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까지 오는 진창 늪을 건너며 토르는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헉헉거렸다. 남자는 기척을 죽이는 법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으며 도전해오는 자들을 속임수 없이 맞이했다. 설령 비겁한수에 빠지더라도 정면에서 당당하게 응수했다. 그러한 두려움을 모르는 ‘천둥의 신’이 지금 자신을 쫒는 무리들을 피해 미궁을 헤매는 중이다.
육체의 고통은 최고조에 다다랐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땀과 잔상처로 엉망이 된 몸에 입고 있던 옷은 넝마가 된지 오래다. 한쪽만 남은 붉은 망토가 마치 몸에서 빠져나가는 피처럼 늘어져 주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토르는 그저 어디로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뻘이 타르처럼 몸을 끌어당겼다. 니플헤임에 존재하는 것들은 생명체건 비생명체건 상대의 발목을 잡는 사악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토르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조차 흐릿해져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오로지 한가지만을 떠올렸다. '이 돌을 빼앗겨선 안 된다.' 왼손에 쥔 돌에서 발산되는 열기가 혼까지 태울 듯 두꺼운 주먹 속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거기엔 주황색 작은 돌이 있다.
[어리석군 달링.]
익숙한 초록빛이 넘실거렸다. 토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니플헤임으로 쫒아낸 결과가 고작 그꼴이더냐.]
우아한 웃음소리가 무의 공간 속으로 퍼져나갔다. 명백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토르는 대꾸없이 묵묵히 한점을 향해 나아갔다.
[오딘은 아스가르드에 영광을 가져왔지만, 너는 아스가르드에 멸망을 선사하는구나.]
최악의 왕이시여. 감축드리겠나이다- 잔뜩 꼬인 찬사가 이어졌다. 토르는 쿨럭- 하고 피를 토했다. 육체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으며 사방은 적이 그득했다. 멀지 않은 마른 나무 숲에는 이름조차 선사받지 못한 저주받은 것들이 조용히 눈을 빛내며 침입자가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그 때가 머지 않았음을 본능밖에 남지 않은 존재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진창속에서 몸이 휘청거리는 찰나 짧은 뒷머리를 재빠르게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너를 어떻게 할까?
-...헬라
하나밖에 없는 푸른눈이 자신을 향하자 헬라는 기꺼이 시선을 맞추었다. 깊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검은 뿔의 끝이 기괴하게 꿈틀거린다. 늘어진 거구의 몸 따위 마치 솜뭉치라도 낚아챈 듯 하다.
-나와 함께 지옥을 평정하지 않겠나?
속삭이는 목소리가 감미롭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재미있는 제안이지만, 거절하겠소.
합당한 명분만 있다면 타락이야말로 가장 쉽고 달콤한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토르에게 헬라와 함께하는 길은 없었다. 설령 그 반대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뭐 그럴 줄 알았지.
그냥 던져본 말이었는지 딱히 미련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헬라가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고 자리를 뜨면 토르는 여기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쉬운 길을 가려는 동생을 도무지 봐줄수가 없구나. 죽음이란 지금의 너에게 가장 편안한 선물이 될 테지... 그러니 어찌할까.
창백하고 긴 손가락이 토르의 턱밑을 쓸어올렸다. 그대로 얼굴을 스쳐 목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간다. 노골적인 희롱의 의미를 품고 있었으나 토르는 불쾌한 의사를 표현할 여력조차 없었다. 손가락이 가슴에 다다르자 헬라는 진하게 웃으며 손톱을 세우고 깊게 긁어 내렸다. 자국을 따라 피가 흘러내린다.
-내기를 하자.
-...내기?
-이것
헬라는 가슴을 긁던 손으로 토르의 왼쪽 손목을 들어 올리더니 꽉 쥔 손아귀를 손쉽게 풀었다. 그러자 주황색 스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뿜어져 나오는 힘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헬라는 코웃음을 치며 입술 끝을 올렸다.
-한심하게도... 겨우 이따위 돌덩이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이냐.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더니.. 세상 물정에 어둡군...
-오 동생아. 어설픈 도발이구나. 내가 아무것도 모를거라 생각하나? 소울 스톤이라... 봐줄만은 하지만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지.
헬라는 죽음의 신이다. 파괴와 죽음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헬라에게 있어서 파괴는 그저 수단일 뿐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전쟁의 뒤를 따르는 빈틈없는 복종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의 삶을 자신의 아래로 두어 완벽하게 굴종시키는 것. 오로지 멸망을 위해 존재하는 인피니티 스톤 따위 헬라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이걸 너에게 주마.
