나.’ 그는 생각과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더글라스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것만으로도 과했다. 제이크 더글라스는 FBI가 요주의 인물로 관리를 하는 뉴욕타임즈 기자였다. 약삭빠르고 머리 좋은 중년 기자에겐 특별한 정보원이 붙어 있는 모양인지 경찰이 냄새를 맡기도 전에 먼저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공표하고 나타나곤 했다. 페기는 제이크가 범인과 커넥션이 있는지를 철저히 조사했지만 책을 잡을 만한 구석은 없었다. 그런 남자가 얼마 전, 까마귀와 관련된 기사를 모두 철회했다. 그는 이제 워싱턴DC 교외의 자택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사회부 사설을 쓰고 있다.

브로콜리를 삶던 중 거실에 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스티브는 끓는 물에 데친 브로콜리를 찬물이 담긴 보울에 붓고 젖은 손을 앞치마에 대충 닦으며 거실로 걸어갔다. 탁자에 올려 둔 휴대폰을 보니 예상대로 페기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스티브는 앞치마를 벗어 테이블 옆 의자에 걸쳤다. 뒷머리를 주무르며 소파에 앉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두 번 갔을 때 페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다섯 번은 울려야 받았는데, 다소 편집증적인 생각을 하던 스티브는 그녀의 다급한 말을 들으며 머리를 앞으로 기울였다.

[피터 버밍엄 조서를 받기로 했어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제가 수사에서 제외됐다는 소식은 들었습니까?”
[공문은 봤어요.]

스티브는 발끝을 까닥이며 침묵했다. 액정 너머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스럽지만 이쪽 사정도 비슷해요. 오전 부로 팀원 절반이 부서이동을 당했어요. 필시 어떤 외압이 있었을 겁니다. 피터 버밍엄과의 면담을 자꾸 미룰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저도 물러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어떻게 시간을 벌긴 했어요. 혹시 상부로부터 보고 들었다거나 이번 지시와 관련해 짐작 가는 부분이 없나요? 사소한 내용이라도 좋아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던 그녀의 목소리에서 잔잔한 분노가 느껴졌다. 스티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짐작 가는 부분’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라우페이] 

그날 밤 스티브는 단어를 구글링 해보았다. 시나리오 라이터의 닉네임, 건축사무소 등 딱히 수상쩍은 부분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돌려본 검찰 데이터 베이스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스티브가 좀 더 높은 등급을 가졌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없군요. 조사가 대대적으로 축소되는 겁니까?”
[범행 텀이 길어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인력 낭비라며 감축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일손이 모자라서 허덕인다는 건 현장을 한 번만 나와봐도 알텐데. 순 억지죠.]

스티브가 사건에 매달린 시간은 두 달 남짓이었다. 그조차 이리 분통이 터지는데 일 년간 열과 성을 다했을 페기의 심정은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포기할 생각 없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몇 차례 조사를 진행하며 알아낸 요점을 짧게 주고받았다. 페기가 받은 유예기간은 앞으로 석 달, 그동안 강도를 높여 심층을 파고들 계획을 세웠다. 페기는 스티브에게 여태껏 접근 권한이 없던 정보를 이메일로 전송하겠다고 약속했다. FBI 기밀자료를 함부로 공개하는 것은 큰 위법행위였다. 이제는 외부인이 된 스티브와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판단은 그녀의 절박함을 알려주는 지표였다. 스티브는 페기의 용기와 결단에 짧게 경의를 표했다.

통화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스티브는 밍기적 거리는 몸을 채찍질해 부엌으로 향했다. 찬장에서 작은 접시를 꺼내 얼음 담긴 보울에서 브로콜리 조각을 꺼내 담았다. 접시를 든 스티브는 한 조각 입에 넣으며 거실로 향했다. 소금이 모자라 싱거웠지만 애초에 맛을 따지려고 했으면 완전식을 챙겨 먹었을 것이다. 그는 소파에 앉아 몸을 숙여 손을 뻗고 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텔레비전을 켜고 스포츠 채널이나 뉴스 채널을 왔다갔다 재다가 농구 중계에 화면을 고정했다. 멍한 얼굴로 경기를 보며 의무적으로 브로콜리를 씹다가 마지막 조각까지 다 먹고 텔레비전을 껐다. 페기의 자료와 샘에게 부탁한 제이크 더글라스와 관련된 조사파일을 받기 전까지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스티브는 빈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주방으로 갔다. 물로 헹궈 한켠에 엎어 놓고 기지개를 크게 켜자 정신이 좀 맑아졌다. 요 며칠 수면을 늘렸더니 과연 컨디션이 좋았다. 페기의 권유대로 카모마일 차를 마셨던 것이 효과를 본 것일까. 새벽마다 설핏 잠에서 깨던 횟수도 많이 줄었다.

 

찻잔을 들고 거실 한 켠에 마련해둔 보드 앞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얽혀 있는 빨간 실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확대된 뉴욕 지도를 코르크 보드에 펼쳐 꽂고 그 위에 각각의 피해자들의 사진이 널려 있었다. 핀을 따라 묶여 있는 빨간 실들은 보드의 중앙으로 이어졌다. 물음표가 그려진 노란 포스트 잇, 그것이 베일에 쌓인 범인이었다. 수많은 붉은 실들이 포스트잇을 향해 연결되어 있었다. 얼핏 퍼져나가는 핏줄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최근 새로 연결된 붉은 실은 노스 베러겐 81번가를 향하고 있었다. 버밍엄 부부의 자택이다. 스티브는 이마에 붕대를 감은 목격자 맹인 소년 피터 버밍엄을 떠올랐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FBI 지정 병동 입구에서 제 안내견과 함께 서 있던 반바지의 소년. 옆에는 앨러배마에서 올라온 친할머니도 함께 있었다. 굳게 다문 입매와 서슬 퍼런 안광이 인상적인 노년의 여성이었다. 손주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얼마나 줬는지 소년의 각 잡힌 코트의 어깨 부분이 잔뜩 우그러져 있었다. 아플 법도 한데 그는 용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피터 버밍엄은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를 알지도 모를 중요한 증인이었다. 

붉은 실들 사이로 이질적인 검은 실 한가닥이 뉴욕 지도를 벗어나 벽으로 이어졌다. 연결점의 포스트잇에는 워싱턴 D.C 알링턴 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이크 더글라스, 타임즈 기자인 중년의 사내였다. 피해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산 자인 그는 FBI 감시리스트에 있었다.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은 FBI가 저를 감시하는 사실을 잘 알고 알았다. 민간인 사찰이라고 굳이 떠벌리지지 않아도 이 방면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감시는 어느정도 익스큐즈 된 감이 있었다. 물론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위키리크스때와 비슷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벼르는 기자들이 잔뜩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스티브는 국가 단체와 폭로를 원하는 민간인, 각종 언론들의 알력 다툼 따위 알 바 아니었다. 그저 연쇄살인범을 잡고 싶을 뿐이었다.

 

 


“휴가 받고 직장 앞 카페에서 약속 잡는 놈은 너 하나 뿐일거야.”
“고마워요.”


웨일즈 카페, 펀드매니저였던 중년의 마스터가 이른 퇴직 후 세운 가게였다. 언젠가 스티브는 그에게 왜 월가가 아닌 검찰청 앞에서 장사를 시작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 엿먹인 새끼들이 저기 들어가는 꼴 보려고 그랬지.” 맨해튼 검찰청 본건물을 가리켰다. 실제로 그의 상사였던 남자는 횡령 혐의로 조사를 받기 위해 본청을 다섯 번이나 왕래했다. 그때마다 마스터는 죽상인 남자에게 공짜 커피를 주었다.

스티브는 샘이 건넨 USB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주문? 스티브가 묻자 샘은 고개를 저었다.

“잠깐 나온 거라 들어가 봐야 해. 쉬려고 받은 휴가가 아닌 건 알지만 무리하지 마.”

걱정 섞인 당부에 스티브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샘은 코 끝을 확 찡그렸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풀고 몸을 돌렸다. 스티브는 주머니에 든 USB를 주물럭거리다가 조금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계산서 밑에 팁을 끼워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평일 오전 맨해튼 시내는 출근시간대를 지났어도 유동인구가 많았다. 특히 검찰청 앞은 더욱 그랬다. 양복쟁이들이 온갖 사연이 담긴 서류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바삐 드나들고 있었는데, 시장바닥 같은 소란스러움을 뚫고 시선이 느껴졌다. 스티브는 목 뒤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꼼꼼히 훑었다. 사실 묘한 시선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건을 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밍엄 부부의 자택으로 현장조사를 나갔을 때, 브루클린에 위치한 검시소에 들렀을 때, 여러 번에 걸쳐 누군가 저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리아 힐의 집무실로 불려간 뒤로 이런 경험을 그저 기분 탓이라고 넘겨 버리기도 어렵게 되었다.

스티브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USB를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지지부진한 수사, 증거가 없는 사건 현장, 생존자 조서를 주지 않는 윗선, 대대적인 팀원 축소, 정체 모를 시선까지. 음습한 악의가 느껴졌다. 그는 주차해 둔 공용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회색 각벽 너머로 시끌벅적한 도시를 잠깐 둘러보다가 차에 올라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제이크 더글라스씨 되십니까?”
[그게 내 이름이긴 한데, 당신은 누구고 이 번호는 어떻게 아셨는지.]
“맨해튼 지방 검찰청 3E 전담팀에 근무하는 스티브 로저스라고 합니다.”
[아아, 댁이 그 정의감 넘친다는 젊은 검사양반이군.]
“…번호는 개인적으로 아는 정보원을 통해 받았습니다.”
[정보원은 무슨, FBI 통해서 알아냈다고 솔직히 말해도 좋습니다.]

