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토르AU
스티브의 예상과 달리 블레이크는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전날 웅크리며 떨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주방을 활보했다. 냄비가 끓고 있었는데 무슨 요리인지는 몰랐지만 냄새가 좋았다. 오븐에서 멜로디가 들리자 바삭해진 바게트를 꺼내 도마 위에 올리고 길다란 칼로 솜씨 좋게 석석 잘랐다. 가지런히 놓인 접시에 두 조각씩 던져 담고 렌지 앞에 서서 냄비 뚜껑을 들었는데 뜨거운 김이 확 피어 올랐다. 긴 국자로 내용물을 휘젓자 고소한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렌지 옆에 둔 접시를 하나씩 들어 올려 스튜를 퍼 담았는데 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젖은 금발이 등 뒤에서 흔들렸다.
스티브는 눈앞에 떠오른 스튜 그릇을 멍하니 보았다. 얼른 받으라는 의미인지 접시가 살짝 흔들렸다. 닭고기가 든 걸쭉한 스튜에 꽂혀 있던 바게트 조각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스티브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접시를 받았다.
“사흘 연속으로 아침을 챙겨 먹으니까 건강해지는 기분이야.”
어느샌가 내려온 펜드랄이 스티브 옆에 앉더니 길게 기지개를 켜며 요란하게 하품을 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크서클이 완연했는데 밤마다 무슨 작업을 그리도 하는지 밤샘이 일상인 듯 보였다. 스티브는 낮게 혀를 찼다.
“건강이 목적이라면 밤엔 자고 낮엔 깨어 있어야지.”
“밤에 일하는 쪽이 훨씬 효율 좋은 사람도 있으니까 토 달지 마시죠.”
블레이크는 접시를 두 개 들고 와서 하나는 펜드랄에게 주고 나머지 하나는 제 자리에 놓았다. 펜드랄이 요란한 하품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어버리자 컨테이너 안은 수저가 그릇을 긁는 소리만 요란했다. 닭고기가 들어간 멕시코식 커민 스튜는 맛있었지만 별개로 스티브는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전날 한바탕 뒤엎은 기억이 떠올라 눈앞의 남자를 향한 마음의 짐이 무거워졌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스티브.”
블레이크는 이제 이름을 부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내키는 만큼 조사해. 필요하다면 돕겠다.”
스티브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가 펜드랄에게 내민 선택지는 두 개였다.
1. 블레이크와 스티브 로저스의 관계를 밝힐 것.
2. 까마귀 조사를 도울 것.
스티브는 교활하게도 블레이크가 둘 중 어느 한 쪽을 택했을 때 나머지 한쪽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굳이 조건을 제시한 이유는 블레이크가 어느 쪽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2번을 택했다.
블레이크는 바게트를 숟가락 삼아 스튜에서 덩어리를 건지더니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조건?”
“네 안전.”
블레이크는 커다란 당근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포스트 케어홈에 살던 시절 토르는 스티브의 구세주였다. 몸이 약한 스티브와 달리 토르는 강했고 두려운 게 없었다. 보살핌을 주고받는 사이, 관계가 역전되는 유일한 경우가 있었는데 당근이 그 매개체였다. 토르는 당근을 싫어했다. 안타깝게도 포스터인 레베카는 음식에 당근을 자주 넣었기에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꿍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는 토르를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스티브가 나섰다. 끔찍한 주황색 토끼밥-그의 표현대로-은 스티브의 접시로 옮겨졌다. 토르는 레베카 몰래 환하게 웃으며 제 접시에 들어있는 고기 조각 따위를 옮기려 했지만 스티브가 거절했다. [그러면 양이 늘잖아. 배앓이 할 거야.] 오히려 감자와 고기를 토르의 접시로 담아주었다. ‘역시 토르는 아니야.’ 고작 반찬 투정 습관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후보에서 제외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했지만, 스티브는 토르와 관련된 것 만큼은 논리를 따지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
“나 대신 발로 뛰는 역할을 자처하겠다는 건가?”
“그래.”
“이해했어.”
“받아들이겠나?”
“좋아.”
‘왜 그렇게까지 하지?’ 물어봐야 대답이 없을 의문을 속으로 삼킨 채 스티브가 대답하자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숟가락을 움직였다. 의외로 펜드랄은 별말이 없다가 툭 내뱉듯 화제를 전환했다.
“호건에게 연락이 왔어. 모타알러 건으로 경비가 늘어난 모양이야. 골치 아픈가 봐.”
모타알러, 얼마 전 모텔에서 쇳소리를 내던 남자가 꺼낸 단어였다. 스티브는 바게트를 씹으며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머릿속에 넣었다.
“철수하라고 해.”
“명령?”
“권고.”
“아직 화난 상태라 들을지 의문이지만… 일단 알았어. 그리고 로저스.”
스티브가 고개를 돌리자 펜드랄이 턱을 괴고 숟가락을 까닥거리면서 씩 웃었다.
“궁금한 게 많을 테지. 협력하기로 했으니 까마귀와 관련된 공개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다 알려줄 거야.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건 없으니까.”
“좋아.”
“제안할게 하나 있는데.”
펜드랄은 슬쩍 블레이크 쪽을 보았다. 언뜻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당분간 해외로 나가 있을 생각 없나?”
스티브는 눈썹을 찌푸리며 반 남은 바게트 조각을 그릇에 내려 놓았다. 블레이크도 움직임을 멈추고 펜드랄을 바라보았다. 반응으로 보아 사전에 입을 맞춘 것은 아닌 듯했다.
“무슨 소리지?”
질문은 스티브가 아닌 블레이크의 입에서 나왔다.
“말 그대로야. 검사 양반을 미국에서 내보낸다. 노르웨이가 좋겠군. 시프가 뚫은 루트도 있고.”
“이봐, 내 의사는…”
“안 돼.”
블레이크가 스티브의 말을 자르며 반대했다. 펜드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바게트 끝으로 스튜를 빙빙 저으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이제 슬슬 거처를 옮길 시기가 되었어. 4년이면 많이 버텼지. 우리는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그동안 이 친구는? 너나 내가 계속 상주하면서 지킬 순 없어. 공백 동안 로저스가 한 번이라도 습격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만 인정하자고. 로저스를 데려온 건 네 고집이었지만 무사히 지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야. 솔직히 난 네가 수사에 협력한다는 선택을 할 줄은 몰랐어. 뭐 어느 쪽을 택하든 잘난 검사님께선 두 쪽 다 파헤칠 생각 만만하시겠지만... 잊지마, 상대는 라우페이야.”
‘라우페이’ 스티브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뻐끔거렸다. 지킨다는 등의 거슬리는 부분이 잔뜩 있었지만 펜드랄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싹 지워졌다.
“라우페이가 뭐지? 까마귀와 관련이 있나?”
“성격 급하긴… 설명해 줄 테니 좀 기다려. 그전에 이 친구 설득 좀.”
“맨해튼 떠날 생각 없어.”
“댁을 위한 거야.”
“어젯밤엔 갑자기 끌려온 처지를 동정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바뀌나?”
“심정적으로 이해한단 뜻이었어. 냉정해져야지.”
펜드랄은 입매를 굳혔다. 그의 스튜 그릇은 반도 줄어들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바닥이 드러난 제 접시를 들고 일어나며 선포하듯 말했다.
“뭘 걱정하는지 안다. 하지만 안 돼. 알버트 모건은 일본에서 죽었어.”
“그는 안전구역을 벗어나 미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어.”
“맞아. 스티브 로저스도 마찬가지겠지.”
말문이 막힌 펜드랄은 한숨을 푹 쉬며 목을 주물렀다. 스티브는 저를 무슨 짐짝처럼 취급하는 펜드랄이 불쾌했고 저를 대신해 변호를 맡은 블레이크의 의견에 공감했다. 블레이크는 먹은 식기를 싱크대에 담아 놓고 냉장고 문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랩에 싸인 검은 물체, 그는 펜드랄이 볼 수 있도록 손을 들어 올렸다.
“오늘 내로 할 수 있겠어?”
“명령?”
“권고.”
