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 숲, 아늑한 오두막이었음. 사랑하는 이들과 동그랗게 모여 앉아 담요를 덮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지나자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났음
"그럼 안녕."
"즐거웠어."
"잘 있어 토르."
각자 인사를 나누고 오두막을 등졌음. 토르는 밝게 웃으며 하나하나 배웅했음
마지막으로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손을 잡더니 손등에 부드럽게 키스해줌
"잘 있어요 내 사랑."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음. 부축해주려고 했지만 기어코 혼자 일어나서 오두막을 나갔음. 오두막에는 토르만 남았음. 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며 벽을 두드리고 유리창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함
한참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음.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에 서 있는 인영이 있음
"들어오게! 춥지 않나?"
그러자 인영은 고개를 저었음. 의아했지만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음. 문이 열렸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옴.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토르는 그들을 반기며 담요를 들췄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비슷하게 떠나감. 그러길 여러 번, 창밖의 인영이 신경 쓰였음. 다시 혼자가 되자 토르는 오두막 문을 열었음. 맨발로 눈 바닥을 밟았음. 차갑긴 했지만 견딜만함
"정말 안 들어올 텐가?"
묻자 푸른 피부에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음
"네가 나올 생각은 없어?"
좋은 목소리였음. 어딘가 익숙하기도 했음. 토르는 인상을 쓰며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수염을 쓸며 껄껄 웃었음
"좋아 그러겠네. 어디로 갈까?"
그러자 남자는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음
"정말?"
"물론이네."
"함께 가는 건가? 둘이서?"
"그래."
남자는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음. 토르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음. 접촉한 피부가 처음엔 아주 차가웠는데 서서히 온도가 올라갔음. 신기해하자 남자가 웃었음
"서리거인 난로."
둘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숲에 울려 펴졌음. 토르는 손을 잡고 그를 따름. 눈보라가 피부를 때렸지만 차갑지 않았음
헤임달은 로키가 걸어놓은 마법으로 인해 둘을 볼 수 없었음. 그랬는데 [헤임달—!!] 수작을 부린 로키 본인의 외침으로 풀렸음. 금안이 번쩍 빛을 발하며 시신같은 토르를 포착하자 이름 없는 혹한의 행성에 무지개가 내려왔음. 로키 오딘슨은 미드가르드를 침략한 죄를 물어 왕의 지위를 박탈당했음
단 토르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의술사들과 함께 일시적으로 그의 곁에 머물며 치료를 주도했음. 토르가 뒤틀린 시간축 너머로 사라진지 500년이 지났지만 전왕의 방은 전과 다를바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음. 쇠약해진 토르는 아스가르드의 전경이 보이는 그 방우로 옮겨짐. 상처가 심각했음
드러난 구멍으로 침범한 냉기가 심장을 끼고 돌며 피와 뭉쳐 쐐기가 되었음. 그것은 아스가디언의 몸 전체를 돌아 다니며 서리를 내렸음. 튼튼한 육체와 계속되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쉽게 아물지 않았음. 로키는 자신의 탓이라 생각함. 풀려가는 세뇌를 억지로 현상 유지시키기 위해 꾀를 부렸었음
바나헤임에서 가져온 들가투스의 잎을 갈아 상처의 회복을 더디게 만드는 특수한 약재를 만들었음. 꾸준히 공급된 은빛 액체가 아직도 피를 돌며 방해하고 있음. 로키는 토르가 누운 넓은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대 앉았음.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주고 서늘하게 가라앉은 피부에 열기를 불어넣음
“일어나봐, 형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스가르드야. 마침 해가 넘어가네.”
허리를 숙여 이마에 키스하며 속삭였음. 오픈된 테라스에서 바람이 불어옴. 금빛으로 물든 도시의 풍경은 장관이었음. 지겹게 봐서 이미 소중함을 잃은 로키와 달리 오랫동안 잊고 있던 토르의 눈엔 다르게 보일 아름다운 광경
얇은 커튼이 살랑이고 있었음. 어린 로키는 커튼을 몸에 돌돌 말고 형이 자신을 찾을때까지 기다리곤 했음. 평소에는 그토록 영악했던 주제에 술래잡기만 하면 바보가 되었음. 토르는 빌지스나입 흉내를 내며 커튼을 둘둘 말고 발만 삐죽 나온 어린 동생을 안아 올리고는 [으르릉! 잡았다!] 외쳤었음
“그 꼬마는 이제 없지.”
로키가 속삭였음
“북쪽의 잿빛 등대로 가자. 거기서 보는 아스가르드는 찬란하게 아름답거든. 나무가 가득한 신록의 대지와 빛을 받은 사원 지붕이 황금빛으로 물들면 감탄을 금치 못해.”