제이크 더글라스는 30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였다. 스티브는 노련한 기자를 상대로 우위에 설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직구로 미는 쪽을 택했다. 

“아는 것이 있다면 뭐든 부탁드립니다.” 

까마귀의 특정 피해자들을 입에 올리자 휴대전화 너머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모른다, 알려줄 수 없다, 하다 못해 비꼬는 언사도 일절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그렇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종군기자가 되면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뭔지 압니까?]

제이크는 화제를 바꿨다.

[유언장을 쓰는 겁니다. 농담 같지만 진짜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걸프전때 Apec 특파원이었습니다. 그때는 멋도 모르고 비장한 유언장을 다섯 장이나 갈겨놨었지.]
“지금은 사회면을 담당하는 걸로 압니다.”
[맞소. 이제는 그딴 쪽팔리는 유언장은 필요 없지. 안전한 법망의 테두리에서 노는 겁니다. 뭐 가끔… 사소하게 법을 어길때도 있지만 적어도 유탄에 맞거나 구걸하던 어린 아이가 배에 둘둘 두른 폭탄을 보여주며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며 달려드는 일은 없으니까.]

짧게 숨을 고르는 소리와 함께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FBI는 제이크 더글라스가 열정과 사회 암적인 존재들에 대한 증오를 품은, 불의에 저항하는 반골 기질을 품은 사내로 현실과의 타협을 가장 혐오한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오세아니아의 탄생을 두려워하는 자유주의자처럼 굴기도 했고 통제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동유럽 공산주의자의 논리를 설파하기도 하는 등 다소 자유분방한 사고를 하는 언론인이었다. 한 번 타깃을 정하면 물고 늘어져 끝까지 싸우는, 결과는 본인의 입신양명으로 귀결되긴 했지만 어쨌든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니 훌륭한 기자인 셈이다. 그런 남자가 지금 FBI나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아는 것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계속 말을 돌렸다.

 

“외압이 있었습니까?”

페기가 강조했던, 스티브가 마리아 힐의 개인 사무실에서 느꼈던 불합리의 결정체. 이 깐깐하고 프라이드 높아 보이는 타임즈 기자라면 허상처럼 떠도는 위협의 구체적인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스티브는 기대감으로 가슴을 조금 부풀렸다.

[외압?]

제이크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허헛- 끊어 웃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초조하게 발끝을 굴렸다. 어두운 방 안, 책상 위에 올려진 모니터 액정만 하얗게 빛났다.

[물론, 일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터질 수 밖에 없습니다. 거대한 권력, 힘없이 흔들리는 개인, 징그러운 미행은 따라붙고… 그래도 말입니다. 그런 저질 경고가 들어온다고 겁먹고 물러났을 심약한 성격이었다면 이 바닥에서 오래 못 버텼을 겁니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를 조사할 때마다 상대의 약점을 확보해뒀기 때문이지. 주체가 브루주아 이익집단이든 프롤레타리아 반대급부든 일단 뭐라도 거머쥐고 강짜를 부리는거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정보의 질이 과하거나 혹은 못 미치거나, 파워게임에서 밀려나면 끽!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지는 겁니다. 샌디 훅 방파제에 걸린 나무토막으로 관광객들에게 발견되는… 그저 그런 프라임 뉴스감이나 되었을지도.]

스티브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자 등반이에 등을 기댔다. 바퀴가 바닥 카펫에 끌려 직- 딸려오는 소리가 났다. 제이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이 말은 길어진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소리가 뚝 끊겼다. 제이크는 근원 주위를 살살 건드리고 있었지만 정작 핵심은 손도 대지 않았다. 스티브는 못내 불안해졌다.

“미스터 더글라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평소라면 상대가 어떤 식으로 말을 늘려도 진득하게 기다려줄 수 있었다. 그만큼 스티브 로저스는 참을성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좋지 못했다. 두 달간의 어정쩡한 휴가, 그동안 최대한 알아내야 했다. 젊은 검사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짜증을 읽은 기자는 발뺌을 시도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모아뒀던 자료도 이젠 없습니다. 허드슨 강 북서쪽 부두에서 드럼통에 넣고 모두 불태워 버렸지. 그러므로 그때의 이야기가 내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올 일이 없을 겁니다.]

지금 이렇게 통화를 하는 자체가 그에겐 내키지 않는 일이었는지 목소리가 침울했다. 스티브는 책상위를 탁탁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화면이 절전모드로 들어가자 스페이스 바를 툭 건드려 풀어주었다.

“부탁드립니다. 혹시 협박을 받았다면…”
[나는 고아고 피붙이도 없소이다. 아내도 7년 전에 죽었으니 완벽한 외톨이요. 잃을 게 없는 사람에게 협박이 통하겠습니까?]
“이 사건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놈은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고요.”
[당시 조사했던 별 거 아닌 자료들도 이젠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모두 잿더미가 되었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울리는 전화는 일절 받지 않을 겁니다. 만에 하나 내 집에 찾아 오더라도 문을 열어줄거란 기대는 마십시오. 시간낭비 하는겁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일방적으로 쏘아댄 말 끝에 생색내듯 붙이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스티브는 휴대폰을 내려 까만 화면이 통화목록으로 전환되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자의 목소리에서 미미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뭔가를 알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지 않는 이상에서야 피땀 흘려 조사한 자료를 불태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스티브는 샘이 준 제이크 더글라스 폴더를 뒤적이며 그가 쓴 대표 기사들을 몇 개 읽었다. 젊고 의욕이 넘치던 시절, 그는 남들은 기피하는 전쟁 발발지역과 탐사가 힘든 최초의 오지 등으로 자주 취재를 갔었다. 필리핀 내전을 다룬 장편 기사를 써 퓰리처 상을 받았고, 팔레스타인 난민 아이 셋을 국경 수비대에게서 구하기도 하는 등 목숨을 두려워할 사내로는 보이지 않았다. 모로보나 ‘고작 살인범’ 따위에게 겁을 먹을 인물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악바리 언론인의 입을 다물게 만든 결정적인 치명타는 무엇이었을까?

 


 


냉장고에 먹을 만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제이크 더글라스와의 통화 이후 스티브는 초심으로 돌아가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20시간째 잠도 자지 않고 커피 한 잔과 삶은 당근과 포토푀를 조금 먹은 것이 다였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휴식도 중요한 거 아시죠?’ 페기의 당부가 아니었더라면 몇 날 며칠을 책상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배달음식을 시킬까 고민하다가 바람도 쐴 겸 지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 옷걸이에서 얇은 재킷을 내려 걸치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자 회색 하늘이 우중충했다. 길 건너 빌딩 전광판이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스티브의 오피스텔은 맨해튼 외곽에서도 특별히 조용하고 한산한 계획관리 거주구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골목을 두어 번 지나면 번화가가 나왔기에 생활하기에도 편리했다. 스티브는 한적한 거리를 걸어 마트로 향했다. 11월 중순이라 날씨가 서늘했다. 트레이닝 바지와 하얀 반팔 티 위로 얇은 재킷만 한장 걸친 상태라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다. 스티브는 적당히 장을 보고 며칠간 집안에 틀어 박힐 생각을 했다. 페기가 보내준 파일은 과연 그가 처음 보는 내용들이 잔뜩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마트에 들어선 스티브는 입구에 쌓인 바구니 하나를 집어 들고 간편 식품코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스턴트 미트볼 박스를 다섯 개쯤 바구니에 담았을 때 시선이 느껴졌다. 스티브는 진열된 인스턴트 제품 이름을 살피는 척 손가락으로 훑으며 천천히 옆으로 이동했다. 딱히 취향이 아닌 치즈 라자냐를 바구니에 담으며 주변을 파악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 굽은 허리로 카트를 끌고 가는 노부부, 대 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손자와 할아버지, 특별히 의심가는 용의자는 없었다. 그는 탁 트인 냉동코너로 옮겨 가 표고버섯 완탕 스프를 바구니에 넣으며 다시 눈을 굴렸다.

검은 야구모자를 쓰고 그 위에 회색 후드를 뒤집어 쓴 건장한 체격의 남자를 발견했다. 깊이 눌러쓴 캡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해산물 진열대 앞에 서서 잘라 놓은 랍스터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는 바구니도 카트도 없이 양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간간히 이쪽을 힐끔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티브가 목표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스티브는 바구니를 고쳐잡고 곁눈질로 남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건들건들, 머리는 일정하게 흔들고 발은 산만한 스탭을 밟았다. 음악이라도 듣는 모양새였지만 귀에 꽂힌 건 없었다.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손이 빠져나와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반복하는 모양이 엉성한 마약 중독자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성인 ADHD 환자라던지. 스티브는 침착하게 거리를 쟀다.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은 자신이 있었다. 생선을 보는 척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조개가 포장된 팩을 드는 순간, 스티브는 그를 급습했다. 두 사람이 한데 엉켜 바닥을 구르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졌다. 회색 후드의 남자는 퍼드득 거리며 손발을 휘둘렀지만 스티브가 그것을 무리없이 피하고 붙들었다. 남자는 바닥에 자빠져 수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발을 꼴사납게 휘둘렀다. “씨발! 비켜!” 움직임을 보니 프로는 커녕 동네 건달 급도 못 되었다. 묘하게 어색한 미행법도 그렇고 스티브는 이 남자가 초짜라고 확신했다. 그때 멀리서 직원이 달려왔다.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마트의 상호명과 이름이 적힌 명찰을 단 브루넷 여성이었다. 스티브는 엎드린 남자를 눌러 제압한 후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케이트? 케이트라고 불러도 됩니까? 제 자킷 주머니에 지갑이 있으니 신분증 확인해 보세요.”


