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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blue soldier 3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샤아 아즈나블 X 아무로 레이

 

 

 

 

 

 

 

 

 

폭풍같이 몰아쳤던 ‘그 일’ 직후 샤아는 말 한마디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누운 채 희미한 눈으로 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무로는 그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사과하거나 최소한 후회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줄 줄 알았다. 5분도 안 되어 돌아온 샤아의 손에는 시트와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기진맥진한 아무로를 들어 테이블 옆 의자에 앉혀 두고 침대를 정리했다. 체액으로 엉망이 된 시트를 벗기고 새 시트를 깐 뒤 다시 아무로를 들어 침대에 눕혔다. 옷을 갈아입히면서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 무슨 말이라도 해봐.”

 

침묵을 견디다 못한 아무로가 먼저 운을 띄웠다. 그러자 그의 목에 체온 패치를 붙이던 샤아가 고개를 돌렸다.

 

“역시 세 번으론 모자랐나?”

 

그 말이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아무로는 상황에 맞지 않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샤아는 아무로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보다 괜찮군. 열이 오르진 않을까 걱정했네.”

“샤아.”

“앞으로도 힘들면 말하게. 도와주지.”

“작작 해라!”

 

뻔뻔하게 나가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화를 내는 상대를 대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왜 그런 짓을… 어째서…”

 

그는 패치를 떼서 자세한 온도를 살폈다. 별다른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는지 플라스틱 박스에 담아 협탁 서랍에 넣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이해는 하고 있나?”

 

끈질기게 대답을 구하는 아무로의 왼손을 끌어당겨 느슨해진 붕대를 단단하게 고정해주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드디어 무거운 입이 열렸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자위를 도왔지.”

 

직설적인 단어 선택에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당신과 내가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잖아.”

“그럼 묻겠다.”

 

그는 갑자기 아무로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입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푸른 눈은 그렇지 않았다. 눈동자가 타는 것처럼 일렁였다.

 

“우리는 무슨 관계지?”

“뭐…?”

“적, 친우, 적, 우주에서 마지막까지 싸웠다. 그 해안가에서도 너는 칼을 휘둘렀지. 몸이 낫는다면… 다시 시도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아무로, 나는 다시는 너와 싸우지 않는다. 절대로.”

“잠깐, 샤아.”

 

그는 당황한 아무로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나에게 친우도 적도 아니야.”

 

순간 아무로는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친우도 적도 아니다. 단순히 관계의 단절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이어진 둘의 장렬한 역사를 아무것도 아니게 취급하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이가 갈리는 선언이었다.

 

“…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뭐야?”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샤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로는 그의 행동에서 찾을 필요가 없는 부정적인 반응을 읽어내 억지로 상처 받고 있었다. 샤아는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이 영원한 거절 같았다.

 

“나는 뭐냐고! 샤아! 대답해라!”

 

아무로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분노했다. 아픈 부위를 추스른다는 생각도 없었다. 한번 파열되었던 허벅지 근육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 강한 통증을 일으켰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목으로 몸을 지탱하자 붕대 위로 피가 번졌다. 그 모습을 보고 샤아가 급히 손을 내밀었으나 아무로는 팔을 억지로 휘둘러 거칠게 쳐냈다. 샤아는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이미 깨닫고 있지 않나. 우수한 뉴타입인 자네가 모를 리 없다.”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아무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로는 샤아를 올려다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아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입꼬리가 우그러졌다. 얼핏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심적인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 정확하게 확신할 수 없었다.

 

“… 비참하기 이를 데 없군.”

 

그는 자조적으로 웃더니 씹어 뱉듯이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 같아서…”

 

아무로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을 고백하면서 제 치부를 보이는 것처럼 반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샤아 아즈나블은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침대 옆에 선 그는 아무로의 시선을 피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몸이 조금씩 휘청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조금 젓더니 제 말을 정정했다.

 

“아니. 사랑한다.”

 

설마 정말로 ‘사랑’이라는 낯부끄러운 단어를 꺼낼 줄은 몰랐다. 우수한 뉴타입인 아무로가 깨닫지 못할 리 없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감각이 아무리 진실을 외칠지라도 아무로는 계속해서 다른 가능성을 의심해야 했다. 사랑? 착각한 것이다.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애정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는 마이너스적 의식의 집합체일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든 순간…”

 

샤아 아즈나블은 사랑하는 라라아를 앗아간 아무로 레이를 죽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한 오래된 집착에는 여러 감정이 담길 수 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다. 유기적 화학작용에 불과한 호르몬의 반응, 오랜 세월 한 대상을 향해 증오와 원망의 불길을 태워왔다면 충분히 착각할 수 있다. 그랬기에 아무로는 남자의 진심을 보면서도, 느끼면서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적은 바야흐로 적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

 

샤아는 결국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모든 것을 던져버린 패배자의 미소였다. 푸른 눈이 불쌍한 정도로 젖어 있었다.

 

“이제 만족하나?”

 

말투의 깃든 책망과 별개로 눈빛은 두려움과 기대로 얼룩져 있었다.

 

“…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야.”

 

아무로는 고개를 돌리고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얼굴의 한쪽 면으로 강렬한 시선이 쏟아졌다.

 

“난… 그녀를… 라라아를 죽였다. 잘 생각해봐라. 우리는 쭉 대립해왔어. 잠시 손을 잡은 적도 있었지만 그건 결국 적이라는 사실을 공고히 굳히게 된 과정에 불과했다. 많은 일이 있었어도 우리 사이에 그런 달콤한 감정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과거를 짚어가며 풀어 놓는 이야기는 오래된 상처를 헤집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로가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것은 샤아의 ‘착각’을 되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머저리 취급할 셈이군.”

 

남자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이 생기면 웃음으로 감정을 숨기고 원하는 방향으로 교묘하게 유도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의는 적당히 즐기면서 넘어가는 남자였다. 아무로는 소름이 돋았다. 진심으로 화를 내는 샤아 아즈나블은 참으로 그 답게도 화염처럼 타오르듯 상대를 규탄하곤 했다. 얼마 전 우주에서처럼 말이다. 샤아는 넌더리 난다는 표정으로 한 음절씩 씹듯 뱉어냈다.

 

“자네의 상냥함의 대상에 왜 나는 포함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착각…”

“착각이라. 네 입안을 휘젓고, 가슴을 주무르고, 엉덩이를 벌려서 내 것을 집어넣고 싶은 이런 욕망을 착각이라 칭한다면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는 게 아닌지.”

“뭐…!”

 

아무로는 시뻘게진 얼굴로 입을 조금 벌렸다. 샤아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아무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지금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로는 그가 내뱉은 노골적인 언어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사실보다 언제나 우아하던 남자가 음담패설 수준의 천박한 단어를 입 밖에 냈다는 것에 좀 더 충격을 받았다.

 

“뭘 그렇게 놀라나. 새벽에 ‘그런 짓’도 해놓고.”

“그런 짓을 ‘당한’ 거겠지!”

“영광스럽게도 매우 즐겨주시던걸.”

“으윽!”

 

빈정거리는 샤아를 향해 아무로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세 번이나 샤아의 손에 토정했다. 단순 생리현상이라 우기기엔 과할 정도로 흥분했다는 사실을 그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오랫동안 자위를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해도 남자의 손에 붙들려 끝까지 달할 동안 아무로는 조금도 혐오감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샤아의 부푼 성기가 제 등허리에 달라붙는 감촉을 느끼면서도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상한 일이야.”

 

샤아는 길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마의 흉터가 드러났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심으로 거부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

 

아무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아무로. 솔직하게 말해라.”

“무엇을…”

 

샤아는 돌아간 아무로의 얼굴을 억지로 돌려 시선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외면하지 말고.”

 

매트리스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샤아가 침대 위로 올라온 것이다. 가지런한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왔다. 얼음이 뚝뚝 흐르는 표정으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이율배반적인 남자가 대답을 구했다.

 

“내가 끔찍하고 싫다면 그렇다고 말해라. 아니, 말하기 힘들다면 감정이라도 전해다오. 자네의 능력이라면 아무리 덜떨어진 나라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아무로는 눈앞의 화마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치기 어린 소년 시절 건담을 몰고 사막으로 도망갔을 때보다 더했다. 그때는 적어도 화이트 베이스 크루들에게 자신의 원망과 분노를 각인시키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로는 살인적인 시선을 보내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논리로 그의 ‘사랑’이 잘못되었음을 설득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마음이 폭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이리저리 휩쓸렸다.

 

“왜 망설이지? 간단한 흑백논리지 않나. 좋다. 싫다.”

 

아무로는 거의 매트 끝까지 밀려났다. 그는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사람처럼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샤아는 무릎을 꿇고 그런 아무로의 어깨를 꽉 쥐더니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손놀림이 거칠지 않아 오히려 더 초조해졌다. 아무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어 드문드문 말했다.

 

“샤아, 난… 당신이 끔찍하다든지 싫다든지… 별로 그렇지는 않아. 다만 그…런 행위는 거북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적이었고…”

 

노력하는 모습은 가상했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호소력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렇다면 지금은?”

“너무 집요하게 굴고 있는데… 일단 어깨 좀.”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어깨를 단단히 잡은 양손이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꿈쩍도 안 했다.

 

“사춘기 소년처럼 사랑을 고백하도록 몰아 붙여놓고 이제 와서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안달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샤아는 단호했다. 자존심을 내던지고 초라한 본심을 드러낸 그에겐 이 상황을 대충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래. 내 너덜너덜한 속내를 감상하니 소감이 어떠신가?”

 

샤아가 잔잔하게 비꼬며 물었다. ‘너덜너덜한 건 내 쪽이라고!’ 아무로는 버럭 외치고 싶었다. 사랑이라니, 이 남자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감정의 자각도 그러하다.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샤아는 아무로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조금 빼고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특히 오른쪽 어깨를 만지는 왼손은 좀 더 진득했다.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의 행위는 매우 다정했고 또 부드러웠다. 동그란 적갈색 머리통이 아래를 향했다.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아무로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샤아.”

