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rite

태오준호 14 - 완

도철은 옆구리에 파일을 끼고 조사실 문을 열었음. 안에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태오가 의자에 껄렁하게 기대 앉아 있음. 안녕하십니까아- 서도철 형사님.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건네옴. 도철은 속이 뒤집혔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태오의 맞은 편에 앉았음. 귀찮으니까 서론은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자수한다고? 도철이 파일을 내려다 보며 말했음. 태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렸음. 똑같은 말 몇 번이나 하게 만드시네. 전부터 생각했는데 형사님 머리 나쁘죠? 대한민국에 똑똑한 범죄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머리로 제대로 검거할 수 있겠습니까? 존나 얄밉게 실쭉거리더니 지겨워 죽겠다며 몸을 축 늘어트림. 도철은 흘끗 우측의 유리창을 바라봄. 성격 같아선 그냥 확 뒤엎고 싶은데 밖에서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 때문에라도 인내해야 했음. 내 대가리 걱정해줄 필요는 없고. 너 같은 새끼들 굴비처럼 엮어서 잘 집어 쳐넣고 있거든? 여튼 자수할게 뭐냐. 도철이 파일을 넘기며 퉁명스럽게 물었음. 태오는 의자를 당겨 테이블에 양 팔을 올리고 턱을 굄. 카톨릭대 7학년생 최준호 부제 납치감금 제가 했습니다. 도철의 눈썹이 꿈틀거렸음. 조사실은 방음이 잘 되어 있어서 조용했지만 귓가에 술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음. 김규남이라고 개인적인 경호로 불러 쓴 인력이 있는데 그 사람 패서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도철은 입을 떡 벌렸음. 태오는 아랑곳않고 술술 털어놓았음. 박철민. 강남에 제법 잘나가는 클럽 관리하는 새끼 반병신 만든 것도 접니다. 도철은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었음. 아참, 그리고 이거. 태오는 가지고 온 서류가방을 열더니 플라스틱 통을 하나 꺼냄. 탁- 테이블 위에 올려 도철 쪽으로 밀었음. 뭐냐? 도철이 의아하게 보자 태오가 설명했음. 얼마 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새로 들어온 브로커인데 인천항으로 왔다더군요. 박철민 털면 나올 겁니다. 이쯤되니 상황이 조온나 이상함. 도철은 플라스틱 통과 태오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음. 너 혹시 지금 약했냐? 그러자 태오가 깨달았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림. 아~ 약도 하고 올걸 그랬네. 피 뽑으면 바로 나왔을텐데 아쉽다. 야 너... 자 잠깐 기다려라. 도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사실 밖으로 나갔음. 밖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음. 저새끼 미쳤냐 왜저래? 저 통 진짜 마약이야? 다들 웅성웅성 난리임. 오팀장이 주위를 진정시키더니 도철에게 말했음. 일단 들을 거 다 들어. 지금까지 나온 내용은 애들 시켜서 조사할테니까 넌 들어가. 윤형사가 필기한 노트를 찢더니 밖으로 뛰어 나갔음. 도철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유리창 너머를 보았음. 태오가 데스크에 엎드려 플라스틱 통을 빙빙 돌리고 있음. 아오 저거 대체... 한숨이 푹 나왔음. 귀신에게 홀린 기분임.


준호는 침대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음. 날씨는 맑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부는지 마른 나뭇가지가 일정하게 흔들리고 있음. 그럼에도 병실 안은 고요했음. 창문 흔들리는 소리도 안들림. 김신부 말처럼 VIP룸은 뭐가 달라도 다름. 자살시도 후 정신이 든 준호는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 같았음. 김신부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고 도철의 제안을 무시하는 등 자포자기식으로 구는 것도 어쩌면 현실감이 없기 떄문일지도 모름. 준호는 신앙심이 죽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함. 김신부가 쥐어 준 장미묵주를 굴리며 조용히 기도해 보아도 전과 같은 믿음이 느껴지지 않았음. 나는 성직자의 길을 걸어선 안되는 것일까. 여름 날 요란했던 장엄구마 이후 준호는 단 한번도 사제의 길을 의심한 적이 없었음. 그러나 태오와 만난 이후로는 늘 의심과 고뇌의 나날임. 김신부의 말처럼 신의 안배로 자살을 실패했다면 그편이 오히려 더 충격이었음. 이 상황을 타개할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기에. 준호는 지쳐 있었음. 치열하게 앞으로 걸어 나갈 의욕이 없음. 약물의 후유증인지 모르겠지만 계속되는 무기력증으로 깊은 생각을 하기 힘들었음. 그럼에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있음. 조태오. 준호의 안에서 태오는 끔찍한 강간마이기도 했고 어린아이 같은 속내를 비치며 달라 붙어 오는 연민의 대상이기도 했음. 둘의 차이는 극명했지만 준호에겐 그 경계가 허물어진지 오래임. 정말 우습게도 준호는 태오가 보고 싶었음. 옥상에서 뛰어 내리기 전 흘끗 일그러진 표정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음. 그 순간만큼은 태오의 감정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음. 숨이 끊어지기 직전 환자처럼 절망스러운 얼굴로 용서를 구했었음. 그것은 준호에게 저열한 만족감을 주었음. 그러나 태오는 정신이 든 준호를 한 번도 보러오지 않았음. 김신부가 문 밖에 계속 있었다고 말해줬지만 준호에겐 병실 안이 지금 세상의 전부였기에 크게 실감나지 않았음. 왜 밖에서 그러고 있을까요? 준호가 김신부에게 물었을때 '니가 좋아서 죽겠단다.' 라는 대답을 들었음. 동문서답이었음. 가끔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침대 옆 협탁에 책이 쌓여 있었음. 그 중에는 별장에서 읽었던 소설의 뒷편도 있었음. 하하... 조용한 병실에서 바보처럼 웃어봄.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어색함. 


