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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바퀴

로키토르






삶이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딘의 아들로서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살아왔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쉬웠다. 딱히 큰 욕심도 없었거니와 가끔 바라는 것이 생기면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아스가르드의 제 1 왕자란 그런 자리였다.






“사만 유닛이라니 망할 사기꾼 자식이...”
“싫으면 다른 데로 가! 아스가디언들은 고지식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더니 정말이잖아. 이보쇼 꼴통양반, 여기가 잔다르인 줄 알아?”
“삼만 유닛.”
“제조일자도 좋고 옥코사 정품이라고. 삼만 오천.”
“삼만”
“염병... 마음대로 해. 앞으로 잘 생각해야 할 거야. 여기 아니면 이런 희귀병 약은 취급하지도 않아. 하나뿐인 거래상 소중히 여겨야지.”

더듬이를 씰룩거리는 특이한 생명체의 손에서 약병을 낚아챈 토르는 제 손목을 마디 진 외계인의 손등에 가져갔다. 삑-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모은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곤충을 닮은 암거래 외계인, 채드는 날카로운 앞발로 더듬이를 쓸더니 눈앞에 뜬 스크린에 입금된 액수를 살피며 투덜거렸다. 토르는 노란색 약병을 들어 올려 알약의 갯수를 확인했다. 그것이 채드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파는 물건으로 장난질 칠 것 같아? 그러면 이 바닥에서 오래 못 버텨!” 그러나 토르는 무표정하게 마지막 한 알 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내렸다. 채드가 구시렁거리며 가판대에 놓인 물건들을 정리했다.

“곧 모래폭풍이야.”
“다음에도 부탁하지.”
“두 달 뒤엔 제대로 받을 거야.”
“제값은 일만 유닛 아니었나?”
“답답한 양반아 융통성을 좀 가져. 나도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냐. 아주 그냥 날로 먹으려 드네. 여기까지 왔다는 건 볼 장 다 본 밑바닥 인생이란 뜻인데 언제까지 고자세로 굴 텐가?”








속칭 '쓰레기 행성'의 낮은 네 시간 정도로 매우 짧다. 그에 비해 밤은 길었고, 이는 곧 어둠을 틈타 더러운 짓을 저지르는 존재들에겐 최고의 환경이라는 뜻이다. 전 우주의 범죄자들 절반이 모여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질 낮은 행성, 토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 사막에서 어둠과 함께 밀려드는 모래폭풍을 확인했다. 십 분만 더 있으면 휘말릴 것이다. 모두들 익숙하게 가판대를 챙기며 몸을 피하고 있었다. 토르도 보폭 넓게 발을 놀려 시장통 옆 더러운 하천을 건넜다. 품에 든 약병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지만 이것이 일시적인 평안이라는 것을 그도 안다.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더러운 뒷골목을 지났다. 오십 년은 족히 정비를 멈춘 녹슨 관개수로에선 끔찍한 냄새가 풍겼다. 검은 구정물 위를 밟으며 좁은 골목 녹슨 철망 사이로 몸을 밀어 넣은 토르는 재차 약병을 확인했다. aop-89 라는 특이 병의 진행을 늦춰주는 약이었다. 구하기 쉽지 않았다. 가진 거라곤 튼튼한 몸 뿐인 토르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신분을 밝히고 원하는 것을 얻을 상황이 아니었다.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얻었던 아스가르드의 왕자, 아니 전 ‘폐하’는 이제 이름 없는 행성에서 잡일을 하고 있다.

철망을 지나 한참을 걸으면서 열 번쯤 뒤돌아보았다. 쫒아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범죄자로 가득 찬 행성이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돌로 된 벽에 손을 짚고 빙글 돌았다. 바로 앞에 녹이 슨 철 계단이 있었는데 기암절벽을 개미굴처럼 숭숭 파서 만든 거대한 주거 공간 벽에 딱 붙어 있었다. 녹색 페인트칠이 벗겨져 보기엔 영 좋지 못했지만 여기선 보기 좋은 것이 드물었다. 토르는 철제 계단에 발을 딛고 두 개씩 성큼성큼 뛰어 올랐다. 거의 꼭대기에 다다르자 푸른 차단막으로 가려진 입구가 보였다. 손목에 찬 팔찌를 두드려 경보를 해제한 토르는 나무를 엮어 만든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키.”

검은 머리의 작은 아이가 이불을 반쯤 덮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아이, 로키는 토르가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불안에 차있던 얼굴에 순식간에 안심과 기쁨의 감정이 깃들었다.

“오늘 늦었어요.”

아이의 얼굴에 원망의 빛이 서렸다가 금세 사라졌다. 토르는 별 대꾸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 칸짜리 작은 주거 공간에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설비(라고하기엔 우스울 정도로 조악하지만)가 되어 있었다. 토르는 낡은 냉장고를 열어 채워진 생수병 중 하나를 꺼냈다. 슬슬 식수도 구입해야 할 시기다. 로키는 침대에 앉은 채 토르가 움직일 때마다 자그마한 머리통을 따라 움직였다.

“아침에 약은 먹었나?”
“응, 나 약 잘 먹어요.”

토르는 품에서 약병을 꺼내 찬장에 넣었다. 낡은 스토브에 불씨를 던져 넣으면서도 나무 발 사이로 밖을 확인하는 작업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번 미행당하는지 확인하면서도 안심할 순 없었다. 토르는 꺼낸 생수병을 컵에 따르며 로키를 보았다.

“식사는?”
“먹었어요.”

만들어 둔 스프가 조금 줄었고 먹고 난 접시는 깨끗하게 씻겨 개수대 옆에 엎어져 있었다. 굳이 뒷정리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이 어린 꼬맹이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다. 토르는 굳이 타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편하다면 내버려 둘 작정이었다.

“아직 머리가 아픈가?”
“이젠 많이 좋아졌어요. 아침까진 어지러웠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아.”

로키는 배시시 웃었다. 토르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살짝 미소 지었다. 침대 옆 탁자의 올려놓은 상자를 열어 남은 알약의 개수를 확인하는데 드물게 로키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아저씨.”

로키가 어려지고 병에 걸린 이후 형이란 호칭도 잃었다. 토르는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지겹게 형과 동생으로 살아왔다.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다가도 진지한 상황이 되면 형제의 호칭으로 유대감을 되살리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말해.”
“꿈을 꿨어요.”