꼭 함께 보고 싶어. 시체처럼 색이 하얀 귓바퀴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음
숙였던 고개를 들려는 순간
“잿빛 등대 2층 창문틀에는 주문이 새겨져 있었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옴. 로키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음. “토르!” 갈라진 비명이 터졌음. 창백한 얼굴 위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지만 살짝 벌어진 입에서 새액- 숨을 삼키는 소리가 샜음
“형이 낙마하게 해주세요.”
흐릿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음. 딱딱하게 굳었던 로키는 고개를 저으며 소심하게 중얼거렸음
“...맞아. 아주 되바라진 꼬맹이였지.”
그러자 토르의 입가가 조금 풀어졌음
“아니야 로키. 나는 알고 있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조금씩 들려 올라감. 로키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음
“말에서 떨어져 다치면 치료를 위해 왕성에 머물게 될테니까.”
뜨여진 눈은 호수처럼 푸른 색임. 안개같은 회색막은 보이지 않았음. 로키는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음
“또 우는거냐.”
토르가 미소지으며 말했음. 로키는 침대 옆에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음
"내가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토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의식이 흐려지기 전에 되는대로 떠벌렸던 말을 기억했음. 살아났으니 됐지 않느냐 대답함
"네 말대로 아름답구나."
고개를 돌린 토르는 흰 커튼이 넘실거리는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며 깊은 감탄을 내뱉었음
로키는 그 시선을 따라 한동안 밖을 보다가 벅차오르는 감동에 기어코 눈을 감아버렸음. 눈꺼풀을 비집고 나온 눈물이 물길을 따라 떨어져 침대 시트를 물들였음
워리어즈 친구들과 시프의 방문을 받았음.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옛 친구의 생환에 감격하며 뛸듯이 환영했음
눈을 뜬지 얼마 안됐고 상처가 더디게 낫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음. 볼스타그가 너를 위해 술을 잔뜩 준비해 놓겠다고 주먹으로 제 가슴을 퍽퍽 치며 콧대를 세웠음. 호건은 말없이 웃어주었고 시프는 상처 회복에 좋다는 향을 피워줌. 그들은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음
왕국은 평화로웠고 분쟁의 불씨는 없었음. 수르트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토르에 대한 기록을 싹 수정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농담을 했음. 호건은 100년 전 결혼했다고 팬드랄이 말했음. 볼스타그는 마음에 드는 아가씨에게 매번 차인다고 함
"그럼 이만 가야겠군. 얼른 나아서 보자고 폐하."
팬드랄이 유들유들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함. 그러자 쿠션에 등을 기대 앉은 토르가 창백한 얼굴을 좌우로 저었음
"나는 이제 왕이 아니야."
그 말에 시프가 안색을 굳혔음
"설마 로키가 저지른 짓을 감싸는 건 아니겠지."
로키- 그동안 어떻게든 언급을 피하려고 하더니.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음.
"물론 알아. 하지만 그 녀석도 나도 더이상 왕이 아니야..."
모두 입을 다물었음. 섣불리 나서기 힘들었음. 토르는 많은 일을 겪었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음.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지금의 아픈 토르를 파고들어 왕으로서의 책무를 강조하는 건 잔인하다고 생각함
"많이 힘들었던 것 알아. 당장 더 파고들진 않을게. 하지만 로키는 큰 죄를 저질렀고 아스가르드엔 새 지도자가 필요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일축한 시프는 토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모두와 함께 침실을 떠났음
"어떻게 생각하나?"
토르가 테라스를 향해 물었음. 로키가 모습을 드러냄
뒷짐을 쥐고 여유롭게 걸어와서 손을 흔들어 향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음
"전부터 생각했지만 시프는 취향이 고약해. 무덤에나 켜놓으라지."
손짓으로 꺼버림
"생각해서 가져온 것인데 너무 그러지 말거라."
로키는 코웃음을 침
"이제 네 애착대상이 지구인들 대신 그녀로 바뀐건가?"
막무가내식 억지에 토르가 한숨을 쉼
"로키."
"왜."
"이리와라."
두팔을 벌리고 있음. 로키는 인상을 찌푸렸음. 의도가 뻔하게 보이는데 그게 또 토르답지 않아서 함정인가 싶었음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따뜻한 포옹을 받고 싶어하는군."
갑작스럽게 다정한 형의 의도를 의심함
그래도 눈앞에 틈이 보이니 일단 파고들기로 함. 벌어진 양팔 사이로 손을 넣어 허리를 껴안고 상처에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가슴에 몸을 기댔음. 푹 안기자 토르가 숨을 크게 내쉬며 로키의 머리에 부드럽게 키스했음. 슥슥 쓰다듬으며
"너를 사랑한다."