계속 반항하는 남자의 양 손을 등 뒤로 돌려 잡고 몸의 무게를 실어 눌렀다.

“아프잖아! 개새끼가!”

비명섞인 거친 욕설이 터졌다. 스티브는 팔을 살짝 들어 주머니가 보이도록 자세를 잡았다. 케이트는 머뭇거리다가 지갑을 꺼내 검사증을 확인했다. 그녀는 납득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킷에 지갑을 다시 넣었다. 스티브는 그의 양손을 등허리에 누르며 몸을 숙여 질문했다. “내게 무슨 볼 일이지?” 그러나 남자가 거칠게 어깨를 흔들었다. 단단히 붙들린 탓에 상체가 약간 뒤척이는 정도로 그쳤다. 그는 스티브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사납게 소리질렀다.

“이것 풀어!”

스티브도 대답 대신 왼쪽 무릎에 힘을 주어 남자의 등을 꾹 눌렀다. 아프다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딱 불편할 정도로만 힘을 줬는데 엄살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자유로운 다른손으로 그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까부터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반복하는 것이 수상했는데 과연 뭔가가 들어있었다. 걸리는 것을 모조리 잡아 꺼내자 구식 2G 폴더폰과 꾸깃꾸깃 접힌 메모지가 나왔다. 스티브는 남자의 구속을 풀지 않고 그것을 펼쳤다.

<사건에서 손 떼고 검찰청으로 돌아가. 네 가족을 생각해. 스티브.>

휘갈겨 쓴 글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스티브가 굳어 있자 남자가 다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걸 댁한테 저 전해주라는 부탁을 받았어!”
“누구에게?”


남자가 우물쭈물하자 스티브는 혀를 차며 무릎을 치우고 뒤로 돌린 남자의 양 손목을 꽉 쥔 채로 바닥에서 일으켰다. 모여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스티브는 케이트에게 밀폐된 공간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음료수 코너 뒤쪽으로 청소도구를 넣어두는 좁은 창고가 있다고 대답했다. 일으켜진 남자는 계속 욕을 했다. 스티브는 그의 뒤에서 손목을 붙든 채로 창고로 몰아갔다. 퍼드득거리며 욕설을 튈 때마다 안내하는 점원의 어깨도 튀어 올랐다.

“모 몰라. 정말이야. 요 앞 공원에서 담배 피우고 있는데 공중전화가 걸려 오길래 가보니까 지폐뭉치랑 그 그거랑 메모가 있었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창고로 몰아넣어 풀어주자 남자는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몸을 웅크린 채 비굴하게 두 손을 비볐다. 놓아줘, 난 시키는 대로 했어, 거짓말 아냐, 계속되는 어눌한 변명들을 듣고 있던 스티브는 질문을 바꿨다.

“그럼 왜 바로 전해주지 않고 미행한 거지.”
“그건…”  
“제가 대답하죠. 그 자식 전과 7범 소매치기거든요.”

스티브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찰복을 입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창고 문을 잡고 서 있었다. 아까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던 모양이다.

“클린트 바튼, NYPD 도심범죄 전담팀 입니다.”
“맨해튼 지방 검찰청 3E 소속 스티브 로저스 입니다.”

둘은 서로의 신분을 밝히며 간단하게 통성명을 했다. 저벅저벅 걸어온 클린트는 사내의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스티브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점원은 뒤로 빠졌고 전과 7범의 사내는 갑자기 나타난 경찰과 구면인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클린트가 남자의 뒤로 두른 손에 수갑을 채우고 창고에서 그를 끌어냈다. 별다른 문제 없이 범죄인 양도가 이루어지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흥미를 잃고 흩어졌다. 클린트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의 여성 경찰관은 껌을 씹으며 진열대에서 감자 스낵을 고르고 있었다.

“이 자식 분명 처음부터 당신 주머니를 노렸을 겁니다. 안 그러냐 빌? 가석방 중에 일을 치다니 아주 간이 부었군그래.”
“경관님! 저 저 정말로 훔치려던 거 아닙니다. 저 자식... 아니 아니 검사님 지갑 노린 적 없고 그냥 부탁받은 걸 전해주려고…”
“이제 수법을 바꿨나? 들켰을 때를 대비해서 발뺌하려고 또 이상한 수작 부리려는 거 아냐?”

클린트가 혀를 차며 의심하자 남자, 빌은 고개를 붕붕 저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뒤를 따르던 스티브가 목덜미를 주무르며 끼어들었다.

“아마 그자의 말이 맞을 겁니다.”

스티브는 남자에게 받은 폴더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클린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는 쪽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스티브가 쪽지를 주머니에 넣자 클린트는 미심쩍은 얼굴로 내용을 보길 청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거부하자니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스티브는 쪽지를 펼쳐 내밀었다. 클린트는 볼펜으로 쓰인 글과 수갑 찬 빌의 푹 숙인 뒤통수를 번갈아 보다가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심각한 상황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3E 부서는 FBI와 협력하는 팀으로 아는데 큰 사건에 휘말리셨나 봅니다.”
“…그건 말씀드리기가 좀.”

스티브가 곤란해하자 클린트가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가 주제넘었군요. 사과드리죠.”
“아닙니다.”

와중에도 클린트에게 붙들린 빌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기변호를 위해 애썼다. 그는 공원 앞 공중전화 박스에서 벨이 울렸고 호기심에 수화기를 들자 톤이 낮은 남자가 대뜸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뉘앙스라 지폐만 들고 도망가지 못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클린트가 그를 밀며 입구로 향했다. 스티브는 뒤를 따르며 타이거 새우가 쌓여 있는 냉동고 옆에 놓아둔 바구니를 들었다. 남자의 말은 사실인 듯 보였다. 소매치기 잡범은 사용하는 어희 수준으로 보아 초등교육을 받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교육수준에 비해 늘어놓는 변명이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스티브는 빌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클린트가 흐느적거리는 남자를 억지로 추켜세웠다. 

“이 자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데 가능할까요?”
“어렵지 않죠. 어이, 냇! 가자고!”

클린트의 외침에 그녀는 대답 대신 손에 양손에 각각 들린 스낵통을 들어 올려 흔들며 카운터로 향했다. 스티브도 바구니를 들고 붉은 머리의 경관 뒤를 따랐다. 카운터에 서 있던 점원 케이트가 과장스럽게 미소 지으며 감자 스낵 바코드를 찍었다. 냇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린 바구니 안을 슬쩍 보더니 풍선껌을 팡- 터트렸다.

“인스턴트만 먹다가 건강 다 버립니다.”

껄렁하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티브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웨이브 진 머리카락과 반쯤 뜬 나른한 눈이 매력적이었다. 삐딱하게 서 있는 자세가 불량스럽다기보다 노련한 분위기를 풍겼다. “3불입니다.” 그녀는 지폐를 캐셔에게 주고 과자를 봉투에 담았다. 뒤이어 스티브가 고른 인스턴트 식품들이 바코드에 찍혀 포장대로 밀려 나왔다.

“나타샤 로마노프. 저 멍청이와 같은 팀이에요.”
“스티브 로…”
“3E소속 스티브 로저스 검사,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되요. 클린트가 알면 저도 아는 겁니다.”

그와 통성명을 했을 때 거리가 제법 멀었음에도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스티브는 카드를 내밀고 전자패드에 사인을 했다.

“평소엔 잘 챙겨 먹습니다. 그래도 바쁘면 어쩔 수 없죠.”
“검사들은 늘 바쁘지 않나요.”
“특별히 바쁠 때만 이렇다고 정정하죠.”

나타샤는 손가락을 굽혀 분홍색 박스 하나를 가리켰다. 스티브는 봉투에 물건을 담으며 그것을 보았다. 병아리 사진이 트레이드 마크인 치즈 라자냐였다.

“치즈 라자냐는 여기보다 A&F께 먹을 만해요. 그리고 핫 치킨 파스타라… 이건 영 별로일 텐데. 뭐 취향은 다양하니까.”
“인스턴트는 건강에 안 좋다고 말씀하신 분치고는 많이 아시네요.”

스티브의 장난스런 대꾸에 그녀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잘난 검사 분들이 고급 음식점에서 접대 받아실때 우리 같은 말단 경찰들은 정크푸드를 입에 달고 살거든요. 빠삭할 수 밖에 없지요.”

