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음. 이번엔 자각몽이었음. 토르는 잎이 넓게 퍼진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음. 풍경이 제법 좋았음. 한참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음. 희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늘어서 있었고 한쪽 눈에 안대를 낀 자애로운 표정의 노인이었음
어딘가 그립다는 감상을 받았음. 그는 주름이 가득한 손을 들어 토르의 얼굴을 쓸었음 [가엾구나] 한탄했음. 누구시오? 묻자 노인은 대답없이 빙긋 웃기만 했음. 손길에 담긴 따스함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음. 토르는 노인의 손목을 잡았음
[너를 채우는 것은 비단 슬픔과 후회만은 아닐 것이다]
자애롭지만 단호하고 울림이 깊었음. 그의 목소리는 토르를 파고들었음. 무어라 말을 꺼내려하자 인영이 흔들리기 시작했음. 기다리시오! 다급하게 외쳤지만 얼굴을 쓰다듬던 주름진 손이 흐릿해지더니 황금빛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퍼져감. 손이 허공을 갈랐고 서러움에 눈물이 터져나왔음
로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음. 뭐야. 눈을 부비는데 토르가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음. 꿈을... 중얼거리는데 상체가 온통 땀범벅이었음. 꿈틀거리는 근육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며 로키는 양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고 옆구리에 얼굴을 부볐음
나쁜 꿈이라도 꾼거야? 소근거리며 열오른 살에 이를 세워도 반응이 영 둔했음. 한 번 봐줄까? 로키가 손을 들어올리자 토르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숙여주었음. 고분고분한 모습이 마음에 듦. 로키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토르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쌌음. 표면이 불덩이처럼 뜨거웠음
쯧- 손 온도를 차갑게 조절하며 오랜만에 토르의 내면으로 파고들었음. 최근 기억들은 전부 로키와 함께하는 상황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음.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며 금색으로 일렁이는 불안함의 근원으로 접근했음. 손을 대고 의식을 집중해 파고든 순간-
로키?
오랫동안 대답이 없자 토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불렀음. 로키는 당황한 표정을 애써 지우고 하핫- 가볍게 웃었음. 별 거 아니네 얼마전에 도와준 노숙자 늙은이 아닐까?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미지가 비슷한 것 같아. 되는대로 주절거렸음. 토르는 몸에서 힘을 빼고 로키의 손에 머리를 푹 기댔음
이상하게 그립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로키는 어색하게 올린 입꼬리를 가늘게 떨었음. 글쎄, 나는 잘 모르는 노인인걸... 별 거 아닐거야. 괜히 신경쓰지 마. 체온을 조절해 손을 더 차갑게 만들어 주자, 토르는 후우- 낮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부벼 열을 식혔음
마리아 힐은 허리에 손을 얹고 눈 앞의 얼어붙은 남자를 바라보았음. 서리가 내려앉은 냉동 캡슐 속에서 남자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음. 그의 얼굴에선 죽음을 앞둔 자의 비장함이나 고통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음. 힐은 고개를 들어 2층 플로어에서 난간을 잡고 있는 퓨리 국장을 바라보았음
시선을 느낀 퓨리는 그녀와 눈을 맞추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음. 힐은 캡슐을 냉정하게 주시하며 손을 올렸음
혈청 주입 카운트다운 대기하고 튜브 준비시켜. 녹화는 30초 전부터. 급작스러운 체온 변화에 주의하도록. 그럼 다들 위치로
사람들은 그녀의 명령에 따라 착착 움직였음
시작하지
캡슐에 연결된 관으로 붉은액체가 흘러들어갔음. 삑삑 울리는 경고음과 수치를 알리는 외침이 터졌음. 관 속 액체가 푸른색으로 바뀌었고 소음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함. 70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영웅의 안색에 혈기가 돌기 시작하자 힐은 손으로 턱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음
환영합니다, 캡틴 로저스
이걸 뭐라고 부르죠?