열 오른 얼굴로 힘없이 웃으며 로키가 말했다. 토르는 스토브에 냄비를 올리며 가만히 소년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멋대로 해석한 로키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드문드문 말했다. 황금빛 성, 아름다운 어머니, 엄하지만 강한 아버지, 친절하고 멋진 형, 그들 틈에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토르는 아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낮게 피식 웃었다. 꿈은 확실히 꿈인 것 같다. ‘단 한 번도 그 시절을 행복하게 여긴 적 없었다고 고백했었던 네가...’ 소년은 조잘조잘 말이 많았다. 녹빛 눈에는 특유의 교활함이나 상대를 속이려는 번뜩임이 없었다. 끝없는 천진난만함이 영 익숙지 않았다.

“좀 더 자둬. 오늘 모래폭풍은 오래 갈 거다.”
“일주일 밤 전처럼 하루 종일 까매요?”
“그래.”

로키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덮었다.

“아저씨. 나 배에 손 올려주면 안돼요?”

나무 발 너머로 몰려드는 모래폭풍을 피하기 위해 링크머신을 작동시키던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로키는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이불 위로 배를 토닥여주자 로키가 끔뻑이던 눈을 억지로 감았다 뜨는 것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잤는데 다시 잠이 오지 않을 만도 했다. 그래도 잠을 자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그나마 덜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았기에 토르는 다른 건 몰라도 수면문제에 관해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 점을 아는지 로키도 악착스럽게 잘 따라주고 있었다.

“건강해지면... 아투사도 타고...”

로키가 실눈을 뜨고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토르는 묵묵하게 배를 쓸어주었다. 아투사는 이 행성에서 탈것으로 이용되는 짐승이었다. 아스가르드나 미드가르드의 말과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흔치 않은 야외 나들이 때 아투사 경주를 보러 갔더니 그 뒤로 늘 저 소리였다. 토르는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아는 동생은 짐승을 싫어했다.

“눈 감아.”

무뚝뚝한 명령이었지만 로키는 재깍 말을 들었다. ‘아저씨’의 성격을 파악한 덕이었다. 투박한 남자가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한동안 아이의 배를 쓸어주고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토르는 오래된 스토브로 고개를 돌렸다. 삑삑 간헐적인 전자음이 나는 통에 여러 번 확인해야 했다. 모래폭풍이 심해지는지 작은 돌 따위가 차단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싸구려 링크머신이지만 앞으로 몇 년은 거뜬하다는 딜러의 말마따나 제법 잘 버텨주고 있었다. 돌벽에 붙은 전등을 끈 토르는 눈을 감고 있는 로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일정하게 울리고 입이 살짝 벌어진 걸로 보아 잠이 들었다.

“나를 놀리고 있다면 이쯤에서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표정 없는 토르의 말에도 아이는 눈을 뜰 기색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팔자에도 없는 도망자 신세까지 되어 보는군.”

듣는 이 없는 한탄이었다.








로키는 타노스의 편에 섰다. 테서렉트를 그에게 주고 비전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 제법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우주는 지켜졌고 인피니티 스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타노스는 죽었다. 로키는 전 우주적 수배범이 되었다.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는데 큰 공을 세운 토르는 현재 동생의 도주를 돕고 있었다. 내버려두면 잡히는 건 고사하고 쉽게 죽어버릴 만큼 로키는 허약해진 상태였다. 토르는 희귀병까지 달고 있는 어린 동생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탓에 토르도 자연스럽게 수배범이 되었다. 그에겐 인피니티 스톤을 찾아 전 우주를 돌며 익혔던 지식이 있었기에 수월하게 도주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다만 로키가 걸린 희귀 병은 쉽게 나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려지고 약해졌다곤 해도 서리거인은 튼튼한 에시르였다. 육체를 파고들어 끝없이 분열을 반복하는 aop-89 는 아이러니하게도 강인하고 오래 사는 종족일수록 치료가 어려웠다. 불멸의 세포에 한 번 달라붙은 바이러스는 함께 공멸할지언정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면역력이 약해진 로키는 본인이 깔보던 지구인들보다 훨씬 연약하게 변했고 점점 메말라갔다. 인간의 나이로 대 여섯 살쯤 마르고 어린 몸이 된 로키를 보살피며 토르는 끝없이 의심했다. 이러고 있다가 언제 또 ‘놀랐지? 사실 다 거짓말이었어.’ 외치며 뒤통수를 칠지 몰랐다. 당연한 의심이었다. 언제나 그래왔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교활한 남자는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열이 심하게 올라 피가 섞인 기침을 내비칠 때도, 기껏 먹은 스프를 그대로 다 게워낼 때도,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토르의 품에서 엉엉 울며 아프다고 호소할 때도, 로키는 단 한 번도 모두 거짓말이었노라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토르는 무덤덤하게 어린 로키를 보살폈다. 사실 그로서는 로키가 자신을 속이고 있든 그렇지 않든 별 다를 바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는 동생의 도주를 도왔을 것이다. 거짓이면 어떻고 진실이면 또 어떠랴, 체념 비슷한 심정으로 동생을 향한 ‘솔직함’의 기대를 접어버리자 모든 것이 편했다. 토르는 로키를 믿지 않았지만 사랑했기에 제 식대로 그를 대하기 시작했다. 사랑에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로키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토르, 안타깝게도 네 연락이 반갑지 못해.]
“이해하네.”
[우린 많은 걸 공유했고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해. 다만, 로키와는 그렇지 못하지.]
“배너.”
[알아보겠지만 큰 기대는 마.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다른 자들의 부탁이었다면 대번에 거절했을 거야.]
“알고 있네. 자네에겐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아스가르드에서도...”
[생색내려고 꺼낸 주제는 아니었으니 그만할게. 그보다 퀼 일행들이 안드로메다 성운 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주의해.]
“고맙네.”
[행운을 빌어.]
“자네도.”

오래된 링크머신이 치직거리며 화면에 줄을 만들었다. 토르는 투박한 손길로 그것을 두드렸다. 살짝 숙인 배너의 얼굴이 박제된 듯 파랗게 남았다. 툭툭 두드려도 화면이 꺼질 줄 모르자 조금 짜증을 내며 배터리를 분리했다.