“정말 늘 똑같네. 알았어. 노르웨이 건은 잘 생각해봐.”
“번복은 없어.”
블레이크는 검은 물체를 던지며 일축했다. 펜드랄은 그것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안 먹나? 블레이크가 물었고 펜드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먹었어. 그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손에 든 것을 던졌다 받았다 반복하며 2층으로 향했다.
“로저스, 식사 끝나면 올라와.”
펜드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스티브는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정리하는지 움직이는 블레이크의 등이 보였다. 뭔가를 넣었다 뺐다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아까와 같은 정체불명의 물건들이 꽤 있는 걸로 보였다. 발밑으로 기계의 부품으로 보이는 것들도 굴러다녔다. 스티브는 식재료와 자리를 공유하고 있는 물건들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천천히 알아내기로 했다. 우선 아까 들었던 이름을 꺼냈다.
“알버트 모건은 누구야. 나 이전에 이런 식으로 보호하던 사람이었나?”
“이곳엔 네가 처음이다. 그는 기자였고 위험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보냈어.”
기자라는 말에 제이크 더글라스가 생각났다. 문득 스티브는 블레이크가 더글라스를 죽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물어봤는데 의외로 대답해 주었다.
“제이크 더글라스는 왜 죽였어?”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의 대답은 페기가 말한 ‘존중’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랬기에 스티브는 진저리를 쳤다. 타인의 생명을 꺼트리고 이유를 갖다 붙이는 모양새가 오만으로 비쳤다.
“알버트 모건은 공식적으론 실종 처리 되었다. 기사로 나온 것도 없어.”
“일본으로 보냈다며, 사망한 건 확실해?”
“물론이다. 그를 죽인 게 나니까.”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블레이크는 동요 없이 담담했다. 다른 경우라고 했지만 알버트 모건 역시 스티브처럼 이들의 보호를 받던 존재였다. [그를 죽인 게 나니까.] 수틀리면 손쉽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절절매도 스티브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편하게’ 해주기 위해 칼날을 들지도 모른다. 뒤틀린 존중을 담아서. 그도 그럴것이 블레이크가 꺼내는 죽음은 별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조용해지자 블레이크가 냉장고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는 불편하게 굳은 스티브를 보고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상황이…”
“편하게 해주려고 그랬다.”
“…그래.”
“입막음이 아니라?”
블레이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는 드문드문 느리게 설명했다. 알버트 모건을 구하기 위해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이 늦어버렸다. 상태는 심각했지만 숨은 끈질기게 붙어 있어 그대로 두고 갔다간 고통만 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랬기에 블레이크는 나이프를 들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자 스티브는 혀를 찼다.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했어야지.”
“그런다고 내가 그를 죽인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네 행동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살인에는 계획과 우발, 그리고 상황에 의해 참작되는 부분이 있어.”
“살인은 살인일 뿐이야. 난 그들을 죽였고.”
“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스티브는 엉겁결에 그를 변호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블레이크의 사고방식은 극과 극이었다. 그에게는 보편적인 법의 기준이 통용되지 않았다.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 필요하다면 배심원단을 들여서까지 재판은 길게 이어진다. 그 귀찮고 지루한 과정은 모두 사건의 ‘의도’를 철저하게 규명하기 위해서인데 블레이크는 그런 절차를 싹 무시해 버렸다. 사람을 죽인 자신이 손가락질받는 쾌락 살인마들과 별 차이가 없음을, 그는 수도승처럼 엄격한 태도를 고수했다. 의도나 목적과 관계없이 오로지 결과만을 들어 판단을 내렸다. 단호한 말투 때문인지 다소 강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해받기 딱 좋은 성격이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는지도 몰랐다.
“제이크 더글라스도 비슷한 이유였겠군.”
“그는 독에 당했다.”
“과연, 존중의 의미가 맞았어.”
“내 말을 믿나?”
“거짓말이야?”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야. 우물쭈물 자신이 없었다. 스티브는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티브.”
냉장고 문을 잡고 있던 블레이크가 조용히 불렀다. 식기를 들고 일어난 스티브는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네 삶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이 바닥에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 있다. 노력해도 정당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 가라앉는 경우 말이야.”
“까마귀를 쫓는 내가 거기에 부합되겠군.”
“라우페이에게 놈은 부속품이야. 나도 다를 바 없어.”
스티브는 냉장고 앞에 주저앉은 커다란 뒷모습을 지나쳐 빈 그릇을 싱크대에 담으며 블레이크가 한 말을 되새겼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보이는 듯했다. 사회를 벗어난 존재들, 제대로 된 보살핌을 못 받고 자라나 무지로 인해 실수를 저지른다. 처벌은 힘 있는 쪽에 유리해지는 불공평한 결과로 나타나고, 그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면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티브는 벗어날 수 없는 서클속에 갇힌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끔찍했다. 그러나.
“사회엔 엄연히 법이란 게 존재해. 방금 설명한 위협적인 존재들을 재판대에 세우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야.”
스티브는 블레이크를 지나쳐 계단으로 향했다. 등 뒤로 꽂히는 따가운 시선이 익숙했다. 라우페이가 얼마나 끔찍하고 대단한 집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티브에겐 그뿐이었다. 포기할 수 없다는 짧은 선언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피하지 않고 불합리에 맞서는 길.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다소 고지식한 신념을 고수하는 삶의 방식이 스티브에겐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블레이크가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철계단이 끼익 끼익 소리를 냈다. 스티브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을 무시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정말 변함이 없구나.”
블레이크는 그의 등을 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펜드랄이 보여준 것들은 스티브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라우페이는 집합의 이름이었다. 정계의 뒤편에서 입에서 입으로 은밀하게 전달되는 이들의 체제는 프리메이슨 비밀결사처럼 음모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수많은 영상과 사진, 문서들은 스티브도 잘 알고 있는 사회 각료들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모니터에 떠오른 정보를 정신없이 눈에 담는 스티브를 보며 펜드랄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의미하는 바를 스티브는 몰랐다. 너 따위가 감당할 것이 아니라는 의미인지 의욕이 넘치는 젊은 검사의 말로를 멋대로 재단하고 내뱉는 씁쓸함인지, 사실 스티브로선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옆에 있는 것이 펜드랄이 아닌 대통령이라 해도 그의 주의를 끌 순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정보였다.
“일종의 종교잖아.”
스티브가 낮게 중얼거렸다. 펜드랄은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대화를 바라고 포문을 튼 것은 아니었기에 스티브는 개의치 않고 눈앞의 리스트에 집중했다. 사회에 암약하고 있는 라우페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끈질긴지, 더러운지 고작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완벽하게 파악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한숨이 새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인물들이 줄줄 엮여서 튀어나오는 통에 도무지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겉핥기식으로 대충 넘기는 와중에도 이러니 제대로 파고들면 얼마나 대단한 게 나올지 상상만으로도 오싹해졌다.
“사실 당신들은 할 만큼 했어. 피해자들 사이의 연결점을 찾지 못한 것도 당연하지. 그들은 사소한 실수를 저질러 ‘그분’들의 눈 밖에 난 개미들이야. 조직원이라 부르기도 힘든 말단에 위치한 인간들이라 전산이나 문건으로도 남겨지지 않아. 마거릿 요원과 네가 쫓는 까마귀는 심부름꾼이자 광대지. 솜씨를 인정받아 좋은 위치에 있는. 죽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전혀 몰랐을걸. 그들을 이어주는 건 오로지 요것 하나뿐이야.”
[입에서 입으로] 펜드랄이 제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폭신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스티브는 리스트에 떠오른 3E 차장검사 마리아 힐과 니콜라스 닉 퓨리 검찰청장을 보고 낮게 탄식했다. 시선을 확인한 펜드랄이 덧붙이듯 설명했다.
“이름 옆에 붉은 표시가 되어있는 자들은 특히나 악질이야. 조직 내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라는 의미지. 노란색은 그 아랫급.”
차장검사는 노란색이었고 청장은 붉은색이었다.
“까마귀는 카터 요원이 부임한 이후 크게 알려진 것으로 아는데. 왜 그녀가 아닌 내가 목표지?”