에릭이 눈앞의 네모난 발광체를 보며 물었음. 콜슨은 팔짱을 끼고 대답했음. 테서렉트라고 합니다. 연한 파란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네모난 함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사면이 유리인 케이스 속에서 빙글빙글 떠다니고 있었음
작동원리도 불명, 물질구성도 불명,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진게 없는데 어떤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입니까?
캡틴이 알려줬습니다. 2차대전때 첫 발견자인 나치 장교가 그렇게 불렀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그의 소생이 믿기지 않네요
에릭은 턱을 쓰다듬으며 빛을 발하는 테서렉트를 가만히 노려보았음
70년 전 얼음 속에 갇힌 사람을 멀쩡히 살리다니, 이론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라지만 쉴드의 기술력은 훨씬 더 미래를 달리고 있군요
세상이 발전하니 우리도 그만큼 의식을 넓혀가야죠
스티브 로저스, 토르의 이야기 속에서 나왔던 남자임. 에릭은 혀를 찼음. 처음 들었을땐 도무지 믿기지 않았음
죽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연인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그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음. 곁에 있을 로키를 떠올리면 제3자인 본인 머리가 아플 지경임. 그런데 또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의 연애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자신의 꼴도 우스웠음. 에릭은 숨을 크게 들이키며 고개를 저었음
부활한 영웅은 어떻게 지냅니까
아직 적응중입니다
그에게 음.. 토르에 대해서 말했나요?
캡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기밀이군요
그건 아니지만 그와 관련된 모든 권한은 제가 아닌 힐 요원에게 있습니다. 만난 적 있으시죠?
일주일 전 가든레이크에서 잠깐..
에릭은 그녀와의 첫만남을 떠올렸음
브루넷을 깔끔하게 묶어 올린 지적인 이미지의 요원이었음. 세월의 흐름마저 우아하게 거친듯한 화장기 없는 단단한 얼굴은 바늘침으로도 뚫지 못할 정도로 틈이 없어 보였음. 그런 그녀가 이쪽을 향해 손을 내밀며 ‘토르의 딸’ 마리아 블레이크라는 이름을 댔을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름
생각해보면 1980년대 후반에 만난 에릭에게 과거를 고백했을때 그의 이야기 속 마리아는 1970년대를 달리고 있었음. 결국 토르의 친구 에릭 셀빅과 토르의 딸 마리아 블레이크는 나이가 비슷했음. 뜻밖의 장소에서 그의 불멸성을 되새기게 되었음
힐 요원과 직접 이야기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죠
에릭은 잠깐 나눈 대화를 통해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여겼음.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음. 마리아와 에이전트 힐 사이의 거리감이 줄어든 순간, 에릭은 그녀가 토르에게 해가 될 결정을 할리가 없다고 확신했음
드물게 마음을 너그러이 가져 놀라운 존재들의 관계담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줄이기로 마음 먹었음. 언젠가 토르를 만나면 흘러간 과거로서 웃으며 즐길 수 있길 바람. 어쩄든 에릭은 지금 다른 일을 생각해야했음. 셀빅 박사는 지팡이를 짚고 케이스 주변을 천천히 돌며 테서렉트를 뚫어져라 응시했음
페기가 찾아와 스티브 로저스 소생 계획을 넘긴 것이 10년 전, 그녀는 이제 세상에 없음. 그때 함께 마신 커피가 전 상사와의 마지막 티타임이 될 줄은 몰랐음. 어스킨 박사의 ssr 파일에서부터 그린란드의 깊은 바닷속을 가리키는 좌표까지, 힐은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의 중대성을 깊이 통감했었음
퓨리는 오래 전부터 하워드와 함께 계획의 초안을 세운 상태였음. 그런 하워드 역시 조용히 숨을 거두었고 이제 남아있는 자는 제임스 뷰캐넌 반즈 뿐임. 그조차 호흡기를 달고 하루 종일 자고 있으니 사실상 쉴드는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과 다를 바 없음. 힐은 스티브 로저스의 모든 것을 관리했음
당시의 환경을 조성해 70년만에 깨어난 군인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천천히 알려줄 생각이었지만 아쉽게도 통하지 않았음. 에베츠필드 경기장에서 열린 브루클린 다저스 경기를 중계하던 라디오가 문제였음. 남자는 경비를 뿌리치고 세트장을 벗어나 확연하게 변해버린 타임스퀘어 광장에 섰음
1941년 5월 25일, 난 경기를 직접 봤어요. 여긴 어딥니까?
