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은 옮기고 있었지만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듯 보였음. 로키는 모습을 숨기고 계속 토르를 지켜봄. 꼬박 일주일을 말 한마디 없이 움직였음. 걷기만 했는데도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으니 이동거리는 제법 됐음. 로키가 모습을 드러내 모든걸 밝힐까 고민하는 사이에 토르는 작은 마을에 도착함
허름한 여관에 체크아웃한 토르는 품에서 갈색봉투를 꺼냈음. 페기가 준 스팁의 유품임. 흙이 묻은 시계와 꼬깃꼬깃 접힌 종이가 들어있음. 토르가 침대에 누워 고개만 돌리고 웃고있는 그림임. 순간 토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림을 쥔 손에 힘을 주었음. 그러나 그림은 찢어지지 않았음
육안으로 보기에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손을 떨었음. 악 물린 잇사이로 낮은 바람소리가 새어나왔음. 그림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오른쪽 아래를 건드림. [스티브 로저스가, 사랑을 담아] 콩테로 그려진 서명이 조금 번지자 재빨리 손을 거둠. 그리곤 다시 접힌대로 소중히 접었음
갈색 봉투에 넣어 겉옷 위에 그것을 올리고 토르는 침대에 앉았음.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잠시 그렇게 있었음. 어깨가 떨려오고 짧은 순간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음. 그리곤 끝이었음. 토르는 잠시 앉아 있다가 신발만 벗더니 그대로 침대에 누웠음
숨소리가 일정해지고 감긴 속눈썹의 떨림이 멈추자 로키는 모습을 드러냈음. 침대 옆에서 곯아떨어진 지친 형을 내려봄. 로키는 검녹색 실크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토르의 이마를 감싸더니 마법을 사용해 무방비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감. 엉망이 된 기억의 조각이 떠다니는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음
아스가르드와 관련된 과거는 엉망으로 얽혀 풀기 힘든 상태였음. 다만 토르는 로키를 기억하고 있었음. 겨우 대여섯살 꼬마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도무지 얼굴을 떠올리지 못함. 조각을 맞춰주려해도 쉽지 않았음. 결국 포기하고 다른 기억을 뒤졌음. 지구에서 형이 겪은 수많은 일들을 보았음
기억의 처절함에 슬프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앞섰지만 뒤따르는 다른 감상이 있었음. 감히 제 형의 사랑을 받고도 어이없이 자멸하는 인간들에 대한 분노였음. 토르의 0몸과 마음을 가진 개미들에 대한 일방적인 분노. 로키는 형의 사랑을 받는 그들을 질투했다는 걸 자각함. 심장이 차가워짐
그리고 형의 미련함에 화가 났음. 주먹질 한방이면 끝날 인간들에게 왜 쩔쩔매는거지? 사랑한다면 방해자는 다 죽여버리고 제대로 지키던지, 생각하면서도 토르가 그렇게까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로키 자신이 제일 잘 알았음. 먼 과거의 아스가르드의 천둥신 토르도 굉장히 상냥했으니까