속삭이는 것이다. 로키는 입술을 깨물었음
거짓말이라고 외치기엔 이미 지겹도록 꺼낸 전적이 있었음. 토르는 계속 사랑을 속삭였고 로키는 그것을 부정하는 정형화된 패턴. 아스가르드에 온 뒤로 토르는 지구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음. 자기에게만 그러는가 싶어서 뒤로 슬쩍 알아봤더니 헤임달에게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음
포탈을 열어 지구를 날려버릴뻔 했던 아찔한 과거따위 잊은 듯, 혹은 없던 일로 취급하려는 것인지 관련된 화제를 차단해버림. 우습게도 당사자인 토르가 아닌 아스가르드 원로원과 시민들이 로키를 잔인한 파괴자라고 매도했음. 과거 오딘이 벌였던 정복의 역사따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일은 등대에 가볼까."
로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음
"의술사들이 알면 난리날텐데."
로키가 중얼거렸음
"괜찮을거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어느새 등까지 내려와 토닥이기 시작함. 로키는 기분이 좋은 것과 별개로 뭔가를 숨기려고 이렇게 다정한 것이 아닌지 끝없이 의심함
"로키, 네 죄를 어떻게 갚을 생각이냐."
방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쳐박힘. 고개를 돌려 위를 보니 토르가 차분한 표정으로 시선을 맞춰왔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다시 말이 이어졌음
"도망칠 계획이라면 내가 도와주겠다."
로키는 눈을 크게 떴음
저런 말이 나올거라곤 상상도 못했음. 로키는 혀로 입술을 축였음. 토르가 말했음
"아스가르드에 왕은 필요 없을거다."
"왕정제를 버리겠다고?"
로키가 황당해하자 토르는 피식 웃었음
"일 잘하는 의원들이 많지 않느냐."
"지구에서의 네 삶과 달리 여긴 500년이 흘렀어. 주제에 아는 척 하긴."
뒤틀린 시간축으로 형과 나이차도 많이 줄었다고 비죽거림
"헤임달이 눈을 빌려 주었다. 예전과 다를바 없는 얼굴들이더군."
"그것 좀 하지마."
"무엇을?"
"시야 공유하는거."
"질투하는 거냐?"
"그러니까 하지마."
"알았다."
"...동의한거야?"
로키가 미간을 찌푸렸름
"네가 싫다면 하지 않으마."
믿기 힘들만큼 순순한 태도였음. 아스가르드에 돌아온 이상 토르를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음. 등에 마력을 억제하는 돌을 박고 발목에 추적기까지 달린 로키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음
"억지로 날 위하려고 할 필요 없어. 이제와서 지구를 부술 생각도 없고 그럴 방법도 없거든."
로키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토르의 탄탄한 복부에 머리를 부볐음
"안다. 나 또한 지구로 내려갈 생각이 없다."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슥슥 쓰다듬음. 듣기 좋은 저음임. 허벅지 위에 넙죽 엎드린 몸이 한없이 가라앉아감
"사랑하는 개미들을 외면할 생각이야?"
로키가 나른하게 중얼거렸음
토르가 껄껄 웃었음
"그들은 내가 없어도 된다. 강한 존재들이야."
진심으로 들렸음. 형에게 의심이 들지 않는 건 오랜만이라 혼란스러웠음
"...로저스는?"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후회가 되었음. 토르에게 옛 연인의 이야기를 꺼낼때마다 질척이며 들러붙는 자신의 지리멸렬함을 상기하게 됨
모처럼 형이 고분고분 세 치 혀처럼 굴어주고 있는데 멍청하다 싶었음
"그는..."
말끝을 흐렸음. 로키는 푸른 눈이 흐리게 가라앉는 것을 봄. 평소같았으면 분노해야 마땅할 동요였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음. 기특한 생환에 관대해진 것일까
"기다린다고 하더군."
슬쩍 웃더니 고개를 저었음
"고지식하지만 강한 사내이니 쉽게 극복할 것이다."
'글쎄,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쉴드에 잠입시킨 스파이들을 통해 들은 정보가 있음. 세간에 캡틴 아메리카라고 알려진 미국의 영웅에겐 정신과 상담을 수십차례 받은 기록이 있었음. 그는 제 시대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남겨진 외로운 인간이었음
어찌보면 지구에 떨어졌을 당시의 토르와 비슷한 처지였음
'하필 내게 파악당하다니 불쌍한 개미로군.'
감상을 떠올렸다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음. 누가 누굴 동정하는건지 모름. 로저스따위 알바 아니었음. 어쨌든 로키는 지금의 토르가 마음에 들었기에 형의 품에 파고들어 따뜻한 체온을 즐겼음
"네가 저지른 죄는 투옥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원망하는 늬앙스는 아니었음. 토르는 지금 아스가르드 율법데 근거해 현실적으로 이뤄질 처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음. 로키도 거기에 동의했음. 요툰헤임의 얼음궁에 유폐될지도 모른다고 대답하며 장난스럽게 웃었음
악을 쓰며 뱉었던 끔찍한 추측이 그대로 적중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음. 우습게도 형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자니 이젠 아무래도 좋았음
"도망치게 해주마."