점심이 막 지났을 무렵 김신부가 찾아옴. 준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손짓으로 막음. 그냥 누워 있어라. 김신부는 평소처럼 준호 옆에 의자를 당겨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음. 조태오가 자수했다. 준호는 믿기지 않는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음. 뭐라고요? 김신부는 담담하게 그가 자수한 항목을 읊기 시작했음. 최준호 납치감금. 경호원 폭행치사. 마약투약 자백 등등 준호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음. 자수를 해요? 그 사람이? 김신부의 주머니에 넣어 둔 담배곽이 부대끼는 소리가 났음. 자백한 걸 바탕으로 형사들이 조사했는데 입건은 확실하단다. 하여간 웃긴새끼. 김신부가 턱을 긁적이며 툭 내뱉음. 준호는 굳었음. 그럴리가 없는데... 준호의 중얼거림에 김신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음. 어쨌든 끝났다. 넌 학교로 돌아갈거다. 그 말에 준호가 어깨를 움츠렸음. 미약한 움직임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읽은 김신부가 눈썹을 찌푸렸음. 그래도 섣불리 자극이 될 만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음. 침묵은 익숙했음. 그러나 시간을 더해갈수록 혼란한 마음에 잡음이 쌓임. 그 새끼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냐. 김신부가 눈을 감고 물었음. 준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음. 계속... 떠오릅니다. 딱히 짚어 말할 수 없는 먹먹함에 목소리가 떨렸음. 어떻게 해야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애틋한 마음을 버리고 완벽한 피해자로서 당당하게 그를 원망하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지친 마음으로 열심히 생각함. 그러나 준호는 주사기를 든 악마같은 조태오 위로 사랑한다며 웃는 조태오가 겹치는 것을 막지 못함. 신부님. 준호가 힘없이 부르자 김신부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듬. 말해라. 얼마 전 고백의 순간처럼 분위기가 무겁게 잡힘. 제 마음이 병든 걸까요. 준호가 물었음. 잠시 침묵하던 김신부가 대답함. 나는 너와 조태오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른다. 그렇기에 세간의 상식에 일거해 판단내리는 거지. 결론은 병자 맞다. 준호는 떨리는 눈을 감았음. 그때 김신부가 한마디 덧붙임. 그러나 네 마음은 아가토 네가 더 잘 알지 않겠냐. 스스로 판단해 봐라. 기다리마. 뜻밖의 말에 준호는 후후 웃었음. 너무 어려워요 신부님. 김신부도 피식 웃었음. 온화한 공기가 사제들 사이에 감돌았음. 준호도 김신부도 오랜만에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웃는 것 같음. 길은 하나가 아니다. 모로 가더라도 목적지만 같으면 돼. 김신부가 부드럽게 말했음. 그 언젠가 했었던 생각임. 준호는 공기를 크게 들이키며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며 입을 열었음. 오랜만에 기도소리가 흘러나왔음.


태오의 자수는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킴. 최대한 통제했지만 신진물산 조실장이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추측 기사가 쏟아짐. 도철은 양팔을 각각 하나씩 덩치 좋은 형사들에게 붙들려 있는 박철민을 보며 혀를 찼음. 조태오의 말은 사실이었음. 절대적인 증거인 마약이 있었기에 일이 술술 풀렸음. 약을 정제하는 방식은 브로커들 마다 각각 다르기 마련임. 박철민의 클럽 구석에 위치한 방도 증언과 일치했음. 추궁의 형식을 빌려 협박하자 박철민은 쉽게 입을 열었음. 새로 들어온 브로커는 생각보다 거물이었음. 물류항에 쌓인 컨테이너 박스 무려 4개가 그들의 본거지였고 거기서 발견한 마약은 최근 2년간 경찰이 압수했던 양보다 1.5배나 많았음. 엄청난 실적을 올려 기뻐하는 팀원들을 지켜보며 도철은 태오가 왜 자백했는지 추론해 봄. 마약사범이 자수를 한다면 형기를 줄여줌. 그러나 조태오가 그것을 노렸다는 것은 말도 안됨. 일반인들에게 직접 유통되지 않고 내부자들끼리 돌리는 유통망이아 꼬리를 잡기 쉽지 않는 구조였음. 애초에 태오가 입을 털지 않았다면 쥐도 새도 몰랐을 일임. 거기다가 감금과 폭행등의 다른 죄를 함께 털어놓을 이유가 없음.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또라이가 아닌 이상에야 자수할 이유가 없는 것임. 도철은 자연스럽게 준호를 떠올렸음. 이 모든 일의 시작점.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아 신학대는 고사하고 범죄자로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를 최준호 아가토 부제. 만약 태오가 준호를 '위해서' 출두했다면 아귀가 들어맞음. 그러나 도철은 고개를 저었음. 말도 안됨. 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 재벌3세 개또라이 조태오가 평범한 신학생에게 감화 되어 회개하는 결말은 허무맹랑함.