토르는 악몽을 꾸고 있었음. 내면을 들여다보는 로키는 그것을 알았음. 잠시 망설이던 로키는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어둠을 몰아냈음. 이마를 쓸어주며 흐르는 땀을 훔쳐줌. 프리가가 상냥하게 자장가를 불러주자 거친 숨이 조금씩 편하게 바뀜. 그날 밤, 로키는 아둔한 토르의 샌드맨이 되었음
그 뒤로도 로키는 종종 토르의 곁에 머물렀음. 정체를 밝히지는 못했음. 과거 제가 알던 위대한 천둥신이 사라지고 아스가르드 출신 방랑자로만 마주할 것이므로. 불신의 시선을 받고 침착할 자신이 없었음. 그리고 사실 다른 은밀한 욕망도 있었음. 형을 형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잦아진 미드가르드 방문으로 헤임달의 묘한 시선을 받았음. 그때문에 아스가르드에서 왕의 직무를 처리하는라 두 달이 흘렀는데, 그 사이 토르는 뉴욕에서도 아주 먼 펜실베니아까지 흘러갔음. 산맥이 많고 지형이 험한 곳이었는데 그탓에 발전이 더뎌 1900년대 초반의 분위기가 느껴졌음
거기서 얼떨결에 한 노인의 손자 행세를 하게됨. 노인의 이름은 조나단 블레이크였는데 자연스럽게 도날드 블레이크가 됨. 고립된 마을은 외지인에 대한 배척이 심했는데 토르도 예외는 아니었음. 조나단은 마을에서 괴팍한 늙은이로 통했음.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토르를 조나단이라 우겨댔음
사람들이 설득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음. 조나단은 토르를 도날드라 부르며 어딜 가든 함께했음. 2년 쯤 지나자 마을에 정착함. 잘생긴 얼굴에 과묵하고 튼튼해서 이것저것 부려먹기도 좋았음. 그래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어서 공짜 노동력에 따른 보상으로 토르는 마을의 일원이됨
도날드는 정말 과묵했음. 동네 아낙들이 잘생긴 외지인 근처를 얼쩡거렸지만 제 할 일만 하고 묻는 말엔 단답으로 대답하는 철벽에 두손두발 들고 사라짐. 괴팍한 조나단처럼 그의 '손자' 도날드는 다른 의미로 접근하기 어려운 남자라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사람들도 진짜 손자라고 여기게 됨
조나단은 양목장을 운영했음. 말도 두마리 키웠는데 맹수가 나타나 양을 물어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순찰하기 위해 사용됨. 한 마리는 네가 타. 조나단이 말하자 토르는 고개를 저음. 왜? 말 못타나? 그건 블레이크가 사나이라면 기본이야. 가르쳐 줄테니 타. 조나단의 말에 토르는 곤란한듯 웃었음
결국 포기한건 조나단이었음. 말을 타지 않아도 토르는 양들을 잘 돌봤음. 여름을 앞두고 털을 미는 것도 초짜 주제에 조나단에 필적할만큼 해냈음. 70대 노인이라지만 50년 경력의 베테랑이었는데도 어쩐지 자존심이 상함. 조나단은 거칠게 욕했지만 토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양젖 주머니를 내밈
사실 조나단은 죽기 직전에 토르를 만났음. 낙오된 양을 찾기 위해 밤 늦게까지 가스등을 켜고 산을 헤매던 그는 거대한 곰을 만났음. 보통 곰들은 이때쯤 겨울잠을 자기에 방심했음. 날아오는 앞발을 보고 죽음을 직감한 순간, 금발을 질끈 묶은 한 남자가 곰의 앞발을 잡고 있었음. 그게 토르였음
고약한 노친네로 통하는 남자였지만 생명의 은인에게까지 틱틱거릴만큼 안면몰수한 노인은 아니었음. 조나단은 토르를 데리고 제 오두막으로 감. 식사를 대접하고 간단한 대화를 하다가 갈 곳이 없다는 말에 충동적으로 받아들임. 아들이 억지로 끌고간 손자가 살아있었으면 비슷한 나이로 보였음