힐은 남자의 혼란스러운 눈을 보고 짧게 동정했음. 앞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부하요원들을 손짓으로 물리고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 했지만 [당신은 70년간 잠들어 있었어요] 라는 요점은 어떻게 포장해도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음
하지만 역시 훌륭한 군인이었음. 스티브는 얼굴을 쓸어 올리며 침착하게 숨을 골랐음.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양이었음. 괜찮나요? 힐이 물었고 스티브는 뭔가 말하려 하다가 금방 입을 다물었음. 잠시 허무하게 끊어 웃더니 낮게 중얼거렸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티브 로저스는 겉으론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음. 힐은 자주 그의 상태를 체크하며 여러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음. 2차 대전은 끝났고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가 종결되었음. 시간이 흐를수록 치밀해지는 국제연결망은 한 나라의 독립성을 약화시켜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였음
이제는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보다 종교, 이익단체 등 합이 맞아 이루어진 집단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테러로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음. 스티브는 이해했음. 나는 과거에 군인이었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에요. 라고 말하는 그는 여전히 단단했음. 언제든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된 초월적 존재같았음
하지만 힐은 그가 텅 빈 마음을 채우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음. 얼마 저 개인 트레이닝 룸에서 샌드백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캡틴에게 생활에 불편한 부분이 없는지 물었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알려달라는 말도 했음. 한참을 대답없이 샌드백만 때리던 그는 손등으로 이마에 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음
사람을 한 명 찾아줬으면 합니다
이름과 정보를 알려주세요
이름은 토르, 다른 건...
스티브는 말을 멈추고 창밖을 보았음. 삐죽 튀어나온 높은 빌딩과 넓고 정돈된 도로를 오가는 특이한 모양의 자동차들,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의복은 간결하고 편해 보였으며 다양한 인종이 섞여 즐겁게 웃고 있었음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모든게 바뀌었음. 그 괴리감이란! 스티브는 산전수전 다 겪은 요원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외로워 보였음. 하지만 힐은 토르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음. 우선 그를 찾을 생각이었음. 지금 토르의 곁엔 로키가 있을 것임. 비밀을 숨기고 있는 또 하나의 데미갓
속을 알 수 없는 토르의 형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안요소를 더 늘릴 순 없었음
생각해보니 그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군요
캡틴
취소할게요. 가보셔도 됩니다
스티브는 담담하게 했던 말을 무르고 바벨을 들었음. 힐은 들고 온 수트케이스를 수건과 함께 벤치에 내려 놓았음
소리가 들리자 스티브가 무엇인지 물어보았음. 힐은 발키리를 실은 비행선을 조종하던 그때 당신이 입고 있던 수트와 지니고 있던 소지품이라고 대답함. 스티브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저음. 필요 없으니 처분해 달라고 함. 힐은 한 번 더 물어봄. 소지품 중에 스티브가 직접 그린 자화상이 있었음
비닐에 감싸여 물기가 스며들진 않았지만 조금 번져 있었음. 모퉁이에 스티브 로저스가, 사랑을 담아. 라고 적혀 있는 그림. 그녀는 그림에 담긴 의미를 알았음. 그러나 스티브는 대답 없이 바벨을 들어 올리며 운동에 집중했음. 결국 힐은 수트케이스를 들고 트레이닝 룸을 나갔음
스티브가 처한 상황은 너무나 특별해서 그를 마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게 만들었음. 그도 그럴것이 2차대전의 전쟁영웅이 당시 그대로의 젊은 모습으로 복도를 지나다니고 있으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울만도 했음