모래폭풍이 거의 지나고 있었다. 황토색으로 가득 찼던 세상은 조금씩 보랏빛 하늘을 드러내며 먼지가 가라앉았다. 토르는 나무 발 너머를 손가락으로 넘겨 보며 곧 일을 하러 갈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잠들어 있는 로키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한 번 시작된 두통이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면역력이 낮은 로키에겐 특히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토르는 혀를 차며 벽에 걸어둔 마른 수건을 내려 이마를 닦아주었다.

“일 하러 가요?”

희미하게 뜬 눈으로 물어보자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더 자라는 말은 못했다. 로키는 이미 충분히 잤다. 더 이상 권하는 것은 마치 그냥 죽어 있으라는 명령처럼 느껴졌다.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뜻은 비슷했다.

“오늘은 좀 늦을 거다.”
“어제 만큼?”
“그래.”

토르는 낡은 가방을 집어 들고 로키에게 휴대용 게임기를 넘겨주었다.

“이건 다 깼어요.”
“다른 걸 구해주마.”
“아, 아니에요... 전 정말.”
“괜찮아.”

이렇게 된 이후로 로키는 뭔가를 요구하는 일이 잘 없었다. 아프다는 말도 두어 번 칭얼거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고통이 지속되어도 ‘이젠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애써 말했다. 토르는 그 점이 씁쓸했다. 제가 아는 로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에 마치 그 시절 동생의 껍데기를 쓴 유순하고 조용한 다른 존재와 함께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식사 거르지 말고, 약 잘 챙겨 먹어.”
“네 그럴게요.”

로키가 순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토르도 답하듯 웃어주며 가방을 짊어진 손에 힘을 주며 밖으로 나갔다.









이름 없는 쓰레기 행성의 하늘은 보라색이었다. 푸른색은 질리도록 봤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토르는 온갖 종족들로 아수라장인 시장 통을 헤치고 일터로 향했다. 그는 대장장이였다. 총이나 레이저 캐논이 활개 치는 세상이지만 칼과 같은 클래식한 살상 무기의 수요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주선이 수놓는 하늘 아래로 총알과 전력을 낭비하기보다 날붙이를 이용해 서로의 숨통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만큼 가치가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 이곳엔 널려 있다.

“늦었어.”
“미안.”
“됐고, 오늘 반장이 단단히 화났더라. 목표 수량 못 채우면 집에 안 보낼 기세던데.”

토르는 피식 웃으며 직장 동료 엘티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 시간 되면 가는 거지.” 당당한 토르의 말에 엘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네 배짱 절반만 닮았어도 좋았겠는데.” 귀 밑에 단 번역기로 전해져 온 말에 토르는 가방을 내려놓고 가죽 앞치마를 걸쳤다.

뜨거운 용광로의 열기에 주룩 흘러내린 땀이 그대로 증발해 천장으로 올라갔다. 수증기가 된 그것은 부옇게 습기 차 피부에 달라붙어서 계속 땀을 뽑아냈다. 자연의 순환과도 같은 불의 현장에서 토르는 표정 없이 깡깡- 휘어진 철을 내리치며 다듬었다.

엘티의 말대로 반장은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는 크리 제국 출신의 남자였는데 늘 이따위 하급 행성 따위 곧 박차고 나갈 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했다. 물론 단순 허세에 불과했고 대장장이들 누구도 그가 돈을 모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지 않았다. 집행자 로난의 죽음이 전해진 이후로는 그의 말버릇에 간간히 되받아 치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젠장, 저 새끼 날 잡았네.” 엘티가 용광로에 원시적인 풀무질을 하며 숨을 훅훅 몰아쉬었다. 토르는 공방을 돌아다니며 채찍질을 할 기세인 반장을 흘끗 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제 할 일에 집중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낡은 가방을 둘러 멘 토르의 앞을 반장이 막아섰다. 반장은 크리 종족 특유의 보랏빛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토르에게 제 자리로 돌아가 망치를 두드릴 것을 종용했다. 엘티가 당황해 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가야합니다.” 토르는 의외로 정중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반장 기준으로는 ‘정중’ 보다 ‘반격’에 가까운 대꾸였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달아올랐다.

“에이, 진정해요. 이 친구 병든 아들이 집에서 기다리잖아.”
“부모, 자식, 애인, 끔찍하게 살해당하거나 불쌍하게 뒈진 사연 하나 없는 놈이 여기 있어? 지랄하지 말고 얌전히 마무리 짓고 가.”
“내 수량은 채운 걸로 아는데.”
“모두가 한 몸 이라는 모토 몰라? 냉큼 자리로 가!”

토르는 인상을 쓰며 수염을 쓸었다. 반장의 뒤에서 양팔을 휘두르며 성질 좀 죽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엘티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무시하고 집에 가기는 쉽지만 최근 약을 사느라 자금 사정이 녹록치 못했다. 까딱하다 잘리기라도 하면 곤란한 쪽은 토르였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손목에 찬 링크에서 시간을 알리는 대기음이 울려퍼졌다. 마음이 편치 못했다.










퇴근 후 들르려 했던 잡품상에도 못가고 집으로 향했다. 예상보다 세 시간은 오버되었다. 조금 늦는다고 말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 지체된 것른 처음이었다. 로키가 여전히 잠들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토르는 주변 눈에 이상하게 비치지 않을 만큼 속도를 높여 집으로 향했다.

기암절벽에 도착해 계단을 반 쯤 올랐을 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발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늦던 빠르던 맞닥뜨릴 일이라면 한시라도 빠른 게 나았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계단을 올라 차단막이 해제된 집 입구를 확인하자 마음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린다는 게 그나마 안심되는 점이었다. 시신보다 생포가 현상금이 컸기에 침입자들이 저항 불가능한 로키를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토르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벽에 딱 붙어 집안을 살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폐하.”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토르는 깊은 한숨을 쉬며 긴장된 근육을 풀었다. 피터 퀼, 자칭 우주의 수호자들의 리더였다. 해제된 차단막 너머로 남자가 넉살 좋게 웃었다. 로켓과 가모라도 함께 있었는데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로키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아저씨!”

반가운 손 인사에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집어 올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에 너구리 한 마리에 성인 남성 둘, 성인 여성 하나, 소년 하나까지 들어차 있으니 굉장히 답답하게 느껴졌다.