검사에게 적대감을 가진 경찰들이 제법 있다고 들었는데 나타샤 로마노프도 그런 부류인 듯 했다. 나타샤는 검은 봉투를 흔들며 출구로 향했다. 스티브도 물건을 담은 봉투를 한 손에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평일 오후 맨해튼 B블럭에 위치한 경찰서는 한산했다. 소매치기 빌을 앞세운 클린트가 서 내로 들어서자 몇몇 경관들이 수갑 찬 잡범을 알아 보고 비꼬는 말을 꺼냈다. 클린트는 스티브에게 제 책상 앞 의자를 가리키며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시키는대로 의자에 앉자 그는 흐느적거리는 빌을 거칠게 밀며 취조실로 향했다. 나타샤도 제 책상 위에 과자가 든 봉투를 던져 놓고 클린트의 뒤를 따랐다.

“피자 시키신 분?”
“믹! 주차딱지 제대로 계산 했어? 중복 발급이라고 민원 들어왔다.”
“어이 피자보이, 여기로 가져 와!”
“망할! 누가 내 노트북 건드렸어? 내 파일 어디갔어!”
“자동차 면허 갱신 또 잊어먹었네.”
“방금 메리 부인한테 전화가 왔는데 또 아들을 찾는 군. 요양보호사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거야.”

온갖 말들이 빠르게 오갔다. 가만히 앉아서 경관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드라마처럼 각각의 스토리가 펼쳐졌다. 스티브는 폴더폰을 꺼냈다. 경찰차 뒷 자석에서 한 차례 확인했다. 주소록도 통화목록도 텅 비어있는 추적이 불가능한 선불폰이었다. 협박범은 스티브에게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다른 쪽 호주머니가 진동했다. 의자에 앉은 스티브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페기였다. 일곱 번째 피해자 지미 배넘의 과거 행적에 수상쩍은 내용을 발견해서 관련 자료를 메일로 전송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미 배넘은 과거에 소송에 휘말린 전적이 있었는데 그녀에겐 관련 파일에 접근할 자격이 없었다. 이래서 검찰과의 공조가 중요했다. 국가 기밀이 아니라면 3E 소속 검사들에겐 법무부 정보 열람실에서 웬만한 파일을 바로 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페기가 보내온 사건 넘버는 L9로 시작했다. 펜실베니아 주 동부 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진, 이혼이나 양육권 분쟁,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소송으로 추측했다. 스티브는 조사해보고 연락 주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바쁘신가 보군요.”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스티브는 깜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다. “워- 왜 이렇게 놀라십니까.” 양손에 커피잔을 든 클린트가 눈썹을 찌푸리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스티브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가 내민 커피를 받았다.

“저쪽 코너 돌아서 복도 쭉 따라가시다 보면 빈 명패가 달린 방이 있습니다. 바로 들어가 보시면 됩니다. 제 동료가 밖에서 보고 있을겁니다. 아 그리고 신분증 확인 좀 다시 해도 될까요? 절차라서요.”
“물론입니다.”
 
스티브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검사증을 빼내서 클린트에게 건넸다. 그는 빙글 돌아가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가 일련번호를 조회하는 동안 나타샤가 나타났다.

“클린트, 서장이 불러.”
“나 무슨 짓 했나?”
“안젤라 승진파티에서 새로 산 서장 구두에 오바이트 했지. 벨루티 꺼랬나?”

나타샤가 손을 올려 웩- 구토하는 제스처를 취하자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클린트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민 검사증을 받아 지갑에 넣으며 스티브도 몸을 일으켰다.

 

 

빌은 정말 심부름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스티브는 공원 구석 공중전화에 감식반을 보내 봐야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빌에게 폰과 쪽지를 전달한 범인은 치밀했다. 사고가 느린 약쟁이 빌은 수화기 너머로 변조되지 않은 목소리를 들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통화상대의 지식 수준을 예측하는 수준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유치원생 수준의 묘사를 듣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저음, 남자, 단답, 통화 대상에 대한 묘사는 그것이 다였다.

“전달 대상이 나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사진이라도 받았나.”  

스티브가 묻자 빌은 눈치를 보며 대답을 회피했다. 가석방 중이니 묵비권 행사해봐야 불리하게 적용될 거라고 목소리를 깔자 그제야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가 가끔 당신이 마트에서 나오는 걸 봤습니다. 주머니나 슬쩍 하려고 몇 번 봐뒀었는데... 그 그, 그 남자가 딱 거 검사님을 찍어서…”

어눌한 말을 조합해 보자면, 종종 마트에 오는 스티브를 보고 소매치기 대상으로 찍어 두었는데 공중전화를 건 남자는 ‘네가 노리던 금발 남자에게 전해.’ 라며 빌에게 전달자 역할을 맡겼다는 것이다. 최소 몇 주 전부터 관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스티브가 사건을 맡은 지가 이제 겨우 두 달이다. 어쩌면 주머니 사정이 나쁜 정키가 200달러로 만족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다 잡힌 것도 모두 계획 일부일지도 몰랐다.
 

 

취조실에서 나온 스티브는 뭐라도 알아 냈냐는 클린트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책상 위로 다리를 쭉 뻗어 올린 나타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클린트는 제 명함을 건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여기로 연락주세요. 제 직통 번호입니다.”
“고맙습니다.”
“대단한 검사 나으리가 우리 같은 말단 경찰 도움이 뭐가 필요하다고.”
“나타샤.”

클린트가 주의를 줬지만, 그녀는 콧방귀끼며 과자를 씹었다. 클린트와 스티브는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서를 나왔다. 슬슬 저녁시간이 다가올수록 서는 활기를 더해갔다. 민원인과 잡범들이 뒤섞여 각종 욕설이 오가며 성황리를 이루었다. 클린트는 경찰서 문 앞에서 파트너의 무례한 태도를 대신 사과했다. 

“검사들을 별로 안좋아하시나 봅니다.” 

스티브가 흘리듯 묻자 클린트가 볼을 긁적이며 간단하게 설명했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맨해튼으로 발령받기 전 필라델피아 연방 경찰 가정폭력 대응팀에서 활동했다. 세기가 바뀐지 한참이지만 아직도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신고는 고사하고 소극적으로 쉬쉬하는 경향이 컸다. 남편이 부인을, 애인을, 부모가 자식을, 이처럼 힘의 격차가 큰 수직적 폭력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선 빠른 격리가 최우선이었다. 그러나 청구한 영장은 그네들 내부의 사정으로 반려되기 일쑤였고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는 사이 폭력으로 끝날 사건이 결국 살인까지 번지게 되었다. 나타샤는 법원 입구에서 반려된 영장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 파일로 담당 검사의 머리를 내리쳐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저래 봬도 좋은 녀석이에요.”
“이해합니다.”

태워주겠다는 권유를 거절하고 슬슬 붐비기 시작하는 거리를 걸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도로를 달리는 차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헤어지기 전 클린트는 협박을 받는 상황에서 너무 부주의한 것 아니냐는 에두른 표현을 했지만, 스티브는 언제나처럼 웃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에서 또 시선이 뒤통수를 따라붙었다. 스티브는 지나가는 사람들, 골목 구석, 건물의 열린 창문 너머까지 꼼꼼히 훑었다. 시선의 주인은 늘 그렇듯 유령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신경과민으로 인한 착각이 아닐까 생각 했지만 협박 메시지를 받은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어진 가정이었다. 스티브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해지기 위해 노력하며 발걸음을 부지런히 놀렸다. 퇴근시간이라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스티브는 이 시선의 주인과 폴더폰과 쪽지를 전달한 사람을 같은 인물이라고 추측해 보았다. 이제는 원한다면 언제든 소통할 수단이 스티브에게 전달되었다. 대화가 목적이 아니고서야 약쟁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귀찮은 짓을 했을리가 없다. 물리력을 동원한 협박이라면 훨씬 간단한 방법이 많았다.

오피스텔 로비로 들어섰다. 세워진지 3년 남짓의 신식 20층 건물은 관리비가 높은 만큼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경비 두 명이 늘 상주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로저스씨.”

푸근한 인상의 경비원이 인사를 건네 왔다. 스티브는 가볍게 인사하며 승강기로 향했다. 상아색 대리석이 깔린 환한 로비에 편안한 옷차림의 거주민들이 오갔다. 승강기 앞에 서자 피트니스 센터에 다녀왔는지 트레이닝 복 차림의 여성이 팔을 쭉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매우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고 낯선 시선을 느꼈던 경험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스티브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왼쪽에는 제 휴대폰, 오른쪽에는 협박범에게 받은 폴더폰이 굴러다녔다. 경쾌한 알림음이 울리고 승강기 문이 열렸다. 스티브는 일상과 비일상을 양손으로 주무르며 걸음을 옮겼다.