신진그룹에 폭풍이 몰아쳤음. 최상무는 조회장에게 불려가 그간의 일들을 해명했음. 당연하게도 조회장은 불같이 화를 냈음. 최상무는 뺨을 맞고 골프채로 어깨를 가격당해 골절상을 입음. 그동안 얌전히 지내나 싶더니 결국 저를 속이고 대형사고를 쳤다며 길길이 날뜀. 부들부들 떨던 조회장은 혈압이 올랐는지 비틀거려서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음. 최상무는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꾹 감았음. 솔직히 말해서 최상무는 조회장이 비웃김. 그동안 아들 인성이 개판 날때까지 방임주의를 빙자한 무관심으로 응대해 놓고, 이제와서 왜 제대로 크지 않았냐고 지랄지랄 해봐야 설득력이 없음. 솔직히 저렇게 날뛰는 모습을 보면 조태오는 조회장을 빼다 박았음. 어디가서 자식 아니란 소리는 못할 것임. 최상무가 조회장을 비웃든 말든 사태는 긴박하게 흘러갔음. 조회장은 최상무에게 조태오를 빼올 것을 지시했음. 법무팀을 붙여줄테니 최대한 빨리 빼오라고 함.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진그룹 조씨 일가의 이미지를 위해서임. 최상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회장실을 나왔음. 


완벽하게 아물기도 전에 다시 어긋난 갈비뼈와 부러진 정강이뼈의 고통으로 준호는 진통제 처방을 받았음. 마약 중독 초기상태인 준호에겐 굉장히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음. 찔끔찔끔 들어오는 진통제의 몰핀 성분으론 성이 차지 않아 좀 더 강한 성분과 많은 양을 원했음. 그러나 준호는 꾹 참았음. 김신부도 곁에서 도와줌.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자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다닐 수준이 됨. 준호는 휠체어에 앉아 두꺼운 패딩을 덮고 머플러를 두른 채 화단으로 나갔음. 김신부가 투덜거리며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음. 야. 보통 반대 아니냐. 김신부에 말에 준호가 웃었음. 마음에 안드시나요? 그래서 나이 많으신 걸로 유세떠시는 겁니까? 능글거리며 장난스럽게 묻자 김신부가 어이없이 웃음. 새파랗게 젊은 놈 휠체어나 밀어주고 있는 내 신세가 한심해서 그렇다. 준호는 어깨를 으쓱했음. 김신부는 휠체어를 밀며 화단을 거닐었음. 근데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어쩐지 목적이 정해진 것처럼 발길에 거침이 없어서 준호가 물었음. 김신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음. 너 떨어진데 구경하러 간다 왜. 준호는 잠깐 움찔했으니 이내 한숨을 푹 쉬었음. 둘은 한동안 건물의 반 정도를 걸었음. 그리고 마침내 김신부가 발걸음을 멈춤. 거칠고 굵은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킴. 저기네. 준호는 그곳을 바라보았음. 수풀이 우거졌다고 들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음. 잎사귀가 다 떨어진 마른 물푸레나무 아래에 깔린 잔디는 거칠고 짧았음. 말라 비틀어진 잎사귀 몇 개만 나뒹굴고 있을 뿐임. 준호가 말이 없자 김신부가 독백하듯 중얼거렸음. 신기한 일이지. 너 떨어지고 며칠 뒤에 이렇게 됐다더라. 준호는 고개를 숙였음. 초췌해진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음. 만나겠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김신부가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채로 시선을 내리 깜. 만나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제 마음을요. 준호의 고백에 김신부가 물었음. 그래. 결심이 섰냐. 차가운 바람이 불었음. 김신부는 준호의 목 뒤로 머플러를 둘러줌. 신부 서품... 받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신부님. 바람이 멈췄음. 김신부는 조용히 눈을 감았음.