답지 않은 말에 로키는 피식 웃었음
"원로원 늙은이들 내키는대로 하라지. 심심하면 가끔 보러와."
진심이었음
이름 없는 혹한의 행성에서 헤임달을 불렀을때 이미 각오한 내용임. 솔직히 말하자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음
"그래.. 뭐 어때."
평소의 예민함은 다 어디로 갖다 버렸는지 달관한 듯 굴고있음
"형이 무사하다니 됐어."
그러자 내려다보는 푸른 눈이 가늘어짐
"역시 안되겠군. 네 처분이 결정되면 어떻게든 빼내야겠다."
로키가 낄낄 웃었음
"홀로 추방되어 우주를 떠도느니 죽는게 나아."
쓸쓸한 말에
"너와 함께 가마."
답이왔음. 말의 뜻은 이해했는데 이성이 받아들이질 못함. 그래서 다시 물었음. 토르는 근심걱정 없는 단순한 얼굴로 껄껄 웃었음
"네가 어딜 가든 거기엔 내가 있을 것이다."
로키는 몸을 일으키고 자세를 바로해 침대에 앉았음. 시선을 일직선상에 두고
"정말이야?"
거듭 물었음. 토르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음. 곧바로 상처가 아파 허리를 굽히느라 모양새는 좀 빠졌지만, 어쨌든 확실하게 동의했음
웃음이 퍼석하게 부서졌음. 로키는 잠시 침묵했음. 고요한 둘 사이엔 자세를 바르게 하느라 시트가 비벼져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요란함
"봐도 돼?"
로키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오른손을 들며 물었음. 토르는 기꺼이 손에 머리를 툭 댔음. 손바닥에 금발이 닿이자 손끝이 두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음
제어구인 돌 때문에 강한 마력을 사용할 순 없었지만 충분했음. 억지로 파고들어야 할만큼 숨기고 있는 것이 없었음.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검고 딱딱한 응어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음. 로키는 따뜻한 공기에 감싸인채 유영하며 형의 기억과 감정을 마음껏 맛보았음
인간들을 향한 사랑은 여전했음.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지만 화가 나지 않았음. 그보다 대단한것이 있었음. 페리도트 색으로 빛나는 구체에 손을 댄 순간 로키는 엄청난 환희를 느꼈음.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한다 듣고 지겹도록 의심하고 분노했던 과거가 봄 날에 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졌음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이해가 되었음. 토르는 진심으로 로키를 사랑하고 있었음. 직접 목격한 이상 아무리 베베 꼬였다고 해도 외면할 수 없었음. 로키는 손을 떼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음.
"혹시 세뇌가 아직..."
끝까지 입을 나불거리는 동생을 보며 토르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음
"농담이야."
로키가 웃으며 중얼거렸음
"농담이었어. 토르."
두어 번 같은 말을 반복하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시선을 맞추며 "사랑해." 라고 말했고 "사랑한다." 표정을 푼 토르가 상냥하게 속삭였음. 로키는 토르의 허리를 감싸고 입술을 겹쳤음. 세워져 있던 몸이 스르륵 뒤로 넘어감
의심 많은 로키가 처음으로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인 순간이었음
둘은 잿빛 등대에 올랐음. 환영을 만들어두고 어두운 새벽녁에 의술사들 몰래 빠져나옴. 끙끙 앓으면서도 어떻게든 계단을 오름. 잠시 숨을 고르느라 멈춰섰던 토르는 창문틀에 새겨진 [형이 낙마하게 해주세요] 글귀를 쓸었음
뒤따르던 로키가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리자 글이 바뀌었음
[형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너 답지 않구나."
갑자기 다정해진 로키가 조금 어색했는지 작게 투덜거렸음
"여유로워 진거야."
로키는 느긋하게 토르의 어깨에 턱을 괬음. 둘은 잿빛 등대에 올라 아스가르드의 전경을 보았음
해가 떠오를때까지 토르는 난간에 앉아 턱을 괴고 바이프로스트를 바라봄. 아스가르드의 태양은 지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므로 시선이 그쪽을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로키는 가슴 한쪽이 저며옴을 느꼈음. 괜히 투덜거리기보다 바람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토르의 검은 망토를 꼼꼼하게 여며주었음
해가 천천히 떠올랐음.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음.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러나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광경임
옆에 서있는 로키가 다 나으면 무스펠헤임에 가서 정벌하고 싶지 않냐며 장난스럽게 묻자 토르는 고개를 저었음. 수르트는 이미 죽었는데 거길 가서 뭘 하겠느냐고 대답함
따지고보면 그동안 고생한 것도 수르트 탓인데 놈이 다스리던 행성 좀 부수는게 뭐가 나쁘냐며 은밀하게 부추겼음
"복수하면 속이 좀 편해지지 않겠어?"
