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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blue soldier 1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샤아 아즈나블 X 아무로 레이

 

 

 

 

 

 

 

 

 

UC 0093. 03. 12. 제2차 네오지온 항쟁은 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으로 저지되었다.

 

 

 

초질량급 물체와의 충돌을 막아 지구의 빙하기 돌입은 면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액시즈의 파편들이 대기권을 돌파해 지구 곳곳으로 낙하했다. 도심지 한복판에 직격 당해 인명피해가 심한 나라도 있었고, 인적이 뜸한 시골 곡창지대로 떨어져 그나마 한숨 돌린 나라도 있었다. 절망적인 대재앙에서 간신히 벗어난 어스 노이드들은 안도함과 동시에 이 사태를 일으킨 집단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콜로니로 피해 있던 정치인들, 사회 고위 각료 계층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지구로 내려와 대중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지구 연방 우주군은 귀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홀로그램 포스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연방의 하얀 악마 ‘아무로 레이’였다. 네오지온 총수 ‘샤아 아즈나블’의 정신 나간 멸망 계획을 저지하고 지구를 지킨 영웅으로서 여러 매체의 선전용으로 활발하게 퍼져나갔다. 아무로 레이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이용당하는 그가 안쓰러울지도 모를 일이지만, 원래 전쟁은 다 그런 식이지 않던가. 소속된 집단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비인도적인 짓이더라도 일단 저지르고 본다. 뒤따르는 비난과 책임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뤄둔다. 승리한다면 썩은 허물도 금을 두른 갑옷으로 변하는 법, 고작 ‘전’ 영웅의 허락 없이 그의 이미지를 끼워 파는 정도는 사실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사소한 일이었다. 연방은 그보다 더한 짓도 실행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필사적인 쪽은 네오지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네오지온 항쟁의 실패를 총수의 거룩한 순교라는 프로파간다로 포장했다. 은밀하게 이루어졌던 액시즈 거래에 대한 정황이나 MS와 함을 건조하기 위해 투입된 검은 자금의 출처를 슬그머니 흘리며 교란을 이어나갔다. 덕분에 두 세력의 이념 전쟁은 아직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붉은 혜성은 망령이 되어 스페이스 노이드들의 눈 뒤에 숨어 빛을 볼 기회를 노리고 있다.

 

 

 

***

 

 

 

수면이 붉게 물든 것은 석양 때문이 아니었다. 대기권을 뚫고 낙하한 셀 수 없이 많은 액시즈의 파편들이 검은 바다를 불태우고 있는 탓이었다.

 

하얀 노멀 슈트 차림의 남자가 백사장을 걷고 있었다. 그는 기름때 낀 파도를 밟으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목적지는 만의 끝에 툭 튀어나와 있는 케이프. 밀려온 잔해가 잔뜩 쌓여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케이프의 뾰족한 끝부분에 붉은 색깔의 동그란 포트 하나가 박혀 있다. 강하게 불어온 바닷바람을 맞으며 남자는 잠시 멈춰 섰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목에서 새액-새액- 불편한 소리가 퍼졌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자 시뻘건 피가 묻어 나왔다. 붉게 물든 흰 장갑을 물끄러미 내려 보던 남자, 아무로 레이는 이내 고개를 들고 발을 뗐다.

 

케이프의 끝에 도착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경사가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바위와 잔해 따위가 잔뜩 쌓여 있어 포트가 박힌 위치까지 내려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미끄러져 바다에 빠질 뻔했다. 가까스로 바위틈에 박혀 있는 포트 앞에 도착한 아무로는 노멀 슈트의 답답한 목 부분을 손가락으로 당기며 가쁜 숨을 골랐다. 포트 비상 사출구 옆을 대충 쓸어내리자 기름때에 묻혀 있던 전광판넬이 드러났다. 버튼을 조작하자 표시등이 짧은 간격으로 점멸했다. 산소 체크, 기압 체크, 시스템 올 그린.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다.”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졌다. 아무로는 포트의 비상 사출구 레버를 잡은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연거푸 터지는 기침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목구멍을 타고 거품 섞인 핏덩이가 울컥 튀어나왔다.

 

그대로 뒀다간 한없이 쿨럭거릴 기세였다. 아무로는 공기를 크게 삼키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레버를 돌리자 내부 산소가 빠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사출구가 열리는 동안 허벅지에 끼워져 있던 칼집에서 군용 나이프를 꺼냈다. 쇠가 마찰하는 불편한 소리가 멈추자 사출구가 오픈되었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내부는 엉망이었다. 얼기설기 튀어나온 전선들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고 벽에서 떨어져 나온 부서진 부품은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정 중앙, 좌측으로 약간 기울어진 좌석에 남자가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시체처럼 안색이 창백했지만, 가슴이 조금씩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노멀 슈트의 허리 부분을 뚫고 제법 큼직한 요철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샤아.”

 

아무로는 남자의 이름을 읊조리며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둘은 우주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를 벌였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액시즈에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미친 짓이었다. 수많은 생명이 펑펑 터져나가는 끔찍한 장면은 도무지 잊을 수 없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설전도 주고받았다. 14년의 인연의 끝이 감정을 헤집기만 하는 무의미한 다툼이라니. 사이코 프레임의 기적을 눈앞에 두고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소감을 표할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한계까지 치솟은 아드레날린을 해소하지도 못한 채로 퓨즈가 끊기듯 암전 했다가 눈을 뜨니 이 꼴이었다. 조종석 해치가 열리고 눈 앞에 펼쳐진 검푸른 바다를 보며 아무로는 생각했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가라앉아가는 건담에서 나오며 아무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행히도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줄은 아직도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끝을 볼 생각인가.”

 

기절한 줄 알았는데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 부드럽고 느긋한 목소리였다. 얼마 전까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장에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껏 여유로운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액시즈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어진 선언에 샤아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네가 진 거야.”

 

굳이 승패까지 덧붙이는 것은 지리멸렬하다 생각하면서도 튀어나오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살아오며 이 정도로 화가 난 적이 없었다. 수많은 생명을 허무하게 날리고 지구에 액시즈를 떨어트려 대량 학살을 저지르려고 한 전범. 이대로 칼에 찔려 죽는 건 이 남자에게 너무 편안한 마지막인 건 아닐까? 뱉어도 계속 차오르는 피거품처럼, 아무로는 샤아를 향해 끝없이 악담을 퍼붓고 싶었다. ‘우주에서 함께 폭사했다면 이런 익숙지 않은 분노에 사로잡힐 이유도 없었을 텐데.’ 아무로는 냉정해지려 노력하며 나이프를 쥔 손을 내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자신을 죽이려는 오랜 숙적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로는 왼손으로 샤아의 허벅지를 짚고 무게를 실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누구 것인지 모를 피 냄새가 뒤섞여 서로의 후각을 자극했다.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군용 나이프의 칼날이 샤아의 목젖에 닿았다. 날카로운 금속이 살을 가르기까지 겨우 1초, 그때 샤아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목울대가 울렁이는 바람에 살이 베여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위험해 보이는데.”

“상황 파악이 너무 늦는 거 아니야?”

 

아무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샤아는 대상을 정정했다.

 

“아니, 자네 상태가.”

“아아… 뭐 그렇군.”

 

아무로는 순순히 인정했다. 칼을 든 손에서 힘을 뺐으나 마음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여유롭기까지 한 남자의 행동에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느라 잠깐 멈췄을 뿐이다. 샤아는 목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음에도 남의 일인 양 덤덤했다. 모든 걸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인 것일까?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생존본능을 발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날 죽이고 나서 자네는 어쩔 거지?”

 

슬슬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무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골랐다. 콕핏에서 내려온 뒤로 30분은 족히 걸었다. 이따금씩 시야가 검은색으로 점멸했다가 다시 밝아지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호흡이 불편해졌다. 벌써 폐에 피가 절반은 찬 게 아닐까? 부정적인 추측만 잔뜩 떠올랐다.

 

“나도 곧 죽겠지.”

 

아무로는 솔직하게 대답하고 입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냈다.

 

“끝내자. 샤아.”

 

손에 힘을 주고 칼날을 밀어 넣으려는 순간.

 

“안 되겠군.”

 

샤아는 칼을 쥔 아무로의 손목을 붙잡아 거칠게 밀어냈다. 파편이 허리를 관통하고 있는 중상자 주제에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뜻밖의 민첩한 공격에 대응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아무로는 뒤로 휙 밀려나 포트 벽에 등을 부딪쳤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좁은 포트 바닥을 뒹구는 칼을 다시 줍긴 어려울 것이다. 퍼뜩 정신이 든 아무로는 이를 갈며 자유로운 왼손을 휘둘렀다. 샤아는 인상을 쓰며 주먹을 피했다.