“맙소사, 그 대단한 오딘의 아들이 이런 곳에 살다니. 당신 완전 망했나 보네요.”
“피터! 말 좀 조심해.”
“뭐 나쁘지 않잖아. 축축하고 아담하고 좋은걸? 기분이다 싶으니 이 구식 링크머신 업그레이드 해줄까?”
“너까지 이러지 마. 제발 좀.”

평소처럼 허허 웃으며 그들의 주접을 들어줄 수 없었다. 토르는 도망자였고 동생은 토끼랑 싸워도 질만큼 연약해진 상태였다. 과거 동료였다곤 해도 이들은 현상금 헌터로서의 일을 겸임하는 존재들이었다. 토르는 로켓이 등에 진 캐논과 가모라의 단검, 피터 퀼의 쿼드 블래스터를 확인했다. 그것이 자신을 향할 경우, 그리고 로키를 향할 경우를 각각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하는데 가모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 댁이나 댁의 꼬맹이 잡아가려고 온 거 아니니까.”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당연하지. 우린 그저 네 도움이 필요할 뿐이야.”

가모라의 말에 토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켓이 화면을 띄웠다. 모포를 둘러쓰고 붉은 눈을 빛내는 얼굴에 문신이 가득한 남자가 떠올랐다. 현상금 NO4991DP 남자를 가리키며 가모라의 설명이 이어졌다. 시아제국의 공화당 정치인을 암살한 남자로 시아, 크로럴과 노바 콥스에서도 현상금이 걸려 있었는데 세 군대의 현상금을 다 합치면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이 행성에 숨어들었다는 정보가 있어.”
“이분들 우주의 수호자들이라고 했어요. 아저씨는 이런 사람들과 팀업을 해요?”
“안 해.”

토르가 심드렁하게 거부하자 가모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로키의 게임기를 봐주던 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aop-89 이라면 돈이 제법 많이 들어갈 텐데. 라바저 생활 하면서 언뜻 봤죠. 대부분 약값을 감당 못하고 죽어 나가더라고요. 그나저나 아스가디언에게도 aop 면역질환이 전염되는 줄은 몰랐는데.”
“로키는 서리거인이다.”
“아, 그랬죠. 뭐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종족이니까.”

‘죽어 나가더라고요.’ 퀼이 눈치를 보며 소근소근거린 말에 토르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로키는 퀼이 돌려준 게임기에 새로 포함된 소프트를 확인하고 입을 딱 벌리더니 홀로그램에 빠져들었다.

“20프로 떼 드릴게. 이정도면 아주 후한 취급인데.”

피터가 선심 쓰듯 거들먹거렸다. 토르는 눈을 내리 깔았다. 퍼센트를 제해도 자그마치 25만 유닛이었다. 한동안 약값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토르가 고민하는 낌새를 보이자 가모라가 등을 떠밀었다.

“약을 구하기 힘들다면 원하는 만큼 빼돌려 줄 수도 있어.”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맨티스와 드렉스, 그루트는 다른 미션이 있다고 했다. 토르는 이들의 팀에 임시로 끼어들면서 끝까지 의심을 놓지 못했다. 로키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달린 수배범이었다. 말로는 과거에 함께한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대로 믿는다는 게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 잘 알았다. 토르는 들통난 절벽 거주지나 밀라노에 로키를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장장이 동료 엘티에게 맡겼다. 인간과 비슷한 외모였지만 녹색 피부에 빨간 눈과 목에 난 더듬이가 두려웠는지 토르의 다리에 딱 달라붙은 로키가 몸을 굳혔다. “근데 네 아들 너랑 하나도 안 닮았다. 마누라가 바람피운 거 아냐?” 엘티는 경박하고 상스러운 사내였지만 토르는 그게 겉으로만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웃고 말았다.









쓰레기 행성은 일주일 주기로 모래폭풍이 휘몰아친다. 모래폭풍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바닥난 호수에 겨우 고인 물이나 대기를 이루는 공기마저도 엉망으로 휩쓸어 하늘 위로 날려 버렸다. 토르가 머무는 시가지는 어제 폭풍이 지나갔지만 현상범, 4991이 폭풍의 뒤를 따라 이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아주 똑똑한 놈이야.”

로켓이 밀라노의 조종간을 움직였다. 토르는 그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전경을 응시했다. 사막 곳곳에 널린 거대한 바위들이 반짝거렸다. 모래폭풍이 쓸고 지나가며 먼지와 모래가 털려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바위들은 새까만 색이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보라색 하늘과 맞닿은 곳에 거대한 황토색 토네이도 여러 개가 눈에 띈다.

“놈을 쫓는 무리가 우리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찾아내지 못했겠지. 내가 만든 추적용 로퀴스 엔진은.”
“로켓, 집중해.”

가모라는 이성적인 여성이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수호자들’을 컨트롤하는 작전사령관 같은 그녀의 존재 덕분에 여태 이들이 무사했음을 알았기에 토르는 혹시라도 이들과 대립하게 된다면 가모라를 먼저 노려야 한다고 계산했다.

“그런데 당신 그 옷으로 되겠어요?”

퀼이 뒤에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토르는 몸을 돌렸다. 내 옷이 어때서, 라고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차림새를 생각하면 이들의 우려도 이해가 되었다. 낡아 헤진 검은 바지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난 헐렁한 셔츠는 원래의 색을 잃고 갈색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다 정돈되지 않은 수염과 어설프게 긴 머리카락은 토르가 얼마나 거지꼴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라도 걸치지 그래요. 예전에 당신이 입던 겁니다.”
“버리지 그랬나. 필요 없어.”

퀼이 내민 검은 갑옷을 응시하던 토르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용케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퀼은 갑옷을 뒤로 물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 날 세우시네. 성격 완전 변했네요. 동생 때문인가?”

의도가 보이는 도발이었으나 토르는 받아주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그도 더는 이어나갈 말이 없었는지 어깨를 으쓱이더니 중앙실로 이동했다. 로켓이 조종간을 당기며 간간히 탁탁 버튼을 누르는 소리만 울렸다.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과거에는 시끌벅적한 소음에 몸을 맡기고 살아왔었던 것 같지만,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변했네요.’ 퀼의 말이 맞았다.










“돈을 줄게.”
“필요 없어.”
“나한테 걸린 현상금보다 더 많이 준다면? 그들이 약속한 금액의 배를 주마.”