대질심문 날이었음. 준호는 휠체어를 타고 도철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감. 김신부가 의자를 빼고 휠체어를 밀어줌. 고맙습니다. 저 그리고 서도철 형사님. 무릎을 굽혀 휠체어 브레이크를 걸어주던 도철이 고개를 들었음. 그... 전에는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하게 굴었죠. 준호의 솔직한 사과에 도철이 서글서글하게 웃었음. 이쪽 일 하다보면 그 정도는 무례 수준도 안되니 신경쓰지 마십쇼. 사람 좋은 도철의 말에 준호가 미소지었음.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도철은 웃으며 감사를 받았음. 이제 곧 조태오 그자식 들어오니까 혹시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언제든 말해요.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기 힘드실텐데 어려운 결심 하셨습니다. 도철의 말에 준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음. 김신부는 준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음. 도철과 시선을 마주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걸로 김신부의 역할이 끝남. 나가 있으마.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멀어짐. 곧 문이 열렸다가 닫힘. 방 안에는 도철과 준호만 남음.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님. 준호와 도철이 들어온 문 반대쪽 문에서 태오가 경찰관을 대동하고 들어왔음. 준호는 몸을 움찔 떨었음. 구치소에서 며칠 보낸 태오는 황토색 죄수복 차림에 늘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카락도 부스스하게 내려와 있었음. 도철이 의아하게 물었음. 너 변호사는 어따 두고 혼자 들어오냐? 태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음. 오지 말라고 했어요. 오늘은 필요 없거든. 무어라 태클을 걸려던 도철은 입을 꾹 다물고 굳어 있는 준호를 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음. 그러냐. 그럼 시작하자. 태오는 수갑을 찬 두 손으로 의자를 빼네고 털썩 앉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음. 도철은 두 사람을 중재하듯 중앙에 앉아 데스크에 올린 파일을 펼쳤음. 조태오씨는 최준호씨를 납치 감금 폭행 협박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도철의 말에 태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구속된 두 손을 들어 보였음. 인정합니다. 근데 이 말 열 번 넘게 하는 거 알아요? 도철은 파일을 들어 태오의 머리를 내려치고픈 마음을 억누름. 그럼 최준호씨는 조태오씨에게 피해를 당한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도철이 말하자 준호는 조금 머뭇거렸음. 핏기 없는 입술을 우물거리는데 갑자기 태오가 수갑을 찬 손으로 데스크를 내려 침. 쾅! 큰 소리가 났음. 왜 그래요 부제님? 오랜만에 나 보니까 갑자기 무서워?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잖아. 태오의 비꼼에 준호는 안색이 창백해짐. 도철이 큰 소리로 윽박지름. 야! 무슨 짓거리야! 그때 준호가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끄덕임. 인정합니다.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험악한 공기가 흘렀음. 도철은 이를 벅벅 갈며 준호의 안색을 살폈음. 조금 창백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아 보임. 조태오씨는 최준호씨에게 3개월에 걸쳐 지속적인 약물을 투여하고 폭력을 사용해 2급 상해를 입혔으며 주변인들의 신변을 들어 협박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도철의 말에 태오는 똑같이 대답함. 인정합니다. 조금의 떨림도 망설임도 없었음. 준호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음. 아까부터 태오는 준호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음. 늘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을 걸던 평소의 모습과 달라서 어쩐지 어색했음. 도철은 같은 말을 준호에게도 물었고 준호 역시 똑같이 대답했음. 심문의 흐름은 조금의 굴곡도 없었음. 마치 '인정합니다' 라는 말만 허락된 간담회에 온 기분이었음. 그렇게 몇차례 반복하자 태오가 자백한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이 끝났음. 대질심문이 싱겁게 마무리 지어짐. 도철이 파일을 덮음. 태오를 데리고 들어온 경찰관이 발을 움직임. 그때 준호가 다급하게 말했음. 잠깐만요, 할 말이 있습니다. 도철은 의아했으나 고개를 끄덕였음. 태오는 여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음. 왜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습니까. 준호가 물었음. 그러자 태오는 피식 웃었음. 이제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요? 말투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지만 몇 개월간 계속 그의 곁에 붙어 있었던 준호는 미묘한 어색함을 감지했음. 중요합니다. 왜 시선을 피하죠? 준호의 집요한 물음에 태오는 이를 갈았음. 씨발. 그냥 빨리 병원 가서 치료나 받다가 학교로 돌아 가란 말이야. 왜 자꾸 날 자극해? 설마 또 당하고 싶어? 고개를 숙인채로 거칠게 말함. 도철이 일어서려하자 준호가 저지했음. 저 학교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담담한 말에 그제서야 태오가 고개를 듬. 눈이 마주치자 준호는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 뭐... 왜? 태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음. 진심으로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임. 준호는 계속 말했음. 사제 서품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남. 경찰관이 발을 움직였으나 이번엔 도철이 고개를 저음.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 이유... 이유를 말해봐요. 태오가 숨막히는 소리를 냈음. 너무나도 겁먹은 목소리라 듣고 있던 도철도 의아할 정도였음. 저에게는 필요 없으니까요. 준호의 말에 태오는 입술을 꽉 물었음. 두통이 오는지 수갑이 채워진 양손으로 이마를 눌렀음. 강박적인 행동이었음. 터져나오는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으려는 것 같음. 뜸을 들이던 태오가 더듬더듬 중얼거리기 시작했음. 왜 필요 없죠? 죽을거니까? 처음에는... 실패했으니 이번엔 확실하게 성공할거야? 목소리가 돌을 던져 넣은 호수의 표면처럼 잔잔하게 흔들렸음. 수갑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음. 화를 참고 있는 듯 보였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준호는 어쩐지 정신이 아득해졌음.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으로 경찰을 대동하고 만났음에도 준호는 아직 그 별장에 있는 기분임. 태오의 말은 사슬처럼 준호를 속박했음. 그리고 그 속박에서 안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함. 준호가 어색하게 중얼거렸음. 죽어도... 됩니까? 과거로 돌아간 준호의 질문임. 그때는 대답을 듣지 못했었음. 그리고 지금은. 다음 순간 준호는 깜짝 놀랐음. 수갑을 내린 태오의 얼굴이 준호를 향했음. 찌푸린 눈썹과 경련하는 눈동자가 그가 굉장히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음. 준호는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냈음. 태오는 의자에 털썩 앉았음. 수갑을 찬 두 손을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모아 데스크에 세우고 고개를 푹 숙인채 부들부들 떨었음. 손가락 끝이 손등을 강하게 눌러 살이 하얗게 질렸음. 제발... 태오가 씹듯이 중얼거렸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준호는 정신이 조금씩 갉아먹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음. 제발... 계속 중얼거렸음. 길을 잃은 아이처럼 겁먹은 목소리로 흐느꼈음. 제발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 쉬어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음. 준호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도철과 경찰관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음. 준호는 눈앞이 울렁거렸음. 자신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안겨준 사람인데 왜 그가 우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음. 짧은 시간동안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오가 갑자기 얼굴을 들었음. 씨발! 태오는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다급하게 외쳤음. 다시는 내 앞에서 죽는다는 말 하지마. 한 번만 더 그딴소리 지껄이면 내가 먼저 죽여버릴거야! 분노가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목소리였음. 경찰관이 태오의 몸을 잡아 저지했음. 야 임마 이새끼 갑자기 왜이래. 도철도 자리에서 일어나 날뛰는 몸을 잡아 눌렀음. 준호만 멍한 얼굴로 태오를 바라 보고 있었음. 문이 열리더니 경찰이 한 명 더 들어왔음. 각각 한팔씩 잡은 두 경찰은 태오를 짐짝처럼 질질 끌고 감. 내 말 듣고 있죠 부제님? 죽지 말라고 씨발!!! 태오가 기를 쓰며 준호를 향해 외쳤음. 그 소리는 문이 닫히기 전까지 계속 들려왔음. 