 

“아무로. 진정해라.”

“방금까지의 그… 달관한 태도는 위장이었나? 역시 네놈은 교활하다!”

 

조금만 집중을 흩트려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이대로 기절한다면 다시 깨지 못할지도 모른다. 손목을 잡아 밀치던 힘으로 미루어보건대 샤아는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이 컸다. ‘내가 죽고 이 남자만 살아남는다면… 또 지구에 핵을 떨어트리겠다는 정신 나간 계획을 실행해도 막을 사람이 없다.’ 거기까지 사고가 확장되자 아무로는 그만 냉정함을 잃고 말았다.

 

“개자식!”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은 처참한 명중률을 자랑했다. 샤아는 언젠가 말을 타고 있던 저에게 겁 없이 뛰어들던 그때의 아무로 레이도 지금보다는 제정신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투 중에도 쓰지 않던 원색적인 욕설을 내뱉는 것을 보니 제대로 눈이 뒤집힌 모양이었다. 샤아는 이성을 잃고 날뛰는 숙적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샤아의 귓가에 비정상적인 숨소리가 울렸다.

 

“이것 놔라!”

 

얼마나 지났을까, 악에 받쳐 펄떡이던 아무로의 몸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공중에서 방황하던 손은 미약한 반항으로 금발을 그러쥐었다. 샤아는 맞닿은 뺨에서 느껴지는 짙은 열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몸이 불덩이야. 이러다 정말 죽는다.”

“… 망할 자식… 너나 빨리 죽어버리란 말이다!”

 

오랜 라이벌의 형편없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상상했던 것만큼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샤아는 잡고 있던 아무로의 팔목을 조금 거칠게 뒤로 꺾었다.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겹쳐진 상체로 경련이 전해졌다. 샤아는 무력화된 아무로의 상체를 더듬었다. 푹신한 노멀 슈트 위를 느릿느릿 기어가던 손이 심장 옆 어느 부위를 부드럽게 누르자 아무로가 목을 뒤로 젖히고 몸을 크게 경직했다.

 

입을 크게 벌린 것치곤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훤히 드러난 목울대가 파르르 떨렸다. 샤아는 한 손으로 아무로의 뒤통수를 감아쥐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마와 머리카락 경계선을 더듬어 핏자국을 엄지로 쓸어도 보았다.

 

“부러진 늑골이 폐를 건드린 모양이다. 이대로는 한 시간도 못 버텨.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어 걱정했는데 단순 찰과상인가. 뇌에 큰 충격은 안 간 듯하니 그나마 다행이군.”

 

샤아는 아무로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뒤통수를 끌어내렸다.

 

[죽어]

 

그는 샤아의 어깨에 이마를 박고 소리 없이 외쳤다.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하는 뉴타입 특유의 소통법. 샤아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고 기진맥진한 아무로를 든 채 조종석에서 일어났다. 엉덩이를 받치고 마주 안은 어정쩡한 모양새였지만, 상대는 불평할 여유가 없었다. 허리에 박힌 부품이 살을 찢으며 압력을 가했다. 당연한 고통을 감내하며 샤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통은 차라리 낫다. 상처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정 위험하다는 신호였다. 여러 번 사선을 넘으며 직접 경험한 것이었다.

 

포트 밖으로 나오자 뺨을 할퀴는 바닷바람이 거셌다. 익숙지 않은 비린내와 익숙한 기름내가 한데 섞여 코끝을 맴돌았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낙하하는 액시즈의 잔해들도 그 수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드문드문 비쳤다. 샤아는 가파른 케이프를 둘러보며 질렸다는 듯 혀를 찼다. 시야가 확보된 지금도 오르기 쉽지 않은 경사인데 밤이 된다면 틀림없이 날카로운 바위들 틈에 발이 묶일 것이었다.

 

“이런 몸으로 잘도…”

 

아무로가 무슨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을지 상상하는 것은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계속 시간을 끌 순 없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병원, 하다못해 민가라도 찾아야 했다. 이대로 두면 아무로는 서서히 질식해 죽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멀리 우거진 숲뿐, 문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어깨를 흘끗 내려다보니 그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쇳소리가 섞인 호흡이 영 심상치 않았다. 덧붙여 샤아 본인의 부상도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래서야… 너나 나나 우주에서 죽는 것이 최고의 결말이었을지도.”

 

 

 

****

 

 

 

개개인이 꿈을 가지고 열심히 가꾸었을 삶의 터전은 대립하는 집단의 편의에 따라 손쉽게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바뀌곤 했다.

 

폭발음이 터졌을 때 살아남기 위해 건담에 올라탄 것이 시작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격렬해지는 전투에서 용케 도망가지 않고 적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생명이 허무하게 사라져선 안 된다는 미지근한 의분 때문이었다. 그저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더는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에게 이기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붉은 혜성에게 지고 싶지 않아.>

 

경험이 쌓일수록 늘어나는 소원은 16세 소년의 말랑말랑하던 마음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콕핏을 노리던 나날들.

 

당신에겐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 없어. 가족도, 고향도 아무것도.

 

빔사벨에 견딜 수 없는 무게가 실린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짧게 스친 만남은 그러나 강렬하게 한 소년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라라아 슨은 샤아 아즈나블을 순수한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는, 제대로 된 신념조차 내세우지 못하는 아무로 레이를 외롭게 내버려 둔 채 가버렸다. 자신을 방패 삼아 그 남자를 지키고는 시간을 넘어 새까만 우주로 흩어져 버렸다.

 

어스 노이드 따위 지상의 벼룩 같은 무리라는 것을 왜 모르나!

 

당신의 절망은 잘 알겠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이해해 버렸다. 부패한 인간들이 정도를 모르고 착취를 반복해 지구를 죽이고 있다. 그들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인류의 발전을 저해한다.

 

라라아의 말대로 샤아 아즈나블은 순수하다. 그딴 어이없는 깨달음,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절대적 타인의 입장에 서서 당신을 규탄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무지는 어떤 의미에서 축복일 수 있다.

 

야만의 인류는 풍부한 호기심과 용기를 갖춘 개척자들이었다. 그들은 긴 세월에 걸쳐 축적된 지혜를 바탕으로 코스모스로의 문을 열었다. 인간이 진화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조건은 믿을 수 없이 낮은 확률을 뚫고 이 아름다운 물의 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작점은 지구다.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죽어갔다. 사백만 년, 긴 세월 동안 인간은 지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 생명의 별의 중력에 속박되어 쉽게 떠나지 못하는 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죄는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샤아,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인류의 진화를 위해 선택된 희생양을 자처하며, 급변하는 시대정신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벌레로 칭하고 그들의 멸망을 선언하는가. 누구보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진화를 바라는 네가, 세대가 바뀌어도 쉽게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어스, 스페이스 노이드 모두에게 심으려 하다니 대체 무슨 허망한 짓인가.

 

샤아 아즈나블이라면 이런 대량 학살이 아닌 좀 더 나은 다른 방법을 택할 수 있었다고, 아무로 레이는 그렇게 믿었다.

 

AD시대의 독재자들에게도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지금 그들을 학살자로 정의하여 규탄할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이 흐르며 우리의 사고가 유연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 미래의 인류는 네오지온 총수의 이 과격한 충격요법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서로를 물어뜯으며 가열차게 토론해봐야 그럴싸한 추측만 남을 뿐이다.

 

당신은 어째서 이해와 굴종만을 강요하며 나를 고립시키려 드는가. 단 한 번만이라도 나의 입장을, 나의 고통을 헤아려준 적 있는가. 당신의 절망만큼 나의 절망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랬기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진심을 외쳤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

 

 

 

아무로는 낯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고압 산소 챔버 안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살을 찢고 나오는 것 같은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한동안 끙끙 앓고 있는데 누군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신이 들었군요.”

 

눈을 굴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하얀 가운. 명찰에 적힌 이름은 Dr 마거릿. 손에 쥔 검진 차트와 펜. 의사인가. 병실. 사고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산소 부족으로 뇌 일부분이 망가진 걸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사흘간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 억지로 말하려 하지 말아요. 늑골이 네 대나 부러졌거든요. 호흡기도 어제 뗐습니다. 아직 숨쉬기 많이 힘들죠?”

 

아무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가 호흡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입니다. 선생님을 데려온 사람이 응급조치를 잘해 두었더군요. 워낙 유창하게 설명해서 처음에는 병원 관계자인 줄 알았어요.”

 

데려온 사람, 아무로는 입을 달싹였다. 입술 모양을 읽은 닥터 마거릿이 살짝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분도 부상이 심각한 상황이어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갑자기 응급환자들이 밀려오는 바람에… 그쪽에 잠깐 신경을 쓰는 사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요. 사흘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아서 경찰에 연락은 넣었지만 제 발로 사라진 환자를 수색할 정도로 인력이 남아도는 상황이 아니라더군요. 아시다시피 온 세상이 난리니, 그들을 탓할 수는 없겠죠.”