키보드를 두드려 리스트를 다음 장으로 넘기며 스티브가 물었다. 일년 전, 페기 카터가 스물다섯 건의 살인사건을 하나의 연쇄살인으로 규명짓자 언론은 연일 보도를 내보냈다. 당시에는 다른 사건을 맡고 있었던 스티브로서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은 물론이고 끔찍한 연쇄살인범의 등장에 대중의 관심은 온통 그쪽에 쏠려 있었다.
화면이 전환되었고 펜드랄이 띄워 준 새로운 라우페이 리스트에서 유명 언론사 사장의 증명사진이 떠올랐다. 책상을 붙든 채 허리를 숙이고 있던 스티브가 인상을 찌푸렸다.
“널 노리는 이유는 ‘희생양’과 관련이 있어서 노코멘트.”
스티브가 인상을 쓰자 펜드랄이 입꼬리를 올렸다. 갈색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소속된 놈들 지위를 보면 대충 알겠지만, 이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딴 사건 묻어 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그런데 왜 시끄럽게 떠들어 댔을까?”
펜드랄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넓은 책상에 발을 턱 올려 까닥까닥 불량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책상 위엔 빈 에너지 드링크 음료통과 커피를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컵, 반쯤 우그려진 캔 등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아침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다크서클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였다. 스티브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본보기.”
“똑똑하시네.”
펜드랄의 설명은 이어졌다. 이들이 피지배계급을 가장 효율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취한 방식은 실체가 없는 안개처럼 공포를 퍼트리는 것이었다. 시작점을 모르니 탓할 대상을 찾을 수가 없다. 목적과 목표가 흐릿하니 행동을 예측해 앞서나갈 수도 없다. 전시된 시신은 일종의 경고였다. 너희들도 이렇게 될 수 있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잠깐 멈춰.”
끊임없이 움직이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스티브가 말했다. 뒤로 10초만 더. 펜드랄은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따라주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 편집장이야. 전에 만난 적 있어. 횡령 혐의로 조사를 받았지. 웨일즈 커피 마스터의 전 상사와 함께 엮인 거로 아는데…”
“응, 죽었네. 뭐 잘은 몰라도 놈들 신경 거슬리게 했겠지.”
“자세한 이유를 알아낼 순 없나?”
“내가 유능하긴 하지만 그정도로 만능은 아냐.”
스티브는 팔짱을 끼고 한 손을 세워 턱을 쓰다듬었다. 뭔가에 깊이 집중할 때 그가 취하는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이윽고 그는 시선을 내려 의자에 파묻혀 있는 펜드랄을 향해 물었다.
“너희들은 이들의 목적을 알지?”
“대강은.”
“말해봐.”
“의외로 단순해. 세계정복! 빠밤!”
“좀 진지해질 수 없어?”
“완전 진지하거든.”
낄낄 웃으며 말하는 펜드랄의 모습에 스티브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양팔을 깍지 껴 쭉 뻗으면서 스트레칭을 했다. 관절이 뚝뚝 이어지고 늘어나는 소리가 났다. 그러는 사이 웃음은 점점 사그라지면서 이윽고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참으로 극적인 변화였다. 스티브는 그가 브로드웨이 배우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쪽 업계는 잘 모르지만 펜드랄이라면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세상엔 그런 조직들이 많잖아. 카르텔이나 삼합회, 마피아… 결국 다 돈과 명예를 위한 길이야. 놈들은 자신들이 정의라고 생각해. 갈퀴처럼 돈을 긁어모아 지역사회에 조금씩 환원해서 기반을 다지고, 돈으로 매수한 자들의 환호와 지지를 바탕으로 굳어진 정의를 관철하면서…”
결국 돌아버렸지,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빙빙 돌리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니 카르텔 따위와는 다르군. 놈들은 자기들이 누군가의 위에 설 자격이 있는 귀족이라고 생각하거든. 훨씬 질이 나빠.”
모니터에 떠오른 각종 정보가 없었다면 허무맹랑한 픽션으로 여겨버렸을 것이다. 스티브는 일렁이는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때 펜드랄이 말했다.
“자 그럼 똑똑한 검사님. 우리가 철 덩어리 속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가 뭘까?”
“라우페이를 폭로하기 위해?”
“틀렸습니다.”
“전에는 부정했지만, 비공식 단체 소속이라든지. 인터폴이나.”
“땡! 틀렸어요. 엄청 뻣뻣한 양반이네. 대쪽같이 올바르고… 존경해 아주.”
펜드랄은 하품을 하며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전환했다. 삑삑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중앙 모니터에 다른 리스트가 떠올랐다. 사람들로 가득 찬,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모두 어린아이들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건전하게 사고할 거란 생각은 버려. 좀 더 사적이고 유치한 부분으로 파고들어 봐. 악의 반대편에 무조건 정의가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말고.”
“이 명단은…”
스티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모니터로 한 발짝 다가섰다. 사진 속 아이들은 성별, 인종, 연령대가 다양했지만, 많이 잡아봐야 열다섯을 넘기지 않는 듯 보였다. 잔뜩 펼쳐진 증명사진을 훑던 스티브는 한 가지 기묘한 점을 발견했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한 화면에 드러난 수십 명은 족히 되는 아이 중에서 웃는 얼굴로 찍힌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또한, 컬러와 흑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어쩐지 불길했다. 오래된 사진도 아닌데 저런 식의 구분이라니.
“흑백은 죽은 애들이야.”
역시, 스티브는 침음성을 내뱉으며 질문했다.
“아이들을 구출하는 게 너희 목적인가?”
그의 말에 펜드랄이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뭐… 겸사겸사 그러고 있긴 한데, 딱히 구출이 목적은 아니야.”
펜드랄은 볼을 긁적이며 마우스를 움직여 찰칵찰칵 눌렀다. 화면이 빠르게 전환되었고 사진이 한 장 떠올랐다. 검은 머리의 여성이었다. 흐릿한 인물의 측면이 찍혀 있었는데 잔뜩 확대해서 그런지 픽셀이 뭉개져 얼굴은 물론 나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강렬한 눈빛만은 기억에 새겨졌다. 화면은 다시 전환되었다. 국외로 보이는 허름한 건물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불에 타오르는 폐건물, 우중충한 숲, 잔뜩 쌓인 폐타이어들과 폭발하는 근현대 건축물들…
“우린 댁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어.”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스티브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넓은 모니터에 떠오른 장면은 끔찍한 지옥도였다. 총탄이 잔뜩 박혀 콘크리트 파편이 튄 엉망이 된 건물을 배경으로 수많은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총을 맞아 죽은 모습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머리가 터져 차마 보기 힘든 꼴의 시신, 팔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거나 몸이 분리되어 조각난 경우도 있었다. 끔찍한 참상의 기록이 느리게 슬라이드 되었다. 스티브는 손바닥으로 입가를 쓸었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복수. 그것도 세상 둘 도 없을 끔찍한 방식으로. 이런 식의 사적 제재는 네가 준수하는 사법정신에 따르면 엄벌에 처해야 한다지?”
“그야 당연히…”
뭐라 말을 꺼내려던 스티브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복수의 반작용이니 뭐니 수사체계를 무시하다가 결국 다다르게 될 체제의 붕괴를 이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봐야 먹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티브는 할 말을 잊은 채 전환되는 화면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슬라이드가 멈췄다. 마지막 사진인 듯, 낡은 오두막을 배경으로 시신 몇 구 사이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캠으로 찍은 비디오의 캡처된 화면이라 화질은 좋지 못했지만, 스티브는 그를 알았다. 긴 금발을 뒤로 질끈 묶고 손에 쥔 나이프를 홀스터에서 꺼내고 있는, 혹은 집어넣고 있는, 어느 쪽이든 살을 갈랐을 것이 분명한 무기를 쥔 남자는 다름 아닌 블레이크였다.
펜드랄은 리넨 끈으로 묶은 두툼한 갈색 봉투를 하나 건넸다. 이게 뭐지? 스티브가 묻자 그는 기분 나쁘게 히죽히죽 웃으며 “우리가 모은 증거.” 라고 대답했다. 스티브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두께도 무게도 상당했다.