기분이 이상합니다. 아래에서 허무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김신부는 휠체어를 밀면서 고개를 숙였음. 뭐가 이상하냐. 김신부가 중얼거리자 준호가 멍하니 대답했음. 그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서요. 근데 그 이유가 참 이상하네요. 경찰서 복도를 지나 입구가 보임. 김신부는 발을 멈추지 않았음. 저의 행동범위를 자기 곁으로만 두던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위해서 태오가 자수했다는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니 얼떨떨했음. 입으로는 연신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함. 김신부는 말없이 휠체어를 밀었음. 


며칠 후 도철에게 연락이 옴. 태오가 준호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함. 도철이 전화로 전달하며 혹여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도 좋다는 의사를 내비침. 그러나 준호는 승낙했음.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강화 유리가 가운데 놓인 작은 접견실이었음. 가운데 작은 구멍이 몇 개 뚫려 있는 유리는 별장 창과 비슷한 재질 같았음. 별장. 그때와 반대로 준호는 자유의 몸이었고 태오는 구속되어 있음. 이상한 느낌임. 조금 기다리자 태오가 들어왔음. 대동한 경찰관은 약간 떨어진 의자에 앉음. 터벅터벅 걸어온 태오는 앞에 있는 준호를 향해 고개를 들었음. 왔네요 준호씨.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음. 할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태오는 의자에 앉아 준호를 빤히 바라봄. 진짜... 살아 있는 거 맞구나. 믿을 수가 없는지 태오가 큭큭 웃었음. 손가락을 꿈지럭 거리며 어색하게 얼굴을 쓸어내림. 왜 제가 잘때만 병실에 들어왔습니까? 준호가 불쑥 묻자 태오는 얼어붙음. 어떻게 알았어요? 치부를 들킨 것처럼 움츠려듬. 평소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엄마에게 꾸중 맞기 직전의 어린애가 앉아 있음. 별장에서 읽었던 소설 2권이 있더군요. 준호의 말에 태오가 끙 앓았음. 그 모습이 이상하게 귀엽게 느껴져 준호가 약간 웃었음. 그러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빤히 응시해옴. 웃네요. 준호는 피식함. 웃으면 안됩니까? 태오는 재빨리 고개를 저음. 아니야. 그냥 신기해서 그래요. 준호씨가 웃으면 좋지. 태오가 힘없이 중얼거림. 불필요한 침묵이 흘렀음. 태오가 화제를 전환함. 부제님 기억나요? 왜 그때 부모님이랑 김신부님이랑 통화하면서 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했잖아. 준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임. 기억납니다. 태오는 씨익 웃으며 팔을 들었음. 그리곤 수갑 찬 손을 유리창에 댐. 앉아 있던 경찰관이 떨어지라고 경고하자 태오가 아~ 잠깐만요! 하며 건들거림. 준호는 의아함. 태오가 계속 실실 웃으며 손을 겹쳐 달라고 함. 그게 소원입니까? 의아한 준호에게 태오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듬. 이건 그냥 부탁이야.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요 부제님. 내가 소원 백개로 늘려달라고 안하는 걸 다행으로 알아. 오랜만에 조땅당한 조태오임. 준호는 피식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 유리창 너머 태오의 손바닥과 겹쳤음. 좀 민망했지만 태오가 이러는게 한 두번도 아니고 준호는 이미 적응 완료임. 그럼 이제... 태오가 조용히 중얼거렸음.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광장히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음. 학교로 돌아가서 신부가 되세요. 준호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짐. 처음엔 잘못 들었나 했음. 신부가 되요. 구마는 안했으면 좋겠지만... 준호씨가 꼭 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고. 준호가 어색하게 되물었음. 그게 소원이에요? 태오가 고개를 끄덕임. 신부가 되서 언젠가 내가 고해성사하면 받아 줘요. 준호는 멍하게 입술을 달싹임. 고해성사는 천주교 신자만 가능한데... 태오가 낄낄 웃었음. 까짓거 믿어 보지 뭐. 굉장히 불순한 목적을 가진 신도가 탄생하는 순간임. 준호는 계속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함. 자수는 왜 한겁니까. 스스로 추측한 것은 도무지 납득이 안되었기에 태오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음. 그러자 태오는 눈을 내리깜. 부제님 뛰어내린거랑 어느 정도 합이 맞으려면 이쯤은 되야겠다 싶더라고. 준호는 진짜 놀랐음.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데 그 표정을 오해했는지 태오가 다급히 덧붙였음. 아니 합이 딱 맞을거란 뜻이 아니라 그냥 뭐 대충... 지지부진한 변명의 말을 자르며 준호가 직구로 물었음. 그러니까 지금 저에게 속죄하고 있는겁니까? 잠깐 멈칫한 태오가 희미하게 웃었음. 솔직하게 말할게요. 난 속죄가 뭔지 몰라요. 그딴거 왜 해야 하는지도 이해 안되고. 준호는 알 수 없는 얼굴로 태오를 바라봄. 무작정 따라 하는 거야. 준호씨가 나한테 말했던 것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런 짓은 하지마라... 그걸 참고로 부제님이 좋아할 만한, 도움이 될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거지. 서도철 형사나 김 베드로 신부처럼 자연스럽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조태오와 거리가 먼 고백이었음. 신부가 되어서... 태오가 느릿하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유리에 대왔음. 날 용서해 줘요. 막힌 유리창 너머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음. 준호는 눈을 감고 짧게 기도했음. 