 

이렇게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 알겠어. 당신의 그… 마음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대답은… 시간을 좀 줘.”

 

남자의 무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로는 복잡한 심경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철저히 통감하고 있었다. 첫 산책에 이어 눈앞에 선택지가 디밀어지자 또 보류하고 만다. 아무로는 샤아가 화를 내리라 추측했다. 그러나 의외로 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다리지.”

 

놀랍게도 샤아는 불평 한마디 없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아무로가 알기로 그는 자신에 한해선 별로 참을성이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런 면도 전과 달라졌다. 아무로는 여태껏 자신의 삶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샤아 아즈나블에 의해, 그가 행한 흔적에 의해 규정되어 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변해버린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수록 과거의 그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샤아 아즈나블을 막기 위해 존재하던 아무로 레이도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영양가 없는 추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덤처럼 따라붙었다.

 

“아무로.”

 

샤아가 오른손을 올려 아무로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무로는 흠칫 놀랐으나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의 준비를 하며 곧 다가올 선언을 기다렸다. 미친 소리처럼 들릴 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할 것 같았다.

 

“키스는 괜찮겠지.”

“… 역시 손해 보는 걸 싫어하는군.”

“불편하면 밀어내게.”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눈을 감자 거부할 새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아무로는 목석처럼 굳어 그의 키스를 받았다. 혀끝이 조금씩 전진해 말라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닿았다가 살짝 떨어지고 이내 다시 침입해 느릿하게 핥고, 속을 맛보기보다 겉을 가지고 놀며 샤아는 마치 탐색전처럼 느릿하게 행위를 이어갔다.

 

‘그 답지 않다.’ 아무로는 점점 피곤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멍하게 생각했다. 자비로움의 이면에 잔악함을 숨기고 있는 남자가 이따위 낯간지러운 입맞춤이라니. 그때 이 사이로 침입한 혀가 아무로의 혀를 질척하게 꼬아 얽더니 곧장 떨어져 나갔다. 허전한 느낌에 슬그머니 눈을 뜨자 샤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상당히 뻣뻣하잖아. 애인들이 불평하지 않던가?”

“… 닥쳐라.”

“하하.”

 

가볍게 웃던 샤아가 다시 입술을 붙였다. 아무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감은 눈을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붙어 있는 금색 속눈썹을 만져보고 싶었다. 손이 멀쩡했으면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음… 샤아, 잠…깐.”

 

갑자기 아무로가 어깨를 틀며 머리를 뒤로 뺐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제 가슴을 붙잡고 있는 오른손을 노려보았다.

 

“이건 뭐냐?”

“실례했다. 아무래도 습관이라서 말이야.”

“…… 그냥 당신 좋다는 여자를 찾아가지 그래? 딱딱한 남자보다 부드러운 여자 쪽이 좋잖아.”

 

그러자 샤아가 가슴을 노골적으로 주물렀다. 아무로는 헉!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만질 게 왜 없나. 여기. 촉감부터 탄력까지 아주 좋아.”

 

경악으로 입을 벌린 아무로를 보며 샤아는 짓궂은 미소를 보였다. 기가 막힐 정도로 가벼운 표정이었다.

 

“잘도 그런 미친 소리를…”

“사실인 걸 어떡하나. 자네 몸은 최고야. 체향이나 피부의 감촉도 그렇지만 이런 민감한 반응도 빼놓을 수 없지.”

 

악! 아무로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샤아는 빙긋 웃으며 짧게 버드 키스를 하더니 입술을 떼고 귓가에 속삭였다.

 

“좋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더니 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아무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행위를 허락한 건 자신이지만 이렇게 길어지니 역시 껄끄러웠다. 그래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꼭 세뇌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키스를 받다가 문득 시퍼런 안광이 저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무로는 질 게 뻔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감고 힘을 뺐다. 그것이 신호였다. 뜨거운 혀가 입술을 뚫고 단번에 안으로 침입했다. 적당히 난폭하고 강압적인, 샤아 아즈나블 다운 입맞춤이었다.

 

 

 

 

***

 

 

 

 

아무로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철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칸쿤은 겨울에도 따뜻해 눈이 내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우기가 시작되는 가을은 폭풍과 허리케인의 위험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간밤에 바람이 거셌던 것도 계절의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늦가을, 철새들은 여기보다 더 따뜻한 남쪽으로 갈 것이다. 지구가 오염되어 기후의 변화가 왔지만 그래도 남쪽 나라는 여전히 따뜻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서늘한 바람이 들어와 방 안의 공기를 순환시켰다. 바깥에서 무엇인가 탕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붕에 올라간 샤아가 효율이 낮은 태양전지 방열판을 추려내 아래로 던지고 있었다. 필요한 소비 전력에 비해 패널의 수가 많아 비효율적이었다. 그대로 방치하면 저공비행으로 해안가를 순찰하는 드론의 감시망에 걸릴 염려가 있어 최소한만 남긴 채 제거하는 방법을 택했다.

 

탕- 탕-

 

일정 간격으로 울리는 소음을 들으며 아무로는 샤아와의 키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좋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다.’ 어쩌다가 저 남자와 이런 미묘한 관계가 되어버렸는지, 상황을 떠올릴수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해안가의 포트 안에서 그가 뭐라고 했든 듣지 말고 목을 찔러 버렸어야 했다.

 

<아무로.>

 

아무로가 감정적으로 동요할 때마다 남자는 귀신같이 알아챈다. 그런 주제에 뉴타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럴 리가 없었다. 샤아 아즈나블은 뉴타입이었다. 전투에 발휘하는 능력이 아무로보다 떨어질 뿐이지, 그의 감각은 일반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욕심 많은 사내로서는 만족하지 못할 어중간한 각성이었겠지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

 

협탁에 올려놓은 통신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니. 괜찮아.”

 

아무로는 다 포기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거의 끝났다. 식사 준비는 다 되어있으니 잠시 기다려라.>

 

다시 못이 뽑히고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당신 상처는 괜찮은 거야?”

 

늦어도 한참 늦은 질문이었다. 샤아는 방열판 두어 개를 아래로 내던지며 대답했다.

 

<누구와 달리 푹 쉬었으니까.>

“나도 누워있기만 했는데.”

<간호사가 약을 바꿨더군.>

“역시 그랬나. 보름이 지나도 호흡이 힘들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어.”

<연방도 참 대단해. 자네의 의욕 부진은 그들의 작품일지도 모르겠군.>

“너무 나간 거 아냐?”

<자네가 샤이안에 있을 때 연구에 협력하면서 받은 실험의 세부적인 정보는 아직도 불문이더군. 나나이도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로 철통 같은 보안이었어. 딱히 과한 추측이라고 할 순 없다.>

“뉴타입 연구라면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

<강화인간을 말하는 건가.>

“…로자미아 비담이 오거스트 연구소 출신이었어. 시기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마지막 방열판이 바닥으로 던져졌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작업을 마쳤으니 내려가겠다는 짧은 전언을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겼다. 아무로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숨 한번 흐트러트리지 않은 그가 독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점심 메뉴는 무엇일지 속 편한 상상을 하며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 스콜이 올 것이라는 기상특보를 들었다.

 

아무로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양손을 들어 올렸다. 붕대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오른쪽 손가락은 의지대로 움직였고 부상이 심한 왼손은 아직 검지와 약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양쪽 손 다 통증은 많이 가라앉았다.

 

창밖을 보며 철새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샤아가 음식이 담긴 베드 트레이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습도가 높으니 붕대를 한 번 더 갈도록 하지.”

 

샤아는 베드 트레이를 침대에 올려 두고 협탁 서랍을 열어 약품의 수량을 체크했다. 오늘 메뉴는 스튜였다. 아무로가 그릇을 노려보고 있자 샤아가 재료를 알려 주었다. 브로콜리와 닭고기. 김이 모락모락 올라 아주 맛있어 보였다. 아무로는 붕대가 감긴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른쪽 손가락에 감각이 많이 돌아왔어.”

“그렇지 않아도 며칠 뒤에 부목을 떼려고 했다. 호흡도 좋아졌으니 슬슬 재활을 시작해도 되겠어. 단 허벅지 근육이 아직 덜 붙은 상태니 조심하고.”

 

샤아는 새 붕대를 협탁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붕대에 박혀 있던 제습제를 빼내 서랍 안에 착착 정리해 넣고 알코올 솜을 정돈하는 손길은 프로의 그것이었다. 아무로는 멍하니 손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툭 내뱉었다.

 

“테러로 쿠에르 파커의 아내가 죽었다고 들었어.”

 

샤아는 잠깐 멈칫했던 손을 이내 다시 움직였다. 아무로가 계속 말했다.

 

“그자가 무사하다고 했었지?”

“물론이다. 그는 제 앞길을 가릴 줄 아는 남자더군. 연방에 의심받지 않도록 깔끔하게 잘 처신했어. 원래 기자들이 눈속임에 강하지. 혹시 그자의 아내와 얽힌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나?”

“시기를 따져보면 루나2, 자브로, 폰 브라운 공장 셋 중 하나겠지. 당신이 네오지온 총수 시절 일으킨 테러라면 범위가 좁다.”

“… 루나2다.”

“그렇다면 핵병기 보관소 근처인가. 합선으로 통신 시설들이 폭발했다고 발표했던 내부 숙청 사건이겠네. 레프시스 준위, 라만 중위, 돌로레스 소위….”

“돌로레스.”

“아아… 라사에서 열린 재판이 기억난다. 딸이 하나 있었던…”

 

아무로는 뒤통수를 침대 헤드에 툭 가볍게 대며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참 죄가 깊은 남자다.”

“동감이야.”

“말 한번 잘하잖아.”

 

아무로는 피식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들리던 철새 울음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 공기가 차가웠다. 곧 스콜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샤아는 아무로의 손을 당겨와 붕대를 풀었다.

 

“쿠에르 파커에게 내가 조사한 내용과 자네에게 ‘받은’ 연방의 폭거 정황이 기록된 아카이브 주소를 넘겼어. 이틀 전에 공개되도록 맞춰놨었으니 슬슬 고민을 끝낼 시간이겠군.”