 

샤아…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흐릿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목에 기계는 건들지 말아요. 아직 산소포화도가 낮아서 며칠 더 달고 계셔야 합니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면 접수처에 ID를 알려주세요. 당신을 데려온 사람을 안다면 그쪽도 설명해 주시고요. 서에 연락이 갈 겁니다.”

 

아무로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아무로 레이이며 사라진 남자는 테러를 일으킨 장본인 샤아 아즈나블이라고 말했을 때 접수처 직원의 얼굴이 궁금해진 것이다.

 

모니터에 기록된 바이탈 수치를 체크하던 마거릿은 닥터콜 경고음이 울려 병실을 나갔다. 아무로는 쾌유를 빈다는 그녀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설령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입을 꾹 다물었을 것이다.

 

 

 

****

 

 

 

이곳은 멕시코 칸쿤에 위치한 작은 병원이었다. 칸쿤은 AD시대 유명한 휴양도시로 한때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오갔다. 계속되는 환경오염으로 바다에 생물이 살기 힘든 지경이 되자 관광지는 죽어버렸지만, 풍부한 공업용 냉각수를 퍼올려 그것을 이용하는 군수산업체가 여럿 들어서면서 다시금 번성한 도시가 되었다. 건담이 바다에 떨어진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해안가에는 소형 원자로를 중심으로 가동하는 공장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직격 했다면 지금쯤 이 도시는 지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아무로는 바다에 가라앉은 뉴건담을 떠올리며 서늘하게 웃었다.

 

푸근한 인상의 중년의 남자 데이빗이 아무로의 담당 간호사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과 달리 담당 환자를 다루는 손속은 매우 거칠었다. 그는 아무로가 끙끙 앓으며 식은땀을 흘려도 못 본 채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마른 몸을 부축해 휠체어에 앉혔다.

 

그날 아무로는 간호사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집중치료실을 벗어났다. 열흘이 넘도록 입에 댄 음식이라곤 죽 한 그릇 정도였다. 전신의 거의 모든 근육이 파업 상태였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도 숨을 몰아쉴 지경이었다. 데이빗은 휠체어를 끌고 시끄러운 병원 복도를 지나 접수처에 들렀다. 카운터에 앉은 직원은 연일 밀려드는 환자와 가족들을 상대하느라 매우 피곤해 보였다. 데이빗은 닥터 마거릿에게 전달받은 아무로의 상태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부러진 늑골 자체는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찔린 폐와 심하게 압박되어 괴사 직전이었던 장기들의 회복이 더딘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기억 장애>

 

“선생님.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으십니까?”

 

직원의 성의 없는 질문에 아무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감정 없이 “그렇군요.” 응답했다. 덕분에 모니터에 뜬 아무로의 이름은 계속 John Doe였다.

 

아무로는 신원미상자로 분류되었다. 즉 보험이 없었다. 아무로의 신원이 파악될 때까지 주 정부가 그의 임시 보호자가 된다. 하지만 샤아가 저지른 테러로 위성들이 파괴되어 사회 전반 시스템이 마비되는 바람에 복지사의 파견이 늦어지고 있었다. 원래 좀 더 정밀검사를 해야 했으나 비용 문제가 불거져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는 중이다. 어찌 됐든 아무로에게는 여러 가지로 이득인 상황이었다.

 

배정된 6인실 바로 옆에는 넓은 휴게실이 있었다. 병세가 심하지 않은 환자들의 사교장이 되기도 하고, 문병 온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만남의 장소로 쓰였다. (데이빗의 오지랖 가득한 설명에 의하면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여기엔 침대가 꽉 차 있었다고 한다.) 한쪽 면이 강화 유리로 처리되어 밖이 훤히 보였는데, 펼쳐진 도심지의 풍경 사이사이로 대파된 몇몇 건물들이 드러나 일상의 부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있었다.

 

왼쪽 벽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거기서 아무로는 사고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무로 레이는 유명인이다. 일 년 전쟁 직후에는 연방군의 얼굴마담 노릇을 톡톡히 했고 거의 매년 연방 영웅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론도 벨이 창립했을 때는 지구나 콜로니 할 것 없이 거의 전 매스컴에서 연일 보도를 쏟아냈다. 그렇게 얼굴이 알려진 것 치고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병원 관계자들에 대한 의혹은 허무하게 풀렸다.

 

허옇게 뜬 낯빛과 퍼렇고 붉은 멍자국이 퍼져있는 피부. 볼은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고 눈 밑은 거무죽죽했다.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아 전체적인 인상이 흐릿해 보였다. 비쩍 마른 몸뚱이가 형편없는 모양새로 휠체어에 구겨져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중증 환자의 모습이다.

 

누가 이런 시체를 아무로 레이라고 볼 것인가.

 

거울 속 낯선 남자를 향해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도 구석에 설치되어 있던 모니터에서 지구 멸망을 막은 영웅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왔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주위의 소란스러움에 묻혔지만, 스크린 하단에 뜬 공용어는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로 레이(29세) 대위

연방 우주군 론도 벨 소속

실종(생사불명)

 

 

 

***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대충 넘어가고 있지만, 신분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바다에 가라앉은 건담은 그렇다 치더라도 샤아가 타고 있던 탈출 포트는 여전히 그 케이프 끝에 박혀 있을 것이다. 포트 바닥에는 연방 군인들에게 보급되는 군용 나이프가 뒹굴고 있다. 그것은 아무로가 거기에 있었다는 증거였다. 주인 없는 포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둘만이 안다. 연방 조사관은 병원 폐쇄회로 카메라를 뒤져 아무로를 데려온 샤아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가뜩이나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아무로에게 어떤 추궁을 해올지 안 봐도 뻔했다.

 

샤아가 테러를 일으키기 전, 아무로에겐 그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과 별개로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었다. 그것을 위한 초석이 독립부대 론도 벨이었다. 사실상 승진이 막힌 브라이트와 서로 비슷한 기질을 가진 동료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시체처럼 누워서 멍하게 병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론도 벨로 돌아가도 전처럼 치열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잠적하자니 막막하긴 매한가지였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굳은 뇌를 열심히 굴려보아도 영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로에게는 ‘돌아가야 할 장소’가 없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애틋한 느낌도 잊은 지 오래였다. 아직 덜 여물었던 16세 소년 시절 스스로 걷어차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론도 벨 동료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각자 콜로니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기 시작했을 때, 아무로는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계속 누워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한참을 생각에 매몰되어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만 돌려 보니 오른쪽 다리에 깁스한 덩치 큰 남자가 침대에 반쯤 눕듯 앉아서 오렌지 껍질을 까고 있었다. 아까부터 나던 코를 스치는 시트러스 향은 이 남자에게서 시작된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칸막이 대용으로 침대 사이에 흰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오늘따라 활짝 젖혀져 있다.

 

“난 이틀 전에 들어온 쿠에르 파커라고 한다. 나이는 서른다섯. 액시즈 쇼크 때도 무사했는데 일하던 와중에 교통사고로 이 꼴이 났어. 말이 돼? 운도 지지리 없지.”

 

남자는 묻지도 않은 이름, 나이, 사고 경위까지 줄줄 읊고는 상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로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았다.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건 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쿠에르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의 덥수룩한 금발이 흔들렸다.

 

“잠을 거의 안 자는 것 같던데.”

 

대답이 없어도 말을 멈추지 않는 것이 대단한 마이 페이스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제법 중상이었나 보군.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야. 이틀간 병문안 오는 사람 하나 없었던 걸 보면 나나 형씨나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해도 될까?”

 

아무로는 불행의 교집합으로 친구를 사귀는 행동은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기억을 잃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중증 환자를 연기하고 있었기에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시각이나 청각 문제는 아니겠고… 그런 장애가 있다기엔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군. 각이 제대로 잡혀 있어.”

 

허술한 첫인상과 달리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아무로가 눈살을 찌푸리자 쿠에르가 와하하 경박하게 웃었다.

 

“기자 생활을 했었어. 박봉이라 그만뒀지만. 뭐 그때의 감이라고 해둬. 잠을 못 자는 것도 이해해. 이 좁은 병실에 새벽마다 끙끙 앓는 사람이 셋이나 되는데.”

 

“6인 실에 화상 환자가 무려 셋! 소리며 냄새며… 어떻게 편하게 자겠나?” 쿠에르는 엄지와 약지를 접어 흔들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그 과장된 행동에 아무로는 저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동시에 늑골을 압박하는 깊은 통증이 느껴졌다. 짧게 신음을 흘리자 놀란 쿠에르가 급히 사과했다.