의외의 말에 토르의 눈이 크게 떠졌다. 푸른 눈에 깃든 일말의 희망을 엿본 헬라는 크게 비웃었다.
-순진한 동생아. 너는 정말 오딘과 닮은 구석이 없구나.
그 단순함이 싫지는 않군- 헬라는 갈무리해 두었던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을 조금씩 스톤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불꽃이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스톤에 삼켜진다. 그대로 스톤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드득- 소리를 내면서 작게 뭉쳐졌다. 순수한 영혼의 결정체- 헬라는 낮게 중얼거렸다.
-조금 아플거야.
아아아악!- 토르는 오른쪽 눈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감미로운 음악이라도 듣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은 헬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아끼는 모든 것들은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멸망을 원하는 자가 다가오고 있으니. 놈을 막지 못하면 그리 되겠지.
-네가 사랑하는 자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기는 공정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지. 동생아, 열쇠는 네 오른쪽 눈에 박힌 스톤이다. 인피니티 스톤은 주인인 타노스의 건틀릿으로 모여들 것이다. 네가 소울 스톤을 그 눈에 품고 끝까지 도망가면? 너의 승리다.
'약간'의 희생은 있겠지만- 헬라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토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늘어진 몸을 끌어 안자 힘이 빠진 머리가 누이의 어깨에 기대온다. 그것이 기특했는지 헬라는 토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되면 넌 발할라로 갈 수 있어. 완벽한 죽음을 맞이하는거야. 네가 사랑하는 자들도 많이 살아남겠지.
-하지만 소울 스톤을 빼앗긴다면? 아스가르드인들은 영원히 죽음의 신에게 종속될 것이다. 자유는 물론이거니와 자유를 꿈꿀 의지조차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동생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는 특별히 귀여워해주마.
잠에서 깨어나 얼마간의 시간동안 토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매번 그랬다. 잠깐 눈을 붙여도 깨어나면 불안에 떨었다. 토니는 토르가 안심할 수 있도록 그와 한 침대를 써야 했다. 무슨 꿈을 꾸었냐 물어보면 토르는 허헛-하고 특유의 짧은 웃음소리를 내며 기억나지 않는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는 차라리 행복하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안타깝게도 토르에게 만큼은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섞여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혼탁한 상황에서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어떤 강력한 명령 같은 것이 있었다. [도망쳐] 무엇으로부터? 연산이 불가능해진 머리는 도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떠올리는데도 5초가 소요되었다. 토니의 이름은 이틀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어두운 숲에서 벌벌 떨고있는 자기를 발견해준 닥터 스트레인지도 마찬가지다. '나' 라는 자아가 이리저리 휩쓸리는 지금의 토르에겐 모든것이 새로운 자극이었다.
사용인들이 가져온 후드와 바지를 입은 토르는 불안한 눈으로 누군가와 통화중인 토니를 바라보았다. 일주일의 휴가라 해도 기업의 CEO란 그런 것이다. 토르는 비척비척 걸어가 통화중인 토니의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토니는 익속한 듯 통화를 하면서도 토르의 손을 잡았다.
-가자
통화를 마친 토니는 토르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 주방으로 내려갔다. 이틀간 제법 소란스럽던 분위기는 가라앉고 대신 풀벌레 소리나 그득한 나무들이 서로의 잎을 부대끼는 소리들로 채워졌다. 토니가 빼준 의자에 앉은 토르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건너편에 앉은 토니를 향해 시선을 맞추었다. 크로와상과 햄 몇조각 밀빵등으로 채워진 프랑스식 아침이었다. 토르는 빵을 잡고 예의없이 우적 씹었다.
-토니
-이틀만에 내 이름을 외워주다니. 감격스러워.
토니가 포크를 멈추며 가볍게 말하자 토르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기분 나빴을까? 아니라는걸 걸 알면서도 괜히 찔끔해 되돌리기 위해 말을 꺼내려는 순간.
-가야한다.
-...어디를?
토르의 느릿한 페이스 맞추어 기다려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망가야해.
저 말도 몇 번이나 들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달아나야 한다는 건지. 토니는 식탁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괴었다. 유아성 퇴행은 두부에 큰 충격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빠르면 일이주 늦어도 두세달 정도면 대부분 다 완치된다고 한다. 슬프게도 눈앞의 남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토니는 배너를 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지금 토르의 상태에 대한 해답에 '그나마' 가까운 인물은 바로 그 브루스 배너일 것이다. 로키와 함께 도착한 날 외계 행성 탐험에 대해 조금 듣긴 했다. 단 배드엔딩임을 확신하고 있는 상대와 그 주제로 깊게 토론하기란, 다소 배려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 토니로서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쉬운 일이다. 혹 그가 여기 있다면 도망가야 한다는 말만 되새기는 토르의 상태에 대해 좀 더 많은 가정과 조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도망이라니, 자네와 어울리는 말은 아니잖아...
