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하다하다 새끼개미까지 키우네?
작은 포대기를 껴안고 어르던 토르가 몸을 돌리자 로키가 삐딱선을 타고 현관문에 기대서있음. 들어오는 소리도 안들렸지만 그편이 자연스러웠음
오랜만이군
한동안 얼굴 보기 싫다며
그게 2년이 될 줄은 몰랐지
내가 그리웠나봐?
부정은 않겠다
로키로선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음. 오랜만에 미드가르드에 와서 형의 흔적을 찾았는데 웬 인간 아기를 키우고 있음.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전처럼 누더기 차림새로 다니지 않는다는게 다행이랄까, 커다란 덩치가 작은 아기를 안고 있으니 그 대비가 우스웠음. 로키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음
네 자식일리는 없고 어떻게 된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스가디언과 미드가르드인 사이에선 후사를 못 봐
지구를 미드가르드라 부르나보군
힌트가 됐나?
1962년 토르는 마리아라는 1살 딸을 둔 젊고 핫한 미혼부로서 애틀란타에 정착함. 처음 아이를 키우느라 실수가 잦았지만 그럭저럭 해냄
젊은 아빠 곁에 간간히 등장하는 쫙 빼입은 로키의 존재는 수다떨기 좋아하는 이웃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음.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해 낳은 아이라느니, 호스트 출신으로 부잣집 사모님과 불륜해 얻은 자식이라느니, 로키는 비서나 관리자, 게이가 되기도 하는 등 온갖 망측한 소문의 진원지였음
그래도 제인의 말은 사실이었음. 입이 싸고 이래저래 오지랖이 넓긴 했지만 애틀란타는 활기찬 도시였음. 무엇보다 외지인에 대한 불신이 덜했음. 산업이 발달하면서 공장이 들어서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음. 바야흐로 이민자들의 도시였음. 이곳에서 마리아를 키우며 토르는 안정을 느꼈음
5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났음. 15살 마리아는 똑똑한 소녀로 자라남. 자식을 키우며 토르는 본인이 줄 수 있는 새로운 애정을 발견하고 활기를 찾았음. 언젠가 먼 발치에서 몰래 보았었지. 제인이 아이를 향해 짓던 행복한 표정을, 이젠 토르도 지을 줄 알았음
15살 마리아는 궁금한 것은 반드시 알아내야 직성이 풀렸음
도서관의 책으로 채우지 못하면 선생님을 귀찮게 굴었음. 그녀의 지적 호기심은 굉장했음. 그럼에도 마리아가 파고들지 않는 것들이 있었음.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와 친구인 로키에 관련된 것이었음
토르, 어째서인지 사회보장넘버는 도날드 블레이크라는 이름으로 발급되어 있었지만- 여튼 아버지는 어째서 늙지 않는가?
똑같이 나이를 먹지 않는 로키는 왜 아버지를 묘한 시선으로 보는가, 이들은 누구인가, 토르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굳이 서류를 떼보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음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색이 밝은 금색, 마리아는 진한 브루넷이었으며 제일 중요한 생김새 역시 닮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음
마리아 블레이크는 토르가 주는 사랑을 조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음. 다만 그녀는 언제든 출생의 비밀을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음. 토르가 안다면 상처받겠지만
키 크고 잘생긴 토르는 동화책 속 왕자처럼 위엄이 넘쳤지만, 딸인 마리아는 그에게 생각보다 허당인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았음
여타 아버지란 족속들처럼 어린 딸이 제 말에 반박했다고 엄한 교육을 빙자한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고,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처럼 여기지도 않았음
둘 뿐인, 가끔 셋이 되기도 하는 집안엔 화목이 넘쳤음. 삼촌인지 친구인지 칭호가 마땅치 않아 로키라 부르는 남자 역시 잘 대해 주었음. 토르처럼 다정한 키스나 상냥한 위로는 없었지만 궁금한 지식을 알려주었고, 싸운 남자애를 대상으로 "혼내줄까?" 눈을 빛내며 유치하게 물어보기도 했음
요즘은 악몽을 잘 꾸지 않네
그렇군
역시 새끼개미 덕분인가
전부터 계속 지적했을텐데, 이름으로 불러
어차피 지금 여기 없잖아. 무슨 상관이야
네 방종은 변함이 없구나
고마워 아직 기억나는건 없어?
로키가 묻자 토르는 눈을 얇게 떴음.
내가 입을 열지 않아도 알면서 굳이 물어보는게 고약하군
로키는 토르가 내민 찻잔을 받으며 빙긋 웃었음. 회색 스웨터를 입고 금발을 뒤로 묶은 토르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보였음. 가끔 잠든 형의 이마를 쓸어주며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면 심연의 밑바닥엔 여전히 검은 구덩이가 존재했지만 그 크기는 전처럼 거대하지 않았고 단단하게 굳어 있었음
그 생각은 여전해?