 

“이런, 미안하군. 많이 힘든가 본데 그만 쉬게나. 어쨌든 내 말은… 당분간 이렇게 얼굴 보며 붙어 있을 것 같으니 기왕이면 인사나 하면서 지내자고.”

 

이쯤 되니 아무로도 마음이 누그러져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음 날, 쿠에르는 수액을 갈러 온 데이빗으로부터 아무로의 상태를 전해 들었다. 그는 “오~” 짧은 소감을 표하고 다시는 관련된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나름의 배려인 것 같았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묻지도 않은 넋두리를 흘렸다. 주제가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는 조리 있고 흥미로웠다. 기자였다던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닌듯했다. 피드백을 요구하지 않는 상대의 말에 단순히 귀만 열고 있는 건 솔직히 편했다. 좀 너무한 표현이었지만, 라디오나 주크박스를 통해 듣는 백색소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아무로였다면 이런 식의 여유로운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내성적인 성격 탓이라기보다 군인으로서의 습성 때문이었다. 생사를 오가는 전장에선 한순간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유발한다. 동료라 믿었던 자에게 등을 맡기다 칼이 꽂혀도 의심을 거둔 본인의 잘못이었다. 반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의 아무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심신이 너덜너덜했다.

 

 

 

***

 

 

 

“어쩌면 잘된 일일지 몰라.”

 

쿠에르가 신문을 보며 툭 내뱉었다. 끙끙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던 아무로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간이 우주로 이주한 지 100년을 목전에 둔 시대에 신문이라니 꽤 고상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고상하다고 하면 샤아도 만만치 않았다. 그도 대체 펄프로 만든 신문을 즐겨 보곤 했다.

 

“샤아 아즈나블 말이야.”

 

아무로는 순간 마음을 읽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 뉴타입인가?’ 그러나 곧바로 의심을 지웠다. 그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화제성은 여전하군. 말이 좋아 실종이고 사실상 사망이지 뭐. 아, 형씨는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 엄청나게 잘난 놈이야. 램 다이쿤의 핏줄이라… 우리 같이 능력 없는 하층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데 인류의 진화를 위한 계획이라니 정말 거창하잖아.”

 

쿠에르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한껏 비꼬는 그를 보며 아무로는 ‘우리에는 나도 포함되는 건가.’ 멍하니 생각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지구를 떠납시다. 그런 말은 여유되는 놈들이나 할 수 있는 거야. 기반도 없는데 정부만 믿고 우주로 이주했다가 난민 꼴이 되면 누가 책임지겠어? 어스 노이드라고 전부 돈 많은 부자들만 있는 줄 아나. 허울뿐인 화평 따위 아무래도 좋지만… 콜로니 강제 이주계획에 거주 구역도 계층을 나누어 차등 수용, 배급 역시 마찬가지인가. 가축도 아니고… 대체 사람을 뭐로 아는 거야. 연방 놈들이나 네오지온 놈들이나 매한가지야. 아주 구역질이 난다니까.”

 

그는 계속해서 울화통을 터트렸다.

 

“샤아 아즈나블은 악질적인 혁명가였어. 지구를 핵으로 망가트리려 한 주제에 무슨 미래를 위해서야. 갖다 붙이려면 좀 더 그럴싸한 이유를 대던지. 테러가 성공했다면 요번 억지 화평으로 발표된 콜로니 강제 이주계획보다 훨씬 더 엿같은 정책을 폈을지도 몰라.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은 어스 노이드들에게 <당신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라며 싹 모아 우주 공간에 방출해 버려도 누가 뭐라 하겠나? 그때쯤이면 연방 놈들도 다 뒤져버렸을 텐데. 지구도 밀어버리려 한 남자의 눈에 어스 노이드들이 어떻게 비칠지 불 보듯 뻔해. 과연 스페이스 노이드의 희망이었달까. 그런 놈이 죽은 건 잘된 일이지.”

 

다르다. 아무로는 치미는 불쾌감을 억눌렀다. 샤아는 지구와 인간을 증오해서 망가트리려고 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지구를 사랑해서… 또한 인간의 가능성을 믿어서…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나?”

 

쿠에르가 사뭇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무로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특유의 헤픈 표정으로 돌아간다. 기분전환이 빠른 남자였다.

 

“지금은 과도기야. 연방도 네오지온도 각자 명분을 찾기 바쁘고 그 덕에 정부의 감시 시스템도 엉망이니…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기회라고 생각해. 새로 시작하기엔 딱 좋은 시기지.”

 

쿠에르의 눈은 어떤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로는 오트밀을 억지로 삼키며 그의 이혼한 전처의 이야기를 들었다. 퇴원하면 뒷돈이나 받아먹던 사업을 접고 건전한 일을 하겠다며 부인과의 재결합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고 자상한지에 대한 일장 연설을 거의 세뇌 수준으로 반복했다. 아무로는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면서 왜 이혼을 했느냐는 의문을 떠올렸다가 모른 척 넘어갔다. 그저 뚜렷한 목적이 있는 그의 삶이 조금 부럽다고 생각하며 숟가락으로 죽그릇을 긁었다.

 

 

 

***

 

 

 

머리카락이 눈썹을 덮을 정도로 길었다. 이마를 간지럽혔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홀쭉하게 빠진 살은 아직 차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입원 후 처음 확인한 거울 속의 남자에 비하면 사람 꼴이 되었다.

 

사흘 전 드디어 휠체어에서 내려왔다. 아무로는 일주일 내로 병원을 나갈 계획을 세웠다. 보행기 없이는 몇 발자국 떼다 바닥에 주저앉을 근력이었지만 어떻게든 걸을 수 있도록 근육을 움직여 재활에 집중했다.

 

저녁 식사를 막 끝냈을 때 데이빗이 약 봉투를 들고 링거를 갈러 왔다. 아무로는 그가 가져온 약의 개수가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챘다. 못 보던 하얀 캡슐이 두 개 늘어났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빤히 보고 있자 데이빗은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보조제라고 설명했다. 특별한 낌새는 없었다. 약은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 담당의의 판단에 따라 처방이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무로는 잠시 알약을 응시하다가 이내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물컵도 받아 입에 대고 기울였다. 데이빗은 아무로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것까지 확인하고 병실을 나갔다.

 

아무로는 벽을 보고 모로 누웠다. 오늘따라 젖혀진 커튼이 신경 쓰였다. 옆 침대에는 쿠에르는 하품을 하며 껄렁하게 누워 있다. 그에게도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모든 게 일상적이었다. 아무로는 혀 밑에 숨겨 두었던 알약을 조심스럽게 뱉어냈다. 그것을 매트리스 사이로 숨기고 손을 빼는데 쿠에르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전과 달리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다.

 

“과거를 잊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지? 역시 불안한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상상해봐야 마냥 끔찍하고 불안할 것 같지만 사실 그건 멀쩡한 사람의 불완전한 감상이랄까. 혹시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무시해도 좋아.”

“… 별로 그렇지도 않아.”

 

지금까지는 입에 지퍼라도 채운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지만, 거짓말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아무로는 스스로 내뱉고도 자신의 목소리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꼭 남의 성대를 빌려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목소리가 원래 이랬던가?’ 멍청한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래? 그건 또… 예상외의 소감이군.”

“과거에 얽매이긴 싫다.”

 

아무로가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첫 구절보다 정돈된 발음이었고 훨씬 단호했다. 쿠에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 생각이지만, 형씨는 제법 화려하게 놀았을 것 같아.”

 

아무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달빛이 희미한 밤이었다.

 

아무로는 조용한 병원 복도를 걸었다. 주위가 온통 청색으로 진하게 물들어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기에 오로지 감각에 의지했다. 보행기 없이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몇 발자국 걷다가 벽에 기대야 하는 불안정한 여정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고 두어 번 커브를 도는 정도로 벌써 땀범벅이었다. 이마에 붙은 습윤 밴드가 거슬려서 떼어버렸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움직이길 몇 번,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무로는 낮에 슬쩍한 마스터키로 M.O 문을 열었다.