“내 클라우드를 해킹했나?”

“해킹이라고 할 만큼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었다. 개혁을 목표로 했으면 보안도 이중삼중으로 신경 썼어야지. 여러모로 허술했어.”

“검증이 끝난 내용은 사설 업체에 맡겼는데…”

“아크란 컴퍼니는 네오지온 계열사였다.”

“아! 잘났네. 당신네들과 협력하는 업체는 홍보 페이지에 제대로 표시해 뒀으면 좋았잖아. 알아서 피했을 텐데.”

“중요한 정보라면 여러 군데 분산시켜 보관함이 기본이지.”

“정보부만 견제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무엇보다 네오지온 총수가 연방의 높으신 나리들과 그렇게 사이가 좋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어스 노이드의 썩음을 부르짖던 다이쿤께서 잘도 그들과 손을 잡았잖아.”

 

티격태격 주고받는 동안에도 샤아의 손은 멈출 줄 몰랐다. 격하게 움직인 탓에 덧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왼손의 상처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샤아는 피가 약간 비쳐 나온 터진 실밥 주위를 플라스틱 핀볼로 고정하고 항생제를 뿌렸다. 얼기설기 기운 자국이 거슬린다면 상처가 아물고 난 뒤 새로운 피부를 덧씌우면 된다. 그러나 아무로는 몸에 남은 자국을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놈들과 몇 차례 회담을 가진 적 있지만 모두 액시즈의 거래를 위해서였다. 연방과 손잡았던 적은 없었어. 잘 알 텐데도 굳이 덧붙이는 걸 보니 배신감이 꽤 컸나 보군.”

“글쎄, 연방에 소속된 군인이라고 해도… 애초에 배신당했다고 느낄 만큼 상부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던지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당연히 나에게 말이다.”

“……”

 

아무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샤아는 가끔 이런 식으로 반격을 가하곤 했다. 썩어빠진 윗선의 행태는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샤아 아즈나블은 달랐다. 그는 연방의 반대편에 서서 그들과 다른 입장을 고수했다. 꾸준히 그렇게 행동했기에, 뒷거래 정황을 파악한 아무로는 그에게 깊이 실망했었다.

 

“그렇다곤 해도 잘도 기체를 완성시켰어. 파일럿의 실력을 한계까지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더니 과연… 출력도 성능도 훌륭했다. 폰 브라운을 확실하게 부숴버렸어야 했는데.”

“복기하기엔 너무 가슴 아픈 패배이지 않아? 테러가 아쉽다는 말을 꺼낼 정도면 처음부터 사이코 프레임 정보를 넘기지 말았어야지. 그런 주제에 잘도 뉴건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군.”

“후후. 자네의 비난에 동요하기에는 나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저 과거를 되새기는 것뿐이야. 이제는 모빌 슈트를 탈 일도 없으니 오히려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늙은이 같은 소리나 지껄이고…”

 

칙칙- 고정용 스프레이가 뿌려졌다. 아무로는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는 오른손을 들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물감이 약간 느껴졌으나 큰 무리는 없었다. 제대로 낫는다면 모빌 슈트를 조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다시 조종간을 잡을 날이 올진 미지수였지만.

 

“벨류트도 없이 대기권 돌입에 성공한 건 놀라웠다.”

 

샤아는 아무로의 허벅지에 근육 주사를 놓으며 무심하게 칭찬했다.

 

“아. 그건 나도 예상외였어. 뉴건담이 튼튼한 신소재를 채택하긴 했어도 마찰열을 차단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벨류트 캡슐이나 냉각 필드는… 사실 고려조차 안 했어. 보조 버니어에 자리가 있었다면 차라리 판넬을 하나라도 더 달 생각이었거든.”

“… 그랬나.”

생각해보면 꽤 섬뜩한 이야기였다. 샤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사를 놓은 자리에 알코올 솜을 문질렀다. 초반에는 이런 식의 치료를 위한 접촉도 민망해하던 그는 시간이 지나자 아무렇지 않게 손길을 받아들였다. 아무로는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당신 말대로 사이코 프레임의 기적일지도…”

 

과학과 거리가 먼 단어는 대체로 아무로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기적’이 아니면 둘의 생존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둘은 0과 1로 규정하는 우주세기의 과학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있었다.

 

“불편한 부분이라도?”

 

샤아가 옷매무새를 정돈해주며 말했다. 아무로는 고개를 저었다.

 

“저녁에 잠깐 밖에 다녀올 생각인데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 말해.”

 

슬슬 식료품과 생활 전반에 필요한 잡다한 물품들을 공수할 시기가 되었다. 샤아가 손목시계를 보고 있자 아무로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 내 옷과 속옷을 한 치수 아래로 구해주면 안 되나… 그리고 속옷은 굳이 지금과 비슷한… 무늬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샤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로를 바라보았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사소한’ 불만 사항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잦은 스킨십으로 부끄러움의 역치가 올라간 덕분일지도 모른다.

 

“줄무늬를 고수하길래 자네의 미학이라고 생각했어.”

“속옷 무늬 따위에 무슨 그런 거창한 표현을. 단순히 군에서 보급되는 물품 중 하나였을 뿐이야. 그냥 평범한… 그러니까 대중적인 디자인이잖아.”

“음. 일반적이라. 나와는 기준이 좀 다르긴 하다만 일단 알겠네. 옷 사이즈는 예전 치수를 참고했는데 체중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니 아무래도 신경이 좀 쓰이는군… 어쨌든 고려하지.”

 

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로는 여태 몸을 뒤척이거나 일으킬 때마다 헐렁한 바지와 속옷이 자꾸 내려가는 것이 신경 쓰였다. 손이라도 멀쩡했으면 그때그때 정돈하고 말겠는데 혼자선 흘러내린 옷자락도 추스르지 못하는 상태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 샤아가 근육 주사를 놓으려고 바지를 내릴 때마다 그 사실이 상기되어 더욱 그랬다. 거기다 이 남자가 속옷 매대 앞에 서서 줄무늬만 골라 담는 사소한 장면을 상상하면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무로는 민망한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랐다. 샤아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뿌듯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뭐야 그 요상한 표정은.”

“자네가 이런저런 요구를 해와서 좋다는 생각을 했다.”

“좋을 것도 따로 있지. 당신은 가끔 이상한 부분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 상태가 되더라.”

“하하.”

 

샤아는 눈을 휘며 시원하게 웃었다. 옷 치수를 줄여달라고 한 게 저렇게까지 감격에 겨울 일인지 아무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태클을 걸어 그의 기분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그때, 기분 좋은 남자가 스푼을 내밀었다.

 

“그럼, 식사하지.”

 

아무로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음식은 언제나처럼 맛있었다.

 

 

 

 

***

 

 

 

 

샤아는 옷을 골라 담으며 어스 노이드들의 수준 낮은 취향을 불평하는 짧은 시간을 가졌다. 특히 속옷 코너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처음 들렀을 때는 옷의 디자인이나 기능 등을 평가할 여유가 없었기에 치수만 맞는다면 대충 쑤셔 담았었다. 줄무늬 트렁크를 집어 들고 그걸 입은 아무로를 상상하고 있는데 멀리서 두 여성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여기저기 기름때가 묻은 허름한 옷차림이었지만 눈에 띄는 외모는 쉽게 감춰지지 않는 법이다. 샤아는 챙을 깊이 누르며 옷가지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옷, 식재료, 시설물 보수를 위한 공구 등을 구식 전기 트럭 짐칸에 차곡차곡 실었다. 17년 된 트럭은 한번 충전하면 이틀도 못 달릴 정도로 전력 효율이 낮았다. 칸쿤 외곽의 원주민 마을들은 벌이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대부분이 20년 이상 된 오래된 전기차를 몰았다. 굳이 이런 구식 트럭을 고른 것도 눈에 띄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였다.

 

액시즈 쇼크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구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연방과 네오지온은 끊임없이 회의를 열며 서로의 의견을 개진했다. 지금으로선 네오지온쪽이 약세였다. 어찌 됐든 명분은 연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제공격을 감행한 쪽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따라온 결과를 책임져야만 한다. 물밑으로 치열한 정보전을 벌이고 있지만 글쎄, 샤아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네오지온측이 괴멸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분쟁으로 불필요한 피가 흐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얼마 전까지 그들을 이끌었던 스페이스 노이드의 희망은 평범한 타인이 되어 정국을 논한다. 

 

모자를 벗고 선글라스를 낀 샤아는 트럭을 몰고 재건되기 시작된 도심지를 달렸다. 아직 날이 환한 초저녁, 차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샤아는 조금씩 막히기 시작하는 도로 위에서 핸들을 두드리며 시간을 가늠했다.

 

다행히도 그럭저럭 예정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목적지는 우편집중국이었다. 갓길에 트럭을 주차하고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봉투를 들어 올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대신 우편집중국 앞에 설치된 수거용 박스를 사용했다. 샤아는 카드를 긋고 요금을 지불한 뒤 철컥 소리를 내며 열린 수거 박스에 봉투를 넣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 채 점점 멀어지는 갈색 봉투를 주시하다가 건물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트럭에 올랐다.

 

 

 

 

***

 

 

 

 

아무로는 침대에서 내려 홀로 방안을 돌아다니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샤아가 준비해둔 전완 목발은 손으로 체중을 지탱해야 했기에 아직은 사용하기 힘들었다. 오른쪽 다리에 힘을 덜 주고 멀쩡한 왼쪽 발에 체중을 실어 벽을 짚고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절뚝이는 모양새였지만 계속 누워만 있다가 몸을 일으켜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니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잘하면 밖으로 나가 복도를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 앞에 도착한 아무로는 인상을 팍 썼다. 손잡이를 돌릴 수가 없었다. 부목이 대어진 손은 손가락을 굽히지 못하도록 붕대로 두툼하게 감겨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동그란 철제 손잡이라니, 이 공장의 고용주는 직원 복지에 신경쓰는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래서야 화재라도 발생하면 꼼짝없이 타 죽겠군.”