암살자, 4991의 싱거운 회유가 이어졌다. 토르는 짧게 하품을 하며 뒤에서 잔당들을 제압하고 있는 가모라와 로켓, 퀼의 기척을 파악했다.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통신 교랸을 위해 모래폭풍 근처에서 이동하는 것은 제법 머리를 썼다만 첨단을 달리는 너구리의 날카로운 레이더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바위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장소는 토르에게 유리했다. 빗발치는 레이저를 피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엄폐물에 몸을 숨겨가며 착실히 접근한 토르는 4991을 노렸다. 그가 고용한 자들은 퀼 일행들이 맡았다.

너무 쉬웠다. 그래서 토르는 긴장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전히 감이었지만 짐승같은 육감 덕분에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 4991의 바위 같은 팔을 뒤로 돌려 구속구를 채운 토르는 그의 등을 한 발로 누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터 퀼과 가모라가 다섯인가 되는 남자들을 제압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플라즈마 캐논을 발사해 돌을 부수던 로켓이 보이지 않았다. 토르는 싸늘하게 웃었다.

“시아의 공화당 의원을 암살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토르가 발밑의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우린 그냥 탈옥했을 뿐이야. 노바 콥스로부터 도망치던 중이었다고!”

엎드린 남자의 말은 확인사살이었다. 설사 퀼 일행이 말해준 죄명과 남자가 말한 자백이 같았다 하더라도 로켓이 사라진 순간 토르는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동요는 없었다. 그저 지긋지긋했다. 토르는 등 뒤로 손을 뻗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 자루를 꽉 쥐었다. 동시에 엎드린 남자의 등에서 발을 떼고 팔에 채워진 구속구를 발뒤꿈치로 툭 쳐 풀어주었다.

“고 고맙습니다.”

토르는 코웃음을 쳤다. 남자는 손목을 주무르며 어설프게 달아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잡범들을 제압하던 가모라가 고개를 돌렸다. “뭘 하는 거야!” 그녀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이쪽에서 할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이제는 왕도 아니었고 수중에 가진 재화도 없는 토르를 이따위 잡범 처리를 위해 여기까지 꾀어낸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로키겠지.”

지쳤다. 토르는 제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잠깐만! 다 설명할게. 이유는...”
“됐어. 듣고 싶지 않다.”

토르는 말 대신 손에 쥔 단검을 던졌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그것은 가모라의 발목에 박혔다.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진 그녀는 발에 꽂힌 칼자루를 잡았다. 토르는 앞으로 걸어가며 고개를 저었다.

“뽑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겉이 가공되어 있다.”

칼날의 표면엔 우둘투둘한 잔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뽑으면 살과 뼈를 긁어 올라오는 그것은 밑바닥 행성 쓰레기들의 교활함을 상기시켜주는 무기였다. ‘로켓은 아마 밀라노로 갔겠지.’ 토르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기폭장치를 꺼내 주물렀다. 긴장한 퀼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제압된 남자들이 파란 레이저 그물에 묶여 팔딱거렸다. 터져 나오는 욕설들이 시끄러웠다.

“이봐요 폐하, 그러니까 우리들 예전에 동료였잖아.”
“과거에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고.”
“그 일단 사과할게요. 하지만 정말 이유가 있었어요.”
“로키의 현상금이 탐났다면 사과할 필요 없네.”
“오 음. 사실 그 점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건...”
“시끄럽다.”

토르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퀼은 제트분사기를 작동시켜 몸을 띄우고 쿼드 블래스터를 쏘았다. 토르는 여유롭게 피하며 발을 굴려 몸을 띄웠다. 순식간에 날아올라 목을 낚아채려는 순간 손목에서 타는 듯이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멈칫한 틈에 퀼은 빠르게 이동해 바위 뒤로 숨었다. 착지한 토르는 상처부위를 문질렀다. 가모라의 단검은 살을 파고들진 못했지만 불에 탄 짙은 생채기를 남겼다.

“당신 동생 상태가 어떤지 알아?”
“무슨 소리지.”

가모라가 발목을 절룩거리며 일어나 단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굉장히 고통스러울 텐데 참아내는 모습이 용하다고 생각해 토르는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밀라노는 이륙할 수 없었다.

“로키는 생체폭탄이야.”
“뭐?”
“그는 제 몸에 타노스의 바이러스를 주입했어.”

토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입술을 짓이길 듯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모습은 거짓을 꾸며낼 정도로 여유가 없어 보였다. 퀼이 상처를 걱정하며 다가오는 것을 한손으로 물리며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결과 몸의 분자구조가 달라졌어. 변형의 변형을 거듭해 단백질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는데 고등신경계 생명체들에게 가끔 나타나는 현상이지.”
“솔직히 뭐라는지 모르겠군. 그보다 너희의 작은 친구가 우주선을 조종하는 걸 말리고 싶은데. 이걸 누르고 싶지 않거든.”

토르가 오른손에 든 길쭉한 기폭장치를 내보이자 퀼이 이마를 탁 쳤다. 가모라는 숨을 몰아쉬며 한숨을 내쉬었다.

“행성 하나 정도는 쉽게 날려먹을 수 있는 폭탄이 되었다는 뜻이야. 로키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은 금방 우주의 먼지가 될 걸.”
“그런가.”
“이봐요 폐하, 지금 상황파악 못한 것 같은데 댁 동생이 폭발하면 아무리 튼튼한 당신이라도 무사하지 못해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담백한 인정에 퀼이 할 말을 잃었다. 가모라가 다시 나섰다.

“너희 형제 자살쇼에 죄 없는 사람들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어?”
“가디언즈라면 이 행성에 사는 놈들이 얼마나 밑바닥 인생인지 잘 알 텐데.”
“그게 댁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진 못해.”
“옳은 말씀이군. 대단한 타노스의 따님답게 이타심이 넘치는구려.”
“너 이 자식.”

가모라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토르는 일부러 그녀를 도발했다. 제 몸을 비커삼아 바이러스를 주입해 엄청난 칵테일 효과를 일으킨 동생에 대한 분노표출보다, 자신을 고립시키고 로키를 잡아 달아나려는 이들의 행동을 막는 것이 중요했다. 멀리서 우주선이 이륙하는 소리가 났다. 토르는 기폭장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퀼은 쿼드 블래스터를 만지작거렸고 가모라는 잔뜩 성난 얼굴로 단검을 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작은 친구에게 지시해.”
“밀라노가 박살나면 곤란한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 여기서 시가지까지 무슨 수로 가겠다는 거야.”
“아스가디언을 너무 얕보지 말게.”