 

의국은 잠긴 문 외에 아무런 방범 장치가 되어있지 않았다. 물론 다 파악하고 온 것이다. 환자의 정보를 세세하게 나누어 보관하는 곳은 의료 정보 관리실이었으나 그곳엔 감시카메라가 24시간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의국은 달랐다. 의사들이 휴게실, 수술 전 대기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공과 사가 혼재했다. 사각지대가 없도록 카메라를 다는 경우는 정부나 군에서 관리하는 병원들이 그러했다. 이런 작은 병원들은 의국 같은 그레이존의 경우 감시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환자 목록에 접속했다. 아무로의 파일은 제일 하단에 존재했다. 신원미상. 부러진 늑골을 맞추고 찢어진 폐를 절개하는 1차 수술. 괴사 한 장기의 일부를 제거하는 2차 긴급 수술. 닥터 마거릿을 포함한 세 명의 의사와 두 명의 인턴이 입실. 늑간신경 이상. 호흡 정지. 제세동기 가동. 자가 호흡 불능으로 산소 챔버 처방.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날짜가 표시된 검진 기록이 줄줄이 이어졌다. 아무로는 가장 최근 날짜의 일지를 띄웠다. 갑자기 EFSF 약자가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각오가 무색하게도 연방과의 수상한 커넥션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로는 의국을 나와 닥터 마거릿의 개인 사무실을 찾아갔다. 마스터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사물이 놓여 있는 위치를 눈에 새겼다. 컴퓨터를 켜고 책상에 놓인 노트와 메모지, 서랍, 캐비닛 등을 살폈다. 한참을 뒤져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알아낸 내용은 늘어난 약의 성분이었다. 기억의 손상, 인지장애 환자들에게 널리 처방되는, 협회에서 정상 승인된 항정신성 약물이었다. 진단된 내용이 조제실로 넘어간 기록까지 깔끔했다. 아무로는 손바닥 위의 캡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면 그는 고작 평범한 알약 두 정 때문에 의심을 거듭하다 불법 침입까지 저지른 것이 된다. 전형적인 신경쇠약 환자의 모습이 아니던가. 아무로는 낮게 탄식하며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던 풍경과 똑같이 사무실의 집기들을 되돌렸다.

 

벽을 짚으며 왔던 길을 느릿느릿 걸어 되돌아갔다. 한밤의 병원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고요했으나 안타깝게도 아무로에겐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환자들의 고통과 원망이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온다. 평소라면 의식적으로 차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친 이후로 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의 뉴타입 능력은 강한 살기에 반응한다. 때로 원한과 두려움 섞인 감정을 포착할 때도 있지만 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였다. 시도 때도 없이 타인의 고통을 포착하고 동화하는 것은, 그것도 대상이 다수라면 그 느낌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병실로 돌아와 침대에 오를 때였다.

 

“이 밤에 어딜 다녀오는 거야?”

 

정적을 가르는 느릿한 목소리에 아무로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화장실을 좀.”

“한 시간이 넘도록?”

“… 깨어 있었나?”

“새벽까지 앓는 환자들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남자, 쿠에르가 말했다. 그는 양손을 깍지껴 뒤통수를 받치고 똑바로 누워있었다. 이렇게 어두운 밤이면 그의 색이 짙은 금발은 달빛에 희석되어 연한 플라티나 블론드로 보였다. 샤아를 떠올리게 만드는 색이었다. 물론 닮은 구석이라곤 그뿐이었다. 그는 샤아라고 하기엔 외모도 성격도 완전히 다른, 훨씬 다채롭고 속된 사내였다.

 

“말할 의무는 없겠지.”

 

아무로는 냉정하게 일축하고 벽을 향해 누웠다. 등 뒤의 기척은 조용했다. 늘 편안하던 침묵이 이 순간만큼은 묘하게 불편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걸 보니 혹시 범죄자? 도둑질하다가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르겠군.”

 

쿠에르가 툭 내뱉었다. 아무로는 그의 뜬금없는 헛발질에 긴장이 풀렸다.

 

“몰라. 기억 안 나.”

“아, 그랬었지. 편하네"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문득 아무로는 쿠에르가 자신의 거짓말을 파악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아무로 레이’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밝혔다시피 그는 기자였다. 웬만큼 눈썰미가 있어야 하는 직종이다.

 

“형씨는 과거에 얽매이기 싫다고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조금 전까지 이죽거리던 말투는 어디로 갔는지, 그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지만,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을 저지른다면 그 결과는 누가 책임지지? 일을 저지른 원흉? 틀렸어. 아무도 책임지지 못해. 이미 바뀐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거야. 쏟아진 물이지.”

 

다소 격한 목소리에는 분노 외에도 희미한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

 

“과거를 외면하는 건 결국 도피하는 거야. 인간이라면 그래선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남자의 말은 그 어떤 상처보다 깊숙이 박혔다.

 

 

 

***

 

 

 

손바닥 위에 올려진 약을 먹었다. 새로 추가된 두 개의 캡슐도 빼지 않고 꿀꺽 삼켰다. 전날 의미 없는 스파이 짓을 한 스스로에게 질려버렸다. 본인이 신경쇠약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게 싫은 탓도 컸다. 데이빗은 아무로의 팔뚝에서 피를 뽑으며 그의 목울대가 일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좀 어지럽고 잠이 올 겁니다.”

 

상쾌한 목소리로 데이빗이 설명했다. ‘어제는 그런 경고도 없더니.’ 아무로는 아니꼬움을 숨기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그런 약이니 어쩔 수 없죠. 자는 동안 뇌를 쉬게 하거든요. 아픈 건 싫잖습니까.”

 

그의 상황을 무시하는 경박한 말투는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데이빗은 옳은 말을 해도 신뢰감을 잘 주지 못했다. 의료종사자로선 큰 단점이었으니 이미 수간호사 자리를 꿰찬 그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이빗은 카트를 정돈해 병실을 나갔다.

 

 

 

***

 

 

 

과연 ‘그런’ 약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차원적인 사고가 힘들어졌다. 똑바로 누워서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았다. 천장의 얼룩이 기괴하게 일렁였다. 그것은 과거 동료의 얼굴이 되었다가, 첫사랑의 얼굴이 되었다가, 싫은 남자의 얼굴로, 시시각각 일그러져 변해갔다. 사고는 점점 더 에스컬레이트해가며 괴이한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공이 풀렸다가 조여지길 반복하던 와중에 갑작스레 번뜩이는 예감이 있었다.

 

‘아. 위험. 하다. 이건.’

 

사고가 뚝뚝 끊겼다. 항정신성 약물 특유의 이완 효과라고 보기에는 이상했다. 되려 그 반대의 암페타민류의 환각제를 복용했을 때와 증상이 비슷했다. 중추신경계가 교란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아무로는 과거 샤이엔에서 겪은 일련의 ‘실험’으로 약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내성과 지식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강렬한 반응을 끌어내다니. 전날 밤 닥터 마거릿의 개인 사무실에서 확인한 약의 성분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데이빗이 조제실에서 나온 약을 바꿔치기한 것일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아무로는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끌어내렸다.

 

원래 그런 약이니 어쩔 수 없죠. 자는 동안 뇌를 쉬게 하거든요. 아픈 건 싫잖습니까.

 

데이빗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아픈 건 싫잖습니까.

 

잠든 상대에게 ‘아픈’ 짓을 저지를 것이란 예고일지도 모른다. 사이코 프레임을 흡수한 뉴타입 연구의 뉴 시즌 개막이라던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자학 같은 상상을 하자니 딱 죽을 맛이었다. 의식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안구 뒤편이 터질 듯이 아팠다.

 

문득 주위가 고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병실이 이렇게 조용했던가? 침대가 꽉 차 있던 6인실. 잠을 못 자도록 밤새 소리 내어 앓아대는 화상 환자가 셋. 덕분에 독한 연고 냄새와 진물 냄새가 항상 코끝을 감돌았다. 가래가 끓는 소리. 간간이 섬망처럼 헛소리를 내지르는 환자들. 한 명은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나머지 한 명은 심심하면 저에게 말을 거는 참견쟁이 전 기자.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도 없다. 6인실이 텅 비어있었다. 원래 쿠에르와 아무로의 침대 사이를 제외하곤 다른 침대들은 모두 커튼으로 막혀 있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모든 커튼이 젖혀져 있어 여섯 개의 빈 침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무로는 벽에 기대어 시트가 정돈된 주인 없는 침대들에 하나하나 시선을 보냈다. 눈꺼풀이 파들파들 떨리며 이유 없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환각은 멈추지 않고 가속화된다. 고목나무처럼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눈을 감았다 떠 보았다. 애석하게도 시신경은 기대를 배반했다.

 

사실 아무로 레이는 미쳤다. 이 병원은 정신병동이고 쿠에르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것도 아니면 약물의 작용으로 모두가 사라진 환각을 보는 것이던지.

 

진실은 어느 쪽?