 

투덜거리던 아무로는 벽을 짚고 창가를 향해 절뚝절뚝 걸어갔다. 창문 앞에 선 그는 양손을 집게처럼 모아 회색 커튼을 젖히고 손가락을 걸어 유리문을 열었다. 신선한 바람이 얼굴로 확 쏟아졌다. 기분이 좋았다.

 

밖을 바라보자 빨랫줄에 걸려 이리저리 휘날리는 옷가지와 침대 시트 따위가 보였다. 샤아는 참으로 부지런한 사내였다. 하루 걸러 나오는 환자의 옷과 침대보, 이불 등의 세탁에서부터 음식의 준비,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수발, 방 안의 환기를 시키고 가라앉은 먼지를 닦거나 바닥을 쓰는 등의 청소까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잘도 해냈다. 다이쿤가의 지배자로 태어난 남자가 어디서 이런 지식을 배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샤아라면 매뉴얼을 슬쩍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날아가겠는데.”

 

아무로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침대보는 집게로 고정되어 있었으나 예상보다 바람이 거칠었다. 샤아는 아마도 일을 보고 와서 세탁물을 걷을 요량이었던 것 같았다. 펄럭 펄럭 큰 소리를 내며 휘날리는 흰 천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오래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프린스 루퍼트의 고향 집, 정작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오지 않는 빛바랜 기억은 마당에 널려 있던 하얀 시트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장면이었다. 오래된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특별한 감상 없이 메마르게 박제되어 있었다.

 

고통이 가라앉고 몸이 편안해진 후로 기다렸다는 듯 온갖 상념이 밀려들었다. 샤아와 대결하기 위해 우주로 나가며 내팽개친 많은 이들의 얼굴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아무로는 눈을 뜨고 숨을 쉬는 지금이 진정 제대로 존재하는 삶인지 의문을 느끼던 참이었다.

 

틈을 보이자 보란 듯이 압박해오는 연방의 행태는 예상대로였다. 반평생 몸을 갈아가며 일했건만 예정된 결말은 연구소에 처박혀 모르모트 행이라니.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딱히 연방을 향해 분노를 불태우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뉴타입 실험 당시에 ‘어떤 조치’를 당한 게 아니냐는 샤아의 추측도 그럴싸해진다. 발화점 낮은 미지근한 울분이 정말로 ‘그런 조치’의 결과라면 아무로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대의니 명분이니 잠시 접어두고 개인의 고통에 방점을 찍는다면 당연히 복수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로는 자신의 망친 삶에 대한 미련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선택하고 싶었다.

 

“역시 이상한가.”

 

미래를 선택한다는 말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단 아무로에겐 그 미래가 좋든 나쁘든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일단 행동했으면 끝이 나쁘더라도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얼핏 보면 희망적이었지만, 깊이 파고들면 그 속은 차라리 염세적인 쪽에 가까웠다. 바라던 결과를 본 역사가 드물었기 때문이리라. 우습게도 그것은 샤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로처럼, 아니 아무로보다 훨씬 더 고생하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답은커녕 좌절만 겪은 사내였다. 그는 마음이 꺾여버렸다. 아무로도 그를 따라 전부 접어버리고 싶었다. 샤아의 행적을 좇아 여기까지 왔으니 특별히 이상한 생각도 아닐 것이다.

 

아크란 컴퍼니에 맡긴 자료는 아무로가 카라바 시절부터 모아 온 골든 리스트였다. 연방이 극비로 실행한 비인도적인 실험과 각종 테러를 묵인한 정황, 게릴라들과 손을 잡고 자금줄이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 등 광범위한 부패의 잔여물들이 사법 증거와 함께 담겨 있었다. 독립부대 론도 벨이 창립되었을 때 아무로는 리스트를 흔들어 개혁을 감행할 작정이었다. 샤아의 반란이 터져 흐지부지되었으나 리스트는 아직 건재했다.

 

처음에는 하사웨이를 통해 브라이트에게 넘길 생각을 했었다. 그는 기꺼이 나서 줄 것이다. 하지만 연방은 미라이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녀를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브라이트에게 무거운 짐을 지울 수는 없었다. 다음은 첸이었다. 그녀는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녀였으므로 아무로의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를 끌어들이는 행위는 거부가 용납되지 않는 상명하복과 다를 바 없었다. 론도 벨의 다른 동료들도 있었으나 그들도 실상 첸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어 어느덧 주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결국 아무로는 뉴건담을 타고 우주로 나오기 전에 아크란 컴퍼니에 자료를 맡기고 10년 후 모든 내용을 세상에 공개하겠다는 A+등급 위탁 계약을 맺었다. 본인의 죽음을 상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크란 컴퍼니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문을 닫더라도 티타늄 보관함에 담긴 리스트는 최우선으로 보호받는다. 네오지온 계열사라고 해도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들은 의뢰자가 아무로 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알아서도 안 된다. 보안회사들은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했다. 그것은 업계 불변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샤아는 알았지.”

 

엄밀히 따지자면 샤아는 아무로를 역추적해서 아크란 컴퍼니를 발견한 것이었으므로 루트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시일이 흘러 자연스럽게 개봉되는 것이 아닌, 도중에 계약을 파기하거나 첨삭 등의 작업이 필요하다면 아무로 본인이 사이드7 아크란 본사에 방문하더라도 보름간의 복잡한 인증 시스템을 거쳐야 했다. 단 ‘확인자’의 자격으로 열람은 가능했다. 

 

아무로는 아카이브에 정보를 보충하기 위해 샤아가 취했을 행동을 추론해보았다. 병원에서 아무로를 데리고 온 상태였으므로 지문과 안구 등을 통한 생체인증은 쉽게 통과했을 것이다. 귀찮은 서류 작업도 네오지온 계열사인 이상 간부용 특별 코드를 사용하면 간단히 해결되었다. 아무로는 기절한 자신의 눈을 뒤집어 망막을 스캔하고 피를 뽑아 DNA를 채취했을 샤아를 생각하니 조금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한참을 생각에 매몰된 채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자니 슬슬 몸이 떨려왔다. 바람이 갈수록 거칠어졌다. 아무로는 수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다가 창문을 닫았다. 커튼은 치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편안하게 밖을 보고 싶었다. 어쩌면 샤아가 탄 트럭이 들어오는 장면을 볼 수도 있겠다.

 

별로 넓지 않은 방이었지만 벽을 짚으며 느릿느릿 걷자니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침대에 도착했다. 전신이 축축했으나 몸이 아파 흘리는 땀과는 다르게 기분 좋은 발산이었다. 아무로는 침대에 올라 쿠션을 등에 받치고 편안하게 자세를 잡았다. 천천히 호흡을 정돈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헐떡이는 가슴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이렇게 여유를 만끽했던 게 언제였던가. 샤이안에서는 몸은 편할지언정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저택의 집사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모두 아무로를 감시하는 연방의 수족이었다. 간부 후보생들에게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뉴타입 교관 생활도 했었다. 정기적으로 연구소에 불려 가 피를 뽑히고 불편한 실험에 동원되었던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수가 적은 소중한 뉴타입 샘플이었으므로 목숨이 위험하다든지 후유증이 남는 등의 가혹한 행위는 없었다. 그래도 몇 년간 꾸준히 기니피그 취급을 당하다 보면 정신이 지치게 마련이다.

 

“붙잡히면 끝인가…”

 

아무로는 헤드에 뒤통수를 대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연방은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의 생존을 확인했다. 샤아의 말에 따르면 수색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붙잡힌다면 데이빗이 조합한 약은 장난으로 느껴질 수준의 불편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이코 프레임이란 미지의 기술을 받아들인 뉴타입을 그들이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도 연방의 치부는 10년 뒤에는 자연스럽게 공개된다. 아무로와 샤아는 공식적으로 행방불명 상태였으므로 상부에서 생존 사실을 확신하고 있더라도 대놓고 추적을 해오진 않을 것이다. 공개수사로 전환하기 위해선 생존 가능성을 인정해야 했다. 둘의 존재는 포커판의 조커와 다를 바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엔 리스크가 컸다. 

 

이대로 조용히 숨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열람’한 정보를 가지고 모습을 드러내 연방을 압박할 것인가. 추적을 피해 부평초처럼 떠도는 삶은 힘들다. 하지만 정체를 밝힌 뒤 당당히 맞서는 삶은 더욱 힘들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아무로는 전자를 택하고 싶었다. 도망치는 삶은 차라리 익숙했다.

 

그때, 기어코 시트 하나가 거센 바람에 휘말려 빨랫줄에서 떨어졌다. 둥글게 부풀기도 하며 자유분방한 모양으로 휙휙 변형되던 천은 순식간에 아무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얼핏 절벽 쪽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

 

곧 스콜이 내릴 것이다. 섬뜩한 남자는 세탁물을 주우러 절벽으로 향할까? 시야를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밤에 바람까지 거칠게 부는 해안가 절벽으로.

 

“아. 왔군.”

 

창문 너머로 언덕을 올라오는 파란 트럭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던 트럭은 빨랫줄 너머에서 멈췄다. 곧 블루진 차림의 남자가 내렸다.

 

펄럭이는 하얀 천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아무로는 가만히 침대에 기대앉아 그를 관찰했다. 샤아는 세탁물을 걷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그렇기에 느껴지는 언발란스한 매력이 있었다.

 

불어온 바람이 그가 쓰고 있던 모자를 휙 뒤집더니 하늘 높이 가져가 버렸다. 눌려있던 금발이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샤아는 시트를 쥔 손을 놓지도 못하고 둥실 떠올라 사라지는 모자를 잡지도 못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로는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어떻게 알아챘는지 샤아의 얼굴이 아무로를 향했다. 하얀 시트가 날개처럼 그의 몸 주위에서 펄럭였다. 아무로는 웃음기를 지울 새도 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눈을 반달로 휘고 입술 끝을 부드럽게 올리는 익숙한 모습. 아니다. 생각해보면 과거 샤아는 저런 표정을 지은 적 없었다. 가면이나 선글라스를 쓰던 시절에도 대놓고 얼굴을 드러낸 총수 시절에도 속을 철저히 감춘 가식적인 얼굴만 잔뜩 보여주었다. 익숙하다고 느낀 것은 최근 변해버린 이미지가 뇌리에 덧씌워진 탓이었다.