요원들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박제된 밀랍인형이 의지를 얻은게 아닐까 하는 다소 과한 농담까지 주고 받았음. 존경을 표해오긴 했지만 깊이 이해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이는 없었음. 그들 사이에서 겉돌던 스티브는 길 잃은 유령이 된 기분을 느껴야했음
브루클린의 옛집을 찾아가 보았음. 건물이 있던 자리는 새로운 고층 빌딩으로 바뀌었음. 단골이었던 음식점과 식료품점, 친절했던 양복점과 무뚝뚝한 할머니가 운영하던 서점 등, 무엇 하나 멀쩡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었음. 돌아갈 곳도 머물 곳도 남아있지 않았음
모두들 저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싹 이주해 버린 것 같았음. 이상한 세계에 홀로 떨어진 기분을 느끼며 스티브는 거리를 걸었음
토르. 연인이었으면서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 아스가르드라는 처음 들어보는 외국에서 왔다는 것 정도일까. 꿈 속의 꿈 같은 존재처럼 과거와 맞물려 기억이 혼재했음
쉴드에서 컴퓨터 사용법을 배워 제일 먼저 검색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음. 가르쳐주던 요원에게 물었지만 그도 아스가르드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본다고 대답했음. 나라가 아니라 지명이라 하더라도 뭔가 나올만도 한데 허상으로만 존재하는 신기루처럼 전무했음
토르에 대해 생각할수록 70년이 지났다는 사람들이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음. [나를 잊어요] 라고 당당하게 말한 주제에 긴 잠에서 깨어난 본인이 잊지 못함. 토르의 얼굴도 바로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었음. 너무나 생생해서 눈을 감고 상상하다가 손을 뻗으면 그를 만질 수 있을것만 같았음
버키를 만났음. 정확히는 코에 호흡기를 달고 의식 없이 누워있는 그를 만났음. 쉴드가 관리하는 맨하튼의 한 병원의 일인용 병실이었음. 친구와 비슷한 분위기의 중년 남자(후에 아들이라고 들었음)에게 안내를 받아 들어간 병실에는 익숙한 생김새의 친구가 낯선 모습을 한 채 누워 있었음
주름진 얼굴과 바싹 마른 손,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지난 70년의 세월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음. 스티브는 의자에 앉아 친우의 손을 잡았음. 버키 나야 스티브. 속삭여 보지만 대답은 없음. 스티브는 한동안 버키를 눈에 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음. 밖에 있던 아들과 짧게 악수를 하고 병원을 등졌음
쉴드에서 마련해 준 맨하튼의 거처로 돌아가기 전에 마트에 들러 팬케이크 재료를 샀음. 온갖 휘황찬란한 기성품들이 잔뜩 있어서 하나하나 진지하게 읽다 보니 재료를 고르는 것도 제법 시간이 소요되었음. 마트를 나와 이상한 차량과 어색한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집에 도착함
현관은 지문인식 시스템이었음. 엄지를 대자 삑- 소리를 내며 열렸는데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었음.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치고 주방으로 갔음. 찬장에서 보울을 꺼내 밀가루와 우유를 쏟았음. 이어서 달걀과 이스트, 설탕을 넣었음. 한켠에 시럽을 준비해두고 보울의 재료를 솜씨좋게 휘휘 저었음
완성된 팬케이크는 70년 전과 똑같은 맛이었음. 스티브는 식탁에 앉아 팬케이크를 우물거리며 건너편 빈 의자를 응시했음. ‘표정이 왜 그렇지, 맛이 없나?’ 토르가 말했음. 맛있군요. 스티브가 중얼거렸음. ‘이젠 고혈압도 없으니 잔뜩 먹어도 되겠군.’ 토르가 껄껄 웃었음. 스티브는 대답하지 않았음
브로드웨이를 걸었음. 토르와 함께 보았던 극이 걸려 있는 극장은 세련된-스티브가 느끼기에는 과한- 광고간판과 특이한 곡선의 건물들로 물갈이 되었음. 토르는 연극을 몰랐음. 스티브에게 그는 어딘가 뜬구름처럼 느긋한 느낌을 주는 묘한 연인이었는데, 시대의 변화를 굉장히 느리게 받아들였음
당시 스티브도 첨단을 달리는 남자는 아니었음. 하지만 토르와 함께 지내며 그의 궁금증을 채워주다 보니 본의 아니게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 되었음. 그랬던 주제에 21세기의 스티브 로저스는 당시의 토르처럼 모든 것을 낯설게 받아들임. 그때의 자신처럼 상냥하게 가르쳐 주는 존재도 주변에 없었음
신문을 팔거나 구두를 닦는 소년들이 외치는 소리, 귀를 찢는 높은 자동차 나팔소리, 고저가 튀는 억양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아직 생생한 낡은 소음들은 뉴욕에서 완전히 사라졌음. ‘오클라해머...?’ 토르가 말했고, ‘오클라호마’ 스티브가 정정했음. ‘전쟁이 끝나면 함께 보러가요.’