 


 

일상이 깨졌다. 손목에 끼우고 있던 봉투가 현관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진 스티브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입가를 쓸었다. 집안이 엉망진창이었다. 꽃병은 깨져있고 소파는 뒤집혀 굴러다녔다. 주방 찬장과 거실 장식장 등 문이란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책장에 꽂힌 책들은 바닥으로 쏟아져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책상 밑에 붙여두었던 브라우닝 권총은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총알박스와 함께 소파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황망하게 집 안을 둘러보던 스티브는 퍼뜩 정신이 들어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데스크탑 본체가 열린 채 책상 위 서류들은 구겨지고 찢겨져 있었는데 예상대로 하드디스크가 없었다. 메일로 받아 출력한 페기의 자료들도 보이지 않았다. 정보의 출처를 따지고 들면 그녀가 나올 것이다. 이는 곧 FBI 요원으로서의 커리어가 걸려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스티브는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10초 남짓,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다. 마침내 그녀가 전화를 받자 스티브는 마트에서 있었던 사건과 집이 뒤집힌 현재까지의 일을 축약하여 전달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당장 거기서 나와야 할 것 같군요.]
“그보다 하드가…”
[영장 없는 가택침입으로 얻은 정보는 증거로 채택되지 못해요.]
“언제라도 발목을 잡힐 수가 있습니다. 올리비아 게이트를 생각해 보세요.”
[각오했던 일입니다. 그보다 어서 다른 거처를 찾아요. 전화상으론 목적지를 말하지 말고, 미행에 조심해야 할겁니다. 메시지만 사용하고 전화는 최대한 자제하는 게 좋아요. 그리고 경찰에...]
“신고해봐야 의미 없이 시간만 뺏길 겁니다.”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거나 도청 당하는 중일수도 있었다. 당장 집이 뒤집어진 마당에 무슨 상상을 해도 과한 의심이 아니었다. 스티브는 굳은 얼굴로 짐을 쌓아둔 창고용 방에서 캐리어를 꺼내왔다. 구겨진 서류뭉치를 모아 담고 옷가지 몇 벌과 생필품과 함께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대충 가져갈 만한 것을 챙긴 그는 욕실에 들어가 가볍게 세수를 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나와 소파 테이블 위에 있는 권총을 들었다. 총에 수작을 부린 건 아닌듯 했다.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과시적인 놈들이었다. 이딴 무기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고 선전포고처럼 전시해 둔 것이다. 스티브는 총과 탄박스를 챙겨 넣은 캐리어를 끌고 현관에 서서 엉망이 된 집 안을 건조한 눈으로 둘러보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코스트코에 들러 노트북을 샀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니 시간은 밤 8시를 넘기고 있었다. 스티브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버키에게 도움을 청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곧바로 마음을 접었다. 고된 인턴 생활을 마치고 최근 개인 병원을 개업한 절친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스티브는 2시간 가까이 차를 몰고 맨해튼을 빙빙 돌다가 따라붙는 이가 없다는 확신이 들자 강이 보이는 부둣가 작은 모텔에 체크인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적힌 명함을 무인 카운터에서 뽑았다. 청소는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4시, 코팅된 안내판이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 구석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자마자 잰걸음으로 걸어가 캐리어를 침대 옆에 내려 놓았다. 최근 수리를 한 모양인지 은은한 페인트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다. 스티브는 박스를 뜯고 노트북을 꺼내 침대에 올려 세팅을 시작했다. 끊임없이 뜨는 알람창을 스페이스바로 스킵해가며 귀찮은 기초설정을 끝내자마자 클라우드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자료는 무사했다.

자료가 다운로드 되는 동안 창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암막 커튼을 손가락으로 살짝 걷어 밖을 살폈다. 주위는 어둡고 한산했다. 모텔 바로 앞에는 항구로 향하는 2차선 도로가 있어서 간간히 트럭이 지나갔다. 도로 건너편에 [파라다이스 비치] 유치한 이름의 24시간 카페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오며가며 들리기 쉬운 위치상 운전기사들의 휴게소로 자주 이용되는 듯 보였다. 넓은 주차장에 트럭과 중형 차량 몇 대가 대어져 있었고 밝은 유리창 너머로 식사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침은 저 곳에서 해결할까 생각했다.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차이나타운이 나왔다. 처음에는 그곳으로 향할까 했는데 눈에 더 뛸것 같아서 관뒀다.

다운로드가 완료되었다는 알람이 울렸다. 스티브는 검찰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 사건넘버를 넣고 7번째 피해자 지미 배넘의 소송건을 조회했다.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눈을 찌푸리고 다시 시도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그는 건조한 입가를 쓸며 휴대전화를 꺼내 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건 넘버 L9 펜실베니아 동부 법원 자료 조회 되나요, 마침 야근중이었는지 바로 기다리라는 답이 왔다. 이상한데, 왜 이렇게 등급이 높은지 모르겠어. 아는 선배에게 부탁해 볼까? 스티브는 곧장 답문을 보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전송을 누르자마자 이번에는 페기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스티브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뜨거웠던 피부가 서서히 차가워지자 복잡한 상념이 많이 가셨다. 앞으로의 거처에 대해 고민하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멜로디는 스마트폰이 아닌 폴더폰에서 나오고 있었다.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머에 누가 있을지 몰랐다. 기껏 늘렸던 신경줄이 다시금 팽팽하게 당겨졌다. 다섯 번, 신호음이 울렸을 때 플립을 열었다. 소리를 최대한 키우고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길 숨죽여 기다렸다. 

[사건에서 손 떼.]

가벼운 목소리. 25세~35세 사이의 젊은 남성, 동북부 억양, 뉴욕이나 뉴저지쪽 토박이 가능성. 유대계는 아님.

“당신 누구지?”
[목숨이 아깝다면 조용히 접어. 다 댁을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댁이 까마귀인가?”

스물 다섯이나 되는 죄 없는 사람들을 당신이 죽였나?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스티브는 단계를 건너뛰고 질문을 바꿨다.

“왜 죽였지?”

그러자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스티브는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살인범이 아님을 직감했다. 범인의 특색과 맞지 않았다. 프로파일링 뭉치를 닳도록 읽고 페기와 관련 주제로 토론을 했던 경험도 있었기에 스티브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고 해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을 것이다.

[이것 봐요. 로저스씨. 난 당신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잘 알아. 온갖 불합리를 이겨내는 정의감 넘치는 열혈 검사 양반. 대단해. 좋지. 헤드라이트 감이야. 하지만 세상에는 건드려선 안 되는 문제도 있는 거야.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고. 다른 사건을 찾아봐. 이딴 음습한 살인사건 말고 훨씬 웅대한, 당신을 빛내줄 수 있는 사연은 어디든 널려 있잖아.]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용의 선상에서 멀어졌다. 그래도 까마귀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음은 틀림없었기에 스티브는 집중해서 그의 목소리를 새겼다. 스마트폰 액정에서 녹음을 알리는 붉은 표시등이 점멸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날 어떻게 할 텐가? 스티브가 도발하듯 묻자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짧은 침묵, 스티브는 인상을 썼다. 뭔가로 가로막힌 듯 작은 소음이 멀어지듯 들려왔다. 스피커 부분을 손으로 막았는지 억눌린 목소리가 매우 작아 파악하기 힘들었다.

[-밌네,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강압적인 수단을 써야지. 댁을 잡아둘 수밖에 없어.]
“잡아 둔다라, 더 간단한 방법은 쓰지 않는 건가?”
[거친 쪽이 취향이라면 들어줄 수도 있고.]
“댁이 내 오피스텔을 뒤집었나?”
[데코레이션이 영 거칠지 않았어? 나라면 그렇게 안 해.]
“당신… 범인은 아니군.”
[할 말은 전했어.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전화는 허무하게 끊겼다. 스티브는 녹음 종료 버튼을 누르고 이마를 짚었다. 안개처럼 부옇던 눈앞이 조금씩 밝아졌다. 약쟁이 빌에게 지시를 내린 남자와 방금 스티브와 통화한 남자는 서로 다른 인물일 것이다. 저음, 단답, 정키가 말한 특징과, 방금 남자는 통하는 부분이 없었다. 스티브는 팔짱을 끼고 방을 느리게 빙글빙글 돌며 생각에 잠겼다. 먼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부모님의 안전이 걱정 되었다. 로저스 부부는 양심에 손을 얹고 떳떳하다면 아무리 위험한 일일지언정 아낌없이 응원을 보낼 만큼 곧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그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친한 선배에게 부모님을 부탁한다는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경호업체의 관리책임자로 일하고 있었기에 이런 일을 부탁하기에 재격이었다. 지미 배넘의 소송 건이 기밀로 등록되었다는 정보와 함께 녹음한 음성파일은 페기의 메일로 보냈다. 덧붙여 녹음 파일 중간에 목소리가 끊긴 부분을 분석해 달라고 특히 강조했다.

이것저것 처리해놓고 나니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겨우 반나절도 안 되어 많은 일이 터지는 바람에 약을 먹을 시간을 놓쳤다. 스티브는 두통이 일기 시작하는 이마를 손바닥 넓적한 부분으로 꾹꾹 누르며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냈다. 그것을 탁자에 올리고 발치의 캐리어를 열어 옷가지 사이에 알약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알람소리가 들려 모니터를 보니 클라우드 자료의 다운로드가 완료되었다. 스티브는 노트북 전원을 끄고 닫은 후 탁자에 올리고 물병을 집었다. 알약 세 개를 입안에 털어 넣고 뚜껑을 딴 물병을 기울여 꿀꺽 삼켰다.