마음만 먹으면 쉬지 않고 달려서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과거 함께 싸웠던 가디언즈들이 모를 리 없다. 시간을 끌어 어떻게든 해결책을 강구해 보려는 그들의 수작질이 눈에 훤히 보였다. 퀼이 어색하게 웃더니 제트분사기를 작동시켜 가모라에게 다갔다. 토르는 팔짱을 끼고 그들이 속닥거리며 무어라 주고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모라는 버럭 화를 냈고 퀼은 투덜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로켓, 이륙하지 마.”
“우리 대화가 필요한 것 같군요.”

가모라가 모래 바닥에 주저앉아 발목을 누르며 로켓과 통신했다. 퀼은 양손에 든 블래스터를 붉은 롱코트 안으로 밀어 넣더니 빈손을 내보이며 위로 들었다. “그런 의미로 잠깐 휴전 어때요?” 토르는 주먹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우선, 우리들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계획적으로 로키를 노리지 않았어.”

소파에 앉은 가모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퀼은 의료용 레이저머신을 그녀의 발에 갖다 대어 작동시키며 조심스럽게 칼을 뽑아냈다. 토르는 벽에 기대서서 팔짱을 낀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모라는 고통을 참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4991은 평범한 잡범이 맞아. 하지만 네 동생은 아니지.”
“그래서 그 회색 덩치와 입담 사나운 나무, 감정 읽는 여자를 따로 보냈나?”
“말을 끝까지 듣지? 셋은 다른 행성에 있어. 잠깐 사정이 생겨 따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야.”

토르가 인상을 찌푸리자 가모라가 눈을 지긋하게 감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바이러스에 대한 분석을 마친 잔다르 고위 장교가 가디언즈에게 정보를 보내왔다고 한다. 로난이 시아에서 강탈해 타노스의 손으로 전해진 바이러스는 가공할 무기로 탄생하기 위해 연구실 한켠에서 대기중이었다. 타노스의 침략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 바이러스를 제 몸에 주입한 채로 로키가 사라졌고, 토르는 그런 제 동생을 요툰헤임 한 구석에서 발견했다.

“4991을 쫒던 도중에 잔다르의 연락을 받았어. 행운인지 불행인지 이 행성에 댁이 있더라. 그 말은 폭탄상태인 로키도 함께 있다는 소리였으니 우리는 네 동생을 안전하게 격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아, 잠깐. 난 반대했어요.”
“입 닥쳐 퀼. 과반수에 의한 동의였어.”
“셋 중 둘의 동의였으니 맞는 말이긴 하네.”

빈정거리는 퀼을 노려보던 가모라는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발목의 고통이 심한 듯 보였다. 토르는 별로 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들의 접근은 처음부터 거짓이었으므로, 속는 것은 지긋지긋했다. 치료용 머신을 든 퀼의 손이 세심하게 움직였다.

“안전한 격리라는 말은 녀석의 죽음을 뜻하나.”
“잡힌 후의 처분에 대해선 우리도 몰라. 다만 녀석은 불안정해. 당신이 아무리 잘난 신이라도 수천수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길 순 없어.”
“그렇군.”

토르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지쳤다. 생체 폭탄이 되어서까지 타르처럼 끈덕지게 달라붙어오는 로키에게, 토르는 진심으로 그를 대하고 사랑하려 애썼지만 턱없이 부족했음을 깨닫는다. 무력과 탈력은 그에게 익숙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헬라를 상대하면서 겨우 느꼈던가. 이제는 로키가 깨닫게 해주는 것을 보면 피는 이어지지 않았어도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섭을 하지.”

토르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로키가 달려왔다. 토르는 제 허벅지에 매달린 작은 소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일은 잘 하고 왔냐는 물음에 미소로 답했다. “가모라, 발을 다쳤어요?” 로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토르를 노려보았다. “미친놈에게 당했어.” 토르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엘티에게 보상금조로 얼마의 금액을 억지로 전송하고-괜찮다고 하면서도 거부하진 않았다- 토르는 로키를 데리고 그의 집에서 나왔다. 조악한 거주지에 들러 로키의 약과 몇몇 소지품을 챙겨 가방에 쑤셔 넣고 계단을 내려온 토르는 바닥의 돌을 툭툭 차며 놀던 로키를 불렀다. 조르르 달려온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토르는 “조금 멀리 갈 거야.” 라고 당부했다. “아저씨도 가요?” 로키가 물었고 토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안심한 로키가 배시시 웃었다.

밀라노에 오른 로키는 열이 났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침대에 누운 로키의 곁을 지키는 토르에게 퀼이 음식을 내밀었으나 거절했다. 달아오른 아이의 이마의 땀을 천으로 훔쳐 주며 토르는 멀리 보이는 창 너머 우주를 조용히 응시했다.








메마른 행성이었다. 불안정한 대기 탓에 공기도 희박했고 생명체라곤 선인장을 닮은 식물이나 푸른 이끼 따위가 고작이었다. 검고 붉은 바위만 가득한 주상절리 한 구석에서 토르는 느긋하게 선인장 줄기를 잘라냈다. 로키의 약이 절반 쯤 남았다. 식량도 그쯤 될 것이다. 토르는 일주일 전을 마지막으로 뭔가를 먹은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토르는 잘라낸 선인장 줄기에 수통을 대고 흘러나온 물을 담았다. 깊은 자연동굴 속에 자리를 잡은 둘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로켓이 만들어준 자가발전 배터리와 업그레이드된 링크머신 덕분에 난방이나 공기 순환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몇 번이나 통신을 시도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
“별 거 아니야. 오랜만일세, 배너.”
[이쪽에서 안달나게 만드는 작전이라면 성공이라고 해둘게.]
“하하.”
[이런 소식을 전하게 돼서 안타까운데, 잔다르에서 수배령을 강화했다고 하더라. 브룬힐데가 알려줬어.]
“알고 있네. 퀼 일행에게 들었어.”
[맙소사, 그러고도 무사해? 아, 내 말은 그들이 말이야.]
“일단 칼을 박아주긴 했는데.”
[...그러면 로키가 스스로 바이러스를 주입한 건 알고 있겠군. aop-89도 그때 감염된 듯 보여.]
“그렇군. 고마워.”
[치료법에 대한 정보는... 현재로선 없어. 유감이야.]

