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이후의 무기력증 윌과 사랑에 패해 도망친 나이젤로 둘이 만나는 거 보고 싶다.
찰리 컨트리맨 [나이젤] X 한니발 [윌 그레이엄]
한니발의 곁에서 떨어져 나온 윌은 삶은 포기한 듯 여기저기를 떠돌았어. 모아둔 예금이 적당히 있었기에 금전적인 문제는 없었지. 관광이 목적도 아니었고 돈을 많이 쓰는 스타일도 아니었거든. 한니발처럼 '특별한' 식재료도 필수가 아니니 4~5유로 정도면 적당히 한 끼 때울 수 있었어.
절벽에서 떨어진 후 거의 죽어가던 윌을 시꺼먼 물에서 끌어 올린 건 한니발이었어. 허리를 감싸인채 수면으로 부상하는 순간 의식을 잃었지. 정신이 들자 한니발이 보였어. 갓 태어난 새끼오리가 각인하듯 뇌리에 박혔지.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왔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한니발도 마주 웃어왔어. 윌은 그때 깨달았어. 변해버렸구나. 한니발의 표현을 빌자면 '해방'되었구나. 이상하게도 기분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좋았지. 그래서 문제였어. 전에는 과한 생각을 할 때마다 브레이크를 걸어오던 이성이 있었는데 이젠 그 신호가 희미하거든.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버려. 그땐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하고 말야.
윌은 한니발에게서 도망친게 아냐. 그냥 좀 혼란스러운 거야.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한니발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 자아를 되짚어 보고자 한 거지. 물론 이런 말을 해봐야 한니발이 쉽게 그러라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한니발이 없는 틈을 타 확 뜬 거지. 크게 걱정 안했어. 어차피 언젠간 만날 건데 뭘.
베네치아는 생각보다 별로야. 물비린내가 심했거든. 잘 관리된 곳은 괜찮았는데 조금만 구석으로 들어가도 생활 오폐수가 뒤섞여 썩는 냄새가 나곤 했지. 그래도 나름 운치는 있었어. 알록달록 칠해진 집은 시각적으로 특별한 곳을 여행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도 그에 맞춰 밝았어. 물론 겉으로만. 윌은 더는 그들에게 이입하고 싶지 않아. 보호하고 싶지도, 말을 나누는 것도 싫었어. 그래도 예전의 윌 그레이엄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은 해봐. 한적한 카페 테리어의 철제 의자에 앉아서 해지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봤어. 식은 커피잔을 주물럭거리며 코트 깃을 뚫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즐겼지.
[지금 누굴 등쳐먹으려고?]
사나운 목소리가 들렸어. 근데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야. 윌은 고개를 돌리고 소리가 난 쪽을 보았지. 그리고 잠깐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려. 거기엔 한니발이 있었어. 덩치 큰 대머리 남자에게 큰 소리로 윽박지르며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서 있는 그는 분명 한니발이랑 똑같이 생겼어. 그런데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해. 머리도 더 길고 입고 있는 옷 취향도 한니발이랑은 달라. 정장 구두도 셔츠도 조금씩 구겨져 있었지. 윌은 그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냥 닮은 사람일 거라고. 그렇게 판단할 수 있었던 건 남자가 입고 있던 코트를 거칠게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기 때문이야. [너 때문에 놀라서 떨어트려 버렸잖아. fuck 이옷 어쩔래.]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려. 주변 사람들은 그 살벌함에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어. 오직 윌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시했지.
[한 두 번 거래했다고 무례하게 굴지 마. 당신은 우리 가족이 아니야.]
[너 같은 돼지새끼가 나와 가족이라고? 병신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군. 네 보스에게 전해. 1.5배 플러스 550유로는 옷값이다.]
대머리 남자는 말없이 그런 남자를 노려보다가 물러났어. 치안이 좋은 볼티모어에서는 보기 드물었지만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무례한 사람들을 목격하곤 해. 이런 식으로 대놓고 위험한 거래를 하는 듯한 상황을 보는 것도 드물지 않았지. 다만 그 주체가 한니발과 닮은 남자라는 것은 신선했어. 혼자 남은 남자는 바닥에 떨어트린 코트를 집어 올려 툭툭 털었어. 주변을 의식했는지 두리번거리다 윌과 눈이 딱 마주쳤지.
[어이, 뭘 봐.]
똑같은 얼굴. 그라면 절대 쓰지 않을 거친 데시벨.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니발 렉터라면 단 한 번도 윌을 향해 내보인 적 없는 감정을 보였어. '적의' 말이야. 윌은 잠깐 흥미가 돋았지만 이내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렸어. 닮았지만 다른 사람이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지. 혼자만의 서커스를 본 셈 치는 거야.
[그 커피 안 마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윌의 맞은 편 비어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을 걸었어. 웃고 있지만 날것스러운 적의는 여전했지. 윌은 안경 너머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봐.