“참고로 라우페이 리스트는 여태까지 모은 자료를 토대로 내가 조합했어. 즉, 원본이 아니란 뜻이야. 그래도 확실한 정보만 골라서 꽉꽉 눌러 담았으니까 신빙성 부분은 자신있어. 언젠가 완벽한 골든리스트를 손에 넣는다면 소원이 없겠는데. 존재하기만 한다면…”
“이걸 나에게 줘도 괜찮나?”
“갑자기 겁이 나셨나? 흠, 그런 눈 하지마. 네가 싸늘하게 볼때마다 은근 무섭다고.”
“출처에 대한 소명은?”
“폴더별로 정리해 뒀어. 특별히 의심가는 부분은 색인 해둬. 여기 이런 식으로. 보이지? 모아 보려면 이걸 누르고.”
펜드랄이 보조 모니터를 통해 시범을 보였다. 스티브는 팔짱을 낀 채 집중했다.
“이걸 자본금 삼아 키워 봐. 뭐라도 쥐고 흔들어 보라는 의미에서 주는 거야.”
“…더글라스와 같은 말을 하는군.”
“그 아저씨도 너처럼 열정적이었어. 뭐 결국, 가버렸지만.”
해킹한 제이크 더글라스의 부검소견서가 중앙 모니터에 떠올랐다. 직접적인 사인은 가슴의 자상이었지만 몸에서 치명적인 VX가 발견되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신경독의 일종인 VX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양만 잘 조절하면 고문에도 사용되는 끔찍한 생화학 무기였다. 소견서 하단에 갈겨진 날카로운 서명을 보며 스티브는 워싱턴DC 검시소에서 본 갈색 뿔테안경을 쓴 부검의를 떠올렸다. 그는 소견서를 페기에게 전달했을 것이고 그녀는 이번 사건은 ‘까마귀’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고 판단 내렸을 것이다. 거기서 물러난다면 좋겠지만 페기 카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수사관이 아니었다.
지금의 스티브에게 검찰청에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스티브는 리스트에 떠오른 마리아 힐과 니콜라스 닉 퓨리 총장의 증명사진을 되새겼다. 그렇다고 페기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 그녀를 위험에 빠트릴 것이다. 결국 남은 건 저 혼자다. 혹은 신원불명의 블레이크와 펜드랄 콤비.
“로저스, 네 마지막이 그와는 다르길 빌어.”
펜드랄은 섬뜩한 소리를 했다. “진심으로.” 그는 덧붙였다.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고 축축한 눈은 일견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떤 꿍꿍이를 감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스티브의 기분을 축 가라앉게 만들었다. 펜드랄은 몸을 돌려 작업에 몰두했다. 사진과 동영상 등 핏빛으로 가득 찬 모니터가 검게 점멸하더니 곧 온갖 코드가 좌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슬쩍 그를 내려다보았다. ‘유능’한 펜드랄은 작업 도중 표정이 없어지는 것이 특징인 듯했다.
어쩌면 다 거짓일지도 모른다.
스티브는 도피와도 같은 생각을 하며 좁은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펼쳤다. 갈색 봉투를 뒤집자 CD 다섯 장과 USB가 인쇄된 사진 뭉치와 함께 매트리스 위로 떨어졌다. 노트북을 켜 USB를 꽂자 흘러가듯 보았던 자료들이 모두 담겨있었다. 몇 번의 조작 끝에 ‘라우페이’ 라고 적힌 파일을 발견해 누르자 사진과 동영상이 잔뜩 떴다. 문건도 항목별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스티브는 우선 리스트를 펼쳐 마리아 힐 항목을 찾아 색인해두고 포함된 첨부 파일을 보았다.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스티브는 각종 공문서와 문건들에 날인된 서명이 그녀의 것임이 틀림없음을 확인했다. 몇 번을 반복해 주르륵 넘어가던 도중 미리 보기로 발견한 한 장의 문서에서 마우스를 잡은 손을 멈췄다.
문서번호 제0000-4149
스티븐 그랜트 로저스
버밍엄 부부 살인사건 외 24건 속칭 ‘까마귀 살인마’ FBI와의 연계 수사를 위한 특별검사로 위 인물을 배속한다.
스티브가 처음 사건을 맡으며 받았던 공문이었지만 스캔본에는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기간이 명시되어 있었다. 두 달. 마리아 힐은 애초에 스티브를 두 달 이상 사건에 투입할 마음이 없었던 듯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더니 결국 정해진 결말이었다. 스티브는 다소 허허한 마음으로 그녀의 서명을 응시했다.
어쩌면 다 거짓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 진실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몸담고 있던 조직을 부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정의라 생각했던 집단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동반한 습격과 추격에 이어서 조작이라기엔 너무도 정교하고 방대한 정보가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실치 않은 많은 것들이 믿었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거나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은폐하는, 스티브는 저를 둘러싼 상황이 끔찍하고 역겨웠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스티브 로저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에 좌절하고 포기하기보다 부수는 길을 택할 것이고, 부수지 못하면 벽에 손가락을 박아 넣어서라도 넘어갈 다짐을 하는 끈질긴 사내였다. 믿으며 걷던 길이 깨끗하지 않다면 얼마든지 선로에서 벗어날 용기가 있는 단단한 사내였다.
스티브는 다소 엉뚱한 요청을 했다. 총기 사용법을 비롯한 몸을 지킬 수 있도록 자신에게 격투법을 가르쳐 달라는 협박과도 같은 부탁이었다. 블레이크는 잠시 굳어졌다. 짧은 침묵 후, 왜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냐고 물었다. 스티브는 엄지를 세워 어깨 뒤로 넘겼다. 거기엔 입을 다물지 못하는 펜드랄이 있었다.
“펜드랄이 내게 말했듯 당신들이 없을 때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겠지. 내 안전이 중요하다 했으니 괜찮은 방법 같은데.”
“하지만 너 몸이 안좋…”
“스토킹할 때 휘트니스 센터 출납증 기록은 빼놓았나 보군.”
“약도 꾸준히 먹어야 하잖아.”
“예비용이다. 마지막 천식 발작은 10년 전이었어.”
“발작 일으키긴 했네…”
블레이크가 꿍얼거렸지만, 스티브는 모른 척 무시했다.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단호한 태도였다. 블레이크는 한숨을 쉬며 마지막으로 설득을 시도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텐데.”
“복수.”
“살인을 동반한.”
“알고 있어. 피범벅으로 서 있는 사진도 봤고.”
“…그걸 보고도 나에게 배우고 싶나?”
블레이크가 씁쓸하게 묻자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아서 당신들을 증인으로 재판장에 세우고 싶어.”
그 말에 펜드랄이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와! 포부가 대단하시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법원 들어서는 순간 우린 사형이야!”
호랑이 새끼네 저거! 펜드랄이 스티브를 향해 삿대질하며 거칠게 외쳤다. 블레이크가 손을 뻗었다. 진정해. 흥분한 친구를 점잖게 말리고 있었지만, 그도 당황한 눈치였다.
“증언은 힘들겠지만… 자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블레이크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펜드랄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퍽퍽 쳤다. 저 등신! 머저리! 입은 열지 않았지만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는 터지는 분통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죽 소파를 퍽퍽 차며 성질을 부렸다.
“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저 친구 꽁꽁 묶어서 노르웨이 보내자고. 시프한텐 내가 말할게. 항공편 힘들면 컨테이너에 식량이랑 같이 굴려 넣고 배에 실어서 보내버려!”
“그렇다는군. 블레이크, 당신 생각은 어때?”
스티브는 느긋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블레이크는 머뭇거리며 스티브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펜드랄. 그만해. 딱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
“맙소사, 하느님… 어째서 저에게 이런 거대한 시련을 주시나이까! 굴러온 돌 때문에 이럴 순 없습니다. 저는 착하게 살았습니다…”
“너 무교잖아.”
“아 제발 닥쳐.”
“착하게 산 것도 아니고.”
“당장 널 쏘고 싶은데 내 베레타의 표적이 되어 줄래?”
“그거 어제 분해해서 윤활유 발라 놨다.”