모른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혼란스러운 아무로는 흘러내리는 몸을 억지로 추슬러 병실을 나왔다. 밖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눈 코 입이 있어야 할 자리가 공허하게 뚫려 있는 기괴한 형상들. 그들은 퀭하게 뚫린 눈으로 아무로를 바라본다. 악몽이다. 꽉 쥔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비틀거리며 복도를 돌아갔다. 만나는 ‘사람’은 무시했다. 화장실로 들어간 아무로는 첫 번째 칸의 문을 열자마자 변기를 붙잡고 쓰러졌다. 가슴과 허벅지를 강하게 부딪쳤는데도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아무로는 변기에 고개를 숙였으나 속에 든 걸 게워내기 쉽지 않았다. 자세를 바로 잡으려는 시도도 힘이 빠져서 자꾸 주저앉는 바람에 잘 안 되었다. 뭣하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없었다. 한참을 헛구역질만 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로는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눈이 뚫려 있는 기괴한 사람은 아니었다. 약 때문인지 고여있는 눈물 때문인지 인영이 잘게 흔들렸다. 그는 아무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은가?”

 

다정하게 말을 걸더니 이윽고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준다. 흔들리는 금발. 아무로는 그가 아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샤아…”

 

등을 두드리던 손이 딱 멈췄다. 그러나 아무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토기가 느껴져 다시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헛구역질을 반복하며 고통을 견딜 뿐이었다.

 

“안타깝군.”

 

남자는 멈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으나 목소리는 냉기를 품은 듯 싸늘했다.

 

“지구 멸망을 막은 영웅의 말로가 이렇게나 초라할 줄이야.”

 

서늘한 숨결이 귓가를 적셨다.

 

“아무로 레이 대위. 네 어설픈 연기는 진작에 탄로 났어.”

 

아무로는 전신을 휘감는 음습한 위협을 감지했다. 다급히 팔꿈치를 세워 뒤로 날렸으나 허공만 휘저을 뿐 남자에겐 닿지 않았다. 등을 토닥이던 손은 어느샌가 아무로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처음엔 하나던 손에 또 하나가 더해지더니 순식간에 강력한 힘이 가해졌다. 일련의 과정은 어색함 없이 효율적으로, 거칠 것 없이 재빠르게 이어졌다. 아무로는 제 목을 조르는 손을 마구잡이로 긁으며 시원찮은 반항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뇌가 산소를 요구했다. 목 너머에서 컥컥 불편한 소리가 올라왔다.

 

“… 쿠에르…!”

“하얀 악마도 모빌 슈트가 없으면 평범한 인간이군.”

 

이대로 꼼짝없이 죽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목을 죄는 힘이 약해졌다. 아무로는 정신없이 공기를 들이켰다.

 

“간호사 형씨가 돈이 급했던 모양이야. 네 정체를 연방에 알려 사례금을 타자고 했더니 기꺼이 협력해줬어.”

 

쿠에르는 아무로의 등에 무릎을 박고 그의 양어깨를 꽉 쥐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설마하니 이런 촌구석에 하얀 악마가 있을 줄은… 난 말이야. 종군 기자였어. 론데니온 사령부에 공식 방문하여 취재한 적도 있었지. 네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 알아? 뭐, 당연히 모르겠지. 그리고 기자가 되기 전에는…”

 

아무로의 귓가에 쿠에르의 축축한 숨결이 닿았다.

 

“지온 군에 있었어. 흘러간 과거지만 어쨌든 그래.”

 

기계처럼 딱딱한 음성. 아무로는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쿨럭, 연방 파일…럿에게 복수하려고 이런 번거로운 짓…을?”

“끝까지 듣지. 흘러간 과거랬잖아. 1년 전쟁 때 주제를 깨닫고 바로 관뒀어. 나는 뼛속까지 현실주의자였거든. 스페이스 노이드도 아니고 군에 소속감도 없는데 갑자기 위험을 무릅쓰고 묻어 두었던 과거를 끄집어내는 건 수지가 안 맞잖아. 아. 그렇다고 사례금이 탐난 것도 아니야.”

“그럼 어째서…”

“아내가 연방 군인이었거든.”

 

몸을 일으키려 시도할수록 등을 압박하는 힘이 강해졌다. 환각증상으로 눈앞은 핑핑 돌아갔고 속이 뒤집혀 울렁거렸다. 숨통이 트인 건 다행이었지만, 갑자기 돌변해 다시 목을 졸라도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꼭 로미오와 줄리엣 같지? 우리도 종종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곤 했어.”

“본론…”

“냉정하긴. 어쨌든 네 추측이 일부 맞긴 하군. 복수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대상은 네가 아니야.”

 

쿠에르는 축 늘어져 있던 아무로의 양손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웠다.

 

“연방이든 네오지온이든 상관없어. 그녀를 죽인 놈이 내 목표다.”

“뭐, 누구?”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뜬 쿠에르가 날카롭게 말했다.

 

“솔직히 놀랐다고. 교통사고로 입원했는데 같은 병실, 그것도 옆 침대에 그 아무로 레이가 있었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게다가 영상으로 널 데려온 남자를 확인했을 때는 정말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지.”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다소 헛헛하게 웃었다.

 

“이봐, 아무로 대위. 나는 되는대로 막사는 인생이지만 내 아내는 그렇지 않았어. 보잘것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고생만 하다가 새 인생을 살겠다며 나갔는데 2년 만에 그 꼴이 난 거야. 그녀는 현장직이 아니었어. 싸우다가 죽은 것도 아니었단 말이다. 샤아 아즈나블이 일으킨 테러에 단지 운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휘말린거다. 사고. 그래. 다들 사고라고 하더군. 그런데 말했잖아. 나도 군인이었어. 군에서 ‘사고’란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걸, 내가 모를 리 있겠어?”

“내게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사이드1에 있을 때 아무로 레이의 잘 나온 사진 한 장이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했는지 알아? 론도 벨 창립 당시에는 기자들끼리 경쟁이 붙어서 제법 대단했지. 그렇게 한 장이라도 건지려고 네 스케줄에 맞춰 밤낮없이 따라다니다 보면 종종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었거든. 예를 들어 론데니온의 할렘가에 있는 외딴 술집에서 밀회를 즐기는 두 남자라든지.”

 

딱딱하게 굳어진 근육의 감촉이 무릎을 타고 전해지자 쿠에르는 피식 웃었다.

 

“놈의 보좌관 때문에 사진을 지우지만 않았어도 떼부자가 되었을지도 몰라. 굉장한 특종이잖아. 내통 혐의만으로도 이미 게이트감이야.”

“…나와 샤아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글쎄. 연방 영웅과 네오지온 총수가 술잔을 맞대는 장면을 본 대중들도 그렇게 판단할까? 게다가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을 적군을 굳이 병원에 데려와 살리려 했어. 본인도 큰 상처를 입은 상태로 말이야… 보통 그렇게까지 하나?”

 

아무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며 버틸 뿐이었다. 침묵은 동의라기보다 묵살에 가까웠지만, 쿠에르는 그의 건방짐을 지적하지 않았다. 애초에 목표는 아무로가 아니었다. 이미 제압된 미끼를 상대로 체력을 소모하는 비효율적인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로는 포박당해 무릎 꿇려진 사형수의 형상으로 꼼짝없이 붙들려 있었다. 쿠에르는 그의 등을 누르던 무릎에서 힘을 빼며 자못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어쨌든 당신 인생도 가혹하군. 액시즈를 막은 영웅이지만 그건 표면상일 뿐. 아무로 레이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연방에 보고했을 때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나?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 구슬리고 있으라더군. 연구소에서 장비와 사람을 준비하는 동안 얌전히 ‘보호’하고 있으라며 엄청난 금액을 제시했어. 더러운 놈들. 네가 먹은 약도 그들이 알려준 성분을 토대로 간호사 형씨가 배합한 거야.”

 

데이빗이 준비한 약은 멀미와 어지럼증, 지속적인 환각과 구토를 유발했다. 그러나 늑골이 부러지고 폐가 제 역할을 못 하는 상태로는 음식물을 밖으로 내보낼 만큼의 충분한 압력을 생성하지 못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아무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간헐적으로 헛구역질만 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쿠에르는 혀를 찼다.

 

“고맙단 인사는 안 해도 돼.”

 

쿠에르는 뒤에서 아무로의 몸을 감싸고 턱을 쥐었다. 하다못해 속을 비우는 것 정도는 도와줄 심산이었다.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푹 집어넣어 목젖을 건드리려고 할 때였다.

 

“크아악!”

 

뼈가 우그러지는 소름 돋는 소리와 동시에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아무로가 쿠에르의 손가락을 물어버린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발휘된 치악력은 제법 대단했다. 쿠에르는 그를 놓고 뒷걸음질 치며 오른손을 부여잡았다.

 

아무로는 입에 고인 피를 뱉으며 머리로 그의 턱을 치받았다. 그러나 양손이 뒤로 묶인 상태로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제대로 된 유효타를 입히지 못하고 타일 바닥을 나뒹굴었다. 방금 공격이 그의 최선이었다. 아무로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닫힌 문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어떻게든 될 터였다.

 

“도와주려고 했더니 이 자식이!”