 

그는 부끄러운 듯 멋쩍게 웃으며 시트를 들지 않은 손으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무로.

 

샤아가 입을 움직였다. 거리가 꽤 멀었기에 들릴 리 없었다. 그러나 아무로는 부드러운 저음을 들은 것만 같았다.

 

아무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귓가에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휘말린 물체가 벽에 부딪혔나 했는데 제 심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의식한 순간, 귓가에서만 들리던 북소리가 몸 전체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 안 되잖아.”

 

목소리에 깃든 묘한 들뜸이 거슬렸다. 아무로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눌렀다. 그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솟구쳐 오르는 열기의 정체를 모를 리 없었다. 하필이면 저 남자가 대상인 것이 불만일 뿐이지.

 

톡-톡-

 

<아무로?>

 

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주먹을 쥐고 손가락을 살짝 세워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별일 없었나?>

 

창문이 닫혀 있어 소리가 흐릿했다. 아까의 목소리는 그리도 또렷하게 들렸는데.

 

“밖에서 그러지 말고 들어와.”

 

아무로는 억양을 최대한 낮춰서 말했다. 이상하게 들리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샤아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엄지를 세워 뒤를 가리켰다.

 

<마무리하고 가겠다. 새 옷을 사 왔으니 편했으면 좋겠군.>

 

샤아가 몸을 돌려 다시 빨랫감을 걷으러 향했다. 아무로는 그를 불러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세탁물 하나가 절벽 쪽으로 날아간 것을 알려줘야 했다. 그러나 아무로는 입을 다물었다. 시트가 그렇게 많은데 딱히 하나 정도는 버려져도 괜찮을 것이다. 아무로는 이유를 떠올리고 납득했다. 괜찮은 변명이었다.

 

 

 

 

***

 

 

 

 

“그라나다? 설마 애너하임 일렉트로닉스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애너하임은 역사가 깊어. 그리프스 전역 때 에우고를 지원하면서도 티탄즈와 거래를 끊지 못하고 계속 줄타기를 해왔는데… 이제 와서 균형을 깨려고 하다니 믿기 어려워.”

“상황이 변했으니까. 물론 애너하임 측도 내부 반발이 큰 모양이다. 최근 암만의 광산 지분 30퍼의 명의를 이전했어. 부회장 측의 소행일 테지.”

“그들이 그라나다에서 철수하면 달 콜로니는 황폐해질 텐데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을까?”

“애너하임은 돈으로 움직이는 기업이다. 이전하면 사람들도 따라가거나 다른 기반을 찾아갈 거다. 우주는 지구와 달라. 공기도, 중력도, 기후도 모두 돈을 주고 사지 않으면 안 돼. 스페이스 노이드라면 다들 알고 있는 원칙이지. 이런 면에서 보면 자네는 어스 노이드가 확실하군.”

 

샤아의 지적에는 비난의 기색이 없었다. 그가 딱히 어스 노이드란 어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로는 자신의 출신지에 대해 유감은 없었으나 예전에 샤아가 ‘자네는 스페이스 노이드에 가까워.’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액시즈 낙하는 유례없는 사건이었으니까.”

“우와. 당신이 할 말이냐.”

“사실 그대로일 뿐이다.”

 

샤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은 공장에 딸린 사무실에 나란히 앉아 위성 프로그램을 연결한 구식 모니터로 뉴스를 보았다. 아무로는 샤아가 어디선가 가져온 커다란 흔들의자에 담요까지 두르고 푹 묻혀 있었다. 목을 받치는 쿠션은 너무 나간 게 아니냐 투덜거렸지만, 샤아는 대답 대신 아무로의 머리와 목이 쿠션에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정리해 주었다.

 

“전 총수께서는 이 사태를 어떻게 보시나.”

 

뉴스가 끝났다. 아무로는 광고가 나오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설렁설렁 말을 걸었다.

 

“내 생각이 중요한가?”

“중요해.”

“아직도 탐색전을 계속할 셈인지.”

“아니. 그건 이제 됐어.”

“알아줬다니 기쁘군.”

“내가 무슨 말할 줄 알고 지레짐작하는 거야?”

 

아무로는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쓰며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무릎 위에 올려진 컨트롤러의 버튼을 눌렀다. 시사 프로그램이 방영 중인 채널이 나오자 컨트롤러에서 손을 뗐다. 샤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네오지온은 괴멸한다.”

 

샤아는 무심한 눈으로 화면 너머 아나운서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계속해서 악수를 뒀어. 그라나다를 위협하면서 애너하임을 압박한 데다가 자브로에 자잘한 테러까지… 나나이는 일선에서 물러난 듯 보이는군. 그녀가 있었다면 저 지경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텐데. 뭐 결론은 샤아 아즈나블은 우주에서 죽었고 뒤를 이끌 후계자도 없으니 끝이라는 거다.”

“아쉬워 보이네.”

 

아무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샤아를 보았다. 샤아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때 이끌었던 조직이다. 착잡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이상한 거겠지. 그래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렇군.”

“스페이스 콜로니가 주춤하고 있어. 지구에서 물자 보급을 틀어쥐고 협박하면 답이 없으니… 그래도 윗선에서 눈치는 보는 모양인지 이주 계획은 실행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

 

콜로니 강제 이주 계획. 병원에서 쿠에르 파커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온갖 욕을 끌어 부으며 자유를 부르짖던 남자와 반대로 샤아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액시즈 사태를 일으킨 것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리석은 민중들을 이끌고 개도를 걷자는 선민사상도 그대로일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샤아 아즈나블의 편린을 확인하니 희한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표정이 이상하군. 역시 불편한 화제였나.”

“아니. 괜찮다. 애초에 먼저 물어보기도 했고. 나도 콜로니 이주는 찬성하는 쪽이야. 다만 그 방식이…”

“압제.”

“… 그렇지.”

“나 역시 폭거는 피해야 한다는 주의다. 하지만 이주와 관련해선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전무하다. 특혜를 들이밀어도 사람들은 지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니… 미온적으로 굴다가 무슨 일이 발생했지? 너와 내가 처음 싸웠던 전쟁을 떠올려라.”

 

샤아의 말은 정론이었다. 아무로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그의 사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입맛이 썼다.

 

“겉은 부드러워졌을지 몰라도 속은 그대로구나.”

 

아무로의 한탄을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나라는 인간은 변하지 않아. 그렇기에 우주…”

“우주에 오르지 않는다.”

 

아무로는 샤아의 말을 가로챘다.

 

“됐어. 당신은 그 정도가 딱 좋다. 너무 바뀌면 징그러워.”

 

그렇게 말하더니 손가락 끝으로 컨트롤러를 눌렀다. 네오지온과 연방의 다툼을 소리 높여 비판하던 패널들의 소음이 순식간에 끊겼다. 틱-틱- 바뀌던 채널은 개발이 제한된 숲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고정되었다. 지구 상에 몇 안 남은 자연의 보고, 아마존이었다.

 

“저런 숲에서 사는 건 불편하겠지.”

 

아무로는 새소리가 요란한 정글 숲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기도 했고 질문 같기도 했다. 샤아는 잠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식 모니터 주제에 선명한 초록색을 보여준다.

 

“그렇겠지. 정기적으로 접종을 해야 하고 야생동물 출몰에도 주의해야 한다. 물자 조달도 쉽지 않겠군.”

“그래도 살 수는 있을 거야. 인류는 오래전부터 저런 오지에서도 거주해 왔으니까.”

“아마존에 살던 마지막 부족은 40년 전을 기점으로 해산했어.”

“40년 전이라, 생각보다 오래 버텼네.”

“잘못해서 다치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다. 헬기로 먼 병원까지 옮겨지다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생태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많이들 죽지.”

“아하하! 당신 너무 필사적으로 단점만 나열하고 있잖아.”

 

아무로가 뒤통수로 쿠션을 치며 크게 웃자 샤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얼마나 신나게 웃었는지 눈물이 고일 지경이었다. 손이 멀쩡했으면 눈가를 쓸었을 것이다. 아무로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정글에서 살자고 안 할 거니까.”

“… 함께 살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군.”

“당신은 싫나?”

 

아무로가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않고 물었다. 샤아는 잠깐 말이 없었다. 이내 입을 살짝 벌리고 아무로의 시선을 피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서른넷이나 먹은 남자가 꼭 소년처럼 말한다. 아무로는 그의 수줍어하는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읽기 쉬운 표정을 짓는 샤아는 드물었기에 눈에 꾹 눌러 담았다.

 

“더 남쪽으로 가는 건 어떤가.”

 

모니터 화면이 폭포를 비췄을 때 샤아가 흘리듯 말했다. 아무로는 그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새 같군…”

 

타이밍 좋게도 창밖으로 새들이 줄지어 날아갔다. 아직 이주 시기는 아니었다. 곧 내릴 스콜을 피하려고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무로는 고개를 숙여 양손을 보았다. 부목을 감싸고 단단하게 매어져 있는 붕대가 보였다. 몸을 일으키다가 걸려서, 잠을 자다 헐렁해져서, 음식을 먹다 흘려서, 습기가 많아서, 사유도 다양했지만 사야에게 아무로의 상처를 치료함에 있어서 적당히란 없었다.

 

처음에 그의 다정함은 매우 거북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흐를수록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의 친절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내가 당신에게 미안해야 하나? 고마워해야 하나?’ 물론 둘 다 아닐 것이다. 그는 죄가 깊은 사내였으므로 이 정도는 받아도 될 것이다… 사실 그런 합리화야말로 핑계였다.

 

“당신 직사광선에 약하잖아.”

“자네는 추위에 약하고.”