능글능글한 속삭임이 토르가 껄껄 웃었음
"역시 변함이 없구나."
전 폐하는 쓸데없는 복수를 원하지 않은다 못박았음
흘러간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다소 늙은이처럼 말하더니 한껏 공기를 들이켰음
"그보다 보거라. 완전히 물들었구나."
시선을 따라가자 찬란하게 빛나는 아스가르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옴. 토르는 제 어깨에 올라온 로키의 손등을 감쌌음. 둘은 한동안 말없이 노을을 바라보았음
어느정도 회복한 토르는 왕위에 오르지 않고 '대리인'의 직위로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음. 원로원에서 즉위하라고 부추겼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음. 언제까지고 왕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말에는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함. 로키는 비공식적인 토르의 조언자로서 뒤에서 계획을 세우고 이행함
로키는 오랫동안 정무를 처리한 경험이 있었기에 탐탁잖은 기색을 비치면서도 곧 잘 일했음. 토르의 계획을 처음 들었을때는 비웃었지만 관련 법령을 세우고 하나하나 틀을 맞춰 끼워넣으니 제법 구색을 갖추었음. 그가 어디서 영향을 받아 체제전복같은 귀찮은 짓거리를 시도하는지는 안봐도 뻔했음
[더 이상 왕은 필요 없다]
단호하게 선포했음. 거센 반대가 있었지만 끝까지 밀어붙임. 결국 기안은 원로회를 통과함. 토르는 백성들 앞에서 의결처리된 공식 문서를 높이 들고 호탕하게 웃었음. 묠니르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반란을 진압했노라 외치던 과거의 토르 오딘슨이 떠오르는 장면이었음
행동은 반대였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토르는 그때와 달라진 점이 없었음. 앞으로는 왕족에 의한 일방적인 결정과 통보가 아닌 시민들의 참여가 활발한 정치가 이루어질 것임. 어색해하던 아스가디언들도 곧 환호했음.오딘슨은 더 이상 아스가르드의 중심이 아니었음. 오로지 상징으로만 남겨질것임
"만족하십니까."
헤임달이 말했고
"그럭저럭이군."
토르가 대답했음. 검을 거꾸로 들고 선 헤임달은 닫힌 문 너머 우주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음
"둘째 왕자님의 처분이 결정되었더군요."
토르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음. 로키는 750년이라는 애매한 시간동안 아스가르드의 지하 감옥에 유폐됨
원래는 더 엄중하게 죄를 물어야 했지만 토르의 치료를 돕고 새로운 기초 행정을 세우는데 이바지했다는 공을 들어 원대한 결정이 내려짐
"반발하실거라 생각했습니다."
"나도 자네가 왕정제를 폐지할때 반대할 줄 알았는데."
"미드가르드에서 자연스럽게 말 돌리는 법도 배워오셨군요."
둘은 우주 너머를 응시하며 최근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졌다는 둥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었음. 그러다가
"그들은... 잘 지내나."
토르가 눈을 내리깔고 물었음. 헤임달은 살짝 고개를 돌려 토르를 보다가 이내 자세를 바로잡음
"화를 많이 내더군요."
"그렇겠지."
토르는 지구와 연락을 피해왔음
꼭 로키를 위해서는 아니었음. 더는 인간의 삶에 끼어들어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음. 좋든 싫든 데미갓의 존재만으로도 상처주고 받았던 경험이 많았음. 그래서 아예 단절을 택함. 이미 발생한 사건을 외면하지는 않았음. 아스가르드의 사절을 쉴드로 파견해 박살난 맨해튼의 수복을 돕도록 했음
'더 이상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지는 못하겠군.'
토르는 씁쓸하게 웃으며 끝없이 펼쳐진 우주공간 너머를 바라보았음. 저 어딘가 있을 상냥하고 강한 친구들을 그렸봄. 마지막까지 사랑스러웠던 스티브의 모습도 떠올림
"괜찮을걸세. 다들 강하니까"
애써 웃으며 말하지만 쓸쓸함을 감추진 못함
헤임달은 뒤돌아서서 다리 너머로 사라지는 토르를 배웅하다가 자세를 바로 했음
"듣고 계십니까."
"그래."
구석에서 반투명한 형상이 떠올랐음
"카발라의 돌이 무색하군요."
헤임달이 나직하게 탄식했음. 환영, 로키는 어깨를 으쓱거렸음
"장난이란 타이틀에 집착해 내 마법을 무시한 결과지."
그 말대로였음. 재능없는 무력에 집착하지 않고 마법을 꾸준히 갈고 닦은 결과임. 웬만한 구속구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음. 토르가 목에 걸린 전기장치를 일부러 부수지 않았듯 로키도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음
"또 뭔가 저지르실 생각이라면.."