무슨 생각
죽고 싶어 했잖아
다리를 꼬고 앉은 로키가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리며 물었음. 토르는 찻잔을 든 채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비죽였음.
적어도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군.
찻잔을 입에 댐 '그거 알아? 형은 차를 안 좋아했어.' 로키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음
선물이 있어
로키의 손이 우아하게 궤적을 그리자 금빛 액체로 가득 찬 병이 나타났음
뭐지?
미드(Mead)야, 벌꿀로 만든 술이지
로키, 난 술을 마셔도..
안취하지, 알아
병을 탁자에 내려놓고 다시 손을 움직이지 토르가 든 찻잔이 술잔으로 바뀜. 토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을 앞으로 내밀었음
황금색 투명한 액체가 차오름. 토르는 술과 로키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오랜만에 불신의 눈빛을 띄워옴. 경계하는 토르를 보며 로키는 유쾌하게 웃었음. 손바닥을 보이게 해서 까닥이며 괜찮으니 마셔보라고 부추김. 마지못해 잔을 입에 갖다 댐. 잠시 입술만 축이나 싶더니 이내 꿀꺽꿀꺽 마심
눈이 휘둥그레 커진 형을 보자니 즐거움. 한 잔 더? 잔이 내밀어짐
맙소사, 방 꼴이 이게 뭐에요
보면 모르겠나? 네 주정뱅이 아버지가 저지른 짓이지
마리아는 저를 껴안고 수염난 얼굴로 볼을 비벼오는 토르의 얼굴을 밀어냈음.
왔느냐! 오늘은 뭘 배웠지?
껄껄 웃으며 마리아를 번쩍 들어올림
잔뜩 취한 몸이 움직일때마다 세간살이가 하나씩 떨어지는데 처음엔 줍고 치우던 마리아도 더는 참지 못했는지 침실로 가요! 손가락으로 방을 가리키며 엄하게 말함. 로키가 킬킬 웃었음
도와줄까, 토르?
음 괜찮다. 혼자 갈 수 있어
잔뜩 꼬인 말로 머리를 휘휘 저으며 답하더니 굼뜨게 움직임
마리아는 빡친 표정을 지으며 로키를 바라봄. 표정이 마치 '뭐해요 당장 부축해주지 않고.' 였음. 로키는 우아하게 무릎을 접고 허리를 숙여 "본부대로." 말하곤 침실이 아닌 주방으로 향하는 중인 토르의 옆구리로 파고들었음. 자, 거기가 아니야. 허리에 손을 두르고 방향을 돌려 침실로 데려감
술취한 아스가디언의 무게란! 로키는 낑낑거리며 토르를 부축해(거의 질질 끌고) 침실로 들어가 정돈된 침대 위로 던지다시피 내려놓았음. 으으- 불편한 소리를 내길래 스웨터 목부분을 편하게 풀어주고 신발도 벗겨서 발을 위로 올려줌. 오랜만에 마신 아스가르드의 술이 과하게 잘 맞았나봄
로키는 작은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음. 널부러진 손을 모아 주고 벌어진 입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이 일정해지도록 이마를 쓸며 기분 좋은 꿈을 유도함
으음, 로키
잠꼬대였기에 답하지 않았음.
잠이나 자 멍청한 토르.
그러자 또 뭔가 중얼거림
my brother
심장이 덜컹거렸음
고작 술주정이었지만, 한 순간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음
브라더, 전부터 듣길 바라왔던 호칭이었음. 기억을 찾은 토르가 그렇게 부르면 로키는 맡아 뒀던 붉은 망토를 천둥의신의 어깨에 둘러주고 둘은 함께 무지개 다리를 타야 했음. 계속 기억해 내라고 닥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습게도 로키는 영광스런 그들의 과거를 토르의 입을 통해 듣고 싶지 않았음. 깊은 잠에 빠진 토르의 이마를 쓸어주며 로키는 건조하게 웃었음. 외면해 왔던 은밀한 연정이 드러남. 나도 스티브 로저스와 다를바가 없잖아. 허망한 목소리가 툭 나왔지만 벌꿀주에 취한 형은 듣지 못했음
동생으로서의 로키, 연인으로서의 로키, 동반자로서의 로키. 무엇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음. 이런 욕심쟁이 미친놈과 얽히게 된 토르에겐 조금 미안함. 그래도 로키는 토르를 갉아먹는 사랑을 멈출 수 없음. 그러고 싶지 않았음. 그는 결코 토르의 곁을 떠나지 못함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브라더
비열하게도 인사불성인 상대에게 키스했음. 원래부터 체온이 높았지만 술 때문에 더욱 열을 발하는 입술에 로키의 서늘한 입술이 맞닿았음.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고 my brother, 중얼거리며 붉은 뺨에 제 이마를 갖다댐. 형에게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아. 어쩌지? 갈팡질팡하는 혼잣말이 계속 튀어나옴
젖은 수건을 들고 문 손잡이를 잡은 마리아는 제자리에 얼어붙었음. my brother. 언젠가 그녀는 토르에게 로키가 누구인지 그와 무슨 관계인지 물었고, 토르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불확실한 기억에 대해서 털어 놓았음. 먼 옛날, 사고를 당해서 잊었노라 고백했지. 더 파고들지 않았었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토르는 거짓말을 안했음. 적어도 마리아에게 만큼은. 대답하기 힘든 질문은 겸연쩍게 웃어 넘겼음. 토르는 시대감각이 뒤떨어지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곤 했음. 지금은 1970년 후반임에도 1900년 초반, 혹은 그보다 더 과거를 경험하고 온 인간마냥 표현력이 남달랐음