쓸쓸한 마음에 토니가 푸념하듯 내뱉었다. 자폐환자처럼 한 단어를 되풀이하던 토르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토니는 자연스럽게 드러난 토르의 주황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여러모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토니 스타크는 지구 안보에 관련되어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그랬는데 지금은 이게 무슨 꼴인가. 죽은 줄 알았던 토르가 마법사를 동반하고 나타났다. 한 술 더떠 토르는 알 수 없는 사건으로 일종의 퇴행상태였고 아무것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누군가의 의지에 휘둘리는 기분은 적당히 오만한 아이언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니가 참고 있는 것은-
-저건?
토르가 손을 들어 창 너머를 가르켰다.
-사슴이군, 뒷 산에 살던 녀석들이 내려왔나.
-사슴이 뭐지?
-척삭동물, 포유류, 소목... 젠장 뭘 하는거야.
재미없는 사전식 지식을 나열하던 토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었다. 멀지 않은 정원에 사슴 무리가 잔디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토르의 눈은 그것을 쫒았다. 아스가르드의 왕자님께서 위풍당당하게 사냥하던 기억이라도 떠오르지 않으려나- 토니는 무의식적으로 빈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뒤에서 의자가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난다. '보호자'와 멀어지는 것이 두려운 토르가 몸을 굳히는 소리다. 조금 재밌네. 뭔가 충족되는 기분이야- 거기까지 생각하니 토니는 자신이 굉장히 저열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질척이며 들러붙는 상대를 제일 싫어하던 주제에- 꺼낸 생수 두병 중 한병을 토르에게 건냈다. 그걸 받으며 토르가 한박자 늦게 고마워- 라고 짧게 말했다. 웁스- 이젠 감사인사도 하는군! 정말 엄청난 발전이야- 토니가 과장스럽게 칭찬하며 토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토르가 이쪽을 보며 방긋 웃는다.
-그런 표정은 여자한테나 지으라고.
대가없는 웃음을 정면으로 받고 있자니 어쩐지 쑥쓰러워진다. 토니는 생수병을 잘 따는(어제 배웠다.) 토르를 대견하게 보다가 무심코 짧게 잘린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토르가 물병을 떨어트리며 매섭게 손을 쳐냈다. 처음으로 드러낸 선명한 거부의 표현에 토니는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잃었다. 190cm가 넘는 남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의자가 밀려나다 못해 아예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수가 없다. 토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등을 돌렸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토니가 진정제를 가지고 오라고 크게 외쳤고 잠시 후, 멀리서 누군가 바삐 발을 놀리는 소리가 났다. 아아아- 토르는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낮은 소리로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고 토니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도망가야해... 도망가야해!
[네가 아끼는 모든 것들은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토르 쉬- 진정해. 괜찮아! 여긴 안전해!
[네가 사랑하는 자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게 될 것이다.]
짐승처럼 울부짖던 토르는 토니를 떼어내고 휘척휘척 문을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소파에 몸을 부딪히고 탁자위에 놓인 꽃병은 떨어져 깨지고 우당탕- 불쾌한 소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온다. 토니가 다시 뛰어들어 토르의 날뛰는 몸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멀리서 의료용 케이스를 들고 뛰어온 사용인들이 진정제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스가르드인들은 영원히 죽음의 신에게 종속될 것이다. 자유는 물론이거니와 자유를 꿈꿀 의지조차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동생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는 특별히 귀여워해주마.]
-로키...
약물이 토르의 목의 혈관을 타고 들어가는 동안 짧게 내뱉어진 단어를 토니는 똑똑히 들었다. 쓰러지는 몸을 받으며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부축한다. 맞닿은 몸을 통해 힘이 빠져나가는것이 느껴졌다. 산소 마스크 씌우고 큰 쿠션을 가져오는 사용인들이 분주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토니는 마른 침을 삼키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트리거가 당겨질만한 행동을 했던가? 그의 뒤통수를 좀 쓰다듬었던 것 뿐이다. 흘끗 내려다보니 쿠션에 푹 들어간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었다.
사용인들에 의해 침대로 옮겨지는 토르를 보며 토니는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진정시키기위해 탄산수를 들이켰다. 마법사 양반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거야. 불평해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마를 짚으니 식은땀이 그득했다. 문득 토르가 눈을 뜨면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난간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토니는 2층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