별로 유감스러울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너와의 통신을 끝낸 토르는 잔상이 남아 말썽을 피우는 링크머신을 바위에 내려쳐 부숴버렸다. 더는 쓰일 일이 없을 것이다. 박살난 기계장치의 잔해를 대충 발로 치워버린 토르는 어두운 동굴 통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조금 걷자 파란 불빛이 보였다. 삑- 의미없는 침입자 경보음이 울렸고 세워 놓은 푸른 차단막을 통과하자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배가... 아파.”

토르는 황급히 구석에 마련된 침대로 달려갔다. 로키가 몸을 웅크린 채 끙끙 앓고 있었다. 식은 땀이 가득했고 동공이 확장된 것이 영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토르는 구석의 구급품 상자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아이에게 먹이기엔 양이 좀 많았지만 aop 환자에게는 약물이 잘 듣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수통을 기울여 컵에 물을 따르고 알약을 든 토르는 로키의 몸을 안아 제 품에 앉히곤 작은 입에 알약을 갖다 댔다.

“입을 열어.”

앓으면서도 그 말이 들린 것인지 입을 벌렸다. 알약 다섯 개가 한 개씩 차례로 들어갔고 뒤이어 컵에 담긴 물이 목으로 흘러내려갔다. 로키는 쿨럭 거리면서도 용케 잘 받아먹었다. 아프다는 단어가 고장난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토르는 로키의 작은 몸을 껴안고 앞뒤로 얼르며 작고 검은 머리통에 키스해 주었다.

“지쳤다. 로키.”

드물게 약한 소리를 꺼냈다. 듣는 이의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였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토르는 희미하게 웃었다.










검은 돌로만 가득한 행성이었지만 드문드문 흙이 존재하긴 했다. 다만 유기체가 활동할 정도로 영양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사막의 모래처럼 버석버석하게 말라 있었지만, 어쨌든 토르는 맨발로 흙을 밟으며 오랜만에 안정감을 느꼈다. 동굴 근처 선인장은 이미 바닥이 난 탓에 조금 멀리 나와야 했다. 희박한 공기는 고지대로 향할수록 점점 부족해졌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그렇다. 오딘의 아들 토르에겐 모든 것이 참을 만 했다. 그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어느 한 지점에 다다랐을 때, 발밑이 급속도로 허물어졌다. 중력은 개미지옥처럼 끝없이 몸을 빨아들였다. 토르는 저항하며 손가락을 세웠지만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푹푹 빠져들기만 하는 갈색 흙은 지지대가 되어주지 않았다. 휩쓸리는 속도는 느렸지만 그랬기에 생각이 많아졌다. 거대한 원기둥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며 흘러내려가는 흙더미에 몸을 맡기고 소용돌이의 중앙을 바라보았다. 저 밑으로 빠져들면 어떻게 될까? 펼쳐진 산성 호수가 나올까, 그것도 아니면 뜨거운 맨틀이 나올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그러나 토르는 그곳에서 죽음을 떠올린다. 안식을 떠올린다. 로키의 약은 이제 열 개도 남지 않았다. 일주일도 채 되기 전에 약이 바닥나면 어린 로키는 고통에 떨며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 토르는 제 손으로 얇은 목을 꺾을 생각을 했다. 그것은 너무나 절망스러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쯤에서 적당히 포기하면?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지켜왔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에서 죽는 건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발할라에 가진 못하더라도 크게 죄책감 느낄 일은 아닐 거라고, 억지로 생각해 본다.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뇌와도 같은 일련의 상상이 부끄러웠다. 토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기가 거의 없는 덕분에 비단결 같은 검은 우주가 완연히 드러났다. 수많은 별들 사이로 사랑했던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 아홉왕국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름 모를 버려진 행성이 아닌 포근한 수풀 속, 혹은 몸을 감싸는 호수,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침대 위에서의 정적인 죽음을 되새긴다. 거기엔 반드시 로키가 있다. 제 손을 잡고 [좋은 꿈 꿔, 형.] 말해주는 동생이 있다. 망상의 달콤함이 덧없어 토르는 계속 흐느꼈다. 끅끅 울먹이는 연약한 신음이 목구멍 너머에서 튀어 올랐고 강한 남자의 내면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잡아.”

목소리가 들린 것보다 흘러내려온 밧줄이 어깨를 친 것이 먼저였다. 토르는 무심결에 그것을 건드리며 위를 보았다. 부루퉁한 표정의 어린 로키가 있었다. 불만스러운 모습의 로키가 익숙하면서도 또 그렇지 못했다. 토르는 멍하니 어린 동생을 보았다.

“가관이군.”

무엇에 대한 소감일까. 흘러내린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 대단한 오딘의 아들이 이깟 버려진 행성의 흙더미에 떠내려가는 상황에 대한 조소? 슬슬 포기하려는 꺾인 마음에 대한 비웃음? 어쩌면 모두 다 일지도.

“뭐해. 얼른 나와.”

토르는 밧줄을 잡고 몸을 움직였다. 살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기보다 로키가 부르고 있었기에 그랬다. 기어 올라간 토르는 지저분하게 묻은 흙을 털 생각도 못하고 선인장 밑둥에 묶인 밧줄을 끙끙거리며 풀어내는 로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날 속인건가?”

토르가 물었다. 로키는 풀어낸 밧줄을 끌어 모아 둘둘 감아 들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결과적으론 그렇게 된 걸지도.”
“제대로 대답해.”
“무서워라. 오늘내일하는 불쌍한 동생한테 윽박지르지 마.”
“로키.”
“딱히 속이려고 한 건 아냐. 지금 이건 그냥 좀 타이밍이 좋았을 뿐이지. 그나저나 밧줄 왜 챙겨가는지 안 물어봐?”
“왜.”
“자살하려고.”

로키는 킬킬 웃으며 밧줄을 들어 올렸다. 토르는 저벅저벅 걸어가며 작은 손에 들린 밧줄 뭉치를 낚아채 어깨에 짊어 지고 앞을 가로질렀다. 로키는 잠시 빈손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형의 뒤를 따랐다. 둘 다 말이 없었다. 토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둘은 동굴 속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차단막을 통과할 때 로키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토르는 구석에 밧줄을 내던지고 로키의 침대 옆에 앉아 수통을 입에 대고 물을 들이켰다.