책에서 봤겠지, 어르신에게 들었겠지. 지금까진 마리아의 이성이 토르를 대신해서 변명해 주었음. 그러나 로키의 형제선언을 들어버리자 두 남자의 오래된 사고방식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음. 부푼 의문을 터질듯이 불어남
하지만 그녀는 상냥했고, 토르를 신뢰했음. 로키 또한 비슷하게 믿었음
당분간 못들은 척 해야지, 어쨌든 그들은 절대로 자신을 기만할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임. 마리아는 입을 꾹 다물며 낙천적으로 생각했음. 불건전한 시선으로 형을 바라보는 동생은 그녀가 속한 사회의 규범과 완전 어긋났지만, 둘을 특별취급 하기로 했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주 편애적 사고방식임
으으윽- 끙끙거리는 소리를 냄. 머리를 감싸쥔 토르는 침대헤드에 등을 기대 앉아 세운 무릎에 머리를 숙였음. 너 대체 나에게 뭘 먹인거야. 낮게 중얼거리자 침대 한 켠에 앉아 책을 읽으며 로키가 능글맞게 웃었음. 아스가디언들이 좋아하는 술이야. 그 말에 앓는 기세가 약간 누그러짐
내가 즐겨 마시던 술인가?
맞아
도저히 모르겠군, 네 말대로 평생 떠올리지 못할지도
하하, 그것 참 슬픈걸
아주 신이 난 것 처럼 보이는데
설마
역시 우린 원수였을까
뭐, 편한 쪽으로 생각해
마리아는? 주방에서 뭔갈 만들고 있어
그렇군, 아 아니 잠깐 주방?! 당장 말리지 않고 뭘..악! 머리가..!
오븐은 로키의 마법 덕분에 무사했음. 토르는 끙끙 앓으며 숙취에 쩐 몸으로 식사를 준비함. 마리아는 지은 죄가 있어서 식탁 앞에 얌전히 앉아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대기했음. 앞에 앉은 로키에게 입모양으로 '내 요리가 그렇게 끔찍해요?' 라고 물었고 로키는 갸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임
애틀란타에서도 토르는 목수일을 했는데 제법 경력이 있어서(25년) 솜씨가 아주 좋았음. 직접 고른 나무로 짠 가구는 인기가 많아서 수요가 끊이질 않았음. 나름 고급인력인 것이다. 그덕에 마리아를 키우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음. 예비용(?)으로 로키도 있었지만 한 번도 그에게 손을 빌리지 않았음
늙지 않는 토르와 로키에 대한 이웃들의 수근거림은 의외로 마리아가 막았음. 가끔 옆집 아주머니가 파이를 가지고 오면 마리아는 고맙게 받으며 열심히 수다를 떨었는데, 주된 대화가 우리 아빠 요즘 허리가 많이 안좋은 것 같아요, 얼굴만 멀쩡하면 뭘해 온 몸이 만신창인데. 이런 내용이었음
그탓에 토르는 이웃들을 만날 때마다 '벌써부터 허리가.. 아직 젊은 나인데.. 저런..' 하는 시선을 받아야 했음. 첨엔 뭐임? 뭐지? 하다가 어느 날 마리아가 친구들 데려와서 우리 아빠 안보이는 부분 고장났어! 이러는거 들어버림.. 목적은 친구들 부모님에게 소문내는 거였지만 어쨌든 미묘한 상처..
마리아의 노력 끝에 15년이 흘렀음에도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병약한 젊은 아빠 이미지를 구축함. 다들 만나면 변함없는 얼굴보다 허약한 몸 때문에 측-은한 시선을 많이 받았음.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데는 성공적인 시도였음
주말이 되자 마리아는 친구들과 그녀 기준 끝내주는 영화를 보러 갔음. 이미 한 번 봤다면서 재관람할 이유가 있느냔 토르의 의문에 마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음. 토르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가치가 있는 건 여러번 봐서 눈에 새겨 둬야 하는 법이야. 토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헛 웃었음
로키도 바빠서 당분간 오지 못한다 했음. 오랜만에 자유시간이 주어짐. 미드를 한잔 가득 채워서 탁자 위에 올리고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신문을 집어 듬. 몇 줄 읽어 내리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음. 아침부터 올 사람이 없었음. 얼마전에 공구를 빌려간 옆집 사람인가? 토르는 신문을 접고 일어남
방범구멍으로 밖을 보자 중절모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 이러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마리아에게 당부했었음. 누구십니까. 토르가 문을 열자 중절모를 쓴 남자가 고개를 들었음. 익히 아는 얼굴이었음. 추억 속 한 켠에 묻어두었던, 다시는 만날 일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남자임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버키 반즈
오랜만이야, 토르
반가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앞서는 감정은 역시 고통임. 버키를 보면 자연히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음. 최근엔 거의 잊고 있었고
들어가도 되나?