토르는 도날드가 되어 조나단의 조수 일을 함. 양을 치고 젖을 짜서 조합에 팔고 가끔씩 땅을 사고 싶다며 쳐들어오는 양복쟁이들을 위협해서 쫒아냄. 아주 일을 잘했음. 노인의 술자리 상대도 되어줌. 아들이 데리고 사라진 손자를 그리워하며 울때는 어깨를 토닥여 위로해 주었음
조나단이 잠들자 밖으로 나와 양들 틈에 섞여 누워 하늘을 보았음. 양들은 냄새가 심했음. 제인과 함께 처음으로 탔던 기차에서도 이렇게 양들 틈에 끼여 있었지. 잊기 위해 숨어든 시골에서조차 기어코 과거의 편린을 찾아 되새기고 만다. 미련한 스스로에게 쓴웃음이 남
그때 양들이 메에에 움
곰이나 늑대가 나타났을때는 이렇지 않았음. 날뛰며 불안해 하는데 지금은 그저 작게 울기만 함. 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났음. 멀리 한 남자가 서있음. 검은 머리를 바짝 뒤로 넘기고 이곳에 어울리지 않게 도시의 신사들처럼 검녹색 양복을 입고 있었음. 땅을 팔라는 어중이떠중이인가, 인상을 찌푸림
나무 그림자에 얼굴이 가려 잘 보이지 않았음. 토르가 뭐라 말하려는데 남자가 먼저 움직임. 달빛에 드러난 얼굴을 보고 토르는 눈을 크게 뜸
너... 기억나는군
운을 떼자 상대의 눈에 기대가 스쳤음 토르는 인상을 썼음
그때 파티에서 시비를 걸었던 남자잖아
남자는 잠깐 굳었다 피식 웃었음
토르는 기억력이 좋았음. 한 번 본 사람은 잘 잊지 않았음. 하물며 적의를 비치던 대상은 더 그렇지. 그는 하워드의 오페라 하우스 파티에서 스팁의 악수를 쳐내며 시비를 걸었던 남자였음. 검은 머리와 녹빛 눈은 과거 연인이었던 프랭크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보다 더 사납고 냉정해 보였음
그런 남자가 왜 여기에 있지? 상황이 이상했음. 이런 곳에서 마주칠 이유가 없는 상대임.
땅을 팔라고 설득하러 왔나?
아니란 걸 알면서도 묻자 남자는, 로키는 피식 웃었음
멍청하긴
댁은 누구요, 나에게 볼 일이 있소?
토르의 적의에 찬 질문에 로키가 입을 열었음
토르 오딘슨
잔뜩 굳어 말을 따라함.
토르...오딘슨?
머리가 복잡했음. 속이 울렁거렸고 주변에서 메에에- 양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림
역시 이정도론 부족하나
무슨
당신은 아스가르드에서 왔어
그걸 어떻게 알지?
봤으니까, 댁의 기억
당신은 누구요
토르가 주먹을 꽉 쥐고 묻자 로키는 눈을 내리깜
그건 네가 알아내
비협조적인 태도에 토르는 짜증이 치솟았음
제대로 말하게, 너는 누구고 날 찾아온 목적이 뭔지, 아스가르드를 알고 있는 걸 보니 혹시...
혹시?
너는
나를.. 알고있냐고?
...그래
로키는 음울하게 중얼거렸음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하는군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입에서 너의 과거가 나올 일은 없을거야. 그걸 떠올리는건 네 몫이고, 나는 그저 방관할 뿐이지
로키는 입가를 가리고 큭큭 웃었음
처음에는.. 그저 가엾고 불안했는데.. 이젠 좀 화가 나
토르는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로키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음. 기분이 매우 나빴음
이대론 가엾으니 한가지 힌트를 주지,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남자였어. 과거형인 이유는 마음대로 생각해
로키가 장난스럽게 말했음. 하는 말은 전혀 모르겠지만 발하는 감정이 분노라는 것은 확실히 느껴짐. 그래서 토르는 소극적으로 질문함
혹시 내가 과거에 너의 적이었나?