‘자네와 함께라면 뭘 봐도 좋아.’ 초콜릿을 입힌 밤 과자를 우물거리며 껄껄 웃었지. 수염에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던가. ‘나도 그래요, 토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잡았음. 여기저기서 좋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음. 그는 스티브에게 잡힌 왼손을 보다가 씨익 웃으며 꽉 맞잡았음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놓인 가스등 아래를 지날때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음. 웃으며-그는 늘 웃었음- 입을 벌려보라 말했고, 스티브는 충실하게 따랐음. 초콜릿이 골인했음. 입천장에 부딪혔다고 말하자 토르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음. 초콜릿은 매우 달콤했음
시간이 지날수록 토르의 환영은 흐려지기는 커녕 더욱 또렷해졌음. 선잠이 든 스티브는 옆에서 허리를 껴안고 몸을 밀착하는 연인의 존재감을 느끼며 미소지었음. 으음- 특유의 낮은 신음을 흘리며 넓어진 어깨에 긴 금발을 부벼 왔는데 스티브는 답하듯 손을 둘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음
손은 허공을 갈랐음. 이런식으로 잠에서 깨어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음
토르는 스티브 로저스의 PTSD 였음
좌표를 모아 스크린에 띄우고 셀빅 박사는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음. 과연 쉴드의 기술력은 대단해서 그가 파악하지 못한 소소한 지역의 좌표까지 잔뜩 떠올라 있었음. 테서렉트와 별개로 에릭이 연구하는 중력 역전 현상은 사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세기의 발견은 아니었음
다만 기존 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는 현상이라 원인을 밝혀냈을때의 결과가 기대되었음. 인류는 이런식의 발견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갔지. 박사님, 오늘은 댁으로 돌아가시나요. 동료 연구원이 물었음. 음 그럴까 하네, 제인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고. 에릭이 대답했음
이번 주말은 추수감사절이었음. 특별한 기념일. 미국인들에겐 중요한 명절이라지만 제인과 에릭에겐 좀 더 남다른 의미가 있었음. 밤까지 계속된 연구를 얼추 마무리하고 점멸하는 화면을 바라보던 에릭은 잠시 고뇌하는 표정을 짓다가 보안용 usb를 이용해 자료를 복사했음
연구원이 고개를 갸웃거림. 셀빅 박사님, 추수감사절은 쉬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오랜만에 맞는 휴일에 자택근무를 하면 따님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러나 에릭은 빙긋 웃었음. 자넨 그 얘를 몰라. 제인은 아주 신이 나서 방방뛸걸?