"걱정마. 네가 염려하는 일은 없어."
"전에도 똑같이 말씀하셨고 5초 후 제 눈이 멀었죠."
"하핫 일시적이었잖아."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그만두십시오."
헤임달이 경고했음. 로키는 입술을 비죽거렸음
"나도 참 신뢰가 없는 걸. 자업자득인가."
저벅저벅 걸어와 헤임달의 옆에 섰음. 방금까지 토르가 서있던 자리임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하느라 눈을 빛내는 헤임달에게 웃어주었음. "이제 안 해." 장난스런 모습과 달리 목소리가 깃털처럼 연약했음. 로키는 검은 우주 공간을 바라봄. 사악한 별의 불러들여 끝장내려 했을때 인간은 기지를 발휘해 참사를 막아냈음. 계란으로 바위를 쳤더니 바위가 깨진 꼴이었음
죽은 별은 배를 채우지 못하고 제가 왔던 무의 공간으로 돌아감
"외로워 하더군."
대답이 없었지만 로키는 개의치 않고 말했음. 분명 충만하게 차올라 더는 바랄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적적해하는 형을 보니 마음이 괴로웠음. 예전에는 무조건 상대의 미련함을 탓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했음
로키는 그의 결심을 보았음.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보았고 그런 인간을 버리고 로키를 택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결정이었는지 똑똑히 보고 말았음. 그래서 도저히 토르의 탓으로 돌릴 수 없었음
"내 사랑이 그를 좀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때도 멈추지 못했는데..."
"정작 얻고 나니 사소한 티끌이 거슬리는군."
헤임달은 인상을 찌푸렸음. 절절한 심경고백을 하필 자신에게 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음. 그래도 이 답없는 왕자들을 아주 어릴때부터 봐왔기에 냉정하게 외면하지 못했음
"배부른 고민이군요."
드물게 감상을 준 문지기를 흘끗 보며 로키가 큭큭 웃었음
"맞아! 하지만 나는 욕심쟁이거든. 이왕이면 사랑하는 형이 완벽하게 행복했으면 좋겠어."
피가 섞인 건 아니었지만 명목상은 형제였음. 근친고백을 당당하게 하는 비범한 둘째 왕자님을 보며 헤임달은 길게 살아온 인생에 굴곡이 하나 더 추가됨을 느꼈음
"그렇다면 당신이 할 일을 하십시오."
노련한 문지기의 말에 잠깐 뜻을 고민하던 로키는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렸음
"웃기는군. 여태껏 내가 해온 모든 행동을 한순간에 멍청한 짓으로 만들어 버리라고?"
분통을 터트리며 항의하자
"멍청한 짓 아니었습니까?"
헤임달이 담담하게 받아쳤음. 어쩐지 대꾸할 마음이 없어짐
로키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우주를 응시했음. 저 어딘가에서 형을 홀린 인간들이 하하호호 살아가고 있을 걸 생각하면 주먹이 쥐어졌지만 전과 달리 금방 풀렸음. 성장한 것일까 아니면 체념한 것일까? 사실 어느쪽이든 상관 없었음. 토르는 인간이 아닌 로키를 선택했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었음
아스가르드에 돌아온 토르 오딘슨의 주변엔 늘 고요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았음. 그는 틈 날때마다 바이프로스트를 바라보았음. 감옥에 갇힌 로키는 그런 형을 몰래 지켜보았음. 의술사들에게 상처를 치료 받으면서도 테라스를 너머 저 멀리 시선을 두었음. 끝에 있는것이 뭔지 로키는 알았음
웃고 떠드는 자리에서도 푸른 눈엔 쓸쓸함만 담겨 있는 것이다. 기특하게도 감옥에 찾아올 때의 토르는 전혀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았음. 밝고 당당한 모습이 억지라는 걸 알았음에도 로키는 화를 내지 못했음. 차라리 마음을 읽지 말 것을, 그랬다면 내키는대로 탓하고 책임을 씌울 수 있었을텐데
토르는 본인에게 걸맞는 위엄과 견고함을 갖추었음에도 어딘가 한 군데를 건드리면 와르르 부서질 것 같은 유약함이 공존했음. 로키는 환영상태로 몰래 그의 뒤를 쫓았음. 홀로 산책하거나 식사하거나 정원을 걸을 때도, 그가 마시고 내뱉는 공기에서도 우울의 냄새가 감돌았음
로키는 형의 등을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음
토르는 지하감옥 복도를 걸었음. 악독한 범죄를 저지른 각기 다른 종족의 죄수들이 큐브에 갇혀 있음. 그들은 왁왁 욕하고 떠들어댔지만 소리는 큐브 밖으로 나오지 못했음. 고요한 복도를 걸어 가장 끝에 있는 문을 하나 더 열어야 로키가 갇힌 큐브가 나옴
토르는 뒤를 따르는 병사들과 시종을 물렸음. 그들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확인하고도 한참 지나서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음. 다른 죄수들의 것보다 세 배정도 되는 넓은 큐브 안에서 로키가 뒷짐을 쥐고 맞아줌
"어서와."