“악! 아악아아악! 악!”
스티브는 펜드랄의 발작을 못들은 척 커피잔을 기울였다.
페기는 최근 이상한 시선을 자주 느꼈다. 처음에는 기분탓으로 넘겼는데 제 오피스텔 앞까지 따라붙으니 무작정 덮어 놓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옆으로 나있는 비상 계단쪽을 염두에 두고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마자 빙글 돌아 가방을 바닥에 내려 놓고 굽이 낮은 단화를 조심스럽게 벗었다. 스타킹만 신은 발을 바닥에 내리자 서늘한 감각이 발가락에서부터 전체적으로 퍼져나갔다. 허리에 끼워 두었던 총을 꺼내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어가며 찰칵- 장전을 마쳤다.
페기는 문에 달린 렌즈에 조심스럽게 눈을 가져다 댔다. 45도 각도로 비치는 밖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녀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손에 쥔 권총의 방아쇠를 더듬으며 조용히 숨을 죽이는데 갑자기 렌즈 너머로 뭔가 일렁였다. 페기는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 문 바로 앞에 있었다. 페기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숨을 깊게 들이키며 오른손에 든 권총을 앞으로 내밀고 왼손으로 문 손잡이를 잡았다. 긴장에 찬 숨을 내쉬며 문을 기습적으로 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는 검은 인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거칠게 외쳤다.
“꼼짝마! 손을 머리 위로…”
“잠깐만요! 쏘 쏘지 말아요!”
페기는 굳은 표정으로 총구를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여성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세상에, 제인… 놀랐잖습니까.”
“저도 놀랐어요. 요원님 총에 겨눠지니까 엄청 짜릿하네요.”
“하마터면 방아쇠를 당길 뻔 했어요. 무슨 일이죠?”
안전장치를 걸고 홀스터에 총을 꽂아 넣은 페기는 바닥에 주저앉은 제인 포스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부풀린 볼을 쓰다듬다가 페기의 손을 마주 잡았다. 힘을 줘 당기자 몸이 쑥 올라왔다.
“꼭 전해야 할 것이 있어서 왔어요.”
“지금 새벽 1시인 건 아시죠?”
“방금도 전화를 걸었는데… 요원님이 제 연락을 안 받으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페기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았다.
부재중 전화, 제인 포스터 외 9건.
“최근 바쁘다보니 정신이 없네요.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제이크가 죽은 뒤로 의도적으로 절 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럴 의도는… 일단 들어와요.”
“고마워요.”
제인은 페기의 뒤를 따라 그녀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페기는 그녀를 거실 소파로 안내하곤 올이 나간 스타킹을 벗었다. 커피? 티? 그녀의 질문에 제인은 무릎에 올린 가죽가방을 뒤적이며 커피라고 대답했다. 주방과 거실이 뚫려 있어 페기가 전기주전자 버튼을 누르고 커피 두 잔을 준비하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빨리 할게요.”
제인은 가죽가방에서 꺼낸 투명한 파일을 꺼냈다.
“제이크가 죽기 이틀 전에 저에게 보낸 메일이에요. 텍스트 없이 사진 한 장만 첨부되어 있었어요. 촬영시기는 알 수 없고 허드슨강에서 유람선을 찍었더라고요. 갈매기가 몇 마리 보이고… 일단 인화해 왔어요. 탁자위에 올려 둘게요.”
페기는 그라인더를 돌려 원두를 분쇄하며 제인의 말을 들었다.
“우편도 왔는데 이건 뭐 별거 없긴 해요. 휴가를 어디서 보낼거라는 둥 늘 하던 식의 시덥잖은 이야긴데… 혹시 몰라서 복사본을 가져 왔어요.”
“고마워요. 제인.”
“천만에요. 오히려 요원님께 폐가 될까봐 고민했어요. 까마귀 건으로 바쁘시잖아요.”
“요즘은 대기상태라 그렇게 바쁘진 않습니다.”
천문학 칼럼니스트인 제인은 제이크 더글라스의 지인이었다. 페기는 제이크의 장례식에서 부은 눈으로 서있던 제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구덩이 속으로 백합을 던져 넣었다. 이렇게 갈 사람이 아니었어요. 제이크 더글라스의 괴팍한 성격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업적과 행보를 탓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닌 척 하면서 기부도 했었다. 주로 희귀병에 걸린 어린이 재단이나 유니세프 같은 제3세계 아이들을 후원하는 쪽이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강도라니.”
‘정확히는 신경독으로 인한 독살이었지만.’ 페기는 속으로 삼키며 유감을 표했다.
제인은 커피를 받으며 짧게 감사의 말을 했다. 페기는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과 복사본을 살폈다. 호놀룰루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겠다는 내용의 편지는 일단 넘기고, 낮에 찍은 허드슨 강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 가로로 찍힌 사진의 끄트머리에는 유람선의 앞부분이 조금 나와 있었다. 방파제 옆에 쌓인 테트라포드 위에 갈매기 네 마리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사망하기 이틀 전에 아끼던 지인에게 이것만 달랑 보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런 퀴즈 같은 사진이나 보내고… 실수로 전송한 걸까요?”
“이 주소는… 더글라스가 쓰던 메일은 보안용 클라우드군요. 이 회사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사용하는 동료를 알아요. 메일을 발송하고 받을 때마다 몇 번이나 확인하게 되어 있죠. 착오는 아닐 겁니다.”
“혹시 몰라서 USB에 담아왔어요.”
페기는 USB를 받았다. 제인은 사흘 뒤에 열리는 천문학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맨해튼으로 왔다고 말했다. 뉴 멕시코에 살던 그녀는 제이크 더글라스의 장례식을 위해 워싱턴으로 갔다가 애틀랜타의 조지아 대학에서 강연을 서고 다시 맨해튼으로 오는 강행군으로 인해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페기는 그녀가 묵는 호텔을 물어보았다. 오피스텔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위치였다. 잠시 커피잔을 들고 모서리를 훑던 페기는 이례적인 제안을 했다. 컨퍼런스 전까지 자신의 집에서 머무는게 어떠냐는, 제인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페기는 답지 않게 제 주장을 관철시켰다.
페기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서 제인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호텔에 도착했지만 깨우기가 미안했다. 그래도 남의 짐을 멋대로 가지고 나올순 없는 노릇이라 페기는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흔들었다. 제인은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켜 입가를 닦았다. 그녀는 어색하게 인사하고는 보조석 문을 열었다. 얼른 챙겨 올게요. 그녀가 말했고 페기는 고개를 저었다. 함께 가죠. 제인은 볼을 긁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어맨이 발렛파킹을 위해 달려왔다. 페기는 그에게 팁을 조금 주고 금방 내려올 것이니 기다려 달라고 당부했다. 둘은 호텔 로비를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15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와 제인의 뒤를 따르며 페기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먼 복도 너머에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열쇠를 찾는 듯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여기까진 이상한 점이 없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네. 금방 나올게요.”
제인은 안으로 들어갔고 페기는 문 밖에 서서 기다렸다. 남자는 여전히 문 밖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제인과 대화를 나누고 기다리기까지 대략 30초, 아직은 괜찮았다.
속으로 초를 셌다.
하나, 둘, 셋…
열아홉, 스물…
마흔.
뭔가 있다. 그녀는 감을 맹신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확률은 대단히 중시하는 편이었다. 2분동안 호텔 방 앞에서 키를 찾지 못해 주머니와 가방을 뒤지는 남자? 여기가 제 집 앞이라면 몰라도 투숙객이라면 카운터에 연락해 사람을 부르거나 직접 내려갈 것이다.
마거릿 앨리자베스 카터는 군인으로서 여러 임무를 수행하며 적의 행동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배웠다. 정글 속 게릴라, 탈레반, 정체를 숨긴 스파이 등 적은 다양했지만 그들의 패턴은 비슷했다. 그녀는 총을 들고 정글을 기어가다가 멈춰야 할 타이밍을 안다. 이상하게 꺾인 나뭇가지, 역방향으로 돌아간 수풀, 진창이 된 바닥에 뭔가가 쓸린 자국, 작은 위화감을 무시해선 안된다. 그것들이 뭉쳐 적이 된다.