다음 순간 드러난 얼굴이 너무나 상처받은 표정이라 토르는 저도 모르게 움찔 물러남. 양 한마리가 불만에 차서 허벅지를 머리로 꾹꾹 밀어냄
적은 아니었어, 대답은 여기까지야. 이만 가볼게
잠깐 기다리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겪는건 확실히 다르군, 좀 충격이라 쉬어야겠어
남자는 제 할 말만 하더니 곧 어둠속으로 사라졌음. 토르는 제자리에 못박힌 채 멀뚱히 서있었음. 처음으로 제 과거를 아는 남자를 만났는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보냈음. 황망한 토르는 마구 뛰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무릎을 꿇었음. 치대는 양들의 주둥이를 손으로 막으며 생각함
저 남자도 아스가르드인일까? 혹시 그라면, 이 고통을 끝낼 방법을 알지 않을까? 억지로 막아두었었음. 대상 없는 분노와 참아왔던 고통은 결국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토르는 자기파괴적인 상상을 하며 바닥을 꽉 쥐었음. 축축한 흙이 손에 감겨옴. 나의 죽음.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자유
이름 모를 새가 우는 소리 양들이 채근대는 소리가 뒤섞여 결코 조용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토르는 고요함을 느꼈음.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가 아는 한 죽음밖에 없었음. 그것은 제인과의 약속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까? 상상만으로도 달콤한 유혹임
처음엔 약했던 충동은 스팁의 죽음 이후 가속화됨. 한때는 차라리 연인의 시신이 눈앞에 없으면 좀 낫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었음. 그런데 막상 최후의 순간이 왔을때 손목조차 잡아주지 못했다는 현실이 이토록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음. 스팁을 그렇게 보내고 토르는 죽음을 상상하는 일이 늘었음
토르 오딘슨, 오딘의 아들. 토르는 그것을 가슴에 새겼음. 남자의 얼굴은... 검은 머리와 녹빛 눈동자에 대한 그립다는 감상이 전부였음. 그러고보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동생도 검은 머리에 녹색 눈동자였던 것 같음. 다만 훨씬 작았고 아까의 남자처럼 날카롭고 냉정한 분위기는 아니었음
그래서 넘겨버림. 정답이었고 제일 쉬운 길이 되었을 것인데 제 발로 차버림. 내 동생은 좀 더 다정하고 상냥한 아이였어. 뒤죽박죽된 기억을 맹신하는 것 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만 동생은 아니라고, 아니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단정지어버림
아침이 밝아옴. 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남
울타리를 열고 양들이 풀을 뜯을 수 있도록 전날 미리 봐둔 목축지로 몰아감. 남자는 다시 볼 수 있을거란 늬앙스를 풍기고 돌아갔음. 토르는 마음을 가라앉혔음. 어차피 시간따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음. 갑자기 사라지는 마술을 부리는걸로 보아 그 남자도 평범한 인간은 아닐터였음
일주일은 자지 않아도 너끈하고 칼과 총 포탄에 맞아도 멀쩡함. 심장에 충격을 받아도 곧 회복되는 경이로운 신체는 토르의 목숨을 연장시켰음. 하지만 그 특별한 남자라면...
끝없이 차오르는 생각의 강에서 허우적거림. 토르는 양들이 풀을 뜯는 것을 지켜보며 죽음과 희망을 함께 떠올림
토르의 생각대로 로키는 곧 모습을 드러냄. 악몽을 꾸며 끙끙 앓다가 조금 편해져서 잠에서 깼는데 제 이마를 쓸어주며 내려 보고 있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쉿- 검지를 입가에 대고 세움. 옆을 보니 조나단이 몸을 뒤척임. 당신이 편하게 해준거요? 누운채로 묻자 로키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음
전엔 그렇게 화를 내더니..
내가 변덕이 좀 심해
기척없이 갑자기 나타나는건 뭐라는 마법이지?
알고 싶으면 날 기억해내
당신은..
로키
로키라고 불러, 남자가 말함. 순간 머리가 터질 듯 아팠음. 이마를 쓸어주는 로키가 무어라 주문을 외우자 고통이 사라짐. 로키는 한숨을 쉼
역시 너는 고장났어
아주 단단히 말이야. 아마 평생 기억할 수 없을지도
네가 말해주면 되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절대 싫어
이상한 자존심이라고 생각이 안드나?
마음대로 생각해, 그보다
이마를 쓸던 손을 내려 얼굴을 쓰다듬더니
내 이름을 불러줘
로키가 애달프게 말했음. 토르는 눈을 깜빡이다가
로키
불렀음
로키는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하-하하 작게 끊어 웃었음. 그저 이름을 불린 것 뿐인데 호흡까지 거칠어짐. 토르는 손을 올려 동요하는 남자의 눈가를 쓸었음
로키, 왜 울지?