토르는 공중에 뜬 룬문자를 손짓으로 훑으며 투명한 빗장을 풀었음
가로막는 투명한 창살이 사라지자 로키는 재빨리 달려가 토르를 냉큼 껴안았음
"상처 많이 나았나봐. 세게 매달려도 내색 안하잖아."
"네 덕이지."
"그거 엄청 이중적으로 들리는거 알지?"
토르는 껄껄 웃으며 마법을 사용해 선물로 가져온 책을 꺼냈음. 로키는 기꺼이 받으며 고맙다고 인사함
주위에 아무도 없었지만 로키의 귓가에 속삭였음
"언제쯤 달아날 생각이냐."
어쩐지 다급하게 느껴짐. 로키는 피식 웃었음
"아직 일 년도 안 지났는데 좀 참아봐.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했으면서."
"딱히 그렇진 않았다."
"강한 척 하네."
"실제로 강하지. 널 날려버릴 만큼."
"이젠 못 때리잖아."
옥신각신 하면서도 토르는 치대는 로키를 떼어내지 않았음
로키는 토르의 품에 안겨 냉정하게 계산했음. 막상 마음 먹으니까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부정이 스멀스멀 기어오름. 로키는 입술을 깨물며 잠깐 고민하다가 토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잡아당겼음. "토르." 다정하게 부르자 시선을 맞춰 왔음
"나는 아주 욕심이 많아. 제멋대로고 아주 음험한 놈이지."
갑작스러운 자기비판에 토르가 인상을 찌푸렸음. 뭐라 말하려는 찰나 검지손가락이 입을 꾹 눌러 소리를 차단해버림
"그리고 한 번 손에 들어온걸 순순히 내어줄 만큼 성격 좋은 놈도 아니야."
토르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음
[이러고 싶지 않지만 다 너를 위해서... 아니야... 도저히 못하겠어! 망할! 끔찍하군]
온갖 상반되는 말들이 터졌음. 로키가 보여주는 모습은 영 이해하기 힘들었음. 토르는 요상한 일인극을 펼치는 로키를 인상을 찌푸린 채 내려보았음
"내 변덕 알잖아..."
로키는 제풀에 꺾여 숨을 몰아쉬었음
귓가에 합리화의 외침이 튀었음
[좀 울적해 보이긴 하는데 뭐 어때. 지금껏 이 자를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막상 잡아놓고 답지 않게 무슨 착한 척이지? 오히려 지금이 좋은 기회 아니겠나? 그의 쓸쓸한 심중을 파고들어 특기인 교활한 혀를 놀려 흔들어!]
[너만 바라보도록, 너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거야. 네가 잘하는 짓이잖아]
달콤한 외침이었지만 로키는 유혹을 견뎠음. 더럽고 축축한 도시에서 환하게 웃으며 어린아이를 죽이려던 토르를 떠올렸음. 로키는 모든 토르를 사랑했음. 다정하고 상냥하고 강하고... 심지어 인간에게 매여사는 토르까지!
노예의 삶을 택한 것은 마음에 안들었지만 그 또한 토르의 선택이었음. 긴 시간을 넘어 왔는데 그보다 작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할까. 로키는 널뛰는 가슴을 움켜쥐었음. 그런 속도 모르고 토르는 머뭇머뭇 로키를 껴안더니 등을 토닥여줌. 다정한 손길에 다시 유혹이 치밀었지만 대견하게도 참아냄
토르의 귓바퀴에 입술을 문지르며 씹듯이 속삭였음
"놈들이 죽을때까지, 하찮은 개미들의 생이 다할때까지만 참을게...! 그 뒤론 형은 내꺼야."
로키는 손에 쥐고 있던 카발라의 돌을 바닥으로 떨어트렸음. 원래라면 등에 박혀 마력 공급을 제한했어야 할 돌이 데굴데굴 굴러 큐브 벽에 부딪혔음
토르는 깜짝 놀라 로키를 바라봄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일거야. 실컷 사랑하고 고통받고 절망하고 그리워해. 언젠가 만날 나를 위해 잘 갈무리해둬. 내가 맛 볼 수 있도록."