에릭의 말이 맞았음. 제인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렸음
기밀 아니었어요? 내가 봐도 되요? 두 번이나 물어보는 그녀의 들뜬 모습에 에릭은 피식 웃었음. 사실 그는 집으로 오기 전 콜슨이 사무실에 들러 자신의 연구에 제인을 조수로 쓸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 말했음. 에릭이 내민 제인의 이력서는 제법 대단했음
무슨 상을 탔고 최초란 수식어가 가득했기에 쉽게 허가받았음. 이번 추수감사절 선물은 이거에요? 제인이 모니터를 보며 실실 웃었음. 에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별개로 달콤한 칠면조 요리도 있지. 덧붙였음. 오, 에릭, 제가 사랑한다고 몇 백 번은 말한 것 같은데 이번만큼은 최고로 진심을 담을게요
제인은 수식이 떠오른 모니터를 보며 환호성을 담아 소리쳤음. 지금까지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단 걸로 들리는데. 에릭의 장난스러운 소감은 모니터에 얼굴을 박을 기세인 제인에게 들리지 않았음
2차대전 당시 뉴욕에서 처음으로 관찰된 이상한 현상은 차츰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들 사이의 공통점이 아무것도 없었음. 동시다발적이 아닌 시간의 흐름대로 관측되었다는 점이 특이하긴 했음. 바닥에 잿더미가 남아 있었고 일정기간동안 그곳에선 물건이 떠오르는 등 중력이 통하지 않았음
추수감사절을 보낸 에릭은 그녀에게 임시 아이디카드를 주고 연구소로 돌아갔음. 카피된 usb의 정보를 토대로 제인은 노트를 펼치고 수식을 끄적거리거나 세계지도에 붉은 펜으로 좌표를 표시해 선을 이어보기도 했음.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중얼거리다가 ‘하늘’이란 단어에서 토르를 떠올림
제인은 아련한 어린시절 기억을 되짚어 금발의 잘생긴 사내를 떠올렸음. 그 잘난 외모가 제인의 남자보는 눈을 높여버려서 학창시절 연애전선이 순조롭지 못했음. 아련하게 그와의 추억을 따라가다보니 자연스레 현관 옆에 꽂아둔 엽서들로 시선이 감. 가장 먼저 눈에 띈 사진은 인도의 니자마바드였음
니자마바드. 갑자기 눈앞이 번뜩했음. 좌표에 있는 도시였음. 제인은 홀린 듯 지도를 펼치고 현관 앞으로 걸어갔음. 1940년 맨하튼, 1942년 이스턴, 앨런타운, 블룸즈버그.. 펜실베니아! 1952년 캔터키 루이빌, 쉐퍼즈빌.. 1960년 매리에타, 애틀란타, 그리고 1987년 뉴멕시코와 로스앤젤레스까지
세기가 바뀐 지금까지 받은 소인 찍힌 엽서의 장소. 모든 좌표가 토르와 이어졌음. 잠시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스르르 풀어졌음. 맙소사, 이건.. 제인은 몸을 빙글 돌려 잰걸음으로 컴퓨터 앞으로 갔음. 옆에 놓아둔 폰을 들어 단축번호 1번을 눌렀음. 젠장, 받아요 에릭. 빨리
여태까지 왜 이걸 몰랐지
에릭이 중얼거렸음. 누가 알았겠느냐고 팔짱을 낀 제인이 대답함. 콜슨은 굳은 미간을 꾹꾹 누르던 손가락을 들어 좌표를 가리키며 중얼거렸음
그러니까 이 현상은 토르가 일으킨 것이다?
그건 아닐겁니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셋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음
힐이 옆구리에 파일을 낀 채 걸어오고 있었음. 그녀는 셋의 시선을 받으며 모니터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음. 모션에 반응하여 화면이 전환되었음. 60년대쯤 찍힌 흑백사진이었음. 관광지의 작은 비치였는데 토르가 복고풍 옷을 입고 작은 아기를 안고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음
그리고 옆에 검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지적인 이미지의 남자가 토르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서있었음
이 사진은...
저건 나에요
힐이 토르가 안고 있는 아기를 가리키며 말했음. 그리고 손가락을 옆으로 살짝 이동시켜 검은 남자를 향했음
로키, 저 남자가 주범일 겁니다. 저는 이 현상이 최근 계속되는 테러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10년 전 자유의 여신상 테러때도 좌표가 떴었죠. 그에겐 뭔가 있어요
우리는 그를 추적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토르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들 말은 안했지만 그렇게 생각했음
ss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