 

이마에 핏줄이 선 쿠에르가 기어가는 아무로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지친 몸이 힘 없이 딸려왔다. 그대로 그를 뒤집고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뺨을 내리쳤다. 조용한 화장실에 소름 끼치는 폭력의 소음이 울려 퍼졌다.

 

한동안 이성을 잃고 주먹질을 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로는 한쪽 뺨을 바닥에 붙이고 피범벅이 된 채 움직임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핏덩이가 꿀렁이며 흘러내렸다. 바닥에 고인 피는 타일 흠을 타고 퍼져 하얀 환자복을 적시며 붉은 면적을 더해갔다. 쿠에르는 싸한 기분이 들었다. 다급히 그의 목덜미에 손을 대자 희미하게 맥이 뛰었다. 그는 달랑거리는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붙들고 아무로의 몸에서 떨어졌다. 과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망할!”

 

이런 쓸데없는 폭력은 계획에 없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약으로 구속해 적당히 얌전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아무로 레이를 쥐고 있으면 샤아 아즈나블이 나타난다. 연구소에서 모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찾아오지 않는다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흔들며 기회를 노리면 그만이다. 우연한 만남으로 급조된 허술한 계획이었지만, 뒷배도 뭣도 없는 남자 하나쯤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랬을 뿐인데.

 

달칵.

 

벽에 기대어 착잡한 표정으로 아무로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내부설비 수리 중’ 표지판을 세워뒀는데 어떤 멍청한 놈이 글을 못 읽고 들어오려는 모양이었다. 쿠에르는 갖은 변명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어울리지도 않는 항공 점퍼와 블루진을 입고 있는 금발의 남자. 챙에 가려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설마. 쿠에르는 저도 모르게 약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매끄러운 콧대와 그늘에 가려진 푸른 눈을 확인한 쿠에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납셨군.”

 

들어왔을 때랑 똑같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남자, 샤아 아즈나블은 바닥에 널브러져 미동도 없는 아무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살아있나?”

 

감정이 실리지 않은, 사실확인을 위한 물음이었다. 눈앞의 참극을 보고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중인 남자에게 쿠에르는 약간 기가 눌렸다.

 

“안 죽었습니다. 그보다 본인 걱정이나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 목표는 아무로 대위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짓을 저지르지?”

“…복수를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만 알아주십시오. 과거 지온 군에 소속되어 있던 입장으로 당신을 존중해주고 있다는 것도요. 그리고… 어스, 스페이스 통틀어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협박이라면 상황을 제대로 보면서 하셔야죠.”

 

다소 황당해하며 덧붙인 말에 샤아는 큭큭 가볍게 웃었다.

 

“인정하지. 멍청한 질문이었어. 복수는 나도 좋아해.”

 

그 웃음이 꼭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쿠에르는 허리춤에 끼워두었던 권총을 꺼냈다. 아니 꺼내려 했다. 아무로가 검지를 물어뜯지 않았더라면 벌써 조준을 마치고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익숙지 않은 왼손을 써서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 목표는 고작 3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으나 이상하게 자신이 없었다. 남자는 얼핏 허술해 보여도 사실 정 반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묘한 방향으로 휘어진 그의 손가락을 보며 샤아는 입술 끝을 올렸다. 서늘한 푸른 눈이 쿠에르를 똑바로 향했다. 처음 아무로의 생사를 물었을 때와 다르게 그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다니. 쿠에르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아무로가 그랬나 보군.”

“맞습니다. 상당히 거칠더군요. 그렇더라도 제가 좀 심하긴 했습니다.”

 

억지 여유를 가장해 대답했다. 땀이 등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피 칠갑을 한 아무로를 보고도 샤아는 별 대꾸가 없었다. 시간은 애처롭게 흘러갔고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쪽은 쿠에르였다. 그는 왼손을 슬금슬금 움직여 총을 끼워둔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그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닐 걸세.”

 

샤아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한술 더 떠서 팔짱을 낀 채 벽에 삐딱하게 기댔다. 시선은 계속 쿠에르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매력적이고 여유로운 분위기는 속세에 찌든 복장을 걸치고도 여전했다.

 

“무기가 없습니까. 대령?”

“그러하네.”

“저는 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이는군.”

“뭔가 믿는 구석이 있네요. 저격수라도 대기 중입니까? 아니면 문밖에 경호원을 잔뜩 세워 뒀다든지.”

“난 혼자야. 알다시피 특급 수배범 신세고.”

 

스무고개라도 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페이스를 잃기 싫었던 쿠에르는 등허리에 끼워두었던 권총을 꺼내 잠금장치를 풀고 샤아를 향해 겨누었다. 일련의 행동은 오른손으로 행했던 때와 별다를 바 없이 빠르고 정확했다. 조준경이 정확하게 샤아의 이마에 맞춰지자 그제야 안심이 되면서 긴장이 풀렸다. 쿠에르는 가라앉았던 분노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원망하려 거든. 내 아내를 죽인. 본인을 탓하십시오.”

 

자신에게 다짐하듯 낮은 목소리로 엄숙하게 선포했다.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그의 복수는 완성이었다. 원수를 죽인다고 아내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내의 복수를 마쳤다는 허영 섞인 만족감은 얻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샤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딸이 하나 있더군.”

 

쿠에르는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저 자식이 방금 무슨 소리를 했지?

내 딸?

수배범 주제에 어떻게 거기까지 조사를?

아니야. 그 아이는 무사할 거다.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해서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건 지나친 억측이다.

그래. 허세에 말려들지 마.

 

머릿속이 복잡하게 공회전했다. 샤아의 말 한마디로 쿠에르는 순식간에 패닉에 빠져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저 남자가 자신의 딸을 제 손속이 닿는 범위에 두었다면, 작은 신호만으로 딸을 죽일 수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고민하는 사이 바닥에 누워있던 아무로가 짧게 기침을 했다. 입에서 핏방울이 터져 바닥 위에 스프레이처럼 뿌려졌다. 그 미약한 모습을 보며 샤아는 순간 어깨를 움찔 굳혔다. 짧은 동요를 포착한 쿠에르는 주도권을 잡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령. 더는 헛수작 부리지 마.”

 

총구가 목표를 바꿨다. 샤아의 시선이 쿠에르의 손을 따라갔다.

 

“이 자식 머리가 터지는 꼴 보고 싶지 않다면…”

“않다면? 자네 목적은 내가 아니었는지.”

“그 전에. 내 딸과 관련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그 아이를 억압 중인가?”

 

쿠에르의 질문은 어딘가 나약하게 들렸다.

 

“연방에 연락하면서 공용 회선을 사용한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

“말 돌리지 마! 내 딸에게 접근했나? 그 애는 무사한가?”

 

샤아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걱정 말게. 그 소녀는 멀쩡해. 다만… 자네는 날 좀 과대평가하는 구석이 있군. 딸이 있다는 언급만으로 내가 그 아이를 어떻게 했을 거란 추측은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지 않나?”

“네오지온 총수치고는 자존감이 낮은데…”

“전 총수로 정정해주게. 이젠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남자라고 말이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아무로를 내세워 나에게 복수하려 들었겠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남자. 그의 말이 맞았다. 액시즈는 지구에 떨어지지 않았고 샤아 아즈나블은 연방군이 공표한 특급 전범이었다. 총수를 잃은 네오지온은 아직 와해되지 않았을 뿐, 그 내부는 권력 다툼이 극심하다고 들었다. 전 총수를 보호하기는커녕 그가 이대로 실종상태로 남아 스페이스 노이드의 신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다. 즉 눈앞의 남자는 여러모로 사면초가 상태였다. 그러나 쿠에르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남자를 앞에 두고, 그가 내뿜는 별것 아닌 압박감에 완전히 눌려버렸다. 대화를 주고 받을수록 점점 더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속마음을 들킨 쿠에르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어지간히도 삶에 미련이 없으신가 봅니다.”

 

총구는 다시 샤아를 향했지만 쿠에르의 내면은 지독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동요를 의도했다면 그는 옳은 선택을 했다. 다만 목숨을 걸고 상대를 도발하는 것은 무언가 얻을 것이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건 맞아. 이제는 딱히 이루고 싶은 일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남자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쿠에르는 이를 갈며 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딸 아이는 괜찮을 것이라고 믿으며 트리거의 감촉에 정신을 집중했다. 세 치 혀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지배자로 태어나 지배자로 죽는 것이 샤아 아즈나블의 운명이라면 그렇게 보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네오지온 총수의 목숨을 끊는 사형집행인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그렇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지 않은가. 쿠에르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합리화하며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했다.

 

“슬슬 아슬아슬하군.”

 

샤아는 AD시대에나 유행했을 구식 롤렉스 시계를 들여다보며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파커 부부의 과거가 그 소녀에게 넘겨지기까지의 시간을 말하고 있다네.”