아, 물론이네
멀뚱히 서있던 토르는 몸을 물려 손님이 지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줌
일인용 소파에 앉은 버키 앞에 찻잔이 놓임. 그는 토르의 모습을 예의주시하며 고맙다고 인사함. 불멸자라는게 존재하다니. 버키는 찻잔을 들고 중얼거림. 토르는 슬쩍 웃었음. 버키가 신문과 함께 놓여 있는 미드잔에 흥미를 보이자 토르가 말렸음
이건 자네가 감당할 수 없네. 내 고향의 술이지
기억을 찾은 건가?
그건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알게 된 친구에게 받았어
오
아스가르드에서 온 마법사야
마법사라.. 새삼 신기할 것도 없지. 그는 네 과거를 아나?
아마도
아마도?
도통 말해주질 않거든
토르는 깍지 낀 팔을 뒤통수에 대고 몸을 느슨하게 함. 버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내려놓음
50대의 버키는 토르가 모르는 중후한 얼굴을 하고 있었음. 토르가 여러 일을 겪는 동안 그에게도 많은 사건이 있었음. 버키는 쉴드라는 국제 안보기관에서 일한다고 함. 세계안전보장이사회, 쉴드, 국제연합. 심각한 단어들은 30년 넘게 잊고 있었던 '전쟁'을 떠올리게 만들었음. 과거가 훅하고 다가옴
토르는 그가 무슨 의도로 방문했는지 어렴풋이 알아차렸음
그리하여 자네를 찾아 온거지
버키
부탁이야, 도와주지 않겠어?
잠깐, 나는
힘든 부탁이라는 걸 잘 알고있어. 사실 오고싶지 않았네. 자네가 가명을 쓰면서까지 숨어든 이유를 아니까
마리아 블레이크, 네 딸이지. 상황이 불편하게 돌아감
꼭 협박처럼 느껴졌음. 딸의 안전을 위해서 우리측 일을 도와달리는. 하지만 토르는 버키가 그런 비겁한 남자가 아님을 알았음. 토르의 '힘'을 알고도 제 발로 찾아와 분위기를 잡을 만큼 이 친구에게도 여러가지 사정이 있겠지
가족을 들먹이면서까지 나를 이용해서 해결해야 할 사건이 뭐지?
토르가 묻자 버키는 깊은 한숨을 쉬었음
불안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하군, 상황이 좋지 않아서 마음이 급했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쉴드 주요 리스트가 노출되었네. 공격당해 사망한 요원과 그 가족들이 많아. 지금 이순간에도 늘어나고 있고
너희들은 대체 누구와 싸우는거지? 전쟁은 끝났잖아
전쟁은 끝나지 않아. 새로운 전쟁이 시작될 뿐이지
과거 본인이 했던 말을, 타인의 입을 빌어 들으니 감회가 새로움
'전쟁은 우리가 막을 겁니다.'
토르는 눈을 내리깔았음
그렇군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나는 마리아와 함께 있어야 해. 그의 말은 재고할만한 일언의 가치도 없어.'