아직 차가운 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1월, 준호는 휠체어를 탄 채로 신부 서품을 받음. 성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었음. 몸이 불편한 준호는 땅에 엎드린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늘어트린 영대에 입을 맞추는 걸로 대신함. 주교의 선언과 함께 식은 경건한 분위기에서 최종장으로 향해 갔음. 학장신부가 준호의 휠체어를 밀어줌. 멀지 않은 곳에서 김신부와 박교수 그리고 영신이가 박수를 보냈음. 규남은 목발을 짚고 여자친구와 함께 참석함. 도철과 팀원들도 초대를 받아서 일반인들 틈에서 예식을 지켜 보았음. 구석진 곳에서는 최상무가 조용히 식을 관람함. 태오는 없었음.


참 사람 앞 길 알 수 없다. 그렇죠? 도철은 고급 정장을 갖춰 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넘긴 조태오를 지켜보며 띠껍게 답했음. 하... 거참, 진짜 그렇네. 너네 집안 대~단하다. 비꼬고 있지만 도철은 지금 속이 뒤집힌 상태임. 조태오는 경찰측이 내민 증거는 물론이거니와 시키지도 않은 폭행상해죄까지 자백해 모든 죄를 인정했음.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았음. 그러나 신진물산 측 법무팀은 조태오의 심신미약을 주장했음. 준호와 태오의 대면심문시 녹화되던 CCTV를 비롯해 다른 진술때 그가 보여준 불안정하고 이해하기 힘든 자백 등의 여러 상황을 모두 모아서 밀어붙였음. 실제로 CCTV의 태오는 슬픔에 잠겨 흐느끼다가 갑자기 돌변해 소리를 치는 등 정신질환자로 보이게 하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음. 윗선에서도 쉬엄쉬엄 넘어가고자 하는 분위기였음. 인천항 마약 수사로 엄청난 실적을 올려 매스컴은 연일 칭찬을 쏟아 냈고 그것을 폭로한 태오에게 동정론도 쏟아지는 중임. 결국은 심신미약으로 석방 처분을 받음. 도철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조태오라 적힌 두꺼운 파일 표지를 닫았음. 너 이럴 줄 알고 자수한거냐. 도철은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정돈하고 있는 태오에게 물었음. 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되돌아온 질문에 도철이 인상을 찌푸렸음. 그의 직감은 질문을 부정함. 도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태오가 흘낏 보며 피식 웃었음. 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특별할 거 하나 없죠. 그저 집안에 돈이 많을 뿐이지 스스로 가진 건 아무것도 없어. 태오의 중얼거림이 어쩐지 서글프게 들림. 그러나 그를 동정하고 싶지 않았던 도철은 인상을 팍 쓰며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남. 갈려면 빨리 나가라. 너 꼴 보기 싫다. 태오는 낄낄 웃었음. 그럼 가보겠습니다. 몸 건강 하십쇼! 언젠가 저 잡아 넣어야죠 안그래요? 도철은 달관한 표정으로 손을 훠이훠이 저음. 죄 짓고 살지 말라 했다. 또 보고 싶으면 니 좆대로 살던가.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던 태오가 잠깐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봄. 이제 볼 일 없을겁니다. 도철이 고개를 기우뚱함. 그러니 걱정 그만하고 나쁜 새끼들이나 잡으러 열심히 뛰십쇼. 문이 닫혔음. 도철은 인상을 팍 쓰고 머리를 긁적임. 가만, 지금 저새끼 저거 다시는 죄 안짓겠다고 한거야? 존나 믿을 수 없었지만 상황을 정리하자면 딱 그랬음.