 

샤아는 모니터가 놓인 책상 옆에서 등을 돌리고 서서 어깨를 움직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몸을 돌린 그의 손에는 머그잔이 두 개 들려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머그잔을 아무로에게 내밀었다. 양손으로 고정하듯 받아 보니 꿀을 넣고 따뜻하게 데운 우유였다.

 

“아. 고마워.”

“별말씀을.”

 

내용물은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미지근하지도 않았다. 아무로는 잔을 조심조심 들어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더위든 추위든 약하지 않다.”

“킬리만자로에서는 상당히 힘겨워 보이던걸.”

“음… 그때는 디제 정비에 들일 시간이 모자라 잠을 줄여서 힘들었던 기억이… 는 그게 대체 언제 이야기야.”

 

아무로가 황당해하며 몸을 들썩이자 덮고 있던 모포가 흘러내렸다. 흔들의자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조금씩 움직였다. 샤아는 천이 땅에 닦기 전에 낚아채 다시 올려 덮어주었다.

 

“그때는 자네나 나나 어려운 시기였지.”

 

샤아의 말에 순간적으로 속이 쓰렸다. 킬리만자로 공습은 에우고니 카라바니 할 것 없이 참전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정신도 육체도 한계까지 몰렸던 힘든 작전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아무로는 이 말 만큼은 반드시 꺼내야 했다.

 

“그 아이가 훨씬 힘들었겠지.”

 

책망하려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샤아에게 달려 있었다. 그는 고요한 눈으로 화면만 바라보았다. 아무로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정글을 누비는 아름다운 새가 클로즈업되는 장면이었다.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내려온 빛이 푸른색 깃털에 내리쬐자 몸통이 유리처럼 반짝였다. 저공으로 낮게 날던 이름 모를 새는 바닥에 내려앉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구구구 낮게 두어 번 울었는데 단조 음이라 서글프다는 감상을 주었다. 아무로는 새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샤아는 화면을 계속 보고 있었으니 지나간 자막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영부영 시간만 흘러갔다.

 

“맞는 말이야. 나는 되먹지 못한 어른이었다.”

 

침묵 끝에 흘러나온 샤아의 말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아무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본인도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샤아는 머그잔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진한 커피 향기가 풍겨왔다. 아무로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자꾸 상처를 후벼 파는 이야기만 하게 되잖아.”

 

맹세코 그럴 의도는 없었으나 순식간에 과거의 통증을 되살리고 말았다. 샤아와 함께 있으면 거의 늘 이랬다. 다툼이 끊이질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사람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과거를 봉인한다면 몰라도 아무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무로는 부목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손가락 끝으로 머그잔 테두리를 빙글빙글 쓸었다.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샤아는 커피를 연거푸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그만큼 우리 과거가 피로 얼룩졌다는 뜻이겠지.”

 

흘러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무덤덤한 태도였다. 아무로는 새삼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샤아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잡을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한탄에 가까울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 불편한 이야기를 해볼까?”

 

아무로는 의아한 눈으로 샤아를 바라보았다.

 

“사후처리에 대하여.”

 

그는 덤덤하게 설명했다.

 

“내 개인 재산은 사망이 확정되면 알테이시아에게 가도록 조치해두었다. 그녀가 상속을 포기한다면 환경단체나 사단법인, 비영리 재단 등 상장 커트라인에 따라 기부되겠지. 아직 실종상태지만 언제까지고 묶어둘 순 없어. 2년 정도가 한계일 테니 그 뒤엔 법적으로 사망처리가 될 거다.”

 

자리에서 일어난 샤아는 트레이에 빈 머그잔을 올려 두고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는 아무로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자네는 론도 벨 동료들에게 지분을 줬더군.”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어. 솔직히 말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군인 주제에 말이야.”

“자조할 것 없다. 내가 아닌 다른 녀석들에게 자네가 죽을 일은 없었으니까.”

“…… 이젠 일일이 반응하기도 힘들어.”

“브라이트 노아에게 네 재산과 물품들 처리 권한이 위임되겠지. 연방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법적으로 나와 비슷하게 2년 정도가 한계라고 본다. 이후 재산은 지분에 따라 분배될 것이고… 브라이트는 네 이름으로 재단을 세울 의사가 있는 모양이야. 법무법인에 문의한 흔적이 있더군.”

“재단이라니… 브라이트는 대체 무슨.”

“이상 불편한 이야기는 끝이다.”

 

화면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났다. 표범이 물가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아마존에는 많은 생물이 산다. 100년 전에는 훨씬 더 많은 종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80퍼센트 이상이 멸종해 뒤늦게 돔을 씌워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안타깝게도 자네의 재산을 받을 사람이 몇 안 남았어.”

“화를 내야 할 타이밍인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

“됐어. 바뀌는 것도 없고.”

 

아무로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리를 쓸고 싶었으나 매번 손이 방해였다. 아무로는 우울하게 입을 열었다.

 

“첸은… 좋은 사람이었다.”

“아기 준위에 대한 보고서도 있다. 읽겠나?”

“됐어.”

“냉정하군.”

 

그의 무신경한 태도에 아무로는 순간적으로 발끈했다.

 

“당신은 평가할 자격이 없어.”

“미안하다.”

 

샤아는 실언을 인정하고 순순히 사과했다.

 

“… 그녀는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로는 생명의 외침과 타오르는 혼을 느낄 수 있다. 장소가 전쟁터라면 더욱 선명하게 와닿았다. 우주 공간에서 울려퍼지는 그녀의 단발마를 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넘어 원망할 대상이 눈앞에 있다. 남자는 아무로가 주먹을 날려도 피하지 않고 순순히 맞아줄 것이다. 그랬기에 의미가 없었다.

 

“스콜이 오는군.”

 

샤아가 중얼거렸다. 창밖으로 검은 장막이 내려와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휘몰아치는 바람과 빗소리가 섞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 정말 같이 살 수 있을까…”

 

아무로가 퀭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샤아와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높은 확률로 가시투성이 벌판에 도착한다. 차라리 거리를 두는 게 어떨까? 그의 진심이 담긴 포기선언도 들었겠다, 어쩌면 적당히 떨어져 사는 것이 과거를 되새기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삶일 수도 있다.

 

“함께 살길 원하지 않는다면 함께 죽는 방법도 있다. 가까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면 큰 통증 없이 갈 수 있을 거다. 높이도 적당하고 아래는 온통 운모 바위투성이라 운이 없이 살아날 확률도 드물지. 어떤가?”

 

아무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운이 없이 살아날 확률도 드물지.’ 보통 운이 없다는 말을 저렇게 사용하나? 아무로는 섬뜩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그를 주시했다. 샤아는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괸 채 저를 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미소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 내가 왜 당신과 같이 죽어야 하지?”

 

아무로는 평온을 가장해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앞으로 자네 혼자서 제대로 된 삶을 살기 힘들 테니까. 평생 고통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애인의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나?”

“뭐, 뭐야? 어째서 내가 고통받으며 살 것이라고 확신하는 거야? 그리고 당연하단 듯이 애인이라고…”

“아무로 레이는 도망치거나 은닉하는데 소질이 없는 인간이다. 그간 내 책상에 올라왔던 자네의 보고서를 살짝 훑어만 봤어도 알만한 내용이지. 연방은 끊임없이 추적해 올 테고 차명계좌 하나 없는 주제에 도주 자금이며 은신처며 어떻게 구하겠다는 건가? 브라이트나 론도 벨의 살아남은 동료들에게 간다면 당장 잘 곳은 모면할 수 있겠지. 하지만 연방이 그리 쉽게 넘어가 줄까? 자네는 혼자 살겠다고 동료들을 위험에 빠트릴 종류의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예시를 첨가한 냉정한 설명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손끝에 힘을 줬다. 갑자기 손에 든 머그잔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무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아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 얌전히 내게 맡기도록.”

“결론이 이상하잖아.”

 

아무로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로 샤아를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이상한 소리를 자주 했지만…’ 아무로는 질린 듯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사랑 고백’에 대한 내 대답을 기다려 주겠다고 했었지.”

“아. 그랬었다.”

“만약 거절하면 어쩌려고 이래?”

 

아무로는 차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샤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갑자기 모니터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표범이 사냥감을 쫓아가는 중이었다. 목표인 사슴은 풀숲 사이를 지그재그로 뛰며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긴박한 배경음악이 깔렸다.

 

“자네가 거절할 리가 없잖아. 혹 거절하더라도.”

 

샤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방 안에 사슴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면에 비친 표범이 사냥감을 물고 낮게 그르렁거렸다.

 

“받아줄 때까지 계속 함께해야지.”

 

체감 온도가 5도 정도 내려간 것 같았다.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갑자기 샤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다른 위협 없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을 뿐인데도 아무로는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샤아는 느긋하게 아무로를 향해 다가왔다. 애당초 둘이 앉아 있던 의자 사이엔 작은 스툴이 하나 들어갈 만큼의 공간밖에 없었기에 샤아는 한 발자국 성큼 움직이는 정도로 아무로의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움츠러든 아무로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상체를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추운가?”

 

아무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샤아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로. 나는 자네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 이 자리에 있는 것이야. 제발 그렇게 불편한 눈으로 보지 말게.”

“지금까지 한 말대로라면 당신이 죽을 때 나도 죽어야 하잖아.”

“… 그렇다면 좋다. 반대로 물어보지. 자네는 내가 죽고 나서 계속 살아가고 싶은가? 누군가를 만나서 관계를 맺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세상은 넓어. 시간이 흐르면 평범하게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 막연함이 문제라는 거다. 올지 안 올지 모를 애매한 미래를 위해 어중간한 태도를 고수하는 존재를 용납해줄 만큼 자네를 둘러싼 위협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샤아가 답답하다는 듯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로도 발끈한 얼굴로 지지 않고 가슴을 폈다. 오히려 방금까지 두려움을 느꼈던 자신이 부끄럽다는 듯 당당하게 외쳤다.

 

“자꾸 당연하다는 듯 내 삶에 관여하지 마라! 내가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심지어 목숨을 끊든 그건 나의 자유야. 왜 자꾸 조종하려 들지? 과거에 끊임없이 강요하고 억압하던 당신과 뭐가 다른가?! 전 독재자답게 지독한 아집이 그대로 느껴지는군.