마음이 복잡했음. 다만 토르는 지금이야말로 이기적으로 굴어야 할 때임을 알았음
미안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야
토르는 냉정하게 일축했음. 둘 사이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음. 벽시계 초침 소리만 요란함. 버키는 시선을 조금 내리깔았음
계속 설득하거나 버럭 화를 낼 줄 알았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음. 흐르는 침묵이 불편해지기 시작할때 쯤 버키는 자리에서 일어났음. 벗어두었던 중절모를 잡아 유려한 동작으로 머리에 툭 올리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음. 그 말이 맞아, 애초에 자넨 군인이 아니었지. 도리어 이쪽이 미안했네
탓하는 늬앙스는 아니었음. 토르는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하는 버키의 뒤를 따름. 문득 그의 왼편에 달린 의수에 눈이 갔음. 그거 아프진 않나? 문고리를 잡은 버키가 흘끗 뒤를 돌아봄. 시선이 제 왼팔에 가 있는 걸 깨닫자 슬쩍 웃었음. 딱히, 목숨 대신이라 생각하면 가볍지
그때 날 구해줘서 고마웠어
30년 묵은 감사인사였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토르가 씁쓸하게 말함. 버키는 피식 웃으며 시무룩한 토르의 가슴팍을 툭 쳤음. 겨우 냉정하게 잘라내나 싶더니 마무리가 허술함. 많이 변한 자신과 달리 이 친구는 달라진 게 없음
아니, 나도 자식이 있어서 이해해
버키는 많이 변했음. 예전엔 좀 더 유들유들했던 것 같은데 이젠 나이에 맞게 두껍고 견고해졌음. 토르는 현관에 서서 수행비서가 열어준 차량 뒷좌석에 탑승하는 친구를 보았음. 곧 비서도 앞좌석에 오르고 그들이 탄 차가 멀어져서 점처럼 보일때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음
영화를 보러갔던 마리아가 돌아옴. 재밌었나? 묻자, 최고였어요! 속편이 기대되요. 신이 나서 스타워즈 스포일러를 줄줄 말하는 마리아에게 간식을 내밀었음. 이미 그녀의 말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았음. 언제 같이 보러 갈까. 토르가 말하자 마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좋아요! 고개를 끄덕임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행복은 어느 날 아침, 조간 신문을 펼쳐 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음. 제임스 뷰캐넌 반즈, 세계안전보장이사회 소속 임원이 밝혀지지 않은 테러 단체로부터 피격당해 중태에 빠졌다는 기사가 있었음. 소련의 사회주의 무장단체의 소행이 아닌지 의심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됨
그날 밤, 토르는 마리아를 앉혀놓고 당분간 일 때문에 집에 자주 들르지 못할거라고 설명했음. 마리아가 이유를 묻자 토르는 그녀가 익히 아는 곤란한 웃음을 지었음. 옛 지인이 많이 아파서 그의 일을 도와주러 간다고 말함. 사실 거짓은 아니었음. 로키는 알아요? 마리아가 부루퉁하게 물어봄
알아서 찾아올거야
그렇겠죠, 그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토르는 움찔 굳었음. 대답이 없자 마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음.
설마 몰랐다는 말은 안하겠죠?
토르는 주먹을 세워 입에 대고 큼큼 소리를 냈음
안다
시대를 앞서가는 미스 블레이크는 한숨을 쉬며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의 볼에 키스해줌
my brother 머릿속에 남았던 로키가 토르를 부르는 호칭, 마리아는 잠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음. 오래된 샌드백 가방에 짐을 챙기는 토르에게 그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함. 둘이서 알아서 하겠지 뭐, 단순하게 넘겨버림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연신 표현하는 로키의 감정을 모를 수는 없었음. 첫인상은 냉정하고 변덕스러운 사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점이 보였음. 그에겐 마음을 준 이에 한해서 섬세하고 부드럽다는 다면적인 면이 있었음. 심플한 토르의 사고회로로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만 빼면 제법 잘 맞았음
로키 행동은 토르를 향할때 만큼은 굉장히 다정했음. 솔직히 다 넘어가도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음. 알려주지 않는 과거, 그래서 토르는 로키의 뻔한 의도가 담긴 손길을 마음 편히 받지 못했음. 언젠가 말해주지 않을까? 그 녀석은 변덕이 심하니까. 막연하게 생각하다보니 마음이 많이 열린 상태임
토르는 샌드백을 메고 집에서 나와 옥상을 향해 손짓했음. 감시가 붙은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접촉하는건 처음임. 버키가 집을 찾은 날부터 생겨난 시선이라 이들이 쉴드 소속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음. 토르는 한 요원의 안내를 받아 버키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음
기계에 의지해 누워있는 버키를 대신하여 닉 퓨리라는 흑인 청년이 그를 맞이 함.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제법 보안레벨이 높았던 그는 방문을 예상했다는 듯 앞장섰음. 소파에 앉은 토르는 앞에 놓인 파일을 물끄러미 바라봄. 표지에는 몰래 찍은 듯한 토르의 사진이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음
퓨리 요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설명을 시작함. 하이드라 잔당이 냉전시대를 틈타 소리없이 물밑 작업을 하는 중임. 그들의 주목적은 세계 요인을 암살하는 것이었음. 쉴드의 정보력을 조합해 습격당할 리스트를 추려 경호업무를 맡길테니 요원으로서 힘써줬으면 좋겠다고 함.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음