계속 말해줘, 내 이름
로키
눈물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음. 로키는 이상한 남자였음. 화를 내고 웃고 울고 아주 멋대로임
본인이 말했듯 정말 변덕적이었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변화에 토르는 묻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었음에도 떠올리지 못했음
네가 우니까 기분이 이상하구나
...어떻게?
그냥, 뭔가 마음이 좀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림. 로키는 큭큭 웃었음
나중에 또 올게
사라지는 로키를 보며 잠깐 눈을 깜빡이던 토르는 손으로 허공을 휘젓다가 걸리는게 없자 팔을 내리고 눈을 감았음. 아직 이마를 쓸어주던 감촉이 피부에 남아있음. 어쩐지 잠이 잘 올 것 같았음
다음 날, 눈을 뜬 토르는 외출 준비를 마친 조나단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음
평소랑 달리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잘 자길래 안 깨웠다고 함. 로키의 마법은 정말 대단했음. 토르는 뻗친 금발을 손으로 빗으며 큼- 소리를 냈음. 조나단은 조합에 양젖 가격 동결에 대해 항의하러 간다고 말하고 문을 염. 토르는 그가 시내로 나간 동안 마굿간으로 가서 말들을 보살핌
아마도 5년 정도, 특별한 사건이 터지지 않는 이상 조나단은 아마 그 정도 살 것임. 토르는 사신이라도 된 것 마냥 사람의 수명을 계산하는 것에 익숙해졌음. 5년 정도 노인이 보살피다가 다시 떠날 생각임. 손자를 사랑하는 괴팍한 노인이 갈구하는 애정은 우연히도 토르가 줄 수 있는 것이었음
해가 기울기 전에 양들을 울타리 안으로 몰아 넣고 햄과 빵을 꺼냄. 데운 양젖과 2인분의 식사를 준비해둔 토르는 소파에 앉아 찬장 위를 바라보았음. 짚으로 꼰 노끈에 묶인 갈색 봉투가 가지런히 놓여 있음. 꺼내지 않은 지 1년이 넘었는데 그럭저럭 견딜만함. 인간처럼 무뎌지는 법을 학습한 것일까
가스등이 가물가물해져서 충전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벌써 9시임. 토르는 인상을 썼음. 조나단은 분명 저녁을 먹기 전에 돌아온다고 했음. 노인은 약속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음. 토르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감. 낡은 포트 트럭은 그가 몰고 나갔지만 토르에겐 하등 문제되지 않았음
시내는 한산했음. 정부의 지원이 적은 지방에서도 도시급도 안되는 도시는 다 이랬음. 네온싸인으로 가득한 뉴욕과 달리 2차대전이 끝나고 2년이 흘렀어도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음. 조합은 문이 닫혀 있었음. 6시가 되면 닫으니 어쩔 수 없음. 그래서 조나단이 자주 들르던 술집으로 감
술집엔 너댓 무리의 손남 밖에 없었음. 한 켠에 앉아서 맥주를 홀짝이는 젊은 세 남자는 토르도 익히 아는 놈들이었음. 손버릇 나쁘고 평이 안좋은 불량배들, 얼마전엔 15살 어린 소녀를 건드리려 했다지- 토르는 눈매를 좁히고 그들에게 다가갔음. 남자들은 다가오는 토르를 보며 킬킬 웃었음
치매 노인은 어디다 두고 혼자 다녀?
내가 그 얼굴에 그 몸매였으면 하루에 한 번 여자 갈아치웠겠다!
혹시 고자 아냐?
그것도 아니면 혹시 뒤로 노나?