로키의 얼굴이 흐려졌고 순식간에 시야가 점멸했음. 어렴풋이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확실하지 않았음
정신이 들었을때 토르는 익숙한 유리 감옥 안에 엎드려 있었음. 차가운 바닥에서 볼을 때고 두통이 오는 이마를 짚고 몸을 일으켰음. 익히 아는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감옥 안을 주시하고 있었음. "뭐...뭐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토르는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싸던 손을 내렸음
목에 뭔가 걸렸는데 구속구였음. 상황파악이 덜 되서 고개를 휘휘 저으며 몸을 비틀거리는데 위쪽 구석에 매달린 앰프에서 마리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음
"어디 변명이 있으면 해보시죠."
토르는 인상을 찌푸렸음
"잠깐...여긴.. 로키는 어딨지?"
앰프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옴
꿈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음. 그러다가
"1년 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뭐? 로오키이?"
늘어지는 목소리는 토니였음.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머리가 제대로된 판단을 내릴만큼 굴러감. 아래를 내려보니 입고 있는 옷이 보였음. 로키를 만날 때와 다를바 없는 아스가르드식 검은 로브였음
"어서 와요 토르."
움찔 굳은 토르는 의도적으로 그를 보지 않았음. 모두에게 등을 돌린 채로 헤임달을 불렀지만 몇 번 외쳐도 대답이 없음. 로키가 수작을 부린것이 분명함
'하찮은 개미의 생이 다할때까지.'
로키의 외침을 떠올리자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확 솟구쳤음
"로키! 네 놈이..!"
분노가 치밀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음. 제멋대로인 것은 전부터 알았지만 그래도 최근 와서 이제야 좀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음. 배신과 다를 바 없는 동생의 행동에 분개하고 있는데 앰프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음. 이번엔 에릭과 제인이었음. 몸은 괜찮은지 물었고 토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음
그들은 전과 다를바 없는 태도로 토르를 맞이해줌. "때려도 되요?" 제인이 중얼거리자 토르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단골 레퍼토리를 재생함. "그럼 네가 다쳐."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몰라 멍청하게 서있는데 유리 문이 열렸음. "환영해요." 마리아가 들어왔음. 토르는 돌아서서 내민 손을 잡았음
'이 정도로 늙었던가.'
"미안하구나."
"애초에 미안할 짓을 하지마!"
토니가 쌀쌀하게 외치며 들어왔음
"언성 높이지 말게."
스티브가 타일렀음. 쓸쓸했던 마음에 온기가 조금씩 차오름. 죽을때까지 볼 일이 없었다고 생각 했는데 하필이면 로키의 배려 아닌 배려로 뜻밖의 재회를 맞이함
스티브의 끈질긴 시선도 결국 마주하고 맘. 여전히 다정하고 로맨틱한 사내였음. 손등에 키스하며 환영한다 말하는 그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음. 토르를 둘러싼 인간들은 장난스럽게 야유하거나 등을 토닥여주거나 옷을 칭찬하거나 제 할 말만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돌아온 신을 환영해 주었음
로키가 건 마법은 일회성이었음. 얼마 지나지 않아 헤임달의 대답을 받았음. 불신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한 뒤 바이프로스트에 도착함. 로키는 토르를 지구로 날려보내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함. 헛웃음이 나왔음. 헤임달 옆에 주저앉은 토르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음
"녀석이 어디로 갔을까?"
헤임달은 고개를 저었음
"장난의 신 속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로키는 정말 종잡을 수 없었음. 지구에 웜홀을 갖다 박으면서까지 광적으로 집착하더니 정작 이쪽에서 마음을 여니까 사라져버림
"그래 녀석은 장난이 심하지."
어느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던 것 같음
로키를 사랑하지만 그를 믿지는 않았음. 장난의 신을 신뢰하는 행동은 확률 낮은 도박 같은 것이었음. 토르는 계속 헛웃음을 터트렸음. 아스가르드는 여전히 빛났고 뒤로는 미드가르드로 통하는 무지개길이 열려있음. 지금 토르는 어디로는 갈 수 있었음. 다름 아닌 로키의 건방진 배려로 인해서
로키는 유예기간을 정해 놓고 떠났음. 사랑하는 이들이 죽을때까지라는 구체적인 기간을 정하고 상의 없이 밀어 붙였음
"감히..."
토르는 로키의 태도를 매우 발칙하다고 여겼음. 그래서 다시 만나면 제대로 때려주리라 마음 먹었음. 울먹이며 동정힘을 유발해도 결코 봐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음
"근데 목에 그건 뭡니까."
헤임달이 물었고
"이건 도망갈까봐. 그들이.."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리다가 고개를 저었음
"내가 사랑받는다는 증거로군."
이해하기 힘든 대답하고는 껄껄 웃어버렸음. 헤임달은 그 모습을 묘한 눈으로 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음. "곧 닫힙니다."
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문으로 향했음. 문 앞에 서서 잠깐 고개를 돌려 빛나는 아스가르드를 눈이 새기고는 그대로 무지개 속으로 뛰어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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