[제 입엔 별로라서요.]
[흠, 어디.]
윌의 손에서 머그컵을 뺏다시피 한 남자는 어이없어하는 윌을 슬쩍 보며 목구멍으로 액체를 쏟아부었어. [이봐요.] 윌은 컵을 뺏긴 두 손을 오므려 테이블 위에 올리며 황당함을 표시했어.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컵을 뒤집어 속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지. 그리고는 탕- 맥주컵을 내려놓듯 테이블 위에 머그컵을 내리쳤어.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컵은 깨지지 않았어. 윌은 눈 하나 깜빡 않고 남자를 바라보았지. 이 남자의 적의는 윌 뿐만 아니라 모두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어.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 말이야. 그것은 상처 입은 것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었어. 명백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윌에게 별 동요가 없자 남자는 허- 하곤 입꼬리를 올렸지.
[나이젤.]
[...]
[이름이 뭐지?]
[윌 그레이엄.]
윌은 퉁명스럽게 대답했어. 나이젤의 입장에서 윌의 의연한 태도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말이야. 영국? 미국. 스무고개를 하듯 단답식 대화가 이어졌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어 허술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수많은 범죄자의 속을 들여다보았던 윌은 알 수 있었지. 눈앞의 남자는 싸이코패스는 아닐지언정 그와 비슷한 냉혈한이야. 그는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기에 더 강한 남자였어. 가는 목덜미가 보이면 물어버리는 거야. 그야말로 육식동물 같은 남자였지.
[그래, 윌. 애인과 놀러 온 건가?]
[글쎄요.]
윌은 탐색하는 듯한 나이젤이 흥미로우면서도 불편해지기 시작했어. 하는 행동은 달랐지만 닮은 외모는 한니발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목소리라도 달랐으면 좋았겠는데 완전 도플갱어 수준이었거든. 윌은 일부러 미간을 꾹 누르며 피곤하다는 티를 냈어.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이젤.]
코트 깃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지. 나이젤은 말이 없었어. 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 등을 돌렸지. 그때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돌았어.
[만나서 반가웠다? 정말? 윌 그레이엄 선생?]
나이젤이 윌의 뒷목을 잡아 테이블 위로 꽂아 버린 거야. 안경이 튕겨져 나가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 걸쳐졌어. 윽- 윌은 작게 신음하며 눈을 깜빡였어. 몸을 일으키려 해도 소용없었지. 얼마나 힘이 센지 짓눌린 오른쪽 볼에서 테이블의 나뭇결 무늬가 느껴질 정도였어.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나이젤의 [제 갈길 가시지!] 한마디에 걸음을 재촉했어. 윌은 팔을 들어 뒷목을 잡아 누르는 나이젤의 손목을 꽉 붙잡았지만 단단한 살가죽엔 하얀 기스만 비칠 뿐이었지.
[무슨 짓입니까! 이 손 풀어요.]
윌이 신음을 흘리며 손목을 잡은 손을 풀고 테이블을 치자 의외로 나이젤은 윌을 잡은 손을 풀었어.
[이제야 좀 평범한 반응인데.]
[허세 부리는 것도 정도껏 해. 귀엽다고 봐주는 것도 한 번뿐이야.] 그러더니 껄껄 웃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윌은 어이가 없어. 남자는 완전 제멋대로야. 숨을 들이키며 뒷목을 쓰다듬는 윌에게 나이젤이 부드럽게 말했어.
[애인? 가족? 아니면 혼자?]
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물어와.
[글쎄요.]
윌은 나이젤을 노려보며 아까와 똑같은 대답을 해.
[학습능력이 없군.]
나이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어. 위험한 징조야. 나이젤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윌은 까닥- 고개를 카페 쪽을 향해 흔들었지. 나이젤이 그 쪽을 보니 몇몇 손님들이 모여 휴대전화를 들고 유리문 너머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 주인도 달려 나온 모양인지 당장에라도 신고할 기세였지.
[쯧, 현명한 생각이 아닐 텐데.]
[당신에게 제 신상을 털어놓는 것도 현명하진 않은 것 같군요.]
그 말에 나이젤은 허- 어이없다는 듯 말했어.
[누가 잡아먹는데? 왜 그렇게 방어적이야.]
윌은 어깨를 으쓱했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보다 댁 애인이나 찾으러 가시죠.]
그러곤 구석에 놓인 안경을 들고 슬쩍 웃었지. 눈매가 가볍게 휘어졌어. 입가도 자연스레 올라가. 노을이 지면서 주변을 온통 노랗게 물들였어. 나이젤은 굳은 얼굴로 구겨진 코트를 정돈하는 윌을 바라 봐. 담배를 쥔 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가루가 부스스 떨어졌지. 윌은 깃을 여미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 숙이곤 미련없이 인사해.
[굿바이, 나이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