토르는 쉴드에 들어감. 가끔 나타나는 로키는 묘한 눈으로 토르를 보았지만 말리지는 않았음. 당초에 약속했던 당분간은 1년이 되고 2년이 되어 마리아의 불평을 감당해야했음. 그녀는 여전히 토르를 믿고 있었지만 새벽녁에 화약 냄새를 풍기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도통 적응하기 힘들었음
마리아는 토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때 언젠가 이런 날이 올거라고 생각했음. 한참 공상과학이 떠오르는 시기에는 토르의 정체를 추측하는 것이 제법 흥미로웠음. 아빠는 사실 외계인이 아닐까? 세상에, 네 나이가 몇인데 이런 유치한 망상을! 현실과 동떨어진 낙천성을 발휘했지
그러나 마리아는 곧 18살이었고 소설 속 세계보다 현실과 미래를 중요시 여기기 시작함. 토르를 여전히 사랑했지만 그의 정체에 대한 위화감이 어린시절의 공상과 합쳐져 점점 커졌음. 언젠가 말해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는것도 지쳐감
토르는 처음엔 평범한 경호 임무로 출발했다가 점점 직접 침입하거나 스파이로서 파견되기도 하는 등 임무가 다양해짐
위험한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소련의 한 연구소에 침입했음. 조용히 들어가 들키지 않고 디스크를 확보해 나와야 하는 임무였음
탈출하는 과정에서 경비를 죽였음. 훈련되지 않은 상대였고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지만 약간의 실수가 있었음. 주먹이 명치에 꽂혔을때 토르는 자신이 지나치게 힘을 썼다는 것을 깨달았음. 평소라면 하지 않을 멍청한 실수였음. 고작 이틀을 잠들지 않았다고 신경이 곤두서서 일을 벌이다니
방어 기능이 없는 경비복을 너머 폐에 큰 충격을 받은 남자는 거친 숨을 헐떡였음. 호흡할 때마다 코와 입에서 피가 튀었음. 토르는 멍청하게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음. 초록색 지시등 아래 드러난 남자는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사 살려줘. 바람 섞인 쇳소리를 토르는 용케 알아들었음
검은 복면 사이로 푸른 눈이 일렁였음. 미안하오.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으며 괴로워하는 청년의 심장에 칼을 박았음. 토르는 그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았음. 초록 지시등이 붉은색으로 바뀌고 사방에서 사이렌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벗어났음
개미를 죽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눈이 가득 쌓인 자작나무 숲을 지나는데 어느샌가 나타난 로키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음. 토르는 대답없이 굳은 얼굴로 앞을 보며 눈밭을 헤치고 나아갔음 피곤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로키
무섭게 목소리 깔지마
상대할 기분 아니다
로키는 코웃음을 침
나쁜 놈들 쳐부쉈다고 생각해
어린 마리아가 보던 만화 주인공처럼 로키는 양 주먹을 쥐고 과장스럽게 가슴을 두드렸음
입닥쳐
토르는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음. 그럼에도 애써 억누르고 싶지 않았음. 로키의 앞에선 어째선지 자제가 힘들었음
오, 토르.. 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났어
고작 갓 스물 넘긴 그의 어디가 '나쁜 놈' 이겠나
걸음을 멈춘 토르는 로키를 노려보았음. 로키는 짐짓 슬프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음. 아스가르드식 초록 의복 위로 눈이 조금씩 쌓여감
하지만 네가 소속된 쉴드는 착한 편이잖아. 그러면 적대하는 쪽은 자연스럽게 나쁜 놈들이 되지 않겠어?
비꼬는 말투가 거슬리는군
원래 그랬잖아, 이제와서 지적하다니
확실히 이번이 첫 살인은 아니었음. 토르는 전에도 사람을 몇 명 죽인적 있었음. 노예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잠입한 곳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사람들 이었음
모두가 총탄과 칼날, 쇠몽둥이에도 굴하지 않고 한손으로 쇠사슬을 부숴버리는 토르를 처음엔 우러러 보았음.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어느덧 신앙이 생겨남. 광신도들의 끝없는 숭배는 토르를 고통스럽게 했음. 그들은 '신을 앞세운 개혁' 이라는 명분으로 온갖 도가 지나친 짓을 저질렀음
약한 이들을 위해 나섰는데 그 약한 이들이 편을 갈라 더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있었음. 선량한 농부를 죽였을 때 토르는 더 참지 못하고 나섰음. 광기에 찬 눈이 희게 돌아가고 입가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나오자 놓아주었음. 신도들은 뿔뿔히 흩어졌음. 그리하여 토르는 신에서 악마로 격하되었음
하지만 이번은 달랐음. 그 청년에게 죄가 있다면 하필이면 이 연구소에 하급 경비로 취직한 것일까
로키는 무지야말로 죄라고 했음. 그러나 토르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음. 적어도 무지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했음. 이렇듯 결정적인 부분에서 둘의 의견이 갈라짐
최근 반복되는 임무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음. 디스크를 손에 넣고 안심한 순간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경비가 튀어나올줄은, 그때 힘을 뺐어야 했는데, 후회가 휘몰아침. 로키는 순간순간 토르가 빈 틈을 보일 때마다 상처를 파고들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음. 천성이 짖궂고 사나운 탓일 것임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수트 차림의 토르는 제법 각이 잡힌 '요원' 같았음. 복면을 써서 금발이 보이지 않는게 아쉬웠지만 은밀하게 움직여야하는 에이전트들의 특성상 화려한 머리색은 방해가 될 터였음