“제인, 엘리베이터 잡아 놓고 기다릴게요!”
페기는 미끼를 던지고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고 눈만 굴려 남자를 보았다. 그가 걸치고 있는 검은 가죽 자켓은 총이 들어갈 만큼 품이 넓었다. 더러운 청바지와 잔뜩 흐트러진 브루넷에 피부 상태도 좋지 못했다. 탐색을 마친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동전 하나를 떨어트렸다. 그것은 남자가 있는 복도로 굴러갔다.
그녀는 능숙하게 연기했다. 눈을 깜빡이고 귀찮은 듯 어깨와 입매를 늘어트렸다. 동전을 줍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며 주머니를 갈무리하는 척 총이 든 허리춤을 점검했다. 남자는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동전이 멈춘 위치는 남자와 1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다. 페기는 곤두선 신경을 온통 남자의 양 손으로만 집중했다. 그는 뒤적이던 가방을 조용히 발 밑으로 내려 놓고 있었다. 그리곤 손을 자켓 안으로 가져간다. 신호였다.
“꼼짝 마.”
페기는 전광석화와도 같이 총을 꺼내 남자를 향해 겨누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손바닥이 보이도록 높이 들어.”
낮게 위협해도 남자는 문을 향한 채 무뚝뚝하게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요원님?”
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페기가 다급하게 외쳤다.
“안으로 들어가요!”
순간 남자가 몸을 돌렸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제인을 향해 겨누었다. 페기는 망설임 없이 허벅지를 향해 총을 발포했다. 격발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맞은 허벅지를 휘청이며 총을 쏘았다. 몸이 기울어진 탓인지 총알은 복도 끝 벽에 박혔다. 페기는 총을 왼손으로 옮겨 잡고 그의 몸으로 파고 들어 오른쪽 팔꿈치로 목젖을 가격했다. 그가 컥 소리를 내며 빈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페기는 총의 그립부분을 세워 남자의 턱을 올려쳤다.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그가 휘청거렸다. 페기는 뒤로 물러서 총을 오른손으로 바꿔 자세를 잡아 조준했다.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멀리 밀어 차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인! 경찰에 연락해요!”
시선은 고정한 채 고개만 살짝 들고 외쳤다. 손 들어! 재차 날카롭게 외쳤고 남자는 마지못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여자 하나 처리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더니 어디서 이런 미친년이…”
“널 보낸 놈이 누구지?”
“묵비권.”
그는 이를 드러내며 얄밉게 웃었다. 30대 후반의 남자는 뒷골목에서 꽤나 구른 듯한 잔뼈굵은 불량배로 보였다. 미행이나 총을 다루는 방식이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청부업자는 아니라고 추측했다.
“무릎 꿇어.”
“너무 거칠게 굴지 말라고.”
남자는 무릎을 꿇고 양손을 뒤통수에 댔다. 멀리서 제인이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페기는 그녀에게 복도 너머로 밀려나간 총을 주워 대기하라고 말했다. 남자는 피식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천박한 도발을 꺼냈다. 페기는 아랑곳 않고 남자의 뒤로 돌아가 총을 그의 머리에 겨눈 채로 허리를 숙여 그의 몸을 수색했다. 페기는 총구로 남자의 뒤통수를 툭툭 치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런 도발에 발끈할 시기는 지났지.”
“언니, 아직 쓸만해 보이는데? 길거리에 나가면 잘 팔릴 것 같아.”
“눈썰미가 없군. 너처럼 무능한 새끼를 부려야 하는 윗대가리 고충이 느껴져. 그래도 버릴 타이밍 잘 잡은 걸 보니 보스가 아주 똑똑한가 봐.”
“개 같은 년이!”
“정곡을 찔려서 화가 나나?”
거칠게 날뛰는 남자의 뒷목을 무릎으로 가격했다. 이래도 되는 거야?! 헛구역질하며 외쳤지만 페기는 무시했다.
곧 경찰이 왔고 남자는 수갑을 찬 채 연행되었다. 제인은 출동한 경찰에게 남자의 총을 건네주었고 페기는 아래로 내려가 차량에서 FBI 요원증을 꺼내 신분을 증명했다. 호텔은 뜻밖의 살인미수 소동으로 시끄러웠다. 직원들은 15층 방마다 돌아다니며 투숙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페기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호텔 현관에 섰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사이렌 아래로 밀어 넣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새벽 두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조서를 작성해야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남자는 우선 서 내에 딸린 철창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페기와 제인이 방문해 조사를 이어가기로 했다. 페기는 조수석에 앉은 제인이 손톱을 물어뜯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를 노린 이유가 제이크 더글라스의 메일 때문일까? 텍스트도 없이 사진 하나만 달랑 보내진 메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데 다른 실이 엉겨 붙어 엉망이 되어갔다.
“컨퍼런스는 제가 동행할게요.”
“그럴 수는…”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 겠지만 경찰 보호를 받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일정을 조율해야 할 겁니다.”
“당황스럽군요.”
“그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그 점이 걱정되네요.”
돌려 말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제인 포스터는 천문학 칼럼니스트로 전향하기 전에는 저널리스트였다. 제이크 더글라스와 함께 공동 사설을 쓰기도 했다. 페기는 그녀가 쓴 기사를 몇 건 읽어본 적 있었다. 과연 연령의 벽을 넘어 제이크와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지금은 천체와 별에 대한 잔잔한 사이언스 칼럼을 게재하고 있었지만, 과거 급진적인 성격을 완전히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눌러두었을 뿐이지.
손톱을 뜯으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제인이 어떤 생각을 할지 페기는 알지 못한다. 그냥 넘길수도 있었을 이메일의 첨부 사진과 편지 사본을 들고 집으로 찾아올 정도였으니까, 약간의 의심은 품고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방금의 습격, 어쩌면 희미하게 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언론에는 제이크가 강도에게 비명횡사했다고만 보도되었다. 그의 몸에서 VX가 발견되었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본다면 제인은 어떻게 행동할까. 페기로서도 미지수였다.
“배우는 게 빠르군.”
“영 감이 안 잡히는데.”
“조급해 하지마. 잘하고 있다.”
스티브는 블레이크가 알려주는 방식으로 글록을 조립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총기를 다루는 데 있어 여태 알던 지식이 이용되는 법은 없었다. 실전이란 이런 건가, 스티브는 땀을 뻘뻘 흘리며 블레이크가 알려준 방식대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평상시에 제대로 정비해 둬야 해. 금이 간 구석 하나가 결정적인 순간 생명을 좌우하니까.”
블레이크는 스티브에게 글록 한 정과 나이프 두 개를 줬다. 지금 스티브는 자동권총 다루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그가 쓰던, 사실 위협용 이상으로 쓰인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브라우닝은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빠르게 장전하고 발사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안정감이 있고 조준이 쉽다는 장점으로 커버하기엔 스티브처럼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만 발 이상 쏘면 새걸로 바꾸지만… 그 정도로 사용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겠지. 이대로 가다간 50발도 채 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겠어.”
스티브가 씁쓸하게 투덜거리며 분해된 상부에 챔버를 채웠다.
“그 전에 일상으로 돌아갈거다.”
“그것 참 고맙군.”
뭉툭한 격려에 스티브는 픽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사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수염에 가려진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간 것 같았다. 다 떠나서 눈이 조금 휘어졌으니 웃는 것이라 생각했다. 스티브는 그의 편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여태껏 그는 무뚝뚝하게 음식을 턱턱 내려놓고 제 방으로 사라지거나 소파에 앉아 무기를 점검하고 어딘가 바삐 다녀오는 등, 캠프 내에 진득하게 붙어 있었던 적이 드물었다.
“이런 분해가 사격 솜씨 향상과 무슨 관련이 있지?”
“계속 만져서 손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야 해.”
글록의 상부를 분해하던 스티브는 아웃바렐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지나가듯 툭 내뱉었다.
“넌 나보다 배우는 속도가 빨라.”
“그런가? 넌 언제 배웠는데.”