 

쿠에르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는 드문드문 어눌한 어조로 물었다.

 

“내 과거…? 설마.”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는 대견한 아이더군. 수업 발표로 아버지의 르포를 인용하기까지 했던데. 연방군 정보부서에 근무했던 어머니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

 

샤아는 양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매력적인 모습이었지만 쿠에르의 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괴물처럼 비쳤다.

 

“존경하는 아버지가 지온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랐던 게 그녀에겐 다행인 일이었어.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 마을을 폭격해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심지어 그 일로 훈장까지 받은 군인이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진실을 어떤 자식이 알고 싶겠나.”

“너… 네놈…! 그건 너희 지온 놈들이…!”

“자네 상관은 마 쿠베였을 테지만… 딱히 부정은 안 하겠네. 나 역시 자비가 밑에서 부역했던 몸이니.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내 과거가 아닐 텐데.”

“샤아 아즈나블! 이 비열한!”

“비열한 건 그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무로 레이는 관계도 없는 남자의 복수에 휘말려 날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었다. 설마 이 녀석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말하진 않겠지?”

“우습군! 적과 내통한 것이 죄가 아니라면 무엇이 죄란 말이지? 아무로 대위는 너를 막을 의무가 있었다. 연방 영웅과 네오지온 총수! 당신들은 적이었다고! 그런데 그런… 은밀하게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즐겁게 웃으면서… 더러운 새끼들!”

 

쿠에르는 완전히 여유를 잃고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도를 넘게 분노하는 그를 보며 샤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정정하자면 아무로와 나는 내통한 것이 아니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이였다면 아무로가 액시즈로 날 막으러 올 일도 없었겠지. 자네의 그 ‘술잔을 기울이고’ 부분은 아마 론데니온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를 말하는 것 같은데… 과연 기자들은 대단해. 팔리기 위한 기사를 쓰려면 어떻게 살을 붙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잖아.”

“같잖은 변명이야!”

“자네의 부인, 돌로레스는 연방군 제9속 정보부서에 근무했다. 사령관 직속이었다곤 해도 떳떳하다고는 말하기 힘들겠어. 전 카라바 승무원들의 뒷조사와 도청에도 관여했고, 론도 벨 소속 군인들을 감시해 위험분자 블랙리스트도 작성했으니. 그녀의 상관은 철저히 이해타산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냉정한 자였네. 쉽게 거부하긴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군이 아무리 계급사회라 해도 엄연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이상, 그런 식의 이해를 바라는 합리화야말로 같잖은 변명이 아닐까?”

 

겨눠진 총구가 사시나무 떨리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자면.”

 

샤아는 눈을 내리깔고 씁쓸하게 웃었다.

 

“나… 샤아 아즈나블이 일으킨 테러로 전사한 돌로레스 소위. 그녀의 사후에 이루어진 재판에 변호인단을 비롯한 비공식적인 지원을 보낸 건 아무로야. 그녀만 도운 게 아니라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전역을 앞둔 정보부 군인들의 치부가 까발려지지 않도록 최대한 막아줬더군. 상층부 개혁을 꿈꾸고 있던 녀석이라 순수한 목적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도 몰라. 그래도 일가친척 하나 없던 자네 딸이 매달 군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이 녀석 덕분이다.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아무로 레이는 세간에서 상냥하다는 평가니까.”

 

쿠에르의 시선이 샤아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의 끝이 붉은 바닥을 가리켰다. 거기엔 너절하게 누워있는 아무로가 있었다.

 

“거짓말이다…”

“때론 현실이 더 하더군.”

“너… 넌 수배범 신세잖아. 어떻게 이런 내용을 혼자 다 조사했나? 말이 안 되잖아!”

“그만하지. 자네가 기자이기 이전에 군인이었듯, 나 역시 총수이기 이전에 군인이었다. 거쳐온 곳과 적진의 정보를 제대로 쥐고 있지 않는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겠나?”

 

샤아가 공허하게 웃으며 말했다. 쿠에르는 탁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총구는 아래를 향한 지 오래였다. 순식간에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복수를 위해 타인을 제물 삼는 일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득 생전 잘해준 적도 없으면서 죽은 아내를 위한답시고 복수를 외치는 자신이 한없이 역겹게 느껴졌다. 최악의 남편이었던 쿠에르 파커보다 생판 타인인 아무로 레이가 훨씬 더 그녀를 위해준 셈이다. 그리고 그런 은인에게…

 

“이렇게 되었으니 한가지 제의를 하겠다.”

“제의…”

 

완전히 전의를 잃은 쿠에르는 멍하게 단어를 반복했다. 시선 끝에 있는 아무로는 여전히 일어날 줄 몰랐다. 코 끝에 피냄새가 감돌았다. 참혹한 부조리극이었다.

 

“나는 아무로를 데리고 가겠다. 대신 쓸만한 정보를 주지. 그걸로 뭘 할지는 자네 마음에 달렸어. 물론 부모를 사랑하는 착한 소녀에게 들어갈 서류도 빼돌려 주겠네.”

“하하! 제의… 통보가 아니라?”

“선택은 그대의 몫이야.”

“끝까지 대단하십니다. 대령.”

 

쿠에르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복수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소중한 것을 놓칠 수가 없었다. 샤아 아즈나블이 지금까지 지껄인 모든 말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순간 쿠에르의 패배는 확정되었다. 딸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도 세계 최악의 범죄자가 필요에 의해 언제든 손을 쓸 수 있는 형태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샤아를 죽여도 언젠가 그가 놓은 덫이 발동해 딸을 덮칠 것 같았다. 모든 가능성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그 손가락은 빨리 치료받는 게 좋을 거야.”

“댁 애인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은 놈을 염려해 줍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참 좋으시네요.”

 

쿠에르는 벽에 기댄 채로 스르륵 쓰러져 내렸다. 샤아는 어느새 아무로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굴을 돌리고 환자복을 들춰 상처를 살피는 손길이 퍽 다정해 보였다. ‘애인이란 말은 부정하지 않는 군.’ 멍하게 생각했다.

 

“사람이 좋은 건 그대가 아닌지.”

“아?”

“원수를 살려 보내려고 하니까.”

“함정을 판 장본인이 말 한번 잘하십니다.”

 

쿠에르가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로 샤아를 쏘아보았다. 샤아는 부어오르기 시작한 아무로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그게 자네와 나의 차이야.”

“무슨 의미죠?”

“나라면 듣지 않고 쏴버렸을 거다.”

“……”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가슴 한켠이 서늘해진 쿠에르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샤아는 아무로의 몸을 돌려 수갑이 채워진 팔목을 살피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열쇠는 가지고 있겠지?”

“여기.”

 

쿠에르는 허겁지겁 뒷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수갑 열쇠를 꺼내 던졌다. 은색 물체가 공중에서 빙그르르 포물선을 그렸다. 솜씨 좋게 낚아챈 샤아는 신중한 손놀림으로 수갑을 풀었다. 힘없이 달랑거리는 아무로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만지던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부러졌을지도 모르겠군.”

“…망할.”

 

뒤로 포박된 채 똑바로 누워 쿠에르의 체중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런 상태의 팔목이 무사할 리 만무했다. 샤아는 날카롭게 살이 패여 피가 흘러나오는 손목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행동에 쿠에르의 시선은 향할 곳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자네 침대 밑에 뒀어.”

 

샤아는 아무로의 어깨와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그를 안아 올렸다. 쿠에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샤아의 팔 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발목에서 손자국을 발견하고 지레 찔려 표정을 굳혔다. 샤아는 손에서 느껴지는 가벼움에 가볍게 혀를 찼다. 쿠에르는 둘을 외면하다가 갑자기 뇌리를 스친 생각에 벽을 붙잡고 일어나 다급하게 외쳤다.

 

“한 대 때려주셔야겠습니다. 손가락 한 개론 대위를 놓쳤다는 말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샤아는 고개를 돌려 쿠에르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자비로운 사내잖아. 부인의 원수에게 주먹질을 부탁하다니.”

“자꾸 떠올리게 하지 마시죠. 솔직히 지금도 많이 참고 있습니다. 아무튼 어서…”

“안타깝지만 그 부탁은 거절하지. 나에겐 자네를 때릴 자격이 없으니. 정 염려된다면 그… 스스로 벽에 머리라도 박는 건 어떤가?”

“…소름 돋네요.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죠.”

 

쿠에르는 한숨을 푹 쉬고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하군.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을 눈앞에 둔 기분이야. 당신같이 잘난 남자는 평생 가도 이 심정을 모르겠지.”

 

문을 열고 나가려던 샤아가 걸음을 멈췄다. 살짝 돌아본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저릿한 압박감에 쿠에르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잘 알지. 그 마음.”

 

탁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