하지만 어린 로키는 자주 보았음. 망설임이 사라졌을때 천둥의신은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웠음
아홉 왕국의 전쟁터에서 토르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모든 적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음. 속임수를 쓸 필요도 없었고, 강한 힘을 억누를 필요도 없었음. 완벽한 악인 앞에 선 토르는 결코 지는 법이 없었음. 쓰러진 적들의 생사 따위 상관없다는 듯, 후퇴를 모르고 돌진하는 모습은 신 그자체였음
안 맞는 음식을 억지로 먹으려하니 탈이 나는거야
로키가 여유롭게 비웃었음. 눈보라가 거세지기 시작함. 로키를 노려보던 토르는 고개를 돌려 왔던 길을 응시함. 눈이 쌓여 발자국이 가려짐. 원래는 좀 걷다가 나무를 타고 이동하려 했었는데 그럴 수고를 덜었음. 다시 발을 움직여 걸음을 옮겼음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는 건 옳지 않아
미드가르드는 특히나 그렇지
옆에서 계속 떠들었지만 토르는 철저히 무시하기로 마음 먹고 입을 다뭄. 로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유쾌하게 웃었음. 토르의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그의 어깨에 눈이 쌓일때마다 툭툭 털어주었음
네가 죽인 그 청년, 아마도 아침마다 어머니 이마에 키스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며 출근하지 않았을까? 갓 스물이라... 미드가르드인 기준으로 첫 직장이겠군! 주변에서 위험하다는 말은 들었겠지만 돈의 유혹을 벗어날 순 없었겠지. 보통 그런 하급의 경비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많이 쓰거든
로키는 토르의 푸른 눈이 동요하여 떨리는것을 놓치지 않았음. 미련한 천둥의신은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겼음. 로키는 형을 사랑했지만 끊임없이 그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었음. 아슬아슬 폭발하기 직전까지 감정을 몰아붙여 하찮은 개미들에게 휩쓸리지 않는 완벽하고 강한 신으로 각성하길 바랐음
그들의 미개함을 계속 깨닫게 될거야,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어리석은 놈들을! 껍질을 벗겨보면 속은 다 똑같이 생긴 주제에 피부색으로 구분하고 종교로 구분하고 가치관으로 구분하고! 개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나누려고 해. 그러다 보면 결국 자기밖에 남지 않는 아주 멍청한 이기주의자들이지
'그들에게 네 사랑은 과분해.'
로키가 입을 다물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만 요란함. 토르는 계속 걸었음. 3km 앞에 작은 은신처가 있었음. 마련된 무전을 보내고 신호를 기다렸다가 지시가 내려오면 끝남. 일련의 사건과 로키의 도발에 정신적으로 몰린 토르는 드물게 피로를 느꼈음
고백하자면 나는 아스가디언이 아니야
로키가 툭 던졌음. 토르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 때문에 잘못 들은 줄 알았음. 뭐라고? 다짐을 뒤엎고 입이 열리자 로키는 그 얼빠진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음. 아스가디언이 아니라고. 쐐기를 박듯이 말했음. 토르는 잠시 멈춰 섰던 발을 다시 움직였음
별로 놀라지 않네
로키가 중얼거리자 토르는 무심하게 툭 내뱉음
네가 인간이든 나랑 같은 종족이던 나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아
다르게 말하면 근원이 무엇이든 전혀 상관없다는 뜻이었음. 대답이 제법 마음에 들었음.
나는 서리거인이야.
심드렁한 토르를 옆에 두고 로키는 멋대로 떠들기 시작했음.
요툰헤임에서 태어났지만 아스가르드에서 자랐다고 말함. 최근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생각보다 큰 충격은 없었다고 했음. 그러자 "고향이 두곳이라 좋겠군." 토르가 내뱉었음. 특유의 낙천적 인생관이 드러나는 뭉툭한 말이었음. 섬세함이라곤 조금도 없었지만 오히려 위로가 되었음
주고 받는 사이, 두 이종족의 밝은 눈에 멀리 떨어진 은신처가 보였음. 주변에 방한복을 입은 무리들이 있음
발각됐나
토르는 눈을 얇게 뜨며 굵은 자작나무를 찾아 재빨리 뒤에 숨었음. 로키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었음. 다행히 이쪽에서 먼저 알아채서 쓸데없는 교전이 벌어질 일은 없었음
어쩔거야
로키가 묻자 토르는 잠시 은신처 주변을 살피는 남자들을 지켜보다가 대답했음
숲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무전은?
내일 정오까지 답신이 없으면 기록을 말소하고 철수할거다
너는 이대로 버려지는 건가, 개미녀석들 제법인데
날 신뢰하는거다
네 힘을 신뢰하는 거겠지
그거나 그거나
둘은 숲속 깊이 들어갔음. 뾰족한 침엽수림이 끝없이 이어져있음. 뚫린 눈쪽 복면으로 눈이 쌓이자 시야에 방해가 됨. 토르는 미련없이 복면을 벗어 허리띠에 끼웠음. 묶이지 않은 긴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나부낌. 로키는 흩날리는 금발을 조금 황홀한 눈으로 훔쳐보며 발걸음을 나란히 했음
나한테 부탁하지 그래
로키가 말하자 토르가 눈을 가리는 금발을 뒤로 넘겼음.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김이 공기중으로 흩어졌음
무엇을 말이냐
알다시피 난 '유용한' 마법을 쓰잖아, 너 하나 이동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흠, 딱히 내키지 않는군
목소리가 부루퉁한게 정말 관심 없어 보였음
육체가 강하다고 해서 추위를 못느끼는 것도 아닐텐데 다섯 시간이 넘도록 영하의 시베리아 숲속을 헤메면서도 바로 옆의 만능 마법사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음
역시 내가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서 의지하지 않는거야?