탁자 밑으로 굴러 떨어진 아웃바렐과 스프링을 주워 올리는데 그가 대답했다.
“아홉살.”
스티브는 인상을 팍 썼다.
“지금 나더러 아홉살 꼬마를 이겨먹었으니 자부심을 가지란 뜻이야?”
“하지만 내가 제일 잘했어…”
블레이크는 수염을 긁적이며 웅얼거렸다. 스티브는 못들은 척 끊임없이 손을 움직였다. 조립을 마치고 완성된 글록을 탁자에 내려놓자 블레이크가 그걸 들어올렸다. 휙휙 돌려보기도 하고 자세를 잡아 옆으로 겨눠 보기도 했다.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미세하게 철컥이는 방아쇠의 반동까지 꼼꼼하게 확인한다.
“다음으로 넘어가지.”
블레이크는 스티브의 질문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 다만 그의 기준으로 대답이 곤란한 질문이 많았기에 과묵하게 비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렸다. 스티브가 질문을 하면 어떻게든 대답을 해주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묘하게 신뢰가 갔다.
“탄환은 모두 19발이야. 10발을 쏘고 나서 여유가 된다면 탄창을 확인해. 4발이 남았으면 신중해. 익숙해지면 상대가 가진 탄환의 갯수를 세는 것도 가능하지만 우선 네 탄환 잔량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티브가 조립한 글록을 내려 놓고 옆에 있던 명칭 설명용 빈 총을 든 블레이크가 각잡힌 자세로 여기저기를 겨누었다. 그 모습이 제법 멋지다고 생각하며 스티브는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잡아 봐.”
스티브는 글록을 들어 올려 블레이크가 취하고 있는 포즈를 어설프게 따라했다. 어깨를 앞으로 당겨. 그가 말하면서 일어났다. 스티브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반동이 작은 총이지만 격발 시 힘을 너무 주고 있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어깨가 아파질 거다. 방아쇠를 당길 때 힘을 느슨하게 빼. 그래 그렇게. 오른손으로 총을 잡고 왼손은 프레임을 받치면 된다. 익숙해지기 전까지 한 손으로 쏠 생각 하지 마.”
본인은 잘 느끼지 못했지만, 스티브는 그럴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들어 상을 조준하는 것까지 가르친 뒤 스티브를 컨테이너 뒤편 고철이 잔뜩 쌓인 공터로 데려갔다. 실전으로 넘어갈 셈이었다. 스티브는 총소리를 걱정했다. 블레이크는 깡통과 유리병 따위를 주워 모으면서 대답했다.
“이 주변 부지는 우리가 사들였다. 소리가 새어나갈 일은 없어.”
빈 물류회사 건물들과 넓은 공터는 시프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스티브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크는 빈 병과 깡통을 안고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벽돌을 양옆으로 다섯 개씩 쌓고 물에 젖은 더러운 나무판을 올려 간이사격대를 만들고는 빈 병과 깡통을 일정 간격으로 세웠다.
“쏴 봐.”
블레이크가 손을 털며 스티브 쪽으로 돌아왔다. 자세를 연습 중이던 스티브가 고개를 들었다.
“충고할 부분이라도?”
“일단 쏴.”
“거리가 먼 것 같아.”
“안 멀어. 딱 적당하다. 난전 상황에서 이보다 가까이 접근하면 엄폐물에 몸을 숨겨가며 격투를 유도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야.”
스티브는 자세를 잡고 술병을 겨냥했다.
“발포 전엔 숨을 들이쉬는 게 좋아. 그렇다고 너무 정신을 쏟으면 독이 되니까 네게 있어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을 찾아. 그건 내가 가르칠 수 없어.”
블레이크가 재촉하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바람이 불어와 쌓인 고철들 사이를 스쳐 지나며 끼익 끼익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탕-
술병은 멀쩡했다. 뒤쪽에 잔뜩 쌓인 고철 더미에서 가루와 쇳조각 따위가 파공음을 내며 튀어 올랐다. 스티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집중은 했지만, 자신은 없었고 결과는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했어.”
“빗나갔는데.”
“자세가 좋았다. 반동도 잘 흡수했고.”
스티브는 다시 자세를 잡고 총을 겨누었다.
“좀 더 아래를 겨냥해. 네 눈은 목표보다 위에 있다. 대부분 타깃이 네 시선 아래에 있어. 저 병도 그렇고,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람을 쏠 때 하체가 타깃이라면 각별히 유의해.”
“넌 머리를 노리겠지.”
“그래.”
“꼭 죽이는 방법밖에 없는 거야?”
블레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곤란한 질문도 아닐 터였다. 스티브는 피투성이가 되어 도륙된 시체들 사이에 서 있는 그의 사진을 보았고, 그걸 보았다는 사실을 블레이크는 알고 있었다.
“한 번 더해.”
말을 돌리는 블레이크의 얼굴에 언뜻 읽기 어려운 표정이 스쳐 갔다. 너무 찰나여서 그것이 쓸쓸함인지 슬픔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조인지 명확하게 판단 내리지 못했다. 스티브는 권총을 들어 병을 겨누었다. 갈색 싸구려 술병으로 총구를 움직였다. 그리고 총을 들고 자세를 잡는 아홉 살 블레이크를 상상했다. 어린 블레이크. 어린 토르.
어깨까지 오는 금발의 토르가 스티브는 처음 보는 무표정한 얼굴로 글록을 분해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모두 혐오스러웠지만, 그중에서도 소년병은 악질 중 악질이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블레이크와 토르.
탕-
두 번째 격발음이 울렸다. 여전했다. 술병은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씁쓸하게 웃으며 블레이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칭찬해 줄 텐가?”
스티브의 도발에 블레이크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방금 완전 별로였다. 너 딴생각 했군.”
“제대로 해.” 블레이크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수염에 가려진 입술이 호선을 그렸고 눈은 휘어져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다. 환하게 개이는 미소는 아니었지만… 저기서 입꼬리가 더 올라가고 흰자위, 검은자위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얇게 접힌다면, 스티브는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소중히 갈무리해 두었던 애틋한 감정을 떠올렸다. 자주 꺼내면 특유의 감상이 바래질까 두려워 꼭꼭 묻어 두었었다. 총을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스티브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토르냐고 물었을 그가 대답하지 않을까봐.
첫 실습 날이었다. 소년은 입술을 꾹꾹 말며 침을 꼴딱 삼켰다. 시프가 킥킥 낮게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나도 안 무섭다면서 큰소리 떵떵 치더니 이 반응은 뭐야.
무섭지 않아.
그런데 왜 그렇게 땀을 흘려.
아씨 말 시키지 좀 마.
겁먹었네 뭐.
시프와 소년은 커다란 저택 앞 숲속에서 엎드린 채로 대기중이었다. 시프가 속닥거리며 소년을 약올렸다. 평소였으면 발끈해서 따라 붙었을텐데 투덜거리며 대화를 끊는 모습을 보면 잔뜩 긴장한 듯 보였다. 시프는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쓴 소년의 동그란 머리통을 슥슥 아무렇게나 쓰다듬었다.
걱정 마. 이 누님이 다 알아서 해줄게.
누가 누님이야. 나이 같으면서.
나보다 약한 애는 전부 내 동생이야.
웃기네. 너한테 진적 없어.
길로틴 초크 당해서 질질 짜던건 어디 사는 누구실까?
그건 막 들어왔을 때잖아. 아무것도 못 배워서 약한 상태였어. 이젠 완전 세졌으니 너 따위 상대도 안 된다.
일주일 전에 헤드락 걸려서 땅 두드리며 풀어달라던 건 어디 사는 누구실까?
…그래 너 쎄다.
소년이 얼굴을 풀숲에 박으며 중얼거렸다. 시프는 픽 웃으며 야간투시경으로 저택을 살피며 물었다.
얼마나 지났지?
40분
생각보다 늦네.
헤임달은 모기가 드글드글한 정글에서 일주일간 진흙에 파뭍혀 대기했었다더라.