저속한 시비를 걸며 낄낄거리는 남자들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가볍게 쳐줌. 탕- 소리가 났고 맥주잔이 튀어 올라 얼굴을 때리자 다들 화들짝 놀람
토르는 늘 과묵했음. 시비를 걸어도 무시했고 그렇다고 시비 이상의 진도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세서 시도를 못했음. 오늘도 평소와 다를바 없이 '말로만' 나불거렸는데 반응이 있을 줄이야. 토르는 테이블에 올려진 철제 안주접시를 한 손으로 우그러트리며 조나단을 봤는지 정중하게 물었음
풍겨나오는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라 셋은 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음. 땅투기꾼들이랑 커피가게 앞에서 옥신각신 하는 걸 봤다고 함. 그들의 거처인 빌딩까지 알려줌. 토르는 빙긋 웃으며 고맙네- 사고치지 말고 조용히들 지내게, 말하고 주먹을 펴서 야구공 모양으로 변한 철제 접시를 돌려줌
빌딩으로 들어가자 경비가 막아섬. 토르는 한손으로 그의 가슴을 밈. 덩치 큰 뚱뚱한 남자가 속절없이 밀려나자 당황해 지시봉으로 내려침. 토르는 부서진 지시봉을 멍하니 보는 경비를 뒤로한 채 유유히 안으로 들어감. 밝은 귀로 조나단의 목소리를 찾았음. 당장 보내달라며 악을 쓰는데 아주 정정함
문이나 벽 따위 장애물 수준도 안되었음. 무슨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볍게 걷는데 가로막는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 묶여 있는 조나단이나 양복입은 고상한 남자나 건달들이나 똑같이 입을 떡 벌렸음. 당신이 도날드 블레이크요? 놀란 투기꾼이 묻자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음
투기꾼들이 당황할만 했음. 원래 계획은 조나단을 죽이고 도날드에게 덮어 씌울 계획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쳐들어와서 으르렁거리는 맹수같은 남자가 손자였다니. 아니 그보다 먼저 같은 인간인지조차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이해불가능한 힘임. 건달은 당황했지만 계획대로 조나단을 죽이려함
투기꾼이 잠깐- 하면서 막으려 했으나 칼을 든 손이 먼저 움직였음. 조나단은 눈을 감았음. 다음 순간 건달은 손을 감싸고 바닥에 쓰러짐. 토르가 던진 문고리가 떨어진 칼과 함께 바닥을 뒹굼. 팔! 내 팔이 부러졌어! 악을 쓰는데 토르는 입을 비죽 내밈. 시끄럽소, 좀 진정하시오. 여유있게 투덜거림
토르는 진심으로 으르렁거리며 다시 한 번 이런일이 생겼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고 다들 고개를 숙이며 설설 기었음. 다른 건달이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고 하자 겉옷을 벌리고 아주 표적이 되어줌. 질린 남자는 총을 바닥에 떨어트림. 토르는 조나단의 결박을 풀고 함께 빌딩 밖으로 나옴
조나단은 말없이 투덜거렸음. 놈들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둥, 묶인 팔이 너무 아프다는 둥, 토르의 비정상적인 힘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피했음. 그것은 배려라기보다 현실도피에 가까운 행동이라 토르는 씁쓸하게 웃었음. 집으로 가요, 조나단. 도날드가 되어 포트 트럭을 몰고 돌아감
사고 후로 며칠간 조용히 지냈음. 양복쟁이들은 찾아오지 않았고 시내에서도 시비를 걸리지 않음. 이대로 평온한 하루가 계속될 줄 알았음
조나단이 쓰러짐. 누구에게 맞거나 당한게 아니었음. 그는 당시에도 최고령 축에 속하는 72세였음. 토르는 그가 심장을 자주 움켜쥐는 것을 봐왔음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심장마비는 아니었음. 그저 늙었고, 평생 힘든 농장일을 해왔으며 죽음의 위협까지 당했으니 어쩔 수 없었음. 조나단은 침대에 누워 약을 먹었음. 투덜거리며 일을 할 수 있다 고집했지만 토르가 엄하게 금지시켰음. 스스로도 본인 상태에 대해 느끼는바가 있었는지 말을 들었음
오랜만에 로키가 찾아옴. 토르는 반색하며 맞이함. 로키는 의문을 표하다가 자리에 누운 조나단을 보고 감을 잡음. 이 인간을 도와 달라는거야? 로키가 묻자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음. 네 마법이라면 어떻게든... 로키는 혀를 찼음. 마법은 만능이 아니야, 게다가 이자는 인간이고. 흠, 오래살았네?