토르가 걸음을 멈췄음. 화를 낼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동요가 없었음
최근 날 가지고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건 알겠지만 적당히 하거라
흐음
그것도 아니면 한대 더 맞아 보겠나?
그때처럼, 토르가 주먹을 들어올리며 씨익 웃자 로키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흔들었음
지구에서도 가장 추운 숲속에서 생존과 하등 관련 없는 태평한 대화를 주고 받음. 한동안 눈밭을 걷던 둘은 작은 굴을 발견했음. 토르는 무릎을 꿇고 입구를 살피며 바닥에 깔린 흙과 죽은 나뭇가지를 만져봄. 곰이 겨울잠 용으로 만들어둔 굴이군. 로키는 팔짱을 낀 채 형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봄
곰이라, 그 아담한 생명체를 말하는건가
그리 작진 않아
아스가르드엔 더 크고 대단한 야수가 많아
흐음
안에 있어? 죽일건가
그럴 필요 없어. 빈 굴이야
말을 마치고 토르는 고개를 숙이고 굴로 들어감. 말대로 정말 비어있음. 로키는 토르가 10년 넘게 지구에서 구르면서 잡지식만 익혔다고 생각함
그리 넓진 않았지만 둘이 들어가 앉을 정도는 되었음. 야생 곰의 생존전략은 대단해서 밖과 온도차가 꽤 됐음. 토르는 숨을 훅훅 몰아쉬며 입김을 이용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음
안 추운가?
토르가 묻자 로키는 피식 웃었음. 말했잖아, 난 서리거인이야. 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음
불을 피우자니 연기가 빠져나갈 공간이 없었음. 로키는 축축한 바닥과 나무 뿌리 따위가 삐져나온 흙벽을 불쾌하게 살펴 보다가 몸을 일으켰음
가려고?
아니
로키는 토르의 다리사이로 파고들더니 몸을 돌려 천장을 보며 누웠음. 토르는 딱딱하게 굳었다가
뭐하는거야, 의문을 표함
서리거인 난로, 흔치 않으니 이 기회에 잘 써
정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짐. 토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음. 두꺼운 손으로 열을 발하는 로키의 얼굴을 감쌌음. 둘은 반대의 체온을 나눴음. 토르가 열기를 즐길 때, 로키는 어깨와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튼튼한 근육의 감촉이 흡족스러웠음
로키
응
토르는 고개를 숙이고 로키를 바라보며 약간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음
혹시 과거에 우리가
미지에의 과거를 향한 추측이 담긴,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단어를 고르는 것처럼 말이 느리게 이어졌음. 갑작스런 진지한 분위기에 로키는 조금 긴장했음
그럴리는 없지만 '브라더' 라고 부르면 어쩌지? 함께 아스가르드로 돌아가 평범한 형제로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면 어쩌지? 짧은 순간 마음이 불안해짐
사랑하는 사이였나?
로키는 저도 모르게 짧게 웃었음.
아닌가? 그렇다면 잊어라.
토르는 민망했는지 빠르게 두두두 말하고 고개를 들어버림
형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로키는 침울하게 웃었음. 악몽을 꾸는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샌드맨이 되어 주면서 많은 인간들이 토르를 '악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음. '정말 악마일지도.' 로키는 입술끝을 떨었음. 아주 달콤한 유혹이 눈앞에 있음
'맞아. 넌 나와 연인이었어.' 혹은 '아니야, 멍청한 토르.' 둘 중 하나로 대답해야 했음. 정말 사악한게 누구지? 나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는 건 누구지?
괜히 입구만 바라보고있는 형의 얼굴을 향해 손을 올렸음 흠칫 떨리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져옴. 토르가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자 로키는 웃었음
열린 입이 기어코 오답을 말하고 만다
정답
토르의 눈이 크게 떠졌음. 로키는 그의 목 뒤로 손을 둘러 재촉하듯 내렸음. 토르는 머뭇거리면서도 피하지 않았음
주인 없는 좁고 더러운 동굴 속에서 로키는 토르의 입술을 마음껏 탐했음. 몰래 하는 도둑키스가 아닌 제대로 의사를 가지고 혀가 오가는 농밀한 입맞춤이었음. 차가웠던 토르의 몸이 '서리거인 난로' 만큼 따뜻해지자 둘은 너나할 것 없이 뜨거운 체온을 나누며 지저분한 동굴에서 뒹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