그는 완전 괴물이야.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소년은 알싸한 수풀에 턱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헤임달은 엄청 강해. 그렇게 강하면 무서운 게 없을텐데. 시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도 무서운 게 있을걸. 사람이라면 다 하나쯤은 있어.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고작해야 열 살 되어보이는 작달막한 소년 소녀들은 제 머리 위를 타고 가는 거미나 벌레 따위에 놀라지 않았다. 두 아이들은 끈질기게 신호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손목에 찬 벨트에서 LED 빛이 반짝였다.
왔어. 시프 넌?
나도. 이거 반짝이는 거 처음 봐.
노란색이네. 바로 가면 되겠어.
내건 파란색이야. 그럼 헤어져야겠다. 난 1층 식당부터 처리할게. 중간에서 만나자.
조심해.
너도.
시프가 먼저 일어났다. 소녀는 바람을 맞으며 넓은 정원으로 뛰어들었다. 소년도 몸을 일으켰다. 시프는 1층 식당 창문으로 진입하고 소년은 벽을 기어 올라 3층 침실로 들어가야 한다.
오늘의 타깃은 사악한 대부호였다. 그는 축적한 부를 나누지 않고 주민들을 억압해 착취를 일삼는 악덕 사장이었다. 사실 조금만 파고들어도 이야기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머리가 말랑말랑한 아이들은 ‘복도 학교’ 의 이상한 수업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최소한의 위화감을 느끼기 위해선 비교대조군이 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새벽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서로만 보았고 교관들만 보았다.
소년은 건물 옥상에 로프 건을 쏘아 붙이고 익숙하게 타고 올랐다. 아주 쉬운 일이었다. 조용한 저택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침실로 들어가서 타깃을 죽이고 나오면 된다. 타깃은 죽어 마땅한 악인이었고 소년은 그를 손쉽게 없앨 수백가지 살인기술을 습득한 상태였다. 로프를 타고 기어 올라가 특수 제작된 고무를 창문에 붙여 팔꿈치로 깨트렸다.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은밀하게 소년은 저택으로 잠입했다.
복도는 어두웠다. 원래는 보디가드들이 지키고 있어야 했지만 오늘은 무슨 특별한 날이었다. 어두운 복도의 구석 방은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소년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가 문에 등을 붙이고 빛이 새어나오는 틈을 살짝 엿보았다. 처음 확인한 것은 살덩이였다. 그것은 앞뒤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비계덩어리. 뭔지 모를 육체의 움직임이 기분 나빴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거대한 살덩이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땀으로 번들번들한 살은 여태껏 본 그 어떤 괴물보다 끔찍해 보였다. 그는 누가 들어온지도 모르고 열심히 움직였다. 소년은 등허리에 꽂아 둔 나이프를 뽑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침대위로 올라가 남자의 목을 겨냥했다. 그 순간.
어?
소년은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살덩어리가 뒤를 돌아 보았다.
뭐야!
소년은 단검을 든 채 멍청하게 그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가 깔아 뭉개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저와 비슷한 나이일까, 눈을 감고 있는 깡마른 금발 소년.
이 새끼 너 뭐하는 놈이야!
살덩어리, 남자는 침대 밑으로 내려가 흉물스런 아랫도리를 가릴 생각도 없이 서랍장을 열어 총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소년에게 겨누었다. 총과 나이프,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조금 숨을 고르더니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했다. 계속 총을 겨눈 채로 테이블 위에 던져 놓은 샤워가운을 걸치고 거칠게 외쳤다.
누가 보냈지?
그러나 소년은 침대 위에 소년에게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스티브…?
저가 불러놓고도 흠칫 놀랐다. 스티브가 누구지? 소년은 멍청하게 반문했다. 안타깝게도 질문에 답해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남자는 나사빠진 이상한 암살자를 경계하며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으아악!
멍청아! 뭐하고 있어!
시프가 던진 단검이 남자의 어깨에 박혔다. 그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어깨를 감싸쥐고 바닥을 굴렀다. 총이 바닥에 떨어지자 시프는 그것을 재빨리 발로 차서 멀리 치워버렸다. 그녀가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달려들었지만 남자는 침대 위에 멍청하게 서있는 소년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그는 소년을 뒤에서 껴안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소년의 손에 달랑달랑 겨우 매달려 있던 나이프를 빼앗에 목에 세우고 시프를 향해 무기를 버리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제법 되었는데도 죽음의 위기에 처한 뇌가 살아남기 위해서 아드레날린을 펑펑 뿌려대느라 남자는 고통을 몰랐다.
블레이크!
시프가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소년이, 블레이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인질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뭐라고 말하려 한 것 같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목이 반쯤 잘려 있었다. 블레이크가 단검을 든 남자의 손을 붙들고 그대로 그어 버린 것이다. 남자는 쉬익 쉬익 듣기 싫은 바람을 목으로 내보내며 피분수를 뿜었다. 블레이크는 그것을 그대로 맞고 서있었다. 남자는 빈 손으로 목을 더듬으며 새액새액 발악을 했다. 비틀비틀, 단검을 든 손을 휘둘렀지만 허무하게 공중을 갈랐다. 목에서 피거품을 부글부글 뿜으며 그는 그대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블레이크. 무슨 일이야.
시프가 다가왔다. 블레이크는 피를 뒤집어쓴 채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침대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발이 꼬여 넘어질 뻔도 한다. 어딜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년은 누워 있는 발가벗은 금발 소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티브?
아니… 아 아니야.
다행이다. 스티브가 아니야.
그런데 스티브는 누구지?
레베카, 스티브가 또 아픈 것 같아요.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어제 동굴에 갔었어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픈 것 같아요.
시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대체 왜 그래… 나 무섭단 말야… 그만해!
시프의 복면 사이로 뚫려 있는 눈 주위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자 블레이크가 고개를 들었다. 피로 축축히 젖어 푸른 눈동자만 기이하게 빛났다.
시프?
알아 보겠어?!
스티브가 아니었어…
야 정신차려! 블레이크!
시프… 나는 블레이크가 아니야.
시프는 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뭐라고?
나는 토르야.
토르였어.
블레이크는, 토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시프는 무너지는 소년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본능적으로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남자는 죽었다. 미션은 끝난 것이다. 블레이크는 의식이 없었지만 기절했을 뿐 외상이 없었다.
시프는 소년의 몸을 바닥에 눕혀 놓고 침대로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참상을 목격하지 못한 듯 보였다. 하지만.
시프는 다시 블레이크에게 다가가 낑낑거리며 그를 들쳐 업었다.
소녀는 강했다. 또한 똑똑했다. 블레이크와 탑을 놓고 다툴 정도의 실력도 있었다. 시프는 블레이크를 업은 채로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식당으로 가는 계단에 쓰러진 보디가드 둘이 보였다. 그녀가 해치운 자들이다. 바닥에 드러누운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단검 한 방에 절명했다. 시프는 시신을 넘어 식당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잃은 블레이크를 업고 저택을 빠져나가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미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블레이크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눈을 뜬 그에게 아까의 미친 모습에 대한 자초지종을 묻고 함께 ‘복도 학교’ 로 귀환하는 일 뿐이었다. 저택은 조용했다. 앞으로 다섯 시간은 그럴 것이다. 저 넓은 저택을 지키는 세 명의 보디가드는 긴급 호출 버튼도 누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저택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던 소년도… 시프는 의식이 없는 그의 목에 단검을 박았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대로 따랐다. 목격자는 없어야 한다. 목격하지 못한 목격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르침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블레이크가 미쳐 날뛰며 소년을 [스티브] 라고 불렀다. 그러더니 뒤늦게 정정했다. [스티브가 아니었어…] [나는 블레이크가 아니야… 나는 토르야.] 시프는 알아버렸다. 침대에 누운 채 목에 칼이 박혀 죽은 소년, 스티브는 아니었어도 다른 이름이 있었음을. 그는 타깃과는 관계가 없는 가엾은 피해자일 뿐임을. 시프는 무의식적으로 깨달아 버렸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날이 밝아오려면 아직 여섯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시프는 블레이크의 옆에 나란히 누워 물었다.
스티브가 누구야…?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조용히 기다렸다.
어서 일어나.
내게 다 말해줘. 블레이크… 아니 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