“… 잘도 말했겠다.”

“그 표정은 뭐냐. 아아…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가. 패자부활전이라도 열고 싶나?”

 

아무로는 일그러진 얼굴로 온 힘을 다해 빈정거렸다. 순식간에 에스컬레이트한 그의 상상력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두 남자의 시신 위로 오후에 날아갔던 하얀 시트가 덮이는 파괴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역시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물을 걷던 샤아 아즈나블을 보며 얼굴을 붉히던 아무로 레이는 틀렸다. 그것이야말로 착각이었다. 이 들끓는 분노가 이 남자와 자신 사이에 유일하게 남아 흘러야 하는 감정이다. 한번 터진 부정적인 망상은 멈출 줄 몰랐다.

 

“아무로. 그 이상 말하지 마라.”

 

샤아가 노기를 억누르며 씹어 내뱉었다. 목소리가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표범의 그르렁거림과 다를 바 없어서 아무로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렇지만 이대로 누그러트리기엔 그 역시 감정이 격양된 상태였다. 샤아의 나직한 경고는 오히려 자신을 자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감을 느끼면서도 아무로는 터져 나오는 울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네놈은… 여태껏 힘들게 본성을 누르고 있었잖아. 그냥 편해지는 게 어때? 날 버리면 이딴 짜증 나는 상황에서 해방될 거 아냐. 날! 죽이고! 네오 지온으로 돌아가 잘난 다이쿤으로서 지구를 우주를 입맛대로 주물러 보라고!”

 

비명이 씩씩대며 터졌다. 방금 전까지 간질간질했던 애틋함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대신 어둡고 음습한 감정만 떠올랐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진심은 아니었다. 아무로는 지구가 무사한 것이 기뻤다. 샤아와 자신이 살아남아 함께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네오지온으로, 우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샤아의 고백에 거짓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아무로는 심하게 지쳐 있었다.

 

그리고 홀로 설 수 없는 자신에게 실망했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사서 고통받고, 변변한 삶의 이유조차 찾지 못해 오랜 숙적의 보살핌을 받는 나약해 빠진 아무로 레이.

 

다시 우주에 오를 생각이 없다는 샤아의 다짐은 사실 아무로에게 더 들어맞았다. 샤아가 가지 ‘않’을거라면 자신은 ‘못’한다는 정도의 차이일까. 어쨌든 결론은 일치한다.

 

아팠던 몸이 나아질수록 늘어나는 상념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무로는 마음 한구석에 작은 공동을 만들어 거기다 파괴적인 본성을 가두었다. 담아 두기만 했을 뿐, 결코 꺼내 보일 생각은 없었다. 샤아와 다르게 아무로는 그 누구에게도 제 너덜너덜한 속내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결단코.

 

“진심인가?”

 

샤아가 허리를 숙인 채로 고요하게 물었다. 반대쪽 어깨에 손이 하나 더해졌다. 양어깨를 붙들린 아무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지쳤다… 샤아.”

 

그 말만은 진심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때는 그랬다며 웃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샤아의 지적대로 막연한 환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 방 안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샤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소 거칠게 아무로를 안아 올렸다. 우유가 담겨 있던 머그컵이 바닥에 떨어져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깜짝 놀란 아무로가 반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근육이 덜 붙은 허벅지를 꾹 누르는 행동으로 반항을 잠재웠다. 그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닫혀 있는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차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무로는 격양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았다.

 

샤아는 불 꺼진 복도를 걸었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와 나직한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로도 마찬가지였다. 복도의 끝에 문이 있었다. 샤아는 계속해서 문을 거칠게 찼다.

 

불편한 소리를 내며 열린 철문 너머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사방에서 빗물이 흘러들었다. 아무로는 쏟아 들어오는 물을 간간이 뱉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샤아는 단 한 번도 내려다보지 않았다.

 

아무로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것 같았다. 시트가 날려 사라진 방향, 해안 절벽이었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자신을 죽이고 해방되라 당당하게 외친 주제에 몸이 조금씩 떨렸다. 우스운 일이었다. 모빌 슈트를 타고 사선을 넘나들며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냉혹한 군인이 정작 본인의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 떨고 있다. 아무로는 자신의 이런 반응은 추위로 인한 것이라고 억지로 되내였다. 샤아도 그렇게 알아줬으면 했다.

 

한 발자국 앞조차 보이지 않았으나 샤아는 용케 잘 걷고 있었다. 둘이 머물던 숙소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 모른다. 어둠 속에서 그의 품에 안긴 채 흔들리기만 하다보니 감각이 둔해졌다. 아무로는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빗물에 쫄딱 젖어 자신이 두려움에 떠는 것인지 추위에 떠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아직 허세를 부릴 여유는 있었는지 차라리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춥나? 떨고 있군.”

 

빗소리에 섞여 샤아의 목소리가 희미했으나 알아듣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아무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젖어서 달라붙은 금발은 평소보다 색이 진했다. 빗물이 그의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 아무로의 가슴을 거쳐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샤아는 알아주었다. 아무로가 추위로 떨고 있음을.

 

“다 왔다.”

 

샤아가 멈춰 서더니 말했다. 아무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시꺼먼 어둠 속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빗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들렸다. 오염된 바다 위로는 배도 지나다니지 않았기에 불빛 한점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시야가 조금씩 검게 펼쳐진 바다를 인식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계속해서 하늘과 수평선의 희미한 경계를 찾아냈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자 회색 잡초가 가득했다.

 

그때 샤아가 한 걸음씩 발을 옮겼다. 비바람을 뚫고 풀숲과 진창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탁 트이고 비린내가 진해지는 곳으로 둘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직도 죽고 싶나?”

 

아무로는 샤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샤아도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마주했다. 협박이나 강제적인 상황을 위시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미하게 슬픔이 묻어 있었다. 빗물이 그의 매끄러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센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잘 깜빡이지 않는 색이 연한 푸른 눈이 아무로를 향했다. 

 

“잘 모르겠어.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나.”

 

의외로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아무로는 놀랄 만큼 침착하게 그의 시선을 받았다. 정신이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어떻게든 당신을 날려버리고 살아보려 했을 텐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 그날 이후로 어딘가 변해버린 것 같아. 사이코 프레임이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친 걸까.”

 

샤아는 차분하게 분석하는 아무로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나기처럼 단타로 내리는 스콜은 칸쿤의 괴팍한 가을 날씨에 힘입어 작은 태풍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요 며칠 기압이 높았던 것으로 보아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어두운 밤, 절벽에 선 두 사람, 아래에는 겹겹이 쌓인 퇴적암이 우둘투둘 날카롭게 잔뜩 솟아 있었다. 흰 포말 가득한 거친 파도가 바위 위로 덮였다 사라지길 수없이 반복한다. 두 남자가 떨어지면 휩쓸려 먼바다로 떠밀려 갈지도 모른다.

 

“울고 있군.”

“어… 뭐, 내가?”

 

아무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더듬다가 손끝으로 눈가를 건드리자 빗물과는 다른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는 울고 있었다.

 

“정말이다. 용케도 알아봤네.”

 

갑자기 껴안는 힘이 강해졌다. 몸 전체가 차가운 와중에 샤아의 가슴에 닿은 부위만 따뜻했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샤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비바람이 거세어 잘 들리지 않을 만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둘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자네가 날 버리지 않는다면…”

“난 당신을 버리지 못해. 애초에 가진 적도 없었는걸.”

 

아무로는 쓸쓸하게 말했다. 몸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이쯤되니 정말 추위 때문에 떨고 있었다. 죽음의 두려움 따위 육체의 고통 앞에선 찰나에 불과한 것이다. 

 

“샤아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인물이란 생각이 안들어. 우주에서 죽어버리고 빈껍데기만 남은 게 아닐까.”

“내가 해야할 말을 하는군.”

 

샤아가 힘없이 투덜거렸다. 그는 아무로가 제 말을 가로채서 분한 듯 보였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함께 죽니 마니 하는 상황에서 팔자도 좋았다. 이제는 완전히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비바람을 뚫고 흰 포말이 가득한 거센 바다가 담겼다. 샤아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나와 함께 가 주겠나?”

 

동반 자살하자는 소리를 참 로맨틱하게도 했다. 아무로는 냉정하게 판단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막상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니 죽기 싫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평생을 도망치면서 사느니 깔끔하게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으니 사실상 반반의 확률이었다. 그래도 제일 좋은 건…

 

“우주에서 폭사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렇지 않나?”

 

이번엔 샤아가 아무로의 말을 가로채며 허무하게 웃었다. 그는 이미 아무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꺼낼지 대략 알고 있는 눈치였다. 대단한 뉴타입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앞으로 또 잘난 입을 열고 덜떨어진, 되다만, 어정쩡한 등의 수식어로 자신을 표현한다면 주먹을 날려줘야지 싶었다.

 

앞으로?

또?

 

“나와 함께 가 주겠나?”

[나와 함께 살아 주겠나?]

 

샤아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무로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것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싫다.”

 

충동적이었다. 아무로는 있는 힘껏 그의 가슴을 밀쳤다. 공중에 붕 뜬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샤아는 한 박자 늦게 팔을 뻗으며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깜깜한 와중에도 충격받은 남자의 모습만큼은 잘 보였다. 허를 찔린듯한 얼빠진 얼굴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저 잘난 남자는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저딴 날것의 표정을 지어 봤을까? 뒤따르는 절망적인 외침도 마음에 들었다.

 

“아무로!”

 

조금만 옆으로 굴러도 떨어졌을 것이다. 아무로는 절벽 끝에 간당간당하게 누워 하늘을 보았다. 축축한 잡초가 목과 뺨을 간지럽혔다. 바람이 양 사방에서 몰아쳤기에 얼굴과 몸을 때리는 비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로는 입을 크게 벌리고 푸하푸하 숨을 쉬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샤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꼭 시체 같았다. 병원에서 갓 구출된 자신도 저런 피부색이었을까?