반쯤 남은 물병을 내려놓은 스티브는 입구로 가서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음을 확인했다. 그것도 모자라 귀를 대고 밖의 기척을 살폈다. 복도는 조용했다. 불을 끄고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창가로 가서 틈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꼼꼼히 여몄다. 강박과도 같은 일련의 작업을 마치고 침대에 앉아 숨을 고르며 얼굴을 쓸었다. 엉덩이로 푹신한 시트의 감촉이 느껴지자 쌓인 피로가 몰려들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스티브는 발치에 놓인 캐리어 속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탄창을 확인했다. 그리곤 총을 베개 밑에 밀어 넣고 침대에 누웠다. 피곤함을 받아들이자 수마가 밀려들었다. 스티브는 깜빡이는 시야로 들어온 빈티지 벽지가 정신 사납다고 생각하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스티브는 이틀 간 모텔에 머무르며 처음부터 차근차근 사건을 점검했다. 몇몇 새로운 의심점을 발견했고 그와 관련해 페기와 메일을 주고 받았다. 식사는 파라다이스 비치에서 해결했다. 무뚝뚝한 웨이트리스와 가죽이 벗겨진 빨간 소파, 80년대 빈티지 인테리어를 어설프게 따라한 것 치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손님들은 주로 화물트럭 기사들이었는데 스티브는 그들이 시키는 메뉴를 곁눈질로 보고 어설프게 따라 시켰다.
 

 

벨소리가 울렸다. 어느 쪽이지? 꿈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의식이 현실로 부상하기까지 정확히 7초가 소요되었다. 스티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옆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덜그럭거리는 휴대폰을 잡았다. 그 바람에 폴더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벽 5시 25분, 발신인은 페기 카터였다. 통화 버튼을 터치하자 인사를 생략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제이크 더글라스가 살해당했어요.]

스티브는 폴더폰을 줍느라 허리를 굽힌 자세로 딱딱하게 굳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났다. 그는 긴장 섞인 한숨이 삼키며 이마를 거칠게 문질렀다. 당황스럽기는 페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한 톤 올라간 목소리는 끝이 조금 갈라지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녀가 쏟아내는 정보들을 감당하기 위해 애썼다.

[저도 방금 연락 받았어요. 알링턴에 있는 자택이 완전히 전소했다고 합니다. 주변 주택가까지 화재가 번져 아직 진압중이고... 특이하게도 시신은 마당에 잔디밭에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육안으로는 가슴 부위의 자상이 치명타로 보인다는군요.]
“까마귀의 새로운 범행일까요.”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요. 만약 그가 맞다면 과거 자신의 사건을 파고든 기자를 피해자로 선택한 것일테니 새로운 패턴이 추가되는 셈이죠. 또한 방화도 이전까지는 없었고요.]

방화, 갑자기 며칠 전 전화 통화를 하며 그가 했던 말이 떠올렸다. ‘자료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허드슨강의 북서쪽 부두에서.’ 휴대전화 너머에서 페기가 계속 말했다. 어젯 밤 스티브가 보낸 검찰 자료들을 토대로 다시 버밍엄 저택 현장으로 방문할 계획을 잡았었다고 한다. 스티브는 폰을 귓가에 댄 채 빠르게 창가로 걸어 갔다. 잘 닫힌 커튼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슬쩍 걷어 보니 물빠진 청바지 색으로 물든 바깥은 아직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없었다. 모텔 입구 주차장엔 어젯 밤 마지막으로 샜던 차량 수와 일치했다. 그때 길 건너 파라다이스 비치 레스토랑 앞에 화물트럭 한 대가 주차했다. 스티브는 가만히 응시했다.

[D.C로 가야 겠어요.]
“혼자 가시는 건 아니죠?”
[그럴 생각입니다.]
“다른 수사관들과는 연락 안하셨습니까?”
[런디와 에이던은 다른 사건을 맡았어요.]
“제가 운전하죠.”
[위험할 수도 있어요. 전 회의적이군요.]
“괜찮습니다.”

페기는 대답이 없었다. “지금 가겠습니다, 어디서 만날까요?” 스티브는 레스토랑 앞 주차장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끈질기게 물었다. 화물트럭의 방향지시등이 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배가 불룩 나온 뚱뚱한 체형의 떡진 머리를 가리기 위해 쓴 야구모자와 허름한 가죽 자켓과 블루 진을 입은 벌이가 시원치 않은 평범한 기사로 보였다. 그는 옆구리를 긁적이며 주유구쪽을 살피더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도중에 슬쩍 이쪽을 본 것도 같았지만 거리가 멀고 아직 어두웠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도슨 호텔 앞에서 봐요.]
“20분 쯤 걸려요.”

통화가 끊기자 커튼을 절반만 걷어 두고 베게 밑에 넣어 둔 권총을 캐리어에 넣었다. 탁자 위에 올려둔 약통과 노트북도 담았다. 얇은 자켓을 걸친 스티브는 캐리어를 끌고 걸쇠를 당겨 열었다. 체크아웃은 하지 않았다. 일주일 치 돈을 미리 내두었기에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다. 무인 카운터를 지나 밖으로 나오자 피부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서늘했다. 캐리어에 넣은 코트를 꺼낼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파라다이스 비치 앞에 방금 주차한 트럭이 보였다. 남자는 이쪽을 봤을까? 스티브는 구석에 주차해둔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모텔을 빠져나왔다.
 

 

잠을 별로 못 잤는지 페기의 눈 밑이 거무스름했다. 제이크의 집은 워싱턴 주 알링턴의 한적한 단독 주택 지구에 있었다. 스티브가 운전하는 동안 페기는 연방 경찰, 심어 둔 정보원 등 이곳저것 통화를 주고 받았다. 먼저 시신 안치소에 들러 부검의의 소견을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자세히 부검해봐야 알겠지만 외상은 가슴에 난 자상이 유일했다. 흉기는 아직 추적중이지만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칼은 아니라고 했다. 페기가 설명을 듣는 동안 스티브는 밖에서 지역 경찰과 이야기를 나눴다. 불길이 치솟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비명의 주인공은 제이크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화재가 일어나고 그가 살해당했다는 소리가 된다. 보통은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에 불을 지르는데 이번 경우는 반대였다. 제이크 더글라스는 정원에 똑바로 누워 있었고 두 손은 가슴 위로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누군가 그의 몸을 정돈했다.

불에 타 벽만 남은 주택가 반경 50미터에 걸쳐 접근금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스티브와 페기는 테이프를 올리고 몸을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저래서야 증거는 커녕... 스티브가 혀를 차며 낮게 중얼거렸다. 페기 역시 비슷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도로에 어지럽게 새겨진 스키드마크가 불을 피해 달아나던 주민들의 긴박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화재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단이 오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그때까지 단서를 발견하길 바랐다.

“저는 집 안을 둘러볼게요. 당신은 시신이 발견된 잔디밭 주위를 살펴봐요.”
“알겠습니다. 조심해요.”

대체 무엇으로부터 조심하라는 것일까, 속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스티브는 불안을 억누르며 노란 페인트가 칠해진 잔디밭 주변을 수색했다. 흰색 페인트가 발린 나무 울타리 아래로 굳은 피가 떨어져 있었는데 자국은 현관-이었을-으로 이어졌다. 뼈대만 남아 겨우 서있는 문과 손잡이에는 쓸린 핏자국이 있었다. 스티브는 사라진 벽으로 돌아가 반대편 문고리를 살폈지만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안에서 나오려고 한 것은 아니군.’

잔디밭을 돌아다니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뒤뜰로 이어지는 풀숲에서 뭔가가 눈에 띄었다. 검게 코팅된 칼이었다. 스티브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날붙이를 들어 올렸다. 말라 붙은 검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검날은 제법 두꺼웠다.

“발리스틱 나이프군요. 칼날을 이렇게 수평으로 발사하죠. 가슴의 자상은 이게 원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장갑을 낀 페기가 칼날을 지퍼백에 담으며 설명했다. 스티브는 그녀가 발견한 하드디스크와 담배꽁초, 권총 등을 받아 들고 차 트렁크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박스에 정리해 넣었다. 하나같이 불에 잔뜩 그슬려 있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하드디스크를 복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설사 데이터를 건진다 하더라도 거기에 살인범과 관련된 내용은 없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둘은 한 시간에 걸쳐 집 근처를 수색했지만 다른 소득은 없었다.

페기는 발견한 증거를 상자에 담아 검시소로 향했다. 워싱턴 경찰들은 FBI의 개입을 반기는 눈치였다. 최근 일어난 정치인 살인사건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기에 기자의 죽음은 뒷전으로 미뤄졌다. 부검의는 지퍼백에 담긴 칼날을 가져가 시신의 자상과 대조했다. “당신들이 흉기를 찾은 것 같군요.” 노년의 남자가 갈색 뿔테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페기가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동안 스티브는 누워 있는 제이크 더글라스의 핏기 없는 얼굴을 내려다 보며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만에 하나 내 집에 찾아 오더라도 문을 열어줄거란 기대는 마십시오.] 스티브는 자신이 그를 죽이는데 일조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끔찍한 사건이 점점 더 끔찍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쫓는 범인은 아닌 것 같군요. 요원님 생각은 어떤가요?”
“동감이에요. 상대를 향한 존중이 느껴집니다. 현장도 묘하게 흐트러져 있고요.”

 

 

페기와 스티브는 뒤늦은 점심을 먹었다. 식사시간대가 지난 멕시코 레스토랑 안은 한산했다. 종업원이 엔칠라다와 플라우타, 완두콩 스프와 샐러드를 테이블에 놓았다. 부엔 프로베초. 둘은 말없이 포크와 스푼을 들었다. 스티브가 스프를 두 술 떴을때 페기가 말했다.