태오가 아직 구치소에 있을 때 최상무가 면회를 왔음. 준호가 신부 서품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줌. 태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음. 몸은 좀 어떻대? 태오의 물음에 최상무는 아직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많이 나아서 곧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답해줌. 만나러 갈거야? 최상무가 탐색하듯 물었음. 태오는 그 의도를 파악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음. 나중에... 아니 언젠가는.


봄이 지나고 슬슬 초여름으로 계절이 변해감. 태오는 조회장의 지랄을 묵묵히 받으며 법원에서 지시한 대로 병원을 내원했음. 구치소에서 나온지는 세달 가까이 지났지만 한 번도 준호를 찾아가지 않았음. 준호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오라는 지시 조차 안했음.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나온 부질없는 시도였고 결과는 역시 예상한대로임. 태오는 준호가 보고 싶었음. 그러나 무슨 수행이라도 하듯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억지로 표정을 지웠음. 가슴 속에 딱딱한 돌덩이가 쌓이는 듯 함. 어쩌면 무뎌져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태오는 억지로 생각하기로 했음.


최상무는 꽃마을 보육원에서 요즘 잘 지내는지 안부를 전해왔다고 태오에게 알려줌.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태오는 자연스럽게 준호가 떠올랐음. 아이들을 안아주는 준호, 침을 질질 흘리는 애를 등에 업고 화단을 걷던 준호. 억지로 눌러 두었던 그리움이 피어 올랐음. 어떡할까? 사람 보낼까? 최상무의 말에 태오는 정신을 퍼뜩 차렸음. 아니 됐어. 내가 가볼게. 최상무는 고개를 끄덕임. 


보육원은 늘 그랬듯 똑같았음. '마' 자 간판이 기울어 있는 정문을 지나며 태오는 사람을 보내 시설을 정비해야 겠다고 생각함. 차를 구석에 주차한 태오는 주위를 둘러보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로 향했음. 아직 초여름이었지만 녹음이 우거지고 곤충우는 소리가 들림. 하늘은 높고 바람이 살랑살랑부는게 좋은 날씨임. 건물로 들어선 태오는 맞은편에서 책자를 들고 오는 수녀를 마주함.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나요. 태오의 인사에 수녀가 반갑게 미소지음. 어머, 정말 오랜만이네요 조실장님. 요즘 얼굴 뵙기 힘들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시고.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더 신경써서 대접했을 텐데요. 수녀의 말에 태오는 고개를 갸웃함. 최상무가 분명 보육원에서 먼저 안부를 묻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음. 태오가 말하자 수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김. 잠시 후에 아- 하고 입을 열었음. 최신부님이 대신 연락했나 보네요. 태오는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질 뻔함. 최... 신부님이요?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어색함. 수녀가 호호 웃었음. 얼마 전까지는 최부제님이셨죠. 올해 신부 서품을 받았으니 이젠 최신부님이시죠. 조실장님은 모르셨나요? 태오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저음. 아... 알고 있었습니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미친듯이 울렸음. 진정이 안됨. 마침 잘 됐네요. 지금 애들 데리고 뒷산에 갔거든요? 본관 뒤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따라 올라가시면 만날 수 있을거에요. 가보시겠어요? 그 권유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태오는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가는 수녀의 뒤를 따랐음. 원장실에 들어가 책상 위에 들고 있던 책자를 올려 놓은 수녀는 찬장을 열고 안에 과자가 잔뜩 든 바구니를 꺼냈음. 얼마 전에 규남씨가 다녀가셨거든요. 이런 과자가 몇 개나 더 있어요. 애들 이 썩는다고 많이 먹이지는 못하겠고... 그래도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죠. 태오는 수녀의 입에서 규남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음. 껄끄러움에 무어라 대답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던 태오에게 수녀가 바구니에 이것저것 더 챙겨 넣더니 건네줌. 음료수도 몇 개 넣었으니 최신부님이랑 같이 드시구요. 수녀의 페이스에 말려든 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음. 허... 정신을 차리리 한 손에는 과자가 잔뜩 든 바구니를 들고 있음. 어쩐지 목이 졸리는 느낌에 한 손으로 넥타이를 편하게 풀며 목을 돌렸음.  