이쯤에서 슬슬 갈 때가 된거지. 토르가 인상을 썼음. 어떻게든 살릴 길이 있다면 죽음을 합리화할 순 없어. 단호하게 말함. 로키는 코웃음을 치며 끙끙 앓으며 잠든 조나단의 이마에 손을 얹었음
뭐 네 말이 맞을수도 있겠군. 그것도 대상이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어야 겠지만
토르는 깜짝 놀람
죽음을 바라고 있다고?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군.
토르는 허허 웃으며 손바닥으로 입가를 쓸었음. 로키는 토르의 이마에도 손을 올렸음
뭐야, 너도 죽이고 싶은 인간이 있잖아. 왜 참았지?
조나단을 구하기 위해 쳐들어간 빌딩에서 본 건달들을 말하는 것이었음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 제인 어쩌구하는 여자가 아주 단단히 세뇌를 해놓으셨군. 토르, 너는 강해. 솔직히 말해서 네가 작정하고 덤비면 난 결코 이길 수 없어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텐데
그 여자에게 얽혀있는게 불쌍해서 그래 그러니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봐
로키가 뱀처럼 속삭였음
토르는 제 귓가에 속삭이는 로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음.
난 너도 죽이지 않아, 그만하지.
로키는 기분이 상했는지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났음.
어쨌든 할 말은 했어, 이자는 곧 죽겠군
그렇군
하루살이에게 애정을 주는 건 슬슬 그만두는게 어때
토르는 대답없이 조나단의 손목을 잡았음
멍청한 토르 오딘슨
로키는 한숨을 쉬며 손을 움직여 조나단의 얼굴을 쓸었음. 헉헉거리던 숨소리가 편하게 줄어듬
갈 때까지 큰 고통은 없을거야
고맙네, 로키
...죽음을 늦추진 못해
충분해
토르는 환하게 웃으며 로키를 등을 툭툭 쳤음. 과거의 형도 어린 동생의 등을 이런 식으로 두드려 주었음
조나단은 조금씩 쇄약해졌음. 토르는 끈질기게 그의 곁을 지켰음. 양젖을 짜는 등 농장일도 계속함. 가끔 로키는 타이밍을 못 맞추고 내려왔을때 미개한 개미가 만든 투박한 흔들의자에 앉아 토르가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음. 손발을 착착 움직여 열심히 짚단을 나르고 바닥을 쓸고 말갈기를 빗김
아스가르드인의 체력이라지만 아랫것들이나 하는 허드렛일이었음. 로키는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말리진 않음. 이 또한 여흥에 불과하리라는 편한 마음가짐임. 몇만년을 살 둘에게 nn년따위 먼지보다도 가치가 없었음. 그리고 이번 인간은 토르가 천박..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생각보다 거슬리지 않음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밤, 조나단은 숨을 허덕였음. 토르는 본능적으로 오늘이 그의 마지막날임을 깨달음. 우연인지 맞춘건지 로키도 뒤에 앉에 지켜봄. 토르는 조나단의 마른 손목을 잡았음
도날드
말해요
강요해서 미안했네, 나는 그 아이가 떠난걸... 알았어 그래도 인정하지 못했어
토르는 말없이 조나단의 팔목을 쓸다가 제 손 위를 덮어오는 작은손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음. 한 소년이 토르의 손등을 잡더니 전처럼 검지를 세워 쉿- 소리를 냄
할아버지
...도날드
소년, 도날드는 할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천진하게 말을 건넸음. 조나단은 환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음
앙상하게 마른 손에서 맥박이 사라지자 침대 매트리스에 이마를 올리고 한숨을 쉬었음. 이런 마지막은 처음이었음. 사랑하는 삶은 행복이었지만 끝은 늘 고통과 공허함으로 몸서리쳤었는데. 노인의 시신을 앞에 두고 토르는 슬퍼서가 아닌 행복해서 울었음
로키, 고마워
대가는 비싸
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