“제 욕심으로 당신을 붙잡아두는 것 같습니다.”

스티브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페기는 플라우타를 포크로 휘적이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은 잃을 게 많아요.”

그녀의 말에 스티브는 제이크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잃을 게 없다던 기자는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음에도 결국 살해당했다.

“제 커리어라면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더라 스물 아홉에 수석 검사까지 오른 인물의 인사평가를 모른 척 망치란 말이군요. 적당히 뒤를 봐주면서 금줄이나 잡아보려고 했는데 아쉽군요.”
“요원님이야 말로 차기 부국장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시던데요.”
“검사들 데이터베이스에 그런 것도 나오나요?”
“안타깝게도 간략한 프로필밖에 안 올라와 있어요. 그래도 제가 아는 이들은 모두 카터 요원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한 때는 그랬죠.”

과거형이 마음에 걸렸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지금은 다릅니까?”

그릇 위를 긁던 포크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서른 아홉, 이제 곧 마흔이었지만 페기 카터의 단단한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잩은 야근으로 드러나는 피곤을 감추기 위한 최소한의 화장만 한 페기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저스 검사,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현실과 타협해 본 적 있습니까?”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스티브가 대답했다.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페기는 마음에 드는지 빙긋 웃었다.

“역시 당신은 이쯤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순진하기 때문입니까?”

스티브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질문했다. 푸른 접시에 담긴 엔칠라다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멀리서 문이 열리고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조용하던 공간에 조금씩 잡음이 섞여들었다. 페기는 시선을 무겁게 내리깔았다.

“로저스, 순진하다는 건 버려야 할 약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켜야 할 중요한 것이지요. 자신을 존중해요. 당신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가면 됩니다.”

따뜻한 격려였지만 별개로 마리아 힐의 집무실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다시 느껴졌다. 근본을 보자면 이 사건은 거대한 음모가 도시라는 정계, 군 등이 얽힌 위험한 게이트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연쇄살인 사건이었다.

“카터 요원, 혹시 뭔가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까?”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은 심플하게 부정당했다. 그녀는 젊은 검사의 답답한 눈을 외면했다.

“없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하길 바라셨지 않습니까.”
“상황이 변했어요. 설마 기자가 살해당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조사를 강행하는 것은 베테랑 수사관들에게도 위험한 일입니다. 하물며 당신은 훈련을 받은 요원도 아니고요. 다치기라도 했다간 제가 못 견딥니다.”

이미 마음을 잡은 듯한 그녀의 태도에 스티브는 할 말을 잃었다. 드세요, 페기가 멈춘 포크를 움직이며 말했다. 스티브는 고민하며 스푼을 들었다. 그녀의 말을 들을 것인가, 혹은 억지로라도 밀고 나갈 것인가.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불편한 상황인 건 매한가지였다. 페기가 말했다.

“가족을 생각해요.”

그 말은 반칙이었다. 그러나 룰을 위반하면서까지 자신을 수사에서 제외시키려고 하는 그녀의 마음을 마냥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 남편은 군인이라 자기 몸 하나는 거뜬히 지킬 수 있어요. 사우디에 있으니 쉽사리 노출될 염려도 적고, 유일한 가족인 오빠도 지금은 해외에 있죠. 하지만 검사님 집을 뒤집은 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부모님 사정을 봐줄 거란 기대는 못하겠군요.”

플라우타를 잘라 소스에 적시며 페기가 말했다. 스티브는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한 채 묵묵히 포크를 움직였다.

 

 

차량은 워싱턴 D.C 북서쪽 뻥 뚫린 4차선 도로를 달렸다. 멀리 백악관이 보였다. 페기는 당분간 차량을 렌트해 알링턴에 머문다고 했다. 스티브는 마지막 부탁을 받았다. 불에 그슬린 하드디스크의 복구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FBI 과학 감식반이 아닌 개인적으로 아는 손재주 좋은 지인에게 맡기는 것이 빠르다고 했다. 스티브가 주소 적힌 메모지를 자켓 주머니에 넣으며 착잡한 표정을 짓자 페기는 작게 미소 지으며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당신은 포기한 게 아닙니다. 당신이 물러나도 이어받아줄 사람이 있으니까요. 이 상황을 타협으로 카운트 하지 말아요. 더 큰 위기를 위해 아껴두세요. 선택의 갈림길에 서면 무력한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겁니다. 로저스, 그 순간이 오면 이기적이 되세요.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요.”

그녀는 심야 라디오 방송 앵커처럼 철학적인 마무리 멘트를 꺼냈다. 어렵군요. 스티브가 중얼거렸고, 어렵지 않아요. 페기가 대답했다. 알링턴 메모리얼 브릿지를 지나 다운타운 검시소로 향하는 동안 둘 사이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스티브는 그녀의 입장을 이해했기에 언성을 높이진 못했지만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제 몸 하나 지킬 수 없는 무능력한 남자가 된 것 같았다. 차는 검시소 건물 앞에 멈췄다. 그럼 이만, 페기가 간단하게 인사하고 문을 잡아 열었다. 몸을 돌린 그녀에게 스티브가 질문을 던졌다.

“요원님은 이기적으로 행동하셨던 순간이 있습니까?”

손잡이를 잡은 채로 페기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짧은 침묵이 뒷 차가 울리는 경적 소리와 함께 깨졌다. 그녀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혔고 열린 창문 너머로 곱슬거리는 브루넷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전 선택을 했고, 의도했던 결과를 얻었지만...”

페기는 말끝을 흐렸다.

“조심해서 가요. 로저스 검사.”


인사를 한 그녀는 몸을 돌려 검시소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스티브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경적이 또 다시 날카롭게 울리자 액셀을 밟았다.

 

 

늦은 밤, 맨해튼으로 돌아온 그는 페기에게 부탁받은 하드디스크를 내일 전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친 마음에 어색하게 헤어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호 대기 중인 차 안에서 최대한 돕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스티브는 오피스텔로 돌아가 경찰에 신고할까 하다가 모텔을 향해 운전대를 돌렸다. 그에겐 지금 경찰조사에 응할 만한 기력이 없었다.

새벽에 나갔던 대로 모텔은 조용했다. 길 건너에서 운전수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모텔 입구엔 허름한 옷차림의 남녀가 껴안고 애정표현을 하는 중이었다. 로비로 들어가는 스티브를 두 남녀가 흘끗거리며 키스를 나눴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 과도한 애정행각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엘리베이터 앞에 설 때까지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조용한 복도를 걸어 방문 앞에 섰다. 카드키를 넣자 찰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스티브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현관에 섰다. 방 안은 어두웠고 조용했다. 나갈 때와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스티브는 창문을 보았다. 커튼이 완전히 닫혀 있었다. 새벽 일찍 도슨 호텔로 떠나기 전 밖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커튼을 절반쯤 열고 그대로 두었다. 청소부가 들어온 것일까? 무인 로비에 적힌 화, 목요일에만 청소한다는 코팅 판이 기억났다.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스티브는 끌고 들어온 트렁크를 살짝 들어 바퀴 소리를 억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을 등으로 밀었다. 그때였다.

“스티븐 그랜트 로저스?”

분명 방 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일부러 알아 듣지 못하도록 그렇게 낸 것 같았다. 스티브는 문을 완전히 밀고 방 밖으로 튀어나갔다.

탕-

명백한 총소리였다. 옆으로 몸을 빙글 굴려 시선을 올리니 벽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멍청하게 있었다간 그대로 맞았을 것이다. 설마 이런 곳에서 당당하게 총격을 가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스티브는 식은땀을 흘리며 캐리어를 옆구리에 끼고 엘리베이터 옆 비상구로 달렸다. 남자가 뒤에서 두어 번 총을 쏘았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오른발 옆에 총탄 자국이 패였다. 흥분으로 심장이 마구 뛰었다. 스티브는 1층 비상구로 나와 문을 닫고 옆에 세워진 밀대로 대충 끼워 막은 후 로비로 뛰었다. 총소리가 여러 번 났음에도 모텔은 조용했다. 단순히 손님이 없다고 생각하기엔 기묘할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사전 동의가 끝난 것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현관으로 나가려고 코너를 돈 순간 아까 마주했던 애정표현이 과했던 남녀가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남자가 먼저 칼을 휘둘렀고 스티브가 물러서며 피하자 옆으로 돌아간 여자가 허리를 노리고 칼을 찔렀다. 가까스로 손목을 쳐냈는데 다시 남자의 칼날이 목을 향하고 있었다. 등 뒤는 벽이었다. 이건 못 막는다. 고통을 직감하는데 남자가 비명을 지르더니 손목을 감싸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칼날이 그의 손목에 박혀 있었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자 불 꺼진 1층 복도에 야구모자와 검은 마스크를 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서있었다. 검은 바지와 허름한 청자켓 안으로 하얀 티셔츠를 입은 평범한 차림새였다. 그는 뭔가를 쥐고 있었는데 스티브는 제이크 더글라스의 사인으로 꼽히는 발리스틱 나이프를 떠올렸다. 날이 발사되는 특이한 칼, 용병들이 자주 쓴다고 하던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를 공격하던 커플 중 남자의 팔뚝에서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고이기 시작했다. 언뜻 보인 칼날은 검은 색이었다.

“이쪽으로.”