태오는 부지런히 발을 놀려 오솔길을 올랐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갈무리할 수 없는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산이라고 칭하기도 부끄러운 작은 언덕 같은 원만한 경사를 오르며 태오는 등반중인 산악인처럼 헉헉거렸다. 오분 남짓, 그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멀리 커다란 밤나무가 보였다.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작은 폭탄처럼 꺄르륵 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낮은 돌더미 위에 검은 수단의 남자가 걸터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었지만 태오는 금방 알아차렸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땀을 닦았다. 햇살이 여울져 빛났다. 태오는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책을 읽던 준호는 고개를 들어 뛰어다니며 비누방울을 불고 물총을 쏘아대는 아이들의 머릿수를 세었다. 가장 키가 작은 한 아이를 마지막으로 수가 딱 들어맞자 안심이 된 준호는 입에 꾹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솔길 끝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깔끔한 정장 차림에 반듯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는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과자바구니를 든 남자를 보고 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남자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당황한 준호는 옆에 둔 목발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발을 내딛었다. 

"헉." 

몸이 휘청이자 달아나려던 남자가 자리에 붙박힌 듯 멈추었다. 힘들게 균형을 잡은 준호는 목발을 향해 손을 뻗다가 결국 쓰러졌다. 

"신부님!" 

"형아!"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억지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긴 수단이 흙바닥에 더럽혀졌지만 일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익숙한 목소리에 준호는 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태오가 바닥에 바구니를 내려 놓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바구니로 달려들었다. 준호가 내민 손을 잡자 태오가 힘을 줘 끌어 올렸다. 휘청이는 몸을 부축해 돌더미에 앉는 것 까지 도와주었다. 닿았던 몸이 떨어지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천천히 하나씩 가져 가." 

준호가 아이들을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태오는 어색하게 서서 그런 준호를 바라보았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준호가 인상을 팍 썼다. 

"뭘 그리 봅니까." 

태오가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했다. 

"그... 오랜만이라서." 

더듬거리며 말하는데 퍽이나 우스웠다.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까지 왜 안 찾아 온겁니까? 신부가 되면 고해성사 해달라더니... 거짓말이었습니까?" 

준호가 쏘아대자 태오가 변명하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난... 부제님이 화낼거라 생각해서 시간을 좀 두려고 했지." 

"부제 아닙니다." 

"아 그래 그래. 이제 신부님이네." 

대화가 끊어졌다. 원래 이렇게 어색한 사이였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하겠다. 태오는 준호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 지 몰랐다. 늘 제멋대로 휘둘렀고 준호는 그걸 참고 받아줬기에. 그런식의 일방적인 소통 말고는 평범한 인사말을 주고 받는 것조차 태오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눈 앞에 두니 까마득하다. 

"날 보기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르고 골라 꺼낸 말이 이따위라니, 태오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의외로 준호는 고개를 들어 태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는 제 말을 잘 들어주신 것처럼 말하시네요." 

가시가 담긴 문장이었지만 어투가 장난스러웠다. 그럼에도 태오는 지레 찔려 몸을 움찔 굳혔다. 

"고해성사, 하시겠습니까?" 

준호가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태오는 겁에 질린 눈으로 준호를 내려 보았다. 

"그건..." 

솔직히 두려웠다. 고해성사가 끝나면 최준호는 더 이상 조태오와 볼 일이 없어진다. 약속의 종결이다. 둘 사이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끝나는 건가요." 

태오가 물었다. 준호는 의아한 눈으로 그런 태오를 보았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 고민하던 준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끝? 조태오씨가요? 지금 끝이라고 말 한 건가요?" 

잠시 태오를 올려다 보던 준호가 큭큭 웃기 시작했다. 하하핫- 하고 정말 즐겁다는 듯 웃었다. 해맑은 얼굴이었다. 부하들에게 시켜 가져온 증명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활짝 개이는 미소. 태오가 멍하니 보고만 있자 준호가 큭큭 웃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법원판결로 병원 다닌다더니 혹시 이상한 약이라도 먹었어요?" 

놀리는 말에 태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준호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세요 태오씨. 이제 그만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부드러운 애정과 다정한 격려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태오는 준호의 말을 곱씹었다.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다음 순간 태오는 입을 조금 벌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급히 준호를 보았다. 첫만남을 기억한다. 그 끔찍하고 악마같은 자신을 향해 준호는 손을 내밀며 해맑게 웃고 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말에 담긴 기회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달콤했다. 두번째 기회였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영대가 없네. 약식으로 가겠습니다." 

준호가 중얼거리며 목발로 손을 뻗었다. 

"아니야. 그냥... 그냥 앉아 있어요." 

태오가 준호의 어깨를 눌렀다. 준호가 의아해하자 태오가 발을 움직여 준호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고해합니다." 

무릎을 꿇은 것으로도 모자라 몸을 낮게 낮추었다. 그리고는 발에 입맞추었다. 

"에베베~ 형아가 신부님 발에 뽀뽀했어~"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놀려댔다. 그러나 준호도 태오도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매미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이들이 뛰어 노느라 흙바닥이 파헤쳐지는 소리, 왁왁 떠들어대는 행복한 높은 음이 여기저기서 울려퍼졌다. 바람이 불어 녹음이 우거진 수풀이 부대끼느라 사락거리는 시원한 소리까지. 좋은 날이었다. 준호가 태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죄를 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