 

아무로는 처음으로 샤아 아즈나블이란 남자를 완벽하게 이긴 것 같다고 생각 했다. 모빌 슈트를 타고 그를 몰아넣을 때도 깨닫지 못했던 강한 우월감을 느꼈다.

 

“보기 좋은 얼굴이야.”

 

아무로는 짓궂게 낄낄거렸다. 샤아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제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풀잎이 흔들리고 잎사귀 따위가 격하게 휘날리는 와중에 조각상처럼 움직임 없는 남자를 보며 아무로는 크게 웃었다.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너… 네놈은 정말…”

 

고상한 호칭 따위 어디론가 날려버린 남자는 허무하게 중얼거리더니 종국엔 비명 같은 고함을 터트렸다. 그의 눈 밑이 꺼멓게 죽어 있었다.

 

“내가 한 발자국만 더 앞에 서 있었어도… 네녀석은 죽었다!”

 

사실 우스운 이야기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죽으려고 했던 주제에 정말 이상한 사내이지 않은가. 아무로는 웃음기를 지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행동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화가 난 샤아에게 차여 절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붙잡혀 함께 떨어지거나, 이런저런 경우의 수가 있었지만 무슨 행동을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좋은 구경을 했다고 생각하니 아쉽지 않았다.

 

“너는… 죽고 싶지 않다고 했어.”

 

샤아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먹먹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로는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기껏 나았던 팔이 다시금 아릿하게 아팠다.

 

“처음 자네를 데려왔을 때 약에 취해 비명을 지르면서 말했다.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다고!”

“꿈을 꿨나 본데… 어린 시절엔 웬만해선 죽고 싶지 않은 법이잖아. 특히 당신은 내 사정을 알 텐데.”

 

굳이 희망을 부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억에도 없는 잠꼬대 따위에 기대고 있는 그를 무시하자니 영 마음이 좋지 못했다. 샤아는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뛰어내렸으면 좋겠나?”

“당신이 그러고 싶다면.”

“함께 살자고 한다면?”

“… 당신이 그러고 싶다면.”

 

그러자 샤아가 기어서 아무로의 앞에 왔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아무로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자네가 화를 낼까 봐 두려워.”

“날 생각해 주는 거야?”

“늘 자넬 생각했네.”

“그렇다기엔 언행이 거침없던걸. 사랑을 받아줄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선언은 정말이지 굉장했어.”

“그래… 그랬어. 자네 말이 맞아. 내가 어리석었다.”

 

샤아는 아무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손을 올려 아무로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물을 막아주었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손이 위태로웠다. 아무로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샤아… 당신 울고 있잖아.”

“… 그렇….”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다.”

 

‘아, 이런 거였구나.’ 아무로는 감탄했다. 시야가 탁했고 빗물이 잘생긴 얼굴을 잔뜩 적셨으나 아무로는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눈물을 알아차렸듯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서글픔이 밀려왔다. 아무로는 오른손을 올렸다. 헐렁하게 풀린 붕대 사이로 조그만 플라스틱 부목 하나가 툭 떨어졌다. 손등이 샤아의 코끝을 스쳤다. 그는 공중에 뜬 아무로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키스했다. 입술은 천천히 손등을 타고 피가 번지고 있는 손목까지 내려갔다.

 

“간지럽다. 샤아.”

 

사실 별다른 감각이 없었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샤아의 입매가 우그러졌다. 늘 호선을 그리던 매끄러운 입술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더니 눈도 코끝도 함께 일그러졌다. 극적인 변화에 아무로는 잠깐 숨을 멈췄다.

 

“자네가… 죽는 것… 싫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처참할 정도로 꼴사나웠다. 그랬기에 아무로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손목을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단순히 배려 탓은 아닐 것이다. 샤아는 오열을 참는 데 온 신경을 집중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울컥울컥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설움을 미처 다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참혹하구나. 아무로…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이렇게 비참할 줄은 몰랐다. 오히려… 빼앗기만 한다. 깨달음이 너무… 늦었구나

 

샤아는 결국 오열하고 말았다. 여태 힘들게 참아왔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꺽꺽 울었다.

 

“샤아……”

 

울부짖는 사람을 지켜보는 쪽도 그에 못지않게 괴롭다. 아무로는 샤아가 발산하는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헤아리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계속 시도 했다가는 질식할 것 같았다. 샤아는 무릎 꿇고 아무로의 가슴 위로 머리를 대고 몸을 들썩였다. 

 

아무로는 허무했다. 지금 울고 있는 샤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의 볼을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위로해 주어도 언젠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또 이런 상황을 반복할 것이다. 삶이 끝나지 않는 한은 그들은 계속 상처를 떠올리며 새로운 상처를 덧씌우고 꾸역꾸역 살아갈 것이다.

 

과거를 외면하는 건 결국 도피하는 거야. 인간이라면 그래선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아무로는 쿠에르 파커의 말을 떠올렸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나. 허무했지만 조금 설레기도 했다.

 

“살아볼까…”

 

아무로가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그래도 샤아보단 덜했다. 쓸데없는 호승심이었다.

 

“영원히 도피해도 괜찮다면.”

 

아무로가 계속 말했다. 고개를 든 샤아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덩치 큰 남자가 눈가가 뻘게진 채로 저를 붙들고 있는 모습이 꼴사나워 또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의 위력이 죽자 내리던 빗방울도 그 기세가 줄어들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태풍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의외였다. 아무로는 저를 멍하니 보는 샤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살짝 힘을 줘 빙글 돌리면 바로 추락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상태였다. 희미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덜컥였다.

 

샤아가 끌어당긴 것이다. 단순히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본 것뿐인데 그런 행동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그는 아무로를 껴안고 필사적으로 절벽 끝에서 멀어졌다. 풀과 흙이 헤쳐지는 소리가 났다.

 

안긴 자세가 얼마 전 새벽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아무로의 귓가에서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와 달리 의도된 행동이 아니었다. 아무로는 그의 넓은 가슴에 기대 고개만 살짝 돌렸다. 창백한 옆모습이 보였다. 여유를 잃은 샤아는 궁지에 몰린 짐승 같았다. 아무로는 새삼스럽게 그의 ‘사랑’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을 확인하다니, 아무로는 자신도 샤아 못지않게 고약한 인간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냉소했다. 둘은 똑같았다. 어쩌다 보너스로 얻은 생명의 무게가 전과 같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비관적인 인간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멈췄고 내리던 비의 양도 줄어들었다. 춥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샤아에게서 전해진 체온은 아무로의 몸에 온기를 찾아 주었다.

 

제법 시간이 흘렀으나 샤아는 여전히 조용했다. 불안한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아무로는 그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것인지 궁금했다. 이렇게 조용히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아무로를 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샤아는 아무로보다 훨씬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살아 볼까.’란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른다. 사실 아무로는 샤아의 그런 예측 불가능한 부분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AR 재단.”

“뭐?”

“브라이트가 생각한 네 재단 이름이다.”

 

아무로는 의아한 얼굴로 샤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파도치는 밤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얀 유성, 하얀 사신도 후보군에 있었지.”

“윽!”

 

아무로는 진심으로 질색했다. 브라이트의 고루한 취향이야 하루이틀이 아니었지만 아무로 레이를 기리기 위한 재단 이름으로 저런 진부한 별명을 넣는 건 괴팍하지 않은가.

 

“초대 창시자로 네 이름이 올라갈 거다. 이미 사망한 사람이 창시자가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니… 하물며 아무로 레이라면 부족함이 없지. 뉴타입의 가능성을 품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사학재단이 될 예정이다.”

“학교를 세우겠다는 건가. 하지만 뉴타입이라니…”

 

아무로는 말끝을 흐렸다.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자 샤아의 목소리가 좀 더 부드럽게 변했다.

 

“연방과는 무관하다. 군사학교도 아니야. 전투기술이나 모빌 슈트 운용법 등은 일절 가르치지 않아. 오히려 안정적인 사회 복귀를 위한 특수 요양 시설에 가까워. 미라이 노아가 예술적 자질이 있는 아이들을 위한 커리큘럼도 검토 중이더군.”

“아아… 생각보다 본격적인데.”

 

반가운 소식이자 과거와의 작별을 고할 계기였다. 아무로는 옛 동료들에게 어중간한 희망을 주기 싫었다. 브라이트도 그렇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사망한 영웅의 이름은 학교 근처 비석에 새겨져 오랫동안 기려질 것이다.

 

전쟁과 무관한 교육 시설이라니 꿈같은 이야기였다. 아무로는 커튼콜을 받는 기분이 되었다. 물론 그는 장막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비가 완전히 그쳤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바람이 사라지자 풀이 사글거리는 소리도 가라앉았다. 늘어진 금발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아무로의 손등에 닿았다. 풀리기 시작한 붕대 사이로 부목이 흐느적거렸다. 아무로는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을 바라보았다. 생물이 살지 못하는 검은 바다 표면이 찬란한 붉은 색으로 반짝였다.

 

“아.”

 

아무로는 작은 감탄음을 뱉었다. 갑자기 어떤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 소리에 샤아가 아무로의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는 여전히 두려워했다. 당장 아무로가 저를 박차고 나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질지도 모른다는 강박적인 상상을 하고 있었다. 

 

“대지에 충돌하기 직전에…”

 

아무로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조종간을 움직였던 것 같다.”

 

아무로가 중얼거렸다. 그리곤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동그란 태양이 손바닥에 감춰졌다. 붕대 사이로 파란 플라스틱 부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당신을 품으로 끌어당겼어.”

 

정확히는 당신이 타고 있던 탈출 포트를- 샤아가 손을 내밀어 아무로의 손을 받쳤다. 작은 조각들이 계속해서 툭툭 떨어졌다. 그는 뻣뻣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못하는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부드럽게 깍지를 꼈다. 그 덕에 아무로가 힘을 빼도 손은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떠오른 태양은 대지에 빛과 온기를 전해주었다. 둘은 말없이 그 장엄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명력이 가득한 태양이 죽음의 바다를 비췄다.

 

온화하고 찬란한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