마스크 남자가 스티브를 향해 고갯짓했다. 부드러운 저음,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약쟁이를 협박한 놈인가.’ 벽에 등을 대고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스티브가 머뭇거리자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때 뒤에서 숨을 고르던 여자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동시에 멀리서 밀대로 막아 둔 비상구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스티브는 칼날을 피하며 어쩔 수 없이 마스크남이 있는 복도 쪽으로 달려갔다. 비상구 문을 열고 나온 남자가 총을 쏘았다. 마스크남은 가볍게 혀를 차더니 바로 옆 102호 문을 열고 스티브의 옷깃을 잡아 거칠게 방 안으로 밀어넣었다. 총탄이 몇 발이나 철문에 박혔다.

스티브가 룸으로 들어가자 마스크남도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그리곤 뒤를 돌아 움찔 놀라는 스티브의 몸을 칼날이 없는 나이프로 꾹꾹 밀며 문에서 떨어지게 만들었다. “벽 뒤로 돌아가서 숨어.” 스티브는 남자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불을 켜려고 하자 그가 막았다. 문이 덜컹거리다 멈추더니 저들끼리 무어라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어는 아니었다. 독일어? 스티브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판단해보려 애썼다. 마스크남은 저를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보호하고 있었다. 진한 청색 야구모자 사이로 조금씩 빠져나온 머리카락은 언뜻 금색이었고 마스크로 감싸인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그는 표정없이 문을 보며 뒷주머니에 나이프를 집어 넣었다. 새로운 칼날과 대가 만나서 찰칵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가만히 있어.”

그가 다시금 명령하더니 벨트 홀스터에서 총을 꺼냈다. 그제야 스티브도 퍼뜩 정신이 들어 케리어를 열었다. 밖에서 문고리에 대고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도 이 모텔 문은 나름 신식 철문이라 총알 한 두 번으론 부서지지 않았다. 스티브는 브라우닝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자세를 잡았다. 마스크남은 그런 그를 감흥 없는 눈으로 보았다. 

“쏠 줄은 아나?” 

비꼬는 느낌은 아니었다. 스티브는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노려.” 

스티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을 살인에 대한 망설임이라 판단했는지 남자는 말을 바꿨다. 

“방탄조끼를 입어서 몸통은 맞춰봐야 소용없다. 허벅지를 노려.” 

스티브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쾅-

다섯 번의 총격 끝에 발로 차인 문이 거칠게 열렸다. 맞붙고 깨지는 격렬한 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벽 옆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 넣어! 스티브는 얼른 얼굴을 뒤로 물렸다. 발사된 총알이 방금 스티브가 내다보던 벽을 패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조각이 튀었다. 손발이 치받는 소리가 들렸다.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름 돋는 타격음을 동반하고 쇠를 긁는 비명이 방안을 메웠다.

“개자식이!”

신음하던 남자가 거칠게 욕하자 마스크남은 팔꿈치를 세워 상대의 명치를 가격했다. 남자는 결국 총을 놓쳤다. 마스크남이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총을 차서 멀리 밀어냈다. 그때 주저앉아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켜 발목을 노렸다. 조심해! 스티브가 외치며 사격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마스크남의 발이 여자의 뒷목을 파고드는 것이 더 빨랐다. 그녀는 쓰러졌고 명치를 가격당해 총을 놓친 남자는 비틀거리며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조용한 공간에 헉헉거리는 고통스러운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복부를 감싼 남자는 멀리 굴러간 총을 흘끗 보며 낮게 웃더니 스티브의 이름을 부를때처럼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냈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과거의 위명이 울겠어. 모타알러도 네 작품이지? 쥐새끼 같은 짓이나 반복하는 군. 아무리 날뛰어 봐야 H는 너 따위에게 신경도 안 써.”
“글쎄, 적어도 기분은 좀 상하게 만들 순 있겠지.”
“내가 죽어도 다른 자들이 올 거야. 저 새끼는 물론 네놈도 무사하지 못해.”
“그때 가봐야 알아.”
“ㅌ…”

뭐라고 입을 여는데 마스크남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걷어찼다. 쓰러진 이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지르며 복부를 감싸 안고 몸을 웅크렸다.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널브러진 남자는 의식이 거의 없는 듯 보였다. 발길질을 멈춘 마스크남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나이프를 꺼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툭 튀어나오자 스티브는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그만해! 죽일 생각이야?”

다급한 외침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문제 있어? 되묻는 듯한, 상황에 맞지 않는 순진함마저 느껴지는 모습이다. 스티브는 소름이 돋았다.

“내가 없었다면 넌 이놈에게 죽었겠지.”

발 밑의 남자를 단검 끝으로 가리키자 스티브는 인상을 찌푸렸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저항 상대에게 선을 넘은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 마.” 

스티브가 엄중하게 말했다. 남자는 나이프를 내리 꽂으려던 손을 멈추고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스티브는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날붙이가 익숙했다. 처음 보았을땐 완벽하게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젠 달랐다. 제이크 더글라스의 집 근처 잔디밭에서 발견한 칼날이 분명했다. 중년의 기자는 양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관 속에서나 보일 법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시신은 평온해 보였다. 페기는 그것을 ‘존중’이라고 했지만 스티브는 ‘위선’으로 보았다. 눈앞의 사내를 향해 강한 혐오감이 치밀었다.

“당신이 제이크 더글라스를 죽였군.”

남자는 짧은 순간 몸을 굳혔다. 긍정의 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눈을 내리까는 남자의 모습은 스티브의 말이 사실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문득 부검의가 알려준 정보가 떠올랐다. 기자의 가슴에 새겨진 치명상은 칼을 수직으로 강하게 내리꽂았을 때나 생길 법한 날카로운 자상이었다. 그렇게 깨끗한 자국이 남으려면 찌를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야 했다. 눈앞의 덩치 큰 사내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사람을 죽였다. 지금은 저를 구해줬지만 그것이 단순한 선의가 아님을, 분명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거라는 당연한 추측을 하며 스티브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이럴 시간 없어. 가야 한다.”
“무얼 믿고 널 따라가지?”

스티브가 잔뜩 의심을 품고 질문했다. 남자는 기자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변명이나, 상황을 모면하려는 설득조차 하지 않았다. 멀뚱히 서서 눈썹을 축 늘어트리는 반응이 다였다. 그런 결여된 모습이 스티브에게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특징으로 비쳤다. 사실 당연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는 처음 본 순간부터 위험했고, 조금도 신뢰를 주지 못했다. 언제 저 나이프를 제 가슴에 꽂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티브는 손에 쥔 권총을 들어 남자를 향해 겨누었다.

“물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쏘지 못할거라 생각하나 본데.”

스티브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브라우닝 권총 특유의 높은 파공음을 내며 날아간 총알이 현관 옆 벽에 박혔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예 공포를 못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죽음에 초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였다. 발끈한 스티브가 입을 달싹이는데 남자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어찌 해야 널 해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믿겠나, 물에 젖은 장작처럼 축 쳐진 목소리였다. 스티브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해칠 마음이고 뭐고 당신의 진심을 믿을 수 없다고, 신뢰를 얻기 위한 증명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그에게 외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청승맞은 꼴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청승맞다라, 방금 덩치 큰 성인남자를 피떡으로 만든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지만 어쨌든 스티브는 그렇게 느꼈다. 그는 계속 우물쭈물 미련하게 굴었다. 이상했다. 총과 칼을 휘두르는 괴한들을 상대로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냉정하게 주먹을 휘두르던 주제에 저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굴고 있었다.

남자가 순식간에 눈빛을 바꿨다. 방금의 우울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냉정하고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는 너덜너덜한 문짝 너머로 고개를 슬쩍 내밀어 복도밖을 보았다. 

“왔어.” 

블레이크는 재빨리 기절한 남녀의 몸뚱이를 발로 굴려 문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곤 손잡이가 너덜너덜해진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그는 굳어 있는 스티브를 지나쳐 걸어가 텔레비전 옆에 있던 장식장을 잡아 끌었다. 장식장 뿐만 아니라 매트리스까지 끌고가 문앞에 세웠다. 순식간에 임시 바리게이트가 세워졌다. 작업을 마치고 창문을 가리켰다.

“따라와. 여기서 죽고싶진 않겠지.”

남자는 창가에 가서 커튼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스티브는 바리게이트를 힐끔거렸다. 그는 팔꿈치를 세워 창문을 가격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자 커튼을 뜯어 모서리 부분을 대충 쓸어내리며 잔유리를 치웠다. 블레이크는 솜씨 좋게 창틀을 뛰어 넘었다. 그가 스티브를 향해 손짓했다. “시간 없어.” 스티브는 캐리어를 그에게 넘기고 창문을 넘었다. 

“내 차는 4A블럭에…” 

스티브가 중얼거리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버리고 가. 발신기가 붙어 있다. 중요한 소지품이라도 있나?” 

발신기, 스티브는 벙어리가 되었다. 맨해튼 외곽을 빙빙 돈 것은 결국 의미 없는 짓거리였다. 남자는 관상수 옆으로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폈다. 창문 너머에서 쾅쾅 문을 거칠게 쳐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남자를 뿌리치고 도망가봐야 다른 괴한들에게 습격 받을 확률이 컸다. [내가 죽어도 다른 자들이 올 거야.] 쉰 목소리의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결국 스티브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