“골골거리는 짐덩이 데리고 여태까지 잘도 도망치셨군.”

로키가 침대에 앉아 킥킥 웃으며 말했다. 토르는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앞만 보았다. 수통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형을 보는 로키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보였다. 녹빛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린 악동의 귀환이었다.

“그래도 제법 좋았지. 나 때문에 절절매는 형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워.”
“네 병은 낫지 않아.”
“알아. 약도 바닥났지? 일주일 지나면 죽겠지 뭐.”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듯 한 태도에 토르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로키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간에 포기할 줄 알았어. 감동이야.”

로키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기분 좋게 말했다. 바이러스를 몸에 주입하는 김에 aop-89 균체까지 주사하는 멍청한 짓거리를 감행한 이유가 자살을 하는 겸사겸사 토르를 놀리기 위함이었다고, “형이라면 믿어 주겠지?” 라는 익살맞은 물음까지 덧붙이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건데 형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었다는 정신 나간 이야기가 너무나도 로키다워서 토르는 대꾸할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요툰헤임에 제 흔적을 남겨놓은 로키는 토르가 죽어가는 꼬맹이를 데리고 우주를 떠돌도록 웃기지도 않는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토르는 착실하게 계획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연기 아니었어.”

aop로 인해 죽어가는 세포로 인해 로키는 자연스럽게 사이즈를 줄여 육체가 받을 데미지를 최소화 하고자 했다. 기억을 잃고 예의바른 소년이 된 것도 그 탓이었다.

“내 묘비는 뭘로 하려고 했어? 뭐 돌은 많으니 적당히 가공하면 되겠군.”

생각보다 늦은 마무리라며 로키가 웃었다.

“고생했어. 마지막까지 형을 놀려먹었다고 생각하니 만족스럽네.”

토르는 침대에 누운 로키를 보았다. 소년의 이마에 맺힌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통스러운 것이 분명했으나 참고 있었다. 병약한 어린 로키가 그랬듯이 말이다. 갑자기 웃음이 밀려왔다. 속은 것에 대한 분노라든지 허탈감이라든지 그런 단순한 감정은 아니었다. 부서졌다고 생각했던 형제의 굴레에 다시 들어오니 마냥 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래 로키, 너는 이런 녀석이었지.’

짜증을 내면서 동생의 멱살을 쥐고 사태를 수습하는 토르 오딘슨. 그것은 로키와 토르 둘 사이에 이루어지던 자연스러운 역사였다.

토르는 구석에 놓인 가방에서 약병을 꺼내 남은 알약 수를 가늠했다. 로키는 침대에 누워 고개를 살짝 들어 그런 형의 모습을 보았다. 토르는 노란색 약병을 손에 쥐고 허무하게 웃었다.

“넌 좀 더 아플 필요가 있어.”








토르는 동굴 입구에 버려진 링크머신의 회로를 수거했다. 그리곤 로키의 게임기를 분해해 회로를 연결하여 통신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로키는 침대에 엎드려 턱을 괴고 그런 형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알약이 이틀 분 남았을 무렵 가디언즈들과의 통신에 성공했다. 토르는 자연스럽게 연기를 시작했다. 로키가 죽었으며 이제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딛을 준비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통신이 끊기자 로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동료 아니었어?” 토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먼저 속였으니 이젠 무효다.” 로키가 비웃었다. “변했네.” 피터 퀼과 똑같은 말을 했다. “네 녀석은 그 말을 할 자격은 없지.” 토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게임기로 만든 통신머신을 잡아 흔들었다. 아무래도 고장난 것 같지만 용건은 전달했으니 제 소명을 다한 셈이다. “뻔뻔함은 내 몫인 걸로 아는데.” 로키가 중얼거렸다. 토르는 동생의 작은 머리통을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약간의 감정이 담겼다.

괜찮은 척 해도 병든 몸은 착실하게 정신을 좀먹는다. 토르는 잠을 청하는 로키의 몸 위로 담요를 올려준 뒤 동굴 밖으로 나갔다. 공전이 느린 행성은 바람도 불지 않았다. 고요하고 황량한 돌산 풍경을 감상하다 개미지옥이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깊숙한 흙의 소용돌이 밑바닥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언젠가 마지막 순간이 오면 지금과 똑같이 궁금해지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고약한 로키는 토르를 무너트리고 싶었고 동요한 얼굴을 보길 바랐다. 그러나 제 존재가 인내의 마지막 심줄까지 타버려 희망을 잃은 토르를 구원하는 존재로서 가동할 줄은 그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만약 그가 안다면 만족하지 않았을까, 로키로 인해 고통받고 로키로 인해 구원받는 존재. 그 아이러니함이야 말로 로키가 추구하는 변덕스러움과 일맥상통하는 면이었으므로.









퀼 일행이 오기로 약속한 날, 로키는 마지막 알약을 삼키며 토르에게 말했다.

“언제든 내 목을 졸라도 돼.”

토르는 어렴풋한 진심을 읽었다. 토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로키의 머리에 주먹을 박았다.

“까불지 말고 끈질기게 버틸 생각이나 해라.”







밀라노가 내려왔다. 로키가 들어간 바디백은 차단막에 감싸여 토르의 옆에 놓였다. 두 형제는 착륙하는 우주선을 올려다보며 똑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얼마 후, 두 명의 현상금 사냥꾼이 우주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노웨어를 비롯한 각종 행성을 떠돌았다. 반려동물로 키우는 아투사로 보아 ‘쓰레기 행성’ 출신이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고작 둘 뿐이었고 심지어 한 명은 어린아이였음에도 너무나 강해 단 한 번도 타깃을 놓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들이 처음으로 사냥한 존재는 NO4991DP 킬른감옥을 탈옥한 잡범이었다. 가디언즈 팀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악한 꼬맹이 서리거인은 aop-89라는 현재로선 치료가 불가능한 병을 달고 있지만 우주는 넓고 시간이 흐를수록 진화한다. 아스가디언과 서리거인의 수명은 길다. 로키는 천년 이천년 뒤에도 존재할 것임을, 끊임없이 고통 받으면서고 긴 수명을 배짱삼아 하루하루를 견딜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해방의 날이 오면 토르는 해맑게 웃으며 로키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릴 것이다. 그 폭력을 축포 삼아 멈췄던 형제의 쳇바퀴는 다시 굴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